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크레이그 램버트, <그림자 노동의 역습>
'그림자 노동'이란 집안일처럼 돈을 받지 않고 하는 노동을 가리킨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이자 사회 비평가인 이반 일리치(Ivan Illich)가 1981년에 발표한 <그림자 노동(Shadow Work)>에서 처음으로 설명한 개념이다.
이 책은 그림자 노동이 우리 삶에 얼마나 침투해 왔는지를 낱낱이 짚어 준다.
예를 들어 요즘 사람들은 '카약닷컴(kayak.com)' 등의 사이트를 이용해 직접 비행기표를 구입하고 '호텔스닷컴(hotels.com)' 등에서 숙박편을 예매해 직접 여행을 준비한다.
이런 사이트들을 통해 대중에게 공개되는 정보는 제한되어 있으며 대중은 여행사 직원 등 관계자들의 정보 시스템에는 접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은 스스로를 여행사 직원으로 임명하고 이런 그림자 노동을 기꺼이 해낸다(이는 물론 독점적인 전문 지식이 대중화되었기에 가능했다).
그림자 노동의 또 다른 예는 셀프 주유소이다. 주유소에 직원이 있으면 당연히 인건비가 나가게 마련이다.
주유소 측에서는 이 직원을 없애고 소비자들이 직접 주유를 하게 함으로써 인건비를 절약하는 대신 기름값을 낮출 수 있다. 물론 이 낮은 기름값은 경쟁력이 되어 더 많은 소비자들을 불러모은다.
이뿐만 아니라 마트에서 셀프 계산대를 이용해 직접 바코드를 찍고 계산을 하는 것도 그림자 노동이다.
보통 마트뿐 아니라 코스트코(Costco) 같은 창고형 대형 마트에서는 보통 마트보다 직원을 적게 고용함으로써 가격을 낮출 수 있었고, 동시에 상품의 위치를 찾는 것도, 상품에 대한 정보를 구하는 것도 모두 고객들에게 넘겨 버렸다.
그러나 그림자 노동이 반드시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위의 여행 준비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이케아(IKEA)' 같은, 자신이 직접 참여해서 일을 끝마쳐야 하는 제품/서비스 등을 좋아하기도 한다.
이케아는 가구를 조립하는 일을 고객에게 맡김으로써 제품 단가를 낮추었고, 고객은 직접 가구를 조립하는 과정에서 뿌듯함을 느낀다.
실제로도 사람들은 "실용적인 제품이든 재미 삼아 만든 제품이든 미숙하나마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이 전문가가 만든 것만큼이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제품을 조립하여 완성하는 일이 그 사람의 자부심을 키워 주는 것이다.
고객이 전적으로 그림자 노동을 떠맡지만 그 대가로 완벽한 프라이버시를 보장해 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임신 테스트기이다.
이 작지만 놀라운 발명으로 인해 여성은 자신의 임신 여부를 처음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과거라면 의사라는 전문가를 찾아가야 했지만 이제는 저렴하고 간단한 임신 테스트기 덕분에 여성의 사생활이 더 많이 보호되고 통제될 수 있다.
이렇듯이 반드시 그림자 노동이 나쁘다거나 고객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한 것은 그림자 노동이 일자리를 없애는 동시에 사람 사이의 면대면 접촉을 줄인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전자뿐 아니라 후자로 인한 인간 소외를 우려한다. 많은 일자리를 대체하는 키오스크(예를 들어 패스트 푸드점의 셀프 주문 기계나 공항의 셀프 체크아웃 기기 같은)는 쌍방향 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제일 인상이 깊었던 것은 '초콜렛 실험'이었다.
2013년 <심리 과학(Psychological Science)>에 일과 여가의 균형을 조사한 실험이 실렸다. 연구자들은 피험자들에게 헤드폰을 씌워 컴퓨터 단말기 앞에 앉혔다. 피험자들은 즐거운 음악을 듣거나(여가) 음악 중간중간에 귀에 거슬리는 소음(일)이 들리는 상황을 선택할 수 있었다. 소음을 20번 듣고 초콜릿을 얻는 피험자(고소득자)도 있었고, 소음을 120번 들어야 초콜릿을 얻는, 시급이 낮은 피험자(저소득자)도 있었다.
피험자들은 다음 실험 단계까지 초콜릿을 먹을 수 없었고, 먹지 않은 초콜릿을 집으로 가져갈 수도 없었다. (...)
놀랍게도 피험자들은 초콜릿을 먹을 수 있을 만큼만 벌고 음악을 듣는 쪽을 선택하지 않았다. 고소득자들은 평균적으로 초콜릿을 10.74개 벌었지만, 4.26개만 먹었다. 애써서 번 초콜릿은 대부분 테이블 위에 남겼다. 저소득자들은 먹을 수 있는 만큼의 초콜릿보다 약간 적게 벌었지만, 고소득자들만큼 시끄러운 소리를 많이 들었다. 휸브라운은 "양쪽 집단 모두, 최적의 결과를 생각한 게 아니라 얼마나 많은 노동을 견딜 수 있는지를 고려하고 있었다."라고 결론 내렸다. 그들은 가장 즐거운 경험을 얻으려고 애쓰는 대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일하면서 소용도 없는 재산을 모았다. 연구자들은 이 현상을 "무분별한 축적(mindless accumulation)"이라 부르면서 지나친 돈벌이를 과식에 비유했다.
그림자 노동은 우리이게 비용을 절감시켜 줄지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노동은 여전히 우리 몫이 된다.
그렇기에 부자들은 시간을 절약하는 대신에 돈을 더 쓰는(이 부분도 책에서 다룬다. 예를 들어 어떤 티켓을 사기 위해 줄을 서느니 다른 사람을 시켜 그걸 사게 하고 그 사람에게 돈을 지불할 수 있다) 방식을 택한다.
나도 부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과 여가의 균형을 찾기 위해서라도 불필요한 그림자 노동은 돈으로 대체해서라도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번 사는 인생, 돈 아끼다가 다 쓰지도 못한 채 죽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다.
예전에 인터넷에서 본 문구처럼, '적당히 벌고 아주 잘 살자'. 그게 내 삶의 목표이다. '워크-라이프 밸런스'를 되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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