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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원도, <아무튼, 언니>

by Jaime Chung 2021.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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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원도, <아무튼, 언니>

 

 

오랜만에 내가 좋아하는 <아무튼> 시리즈의 신권을 읽었다. 이 책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 세상 모든 언니들에 대한 애정과 존경, 공감이 담뿍 담겼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의 친언니뿐만 아니라, 경찰학교에서 만난 동료 여경 언니들, 그리고 경찰 생활을 하며 만난 여성 피해자들까지도 '언니'로 부르며 그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다.

그 안에서 여성주의적 자매애가 피어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경찰학교라는 곳은 전국 여경이 모두 모이는 곳이니 여중이나 여고처럼 여성들이 우정을 다지기에 참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입교 첫날, 강당에 모인 우리는 한 명씩 앞으로 나가 지금껏 살아온 이야기를 짧게마나 나누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들어온 사람, 명문대를 다니다 온 사람, 중소기업을 전전하다 온 사람, 아기 엄마, 소녀 가장, 단편영화 감독, 국가 대표 운동선수 등 다양한 사연을 가진 여성들이 자기 이야기를 수줍게 그러나 거침없이 쏟아냈다. 한 명씩 발표를 마칠 때마다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성도 저렇게 다채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고향도, 나이도, 경력도, 성격도 모두 제각각인 여성들이 경찰 동기라는 이유 하나로 똘똘 뭉치는 모습은 얼마나 큰 울림을 주던지! '개인'이던 여성이 하나의 공통점으로 '우리'가 되자 세계는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입교 당시 나는 비교적 어린 편에 속해서 동기 대부분이 언니였다.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품은 언니들은 가진 색깔도 다 달랐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무채색이던 나에게 각자의 고유한 색을 입혀 주었다. 언니들은 아픈 오빠를 둔 동생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였다. 따뜻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신파 없이 서로의 고통을 담담하게 대화로 풀어내는 법을 배웠다. 눈물을 동반하지 않고도 상처를 드러내는 법과 눈물을 보일 땐 부끄러움 없이 펑펑  울며 기대는 법을, 시기나 질투 없이 진심으로 누군가를 축하하는 법을,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오롯이 현재를 누리는 법을 배웠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이 누군가를 부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마음 내키는 대로 살 권리가 있는 하나의 생명이라는 걸 깨우쳤다. 어둠이 짙게 내린 길에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는 느김이었다.

 

언니들에 대한 애정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 주는 문단은 여기라 하겠다.

태어날 때부터 납작한 가자미였던 나는 아직도 가자미다. 하지만 그냥 가자미가 아니다. 지금 여기보다 넓은 바다가 있다는 걸 알게 된 뒤로 마음껏 바닷속을 누빌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눈이 한쪽으로 쏠려도 고개를 바삐 돌려가며 여러 방향을 보면 그만이다. 이제 나는 혼자가 아니다. 언니들이 옆에 있다. 다정히 내 이름을 불러줄 그들이 있다. 언니와 함께 달빛이 맞닿은 해변에서 마음껏 수영하고 싶다. 내가 접영을 하든 개헤엄을 치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곳에서. 달빛이 반사된 물비늘이 우리의 웃음을 환하게 밝혀줄 것이다. 고맞이 찢어질 듯 시끄러운 록페스티벌에 가서 엉거주춤 몸을 흔들고 싶다. 뭐든 어색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나는 축제 현장에서 야광봉을 들고 뛰는 것도 어색하게 보이겠지. 그런 내 모습을 언니가 보고 웃어주면 좋겠다. 언니들 앞에서라면 나는 마냥 철부지가 되어도 괜찮다. 아무튼, 언니만 있으면 된다. 함께 숨 쉬는 한 나 자신을 더 괜찮은 사람으로, 쓸모 있는 구성원으로 서고 싶게 만드는, 주어진 생을 최대한 멋지게 살아내기 위해 노력하고픈 마음이 솟구치게 하는 언니들은 진정 나의 구원자다.

다시 만난 이 세계를 나는 절대로 놓치지 않을 테다.

 

저자의 전작 <경찰관속으로>도 같은 경찰인 한 언니(책을 읽어 보면 누군지 나온다)에게 하는 말이라 생각하고 쓴 책이라 한다.

소규모 출판으로 대박을 쳤는데 아직 전자책으로는 나오지 않아서 나는 읽을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저자는 자신이 친애하는 경찰 언니를 보며 이렇게 강하고 착한 사람이 경찰이라서 다행이라고 했지만, 나야말로 이렇게 강하고 마음 따뜻한 분이 우리나라 경찰이라 너무너무 감사하고 세상은 아직 살 만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무튼> 시리즈가 짧아서 읽는 데 부담도 없고 여성주의적 자매애가 넘쳐나는 따뜻한 책이니 읽지 않을 이유가 없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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