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영화 추천] Professor Marston and the Wonder Women(원더우먼 스토리, 2017)
- 원더 우먼의 탄생 뒤에 숨겨진 세 연인, 그리고 빗나간 진실의 올가미
감독: 안젤라 로빈슨(Angela Robinson)
윌리엄 몰튼 마스턴(William Moulton Marston, 루크 에반스 분) 박사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강의하는 교수이다.
그는 아내 엘리자베스(Elizabeth Marston, 레베카 홀 분)와 함께 거짓말 탐지기를 개발 중이다.
새 학기가 시작하자 마스턴 교수는 아내와 더불어 자신의 조교 일을 맡아 줄 학생이 있다면 신청해 달라는 말로 수업을 마친다.
교정에서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청순한 매력이 물씬 풍기는 학생 올리브(Olive Byrne, 벨라 헤스콧 분)를 본 그.
그는 올리브를 관찰하고 (심리학) 실험을 해 보고 싶다고 엘리자베스에게 말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마침 올리브도 조교 자리에 신청을 하고, 조교가 된 올리브는 일단 실험실에서 엘리자베스를 만난다.
엘리자베스는 그녀를 보자마자 조교의 할 일을 간단히 알려 준 뒤, 대뜸 "내 남편과 자지 말라(don't f**k my husband)"고 말한다.
이 갑작스럽고 직설적인 말에 충격을 받은 올리브. 커피를 타 달라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자리를 피해 커피를 타다가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마스턴 교수에게 커피를 가져다주는데, 그는 올리브의 안색을 보고 안 좋은 일이 있느냐고 묻는다.
엘리자베스를 만났다는 말에 자기 아내가 뭔가 부적절한 말을 했겠거니 짐작하고 아내를 따로 만나 올리브에게 사과하라고 한다.
잠시 후 엘리자베스는 올리브에게 사과하고, 마스턴과 엘리자베스는 올리브를 술 한잔할 수 있는 클럽으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분위기는 가벼워지고 올리브는 마음을 푼 듯하다.
다시 조교 일을 맡기로 동의한 올리브. 그녀는 마스턴 교수 부부의 거짓말 탐지기 개발을 도우며 그들과 점차 가까워지는데...
왼쪽부터 엘리자베스, 가운데 빌(마스턴 교수), 오른쪽은 올리브.
거짓말 탐지기 개발을 위해 실험 대상이 된 올리브.
빌 마스턴의 '원더 우먼' 코믹스가 건전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빌 본인을 심문 중인 '미국 아동 연구 협회(Child Study Association of America)'의 조젯 프랭크(코니 브리튼 분).
'원더 우먼(Wonder Woman)'이라는, 세상에서 제일 잘 알려진 여성 슈퍼 히어로를 탄생시킨 마스턴 박사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했다.
영화 시작할 때 '실화에 기초함(based on a true story)'이라는 자막이 잠깐 뜨는데, 사실 이건 실화에 '기초'했다기보다는 '영감을 받았다(inspired by)'는 게 더 적절하다(그 이유는 차차 설명하도록 하겠다).
극 중 마스턴 교수가 강의하는 장면이 몇 번 나오는데, 실제로 마스턴 교수는 'DISC 이론'의 창시자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DISC는 각각 Dominance(주도성), Inducement(유인책), Submission(복종), Compliance(준수)의 머릿글자를 딴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람은 애정 어린 권력자(loving authority - 주도성 Dominance)의 말을 따를 때(복종 Submission) 가장 행복하다.
그렇지만 사람이 언제나 권력자의 말을 따르는 건 아니다. 그래서 권력자는 상대방이 나의 뜻대로 움직이게 할 유인책(Inducement)을 제시해야 한다.
즉, 자신이 원하는 것이 곧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상대방이 자발적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어떤 강압에 의해서 권력자의 말을 따르게 되면, 이는 단순한 준수(Compliance)에 불과하며, 별로 즐겁지 않다.
현대에는 이런 DISC 이론을 발전시켜서 머릿글자의 뜻도 Dominance(주도형), Influence(사교형), Steadiness(안정형), Conscientiousness(신중형)으로 바꿨고, 4가지 기본 성격 유형으로 그 의미도 변환시켰다.
아마 회사나 학교에서 오리엔테이션 때 처음 만나는 사람들 성격 파악 및 친목 도모용으로 이런 테스트를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초창기, DISC 이론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대략 위와 비슷한 논리였다.
이런 이론을 세운 마스턴 교수가 어쩌다가 원더 우먼이 등장하는 코믹스를 쓰게(그가 직접 그린 건 아니고 캐릭터를 개발하고 이야기를 쓰기만 했다) 된 것일까?
그건 그의 곁에 있던 두 여인들 덕분이다(영화 제목을 다시 자세히 보시라. 'Wonder Women', 즉 복수이다). 아내 엘리자베스와 그가 가르치던 학생 올리브.
그는 자신의 실험을 돕던 올리브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1. 영화 버전: 올리브는 사실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를 사랑하고 있었다. 올리브의 마음을 알게 된 엘리자베스는 고민한다. 사실 그녀도 올리브가 좋기는 하지만 남편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안한다. 우리 셋이 같이 사랑하고 같이 살면 어떻겠느냐고.
2. 현실 버전: 마스턴 교수(앞으로는 이름인 윌리엄의 애칭인 빌이라고 부르겠다)는 엘리자베스에게 제안을 한다. 올리브와 자신들과 같이 살게 되거나 아니면 빌 자신이 엘리자베스를 떠나거나.
영화 버전은 이 영화의 각본을 쓰고 감독한 안젤라 로빈슨의 해석이고, 현실 버전은 <스미소니언 매거진(Smithsonian Magazine)>에 실린, 원더 우먼의 탄생에 대한 책을 쓴 질 르포어(Jill Lepore)의 조사에 따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나도 1번이 사실이기를 바란다. 물론, 나도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여러 자료를 찾아봐서 진실이 2번 버전에 가까우며, 이 영화는 실화에 기반했다고 보기엔 증거가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시라. 당신은 똑똑하고, 강인하고, 매력적인 여자다. 당신은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남자와 결혼했고, 그는 하버드 대학 교수이다.
당신도 그의 일을 도왔고 당신도 논문을 제출해서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Ph. D)를 딸 자격이 있다. 하지만 당신은 여자이기 때문에 그 박사 학위를 받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당신 남편은 훨씬 더 젊고, 청순하고 순진한 여대생과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그가 당신에게 '셋이 같이 살자. 안 그러면 내가 널 떠나겠다' 이런 제안을 해 온다면?
당신은 배신당한 느낌이 들 것이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나는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했고 결혼한 세월 내내 충실했는데, '다른 여자(the other woman)'을 끌어들이자고?
이 삼각 관계에서 엘리자베스가 최약자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거니까.
나는 한 번에 두 명 이상의 사람을 똑같이 사랑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건 내가 못 한다는 이야기이고, 남들이 할 수 있다고 하면 딱히 그걸 의심하거나 저지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게 진심에서 우러나온, 정말 진짜배기 사랑이기를 바란다. 책임감의 부재나 욕심, 정욕에서 나온 그럴듯한 변명이 아니라.
또한 그 누구도 진심으로 그걸 원하지 않는데 억지로 그 삼각 관계에 끼게 되지 않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사람 한 명으로 충분한데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 공유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만약 엘리자베스가 억지로 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면 나는 그녀가 어떻게 느꼈고 괴로워했을지 알기에, 나는 차라리 그녀가 세상의 통념을 뒤집고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할지언정 적어도 두 사람에게 두 배로 사랑받으며 행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1번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물론 그게 사실이라고 볼 기록물이나 증거는 남아 있지 않지만.
영화에서는 셋이 서로 사랑을 하다가(이 말은 여기에선 '섹스하다'라는 말의 완곡한 표현이다) 올리브가 임신을 하자 셋이 같이 살게 되고(물론 학생들이며 올리브의 약혼자까지도 셋에 대해 수군수군대서 빌은 교수직에서 잘린다), 또 그다음에는 엘리자베스가 빌의 아이를 임신하는 것으로 나온다.
실제로 빌은 엘리자베스와 올리브의 자녀들의 아버지였고, 셋은 같이 살았다.
빌과 엘리자베스는 올리브가 낳은 자식들을 공식적으로, 합법적으로 입양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법적인 절차였을 뿐이고, 올리브는 그들과 동등한 지위의 파트너였으며, 그들의 자식에게 똑같이 부모 노릇을 했다.
빌과 엘리자베스는 일을 해서 돈을 벌었고, 올리브가 아이들을 키웠다.
이는 빌과 엘리자베스의 아들인 피트(Pete Marston)가 증언한 내용이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사람들이 그에게 '정말로 세 사람이 그렇고 그런 관계였느냐' 하는 질문을 여러 번 했던 것 같다.
피트는 단지 이렇게 대답했다. "어른들에게는 어른들의 세상이 있었고,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세상이 있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세상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지도 못했고, 질문을 하더라도 어른들은 '그게 무슨 상관이니? 알아서 뭐하려고?'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라고.
우리가 확실히 아는 또 다른 사실 두 조각은 다음과 같다. 빌이 1947년에 죽은 후에도 엘리자베스와 올리브는 (올리브가 사망할 때까지) 평생 같이 살았다(엘리자베스가 제일 오래 살았다).
피트는 '원더 우먼 박물관(Wonder Woman Museum)'을 세웠다.
영화는 이 셋의 관계를 '폴리 아모리(polyamory)', 즉 둘 이상의 사람이 사랑하는 '다자간의 사랑'으로 묘사하지만,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딱 다음과 같은 사실 정도이다.
즉, 그들은 흔히 프랑스어 표현 'ménage à trois(발음은 '므나지 아 트롸'에 가깝다)'의 딱 글자 그대로의 뜻, 'household of three(세 명의 가정)'으로 살았다.
이 프랑스어는 주로 '쓰리섬(threesome)', 그러니까 세 사람의 섹스 행위를 가리키지만, 우리는 실제로 빌과 엘리자베스, 올리브가 섹슈얼한 관계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 걸 증명할 근거도 없고, 무엇보다도 이건 남의 사생활이지 않은가. 우리가 알고 싶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엘리자베스와 올리브가 선물해 준, 투명한 장난감 비행기를 가지고 노는 빌.
본디지 코스튬을 입고 밧줄을 든 올리브(왼쪽)와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려는 엘리자베스(오른쪽).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영화를 보는 걸까? 이 영화의 가치는 뭘까?
일단, 안젤라 로빈슨 감독의 '해석(interpretation)'을 따르면 모든 걸 설명하기가 쉽다.
즉, 원더 우먼은 강인하고 똑똑하고 멋진 엘리자베스와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 올리브를 반반 섞어 만든 '완벽한 여자'다,
원더 우먼의 팔찌는 올리브가 학생 때부터 하고 즐겨하던 팔찌에서 유래했다,
원더 우먼의 주무기 '진실의 올가미(Lasso of Truth)'는 세 사람이 합십해 개발한 '거짓말 탐지기'와 시도해 보고 즐긴 본디지(bondage, 밧줄, 수갑 등을 이용한 신체적 구속에서 성적 쾌락을 느끼는 페티쉬)에서 기인했다(본디지를 장착하고 나오는 장면에서 올리브는 위 스틸 컷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원더 우먼과 상당히 흡사해 보인다),
원더 우먼이 타는 투명 비행기는 아이들과 어울려 놀라고 엘리자베스와 올리브가 빌에게 선물해 준, 투명한 유리로 된 장난감 비행기에서 따온 것이다, 하는 식으로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짓말 탐지기, 즉 폴리그래프(polygraph)는 마스턴 교수가 발명한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 이미 존 어거스터스 라슨(John Augustus Larson) 의대생이 1912년에 요즘 우리가 아는 현대적 의미의 거짓말 탐지기를 발명했다.
마스턴이 발명한 것은 거짓말 탐지기의 핵심 요소로 여겨지는, 수축기의 혈압을 재는 커프(cuff)이다. 이걸로 대상자가 어떤 발언을 할 때 그 진위 여부를 가린다. 오해의 여지가 있어서 명확히 하기 위해 알린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설명하기 쉽지도 않다.
엘리자베스와 올리브가 BDSM(본디지(Bondage)와 훈육(Discipline)을 포함하는 사도마조히즘(Sadomasochism)적인 성 취향)에 관심이 있었다고 볼 만한 증거가 없다.
세 사람의 관계가 정말로 영화에서 묘사된 것과 같았는지, 로빈슨 감독의 소위 '해석'이 정당한 것인지, 그 근거가 부족하다.
로빈슨 감독은 빌과 엘리자베스의 피트의 딸, 즉 영화 속 주인공들의 손녀인 크리스티 마스턴(Christie Marston)을 이 영화 시사회에 초대하려고 했다고 주장하나, 크리스티는 "직접적으로 그런 제안을 받은 적 없다. 제3자(other party)를 통해서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스턴 가의 유족은 이 영화가 주장하는 바는 진실이 아니며, 이 허구적인 작품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원더 우먼은 강인하고 능력있는 여성의 상징이 되었고, 페미니즘 운동의 기수로 여겨지기도 하며, 그녀의 무기는 진실을 말하게 오는 올가미이다.
진실의 가치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럴진대, 우리가 진실이 아닌 것을 널리 알려서 그게 (마스턴 가문의 유가족에게) 단 한 명이라도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건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니 이 영화는 그냥 흥미로운 2차 창작이라고만 생각해 주시고, 위에서 다소 길게 설명한 진실을 상기해 주시면 좋겠다.
아무래도 폴리아모리라든가 쓰리섬이라든가, 상당히 흥미 위주로 비칠 수 있는 소재와 장면이 많아서 걱정되기에 노파심에 덧붙이는 말이다.
빌과 엘리자베스, 올리브의 관계에 대한 내용은 아래 기사 두 편을 참고했음을 밝힌다. 특히 아래의 <Psychology Today>에 실린 글이 특히나 울림이 있어서 추천할 만하다.
https://www.bustle.com/p/how-accurate-professor-marston-the-wonder-women-is-might-shock-you-2890527
+ 심지어 위에서 간략히 언급만 하고 넘어간 '조젯 프랭크'의 손녀인 이리스 로젠(Yereth Rosen)도 자신의 할머니가 너무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며 항의했다.
진짜 조젯 프랭크는 영화에 묘사된 '전통적 가치, 가족의 소중함을 주장하는 기독교적 인물'이라기보다는 그 정반대에 가까웠다며, 심지어 기독교인도 아니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