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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원도, <경찰관속으로>

by Jaime Chung 2022.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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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원도, <경찰관속으로>

 

원도 작가는 내가 좋아한다고 한 백 번쯤 말한 것 같은 ‘아무튼’ 시리즈의 <아무튼, 언니>를 통해 처음 만났다. 아이가 언니에게 종알종알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듯, 새가 지저귀듯 쓰인 글이 참 사랑스러워서 기억하고 있다. 여자들에게는 조금 특별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언니’를 주제로 삼았다는 점도 물론 무척 흥미로웠기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책보다 (’전작’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튼, 언니>보다 이 책 <경찰관속으로>가 먼저 나왔으니까) 더욱 어둡다. 본업이 경찰관인 저자가 경찰서 또는 현장에서 목격하고 경험한 일들을 가상의 (아니, 어쩌면 실존하는 누구일 수 있지만 우리는 알 수 없다) ‘언니’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쓰였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언니에게 털어놓는 형태이니 더욱 진솔하게 느껴지는데, 그래서 더 뼈 아프게, 슬프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경찰서에서 일어나는 일이 즐거운 일보다는 괴로운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정 폭력 현장에 출동을 나갔는데 부모, 그러니까 어른들의 갈등을 중재하는 것이 주요 임무라는 것은 저자도 잘 알지만, 어른보다 더 큰 도움이 필요한 아동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라든지, 역시나 가정 폭력을 당한, ‘국제 결혼’(또는, 좀 더 정직하게 말해 매매혼)을 한 동남아 여성과 말이 통하지 않는 어려움, 분명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 죽여도 속이 시원치 않을 성범죄자를 보호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느끼는 분노 등.

책 소개에도 인용돼 있는 아래 한 문장만 봐도 이 에세이에서 전반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짐작할 수 있다.

어제 사람이 죽어서 인구가 한 명 줄어버린 관내를 오늘 아무렇지 않게 순찰해야 하는 직업, 그게 경찰관이더라.

‘여는 글’에는 이런 문단이 있다.

언니, 나는 생명윤리라는 건 이제 잘 모르겠어.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 이렇게 살 바에는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까. 매일 소주를 마시면서 행패만 부리는 주취자를 보고 속으로 이 사람은 얼른 사라지는 게 나라를 위한 일이겠다는 생각을 해.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욕을 하고 침을 뱉으며 노상 방뇨를 하는 아저씨를 보면 뒤통수를 때려주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고. 건실하고 건강한 사람만이 존엄한 생명은 아닌데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보며 저런 삶은 가치 있는 삶일까 하는 생각이 나를 잡아먹고 있어. 언니는 이런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

점점 회의적이고 냉소적으로만 변해가는 내 모습을 지켜보는 게 견디기 힘들다고 어느 선배에게 토로했더니, 선배는 그런 이유로 괴로워하는 너는 아직 초심이 남아있는 거라고 하더라. 그 말을 듣고 언니에게 이 편지를 쓰게 되었어. (…)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옳고 그름은 또 무엇인지, 범죄란 진정 무얼 뜻하는 말인지. 그리고 돈으로 굴러가는 세상에선 전혀 주목받지 못하는 어느 사람의 일생, 이 모든 것의 한가운데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경찰관의 일기. 그것에 대한 이야기야. 내가 이 편지를 언니에게 부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혹시나 언니에게 이 글이 닿는다면 나에게 전화 한 통 해줘. 기다릴게.

위에서 이야기한 예시들에 해당하는 꼭지에서 가져온 문단들도 순서대로 보여 드릴까 한다.

그런 아수라장에 출동한 경찰들은 대부분 부모에게 집중해. 대부분의 행위를 부모가 하기 때문에 그들을 분리해 진정시킨 뒤 사정을 들어보고 사건을 처리해야 하니까. 이 지옥에서조차 소외되는 존재가 바로 아이들이야. 가정폭력 현장에서의 아이들, 중학생이 되기 전의 아이들이 어떤 눈동자를 하고 있는지 언니는 본 적이 있어? 그 아이들은 아직 자신의 눈동자에 머물러 있는 현실의 무게를 감당할 힘이 없어. 무섭다고 소리쳐야 할지, 부모를 향해 화를 내야 할지 아무것도 몰라. 그 아이들은 출동한 경찰관을 쳐다보며 눈물만 뚝뚝 흘려. 언니, 그때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도대체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힘없는 경찰관 한 명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미안하다는 말 말고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를 비롯한 이 공간의 모든 것이 너희에게 미안해하지만 정작 너희 부모는 미안함을 모른다는 현실을 내가 어떻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제대로 씻지도 못해 머리에 이가 생긴 채로 집 구석에 사물처럼 놓인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하늘이 쪼개지는 기분을 느껴.

그 남자는 자신의 아내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던 거야. 남자는 우리에게 말했어. 자신은 중간업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 베트남으로 가서 여자를 사 왔다고. 업체는 수수료만 많이 떼어간다는 둥 자신의 국제결혼 노하우를 자랑하듯 늘어놓는 걸 봐서는 국제결혼이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 같았어. 이쯤 되니 국제결혼인지 인신매매인지 구별이 안되더라.

언니, 그 남자가 자신의 아내를 정말 아내로, 한 명의 사람으로 대했다면 한국말부터 배우도록 돕지 않았을까? 한국에서 살게 됐으면 말을 할 줄 알아야 아프면 병원에 가고, 배가 고프면 식당에 가고, 급하면 택시도 타고 할 거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이 평생 캄캄하게 글자 하나 읽지 못하도록 살게 내버려 두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건 어느 형태로 봐서도 사랑이 아닌데. 결코 사랑이 될 수 없는데.

여자는 한국말을 모르는데 남자는 계속해서 한국말로 휴대폰이랑 지갑 다 두고 가라며 소리를 질러. 말을 못 알아듣는 여자는 겁에 질려 내 등 뒤에 숨더라. 나는 전담부서에 지원 요청을 한 뒤 여자분을 데리고 집 밖으로 나와버렸어. 그러더니 그 여자분은 울먹거리면서 나에게 제대로 할 줄도 모르는 한국말을 더듬더듬거리며 “나… 노력했어… 남편….”이라고 하시더라. 내가 올해 들은 말 중에 가장 슬픈 세 단어였어.

각각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있더라. 가해자 누구도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지 않으며 너무도 자연스레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잘만 살아간다는 거. 언니에게 다 말한 건 아니지만 참 많은 성범죄자를 봤고,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도 봤어. 하지만 피해자들은 어떨까. 그들도 그렇게 가슴 펴고 꿋꿋하게 햇살 밝은 날 돌아다니고 있을까? 가해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행복하게 사는 게 당연한 건데. (…) 언니, 모두에게 공평히 내리쬐는 햇살도 누군가에겐 공포가 되고 사치가 되더라. 화살을 쏜 사람은 곧 그 장소에서 자신이 화살을 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어버리겠지. 하지만 맞은 사람은 자신에게 박힌 화살을 뽑기도 힘들어. 상처자국은 쉽게 아물지도 않아. 그럼에도 쓰러지지는 않을 거라고 나는 굳게 믿어.

어쩌다 피해자가 더욱 힘을 내야만 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들의 손 한 번 제대로 잡아주지 못하면서 응원의 말을 내뱉는 내가 부끄럽지만, 바라건대 뜻하지 않은 피해를 입은 사람 모두 잠시 앉았다가 숨을 고르고 운동화 끈을 단단히 여민 채 다시 일어나 세상을 마음껏 뛰어다녔으면 좋겠어.

언니, 나는 그들이 온몸으로 햇살을 받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곁을 지켜주는 사람과 소중한 시간을 보내길 바라. 진심을 가득 담아 그들에게 이 말을 전해. 그 모든 건 당신들 잘못이 아니라고. 당신은 행복할 자격이 있다고. 당연하게 행복을 누리는 그들의 모습을 위해 나는 오늘도 기꺼이 두 발로 뛸 것이라고

책 중후반에는 경찰들에게 실질적인 권한이나 지원이 얼마나 부족한지, 경찰이 정의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한 몸을 다 바쳐도 명예는커녕 비난만 받는지 하는 현실은 토로한다. 물론 세상에 쉬운 일은 없겠지만 경찰처럼 많은 국민을 위해 중요한 일을 하는 이들이라면 전폭적인 지원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정말 읽으면서 한숨이 계속 나왔다. 그리고 경찰이 되고 싶어 하던 아는 언니와 경찰이신 친구의 아버님을 떠올렸다.

종이책 기준 208쪽밖에 되지 않는 (내 기준) 얇은 책이지만, 그 안에 있는 내용은 묵직하기에 소화하기 쉽지 않다. 평소에 억울한 이야기를 접하거나 불의를 접할 때 감정적으로 쉽게 고양되는 이라면 이 책을 한자리에서 다 끝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조금 읽고 잠시 쉬며 귀여운 고양이 사진을 본다거나 게임을 한 판 하고 온다든가 하는 식으로 마음이 과열되지 않도록 주의하시라. 무거운 주제 때문에 쉬이 아무에게나 추천하지는 못하겠지만, 강력한 글임은 분명하다.

 

➕ 위에서 언급한 ‘아무튼, 언니’ 서평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시라.

2021.04.07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원도, <아무튼, 언니>

 

[책 감상/책 추천] 원도, <아무튼,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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