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영화 추천] Battle of the Sexes(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 2017)
빌리 진과 마릴린의 첫 만남
빌리 진과 바비의 대결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감독: 발레리 페리스, 조나단 데이턴
때는 1973년, 빌리 진 킹(Billie Jean King, 엠마 스톤 분)은 명실상부 테니스의 1인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 테니스 선수들을 위한 경기의 상금은 남성 테니스 선수들을 위한 경기의 상금의 1/8 수준.
똑같은 수의 관중을 끌어모으는 티켓 파워도 있는데 상금이 남성들보다 적은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빌리 진은 이를 선수 협회의 잭 크레이머(Jack Kramer, 빌 풀먼 분)에게 따지지만 여성들은 남성과 능력이 동등하지 않으므로 같은 상금을 줄 수 없다는 대답만 들을 뿐이다.
이에 빌리 진은 매니저 글래디스(Gladys, 사라 실버맨 분)를 데리고 여성 테니스 선수들만을 위한 토너먼트를 개최하겠다며 그곳을 떠나고, 곧 여성 테니스 선수들을 모아 '버지니아 슬림스(Virginia Slims, 여성용 담배 브랜드)'의 후원을 받는 여성 테니스 오픈을 열게 된다.
직접 경기장도 준비하고 표를 파는 사이사이에 짬을 내서 연습을 해야 할 정도로 바쁜 일정이지만, 오픈을 시작하기 전 머리를 하러 간 살롱에서 빌리 진은 찌르르 야릇한 느낌이 오는 헤어드레서 마릴린(Marilyn, 안드레아 라이즈보로 분)을 만나게 된다.
전에는 느껴 본 적 없는 새로운 감정, 이 감정이 그녀를 괴롭히는데 과연 그녀는 최고의 테니스 선수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
1973년 빌리 진 킹과 바비 릭스(Bobby Riggs, 스티브 카렐 분)의 '세기의 대결'을 기반으로 한 영화이다.
(실화나 널리 잘 알려진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영화를 다룰 때면 늘 하는 고민이지만, 어디까지가 '스포일러'일까?
영화 <트로이(Troy, 2004)>가 상영되던 당시에 '어디 군대가 진다'를 언급하는 것도 스포일러라고 하는, 다소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니, <일리아스>가 언제적 작품인데... 정말 그 이야기를 듣고는 대해서는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그 작품을 읽지 않기로 선택했을 수는 있어도 그렇다고 해서 바로 어제저녁에 한 드라마도 아니고 몇백, 몇천 년 전부터 쭉 그곳에 있었던 작품 이야기를 안 할 수는 없지 않나.
같은 논리로, 나도 빌리 진 킹의 이 사건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실제 사건이 쉬쉬하면서 묻혀졌던 것도 아니고 내가 관심이 있었다면 충분히 알 수 있었을 테니 실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스포일러'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가 영화를 보기 전에 누가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 줬다고 해도 내가 그 사람에게 결말을 미리 말하면 어떡하느냐고 따지지는 못했을 듯.
따라서 나도 이 영화의 바탕이 된 실제 사건은 굳이 스포일러 주의를 달지 않고 그냥 있는 대로 이야기하겠다. 피하고 싶으신 분은 뒤로가기를 누르시거나 글 맨 끝에 있는 감상으로 곧바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도박사' 바비 릭스는 '남성 우월주의자 돼지(male chauvinist pig)'를 표방하며 당시 최고 여성 테니스 선수던 빌리 진 킹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과연 여자가 남자와 동등하게 테니스를 할 수 있다면 어디 한번 나를 이겨 봐라' 하고, 말하자면 '어그로'를 끈 것이다.
그러나 빌리 진 킹이 마가렛 코트(Margaret Court)라는 테니스 선수에게 지고 코트가 여성 테니스 1위의 자리에 오르자 그녀로 타깃을 변경.
마가렛 코트를 이긴 바비 릭스는 '이래서 여자들은 안 된다니까. 나에게 도전하고 싶으면 해 봐!'라는 식으로 또 어그로를 끌었고 이제 빌리 진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게 도전장을 던졌고 결국 그녀가 승리한다. 사실 생각보다 쉽게.
그도 그럴 것이, 바비 릭스는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오를 정도로 화려한 기록을 가진 남성 선수이긴 했으나 당시 이미 55세였고 빌리 진 킹은 한창 에너지 넘치는 29세였다.
체력 면에서도 상대가 안 되는 데다가, 바비 릭스는 이 '세기의 대결'을 홍보하느라 바빠서 연습을 게을리했다고 본인도 후에 인정했다.
릭스는 연습은 제대로 안 했어도 몸 관리에는 신경 썼던 모양인데, 매일 415가지의 비타민을 섭취했다고 한다. 그 정도는 물 먹고 비타민 약만 삼켜도 배부르지 않을까.
어쨌든 바비 본인이 먼저 어그로를 끌고 판을 벌린 거니 졌어도 동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애초에 나이 차이, 기량 차이 나는 것도 알고 시작했으니.
이건 겉으로는 '남녀 성의 자존심을 건 대결'이었지만 사실은 엔터테인먼트였다.
이고 지는 결과가 판이 짜여져 있다는 말은 아니고, 스포츠보다는 쇼 비즈니스에 가까웠다는 의미이다.
1973년 9월 20일, 이날 경기 시작 전 쇼(pre-show)는 4천 8백만 명의 관중의 눈을 사로잡았다. 경기가 열린 휴스턴 아스트로돔(Astrodome)에는 3만 명의 관중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빌리 진 킹은 정말로, 윗통을 벗은 남자들이 드는 가마를 타고 등장했다.
영화에 묘사된 게 뻥이 아니다. 진짜다.
바비는 'Sugar Daddy(돈 많이 많아 젊은 여자에게 스폰서를 하듯 돈을 퍼 주며 만나는 중년 남자)'라고 쓰인 재킷을 입고, 'Bobby's Bosom Buddies'라고 불리는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등장했다(bosom buddy는 '불알 친구'의 여성 버전인데, bosom은 여성의 가슴을 가리킨다).
경기장에는 "Anything You Can Do, I Can Do Better"(뮤지컬 <Annie Get Your Gun> 수록곡)가 울려퍼졌다.
나는 테니스를 비롯한 스포츠는 (모터스포츠 제외하고 거의 모든 면에서) 무지해서 빌리 진 킹이 레즈비언이었다는 사실도, LGBTQ 인권을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도 몰랐다.
빌리 진 킹이 '세기의 대결' 당시에 마릴린 바넷이라는 헤어드레서와 비밀스러운 연애 관계였던 것은 맞지만(이것도 따지고 보면 불륜이다. 당시 빌리 진 킹에겐 남편이 있었으니까), 영화처럼 그렇게 로맨틱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실제로는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대결 직전에 마릴린에게 머리를 한 것은 아니고, 미국 텍사스 주 휴스턴에서 열리는 경기에 참여하러 가기 전, LA에서 그녀에게 머리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둘이 헤어진 후 나중에 마릴린이 빌리 진을 상대로 별거 수당(palimony)을 요구했는데, 이때 빌리 진은 둘의 관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상당한 금액을 그녀에게 넘겨 줘야 했다고.
다행히, 영화 끝에 자막으로도 나오지만, 빌리 진은 1987년에 남편 래리 킹(Larry King)과 이혼했고, 그 후 일라나 크로스(Ilana Kross)라는 여성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계시단다(이분 역시 테니스 선수 출신이라고). 그때부터 쭉 LGBTQ 운동도 하고.
파트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바비 릭스의 도박사 기질을 참지 못하고 그를 떠났던 아내 프리실라(Priscilla, 엘리자베스 슈 분)가 정말로 다시 돌아와서 그가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았다는 게 내겐 너무 놀라웠다.
도박에 한번 빠지면 손을 잘라도 빠져나오기가 어렵다고 하던데, '나는 변함없고(steady),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라며 그를 떠났던 프리실라가 다시 바비를 받아 주다니... 참사랑 인정합니다ㅠㅠㅠ
진짜 사랑으로 치면 빌리 진 킹의 남편도 대단하다. 자기 아내가 외간 여자랑 바람피우는 걸 알게 되고서도 '빌리 진의 테니스 선수로서의 기량이 혹시 떨어질까'를 최고 우선으로 삼아 그걸 자기 안위보다 걱정하다니...
'진짜 빌리 진의 사랑은 자기(=남편 본인)나 그쪽(=마릴린)도 아니고 바로 테니스이다'라고 말하는 래리ㅜㅜㅜㅜㅜ
이성애자든 아니든 진짜 자기를 아껴 주고 먼저 생각해 주는 파트너를 아프게 하는 건 정말 못할 짓 같다. 당시 동성애자에 대한 인식이 지금보다 안 좋긴 했지만서도 그래도 이런 식으로 상대가 알게 하면 안 되지...
아, 영화에서는 빌리 진과 바비가 오랜 친구인 것처럼 묘사되지만(한밤중에 갑자기 바비가 빌리 진에게 전화를 거는 등), 실제로 이 둘은 '세기의 대결' 전에는 접점이랄 게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앞에서 말했듯이 바비가 빌리 진보다 26살이나 많아서.
대결 후에야 친해졌는데, 바비가 죽기 전날에도 둘은 이야기를 나눴고 그때 서로 '사랑한다(I love you)'라고 말했다고.
남녀 성 대결에서 싹튼 우정이라니, 놀랍다.
짜증 날 수 있는 '남성 우월주의자 돼지' 캐릭터를 능글맞게 연기해 웃음을 준 스티브 카렐의 연기가 (당연히!) 좋다.
엠마 스톤은 본인이 테니스를 잘 못 친다고 했는데 어차피 바디 더블이 있어서 그런 거 티 안 남.
사라 실버맨의 글래디스(담배를 뻑뻑 피워 대며 여성 선수들을 'my girls'라고 부르는 매니저) 연기도 아주 자연스러워서 인상 깊었다.
빌리 진과 마릴린이 처음 만나는 장면은 진짜 보는 나도 마치 머리 할 때처럼 허리 아래 뒤쪽에 전기가 등줄을 타고 퍼지는 것처럼 아주 찌르르하다. u///u
바비가 여자는 어쩌고 저쩌고 말을 늘어놓을 때 빌리 진은 그저 결연하게 '말은 필요 없고 경기로 모든 걸 보여 주겠다'는 식으로 나오는 것도 멋지다.
전반적으로 재밌고 억지 감동이 없는 것도 이 영화의 매력이다.
마지막으로 이 대결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 기사들을 한번 읽어 보시라. 이 글을 쓰는 데 참고했음을 밝힌다.
(http://time.com/4938913/battle-of-the-sexes-1973-report/
http://time.com/4952004/battle-of-the-sexes-movie-true-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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