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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황효진, <나만의 콘텐츠 만드는 법>

 

 

기자 출신으로 독립 출판, 잡지, 팟캐스트, 뉴스레터까지 다양한 종류의 콘텐츠를 만들어 온 저자가 자기만의 콘텐츠를 만드는 방법을 친절하게 설명하는 책. 기획은 어떻게 하는지부터 시작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유용한 팁을 제공하니 이제 막 독립 출판, 잡지, 팟캐스트, 뉴스레터 등을 시작해 보려는 이들에게 상당히 도움이 될 듯하다.

책은 이러한 목적에 충실히 부합하므로 내가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 생각은 없다. 내가 직접 그런 콘텐츠 제작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뭐가 좋은 팁이고 아닌지, 어떻게 하는 게 더 나은지 말을 얹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니까. 나는 저자가 이 책에서 정말 최선을 다해 자신이 아는 한 가장 좋은 조언을 해 주었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 조언들에 대해 논의하지는 않겠다. 이 책은 e북도 있고 리디 셀렉트에서도 이용 가능하므로(물론 아마 도서관에도 있을 것이다), 원한다면 누구나 이 책을 직접 접해서 그 조언이 쓸모 있는지 없는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이 자리에서 주절주절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콘텐츠'라는 용어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나는 이 용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뭐랄까, 너무 자본주의적이라고 해야 하나? 전통적으로 어떤 직업이나 고유한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것에는 '콘텐츠'라고 하지 않는다. 예컨대 소설이나 신문 (요즘엔 다들 뉴스라고 하지만) 기사, 그림을 '콘텐츠'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각자 자기만의 영역이 있다고 여겨져서, 그에 마땅한 이름(소설, 신문 기사, 그림 등)으로 부른다. '콘텐츠'라고 하면 어떤 플랫폼을 미리 상정하고 그 위에서 전개되는 것을 부르는 듯하다. 가장 흔하고 적절한 예가 유튜브와 틱톡이다. 그 플랫폼 위에서 먹방을 하든, 동물 짤을 보여 주든, 댄스 커버 영상을 포스팅하든, 이런저런 논문과 기사를 참조하는 비디오 에세이를 써서 공개하든, '콘텐츠'라는 말은 그 내용물을 평가하지 않는다. 뭐든 그 플랫폼을 채워서 시청자 또는 이용자를 끌어들일 수 있다면 OK다. 그런 점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플랫폼의 이익을 위해, 그 내용물의 질 또는 내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것들을 전무 뭉뚱그리는, 철저히 플랫폼 입장에서 만들어진 용어라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플랫폼 입장에서야 그렇다 쳐도, 그 미디어를 생산하는 (이 표현도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매한가지이지만 어쨌든) 사람 입장에서 스스로를 '콘텐츠 크리에이터'라고 부르는 건 너무 그 플랫폼에 영합하는 느낌이 들지 않나 싶다. 차라리 먹방이면 먹방, 사이버렉카면 사이버렉카(그들이 스스로를 이렇게 부르지는 않겠지만) 하는 식으로 자신이 만드는 미디어의 장르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게 낫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팟캐스트를 합니다', '10대, 20대의 트렌드를 발빠르게 전하는 뉴스레터를 만듭니다' 하는 식으로. 이게 더 정확한 표현 아닌가.

'콘텐츠'라는 말은 또한 '소비'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그 점도 내가 보기엔 마뜩치 않다. 소비가 뭐지? 왜 감상이 아니고 '소비'일까? 책이나 영화, 그림 등은 감상한다고 할 수 있는데 유튜브 영상이나 틱톡 영상, 팟캐스트, 뉴스레터 등을 감상한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린다. 아마 후자들은 '예술'의 영역으로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나는 예술이 무엇인지 게이트키핑(gatekeeping)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후자들이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믿고 마땅히 예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최선을 다해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쏟아부어 만든 유튜브/틱톡 영상이나 팟캐스트, 뉴스레터 등이 있을 것이고 존재한다. 하지만 '콘텐츠'라는 말은 그 모든 노력의 결실을 단순히 자본주의적 '소비'의 대상으로 바꾸어 버린다. 실제로 그것들을 얻기 위해 돈을 한푼도 내지 않는다 쳐도, 그것은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할, 즉 감상해야 할 작품이 아니라 그냥 플랫폼을 채우는 '내용물'('콘텐츠'라는 말의 일차원적인 뜻)에 불과하다. 그냥 슬쩍 보고서 '하하 재밌네' 웃은 후 머리에서 지워 버리는 그런 내용물. 팟캐스트를, 뉴스레터를, 잡지를 '감상'하면 안 되는가? 간단하게 말해, 내 말은 예술과 '콘텐츠'를 분리하는 게 싫다는 거다.

게다가 '콘텐츠'라고 하면 소비와 직결되므로 어디까지나 그걸 '소비'해 주는 사람들을 예민하게 의식해야 한다는 뉘앙스가 있다. 아무리 유익해도 사람들이 안 보는 유튜브 영상이나 팟캐스트는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창작자가 그걸 받아들이는 대중을 고려하고 어느 정도 마음을 연 채로 의사소통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대중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며, 대중의 취향을 모두 다 맞추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콘텐츠'는 아무래도 소비자들에게 영합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세상에는 그저 그걸 하는 게 좋아서 하게 되는 일도 있는 것이다. 글을 쓰든, 노래를 부르든, 춤을 추든, 뭘 하든 간에, 일단 하는 사람이 재미가 있어야 남들이 그걸 봐주든 안 봐주든 해낼 힘이 생긴다. '그냥 그것이 즐거워서 한다'를 극단적으로 끌고 가면 헨리 다거(Henry Darger, 생전에 1만 5천 페이지가 넘는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렸으나 아무 곳에도 공개하지 않고 무명으로 사망한 예술가. 자세한 이야기는 이곳이곳 또는 이곳을 참조하시라)의 경우가 될 수 있을 것이나, 굳이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예를 들지 않아도 '일단 내가 하고 싶어야, 하는 재미가 있어야 할 수 있다'라는 사실은 블로그에 글 한 번만 써 보았어도 누구나 알 것이다. '콘텐츠'라는 말은 그것을 만드는 사람, 즉 창작자에게서 그런 기쁨을 지운다. 소비를 위해 끊임없이 '콘텐츠'를 만들어 내야만 한다고, 그것이 대중의 취향에 부합해야 한다고 창작자를 압박한다. 왜냐? 플랫폼은 그 안에 '내용물'이 충분히 많아야지만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인 발상이다. 플랫폼을 운영하는 이들이 직접 '콘텐츠'를 만드는 게 아니니 당연히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이 쉬지 않고 '콘텐츠'를 만들어내야 한다. 창작물을 만들어 낼 자원이 창작자 안에서 고갈되고 창작자가 번아웃을 느낀다고 플랫폼이 이들을 배려해 주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지 않는 이는 도태되고, 새로 유입된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으로 더 많은 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게 된 것은 정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자기 안에 하고 싶은 말은 있으니까. 그게 유튜브 쇼츠가 되었든, 잡지가 되었든, 팟캐스트가 되었든, 뉴스레터가 되었든, 블로그가 되었든, 자기 표현은 누구나 자유롭게 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을 드러낸다면 우리는 그것을 읽거나 보면서 '아, 세상에는 이런 삶/사람/생각도 있구나' 하고 배우게 될 것이고, 사회적인 면에서 더 서로를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다만 '콘텐츠'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 자신을 그 플랫폼 안에서만 생각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우려스럽다. '콘텐츠'라는 모호한 말을 쓰는 대신, 플랫폼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이 하는 일을 정확히 표현했으면 좋겠다. 팟캐스트든 무엇이든, 어떤 미디어 또는 플랫폼을 통해서든 글을 쓰면 작가, 비평을 하면 비평가, 일러스트를 그리면 일러스트레이터 등등. 나는 창작자라면 자신이 하는 일에 긍지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데, 어떤 플랫폼에 의존하는 건 전혀 긍지 높은 일이라 할 수 없다. 플랫폼이나 미디어는 바뀌어도 창작자라면 자신을 표현할 방법을 계속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콘텐츠' 따위의 용어로 자신의 작품을 정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각가는 이미 자기가 만든 조각 작품이 없어지더라도 여전히 조각가다. 왜냐하면 그 조각을 만든 능력이 그 안에 있으므로. 어떤 이유에서든 조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또는 조각이 아닌 다른 분야의 예술을 하고 싶다면 땅바닥에 나뭇가지를 이용해서라도 예술을 할 것이다. 미디어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그 정도 자부심이 있다면 그는 자신을 '콘텐츠 크리에이터' 같은 빈약한 어휘로 정의하지도 않을 테다.

만약 이 책의 제목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기를 세상에 풀어놓는 법'이었다면, 그러니까 꼭 저 표현이 아니더라도 '콘텐츠'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다르게 풀어서 썼다면, 그리고 책 내에서도 '콘텐츠'라는 용어로 독립 출판, 잡지, 팟캐스트, 뉴스레터 등의 미디어를 묶어서 표현하지 않았다면, 이 책을 접하는 느낌은 사뭇 달랐을 것이다. '콘텐츠'라는 말이 마음에 안 든다고 길게 늘어놓았지만, 어쨌거나 어떤 용어를 쓰건 간에 독자 여러분이 자신 안에 있는 이야깃거리,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표현해 낼 방법을 찾으시게 되기를 기원한다. 이 책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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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김현정, <90년생이 사무실에 들어오셨습니다>

 

 

이렇게 장단점이 극명하게 갈리는 책은 또 오랜만이다. 1980년에서 1990년대 중반의 기간에서 태어난 '밀레니얼'들을 저자는 이 책에서 'Y세대'라고 부르는데, 그들 세대의 문화를 분석하려고 시도한다. 따라서 나도 이 글에서는 밀레니얼과 Y세대라는 용어를 혼용해서 쓸 예정이다. 책 소개는 이쯤 하고 바로 장단점으로 들어가겠다.

단점이 상당히 크므로 단점부터 시작하겠다. 밀레니얼들 분석에 별로 큰 연관이 없는 자기 개인사(그것도 자기 자랑에 가까운, 아무도 안 궁금한 개인사)를 늘어놓는 거야 대충 휙휙 넘기면 된다 치는데, 흐린 눈 하고 넘어가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현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건지 모르겠는, 의심스러운 구절이 크게 두어 군데 있다는 것. 일단 첫 번째.

베이비부머는 더 좋지 않은 경제 여건에서도 제조업을 키웠고,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시켰다. X세대는 닷컴기업, 소프트웨어, 컴퓨터게임과 한류로 문화콘텐츠산업을 키우고, 산업 태동 후 20여 년이 지난 지금 방탄소년단 같은 K팝이나 게임계에 절대적 강자로 세계적 수준의 결과를 선보인다.

그러나 Y세대가 세운 산업은 전무하다. 제조업은 그렇다 쳐도 문화면에서도 그렇다. 스타가 될 만한 프로듀서가 하나도 없다. 나영석﹒김태호 PD, 양현석, 박진영, 방시혁 같은 한류 프로듀서, 홍상수, 봉준호, 박찬욱과 같은 세계적인 감독. 세계로 뻗어나가는 제조업이든 문화산업이든 밀레니얼의 활약은 미약하다. 앞서 말한 사람들은 30대에 이미 스타로 떠올랐고, 지금도 정상을 지키고 있다. 또한 Y세대는 핀테크, 드론 등의 하이테크 기업, 스마트폰 기반의 앱 서비스, 공유경제 등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일고 있는 조류에서도 한참 밀리고 있다.

무슨 말씀이신지? 문화산업 얘기를 꺼냈으니까 그것만 보더라도, 예컨대 방시혁 프로듀서가 키운 방탄소년단(BTS)은 밀레니얼인뎁쇼? 혹시나 내가 멤버들 나이를 잘못 알고 있나 싶어서 위키페디아까지 가서 확인해 봤는데 방탄소년단은 막내 정국(97년생)만 빼고 저자가 말하는 Y세대의 기준에 들어맞는다(92년생부터 95년생까지). 일본에서 한류 붐을 가장 먼저 일으킨 동방신기나 카라 같은 케이팝 그룹도 당연히 Y세대. 그런데 왜 프로듀서 같은 '우두머리'만 콕 집어 그들이 이런 문화를 만들어 냈다고 하는 건지? 방탄소년단만 예로 들자면 (아미들 미안합니다) 현재 일곱 멤버가 아닌 다른 그 누구였어도 현재 방탄소년단만큼 성공시킬 능력이 방시혁 프로듀서에게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위에서 언급된 PD, 프로듀서, 감독 등이 대단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단순히 그들만이 잘나서 성공한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다. 영화라면 각본가라든지, 배우들이라든지 등등 분명히 작품의 질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들이 있게 마련 아닌가. 저자는 아이돌 자체는 조각가가 만든 조각처럼 온전히 조각가의 재량에 따른 결과물이라고 보는 거 같은데, 아이돌도 사람이고 아이돌 멤버들도 각자 재능이 있으며 (물론 노력도 했겠지) 개개인이 고유한 매력이 있으니까 현재의 케이팝 붐이라는 성과가 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뭐 프로듀서가 '야, 한번 대박 내 보자!' 하면서 자기만 노력하면 그런 결과물이 뚝딱 나오나? 아이돌은 그냥 초등학생 손에 쥐어진 찰흙이나 똑같은 존재고? 이건 아이돌 본인들과 그 팬들이 모욕당했다고 느끼고 분노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발언이다. 밀레니얼 세대에 인물이 없어?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다.

두 번째로 크게 틀린 것. 

그런가 하면 IMF 이후 일터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평생직장도 없어지고, 수시로 명예퇴직이 일어나는 경쟁에서 견뎌야 한다. 밀레니얼이 보는 남성과 여성은 앞 세대가 본 남녀와는 다르다. 오히려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아버지와 브런치 카페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자신을 학원에 데려다주고는 휴대폰만 들여다보는 엄마의 모습에서 누가 더 고생하느냐에 대한 생각은 그 이전 세대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집안에서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영향력은 매우 커졌다. 거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여하는 집이 많다. 그러면서 사춘기 자녀와의 갈등이 점차 커져 갔다. 학교에서는 남학생을 감당하지 못하는 여성 교사가 각종 평가를 이유로 남학생을 통제하고, 집에서는 어머니가 학교 성적으로 옥죄며 그 역할을 맡는 경우가 흔하다. 남학생의 습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조건 억압하고, 야단을 치는 여성 권위자에게 남성들은 적대심을 갖게 된다. '약한' 여성에게 양보하고 배려하라고 하는 이야기에 그들이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다.

아니 무슨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예쁘장한 카페에서 브런치를 즐기는 문화는 최소한 (밀레니얼인) 내가 대학생 때나 되었어야 한국에서 퍼지기 시작한 건데, 그 전에 무슨 브런치 카페 운운이지? 브런치 문화가 생긴 시기에 대한 내 기억이 틀렸다 치더라도, 묘사하는 바에 따르면 엄마는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는 극성 엄마인 거 같은데 그런 게 정말 대중적으로 공감받을 수 있는, '맞아, 우리 엄마도 그랬어' 하는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대중적인 경험인가? 있는 집에서야 그랬을지 모르지만, 이 논문에 따르면 X세대(Y세대의 부모 세대)는 맞벌이 비율이 61.5%로 가장 높았다는데요? 맞벌이하는 부부의 아내/엄마 쪽이 어떻게 애를 학원에 직접 데려다주고 한가하게 브런치를 즐깁니까? 분신술이라도 쓰시나?

그다음 문단도 우습기는 매한가지다. 저자가 여성이 맞나 싶을 정도로 명예 남성적인 시각이다. 분명 '자녀'라고 써 놓고서 일단 아들에만 해당하는 것 같은 묘사는 둘째치더라도, 왜 집에서 어머니가 자녀들을 통제하는지 몰라서 묻는가? 그거야 남편, 즉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부재한 상태이니 어머니라도 애들을 돌봐야지. 또한 여교사가 남학생을 감당하지 못하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중학생만 되어도 남자애들은 벌써 여교사를 만만하게 보고 까분다. 체력이나 근력 면에서 여교사가 남학생을 어떻게 감당하나? '통제하고', '옥죄며' '무조건 억압한다', '야단을 치는' 등의 어휘 자체가 이미 여성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이미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생각을 바꿀지 모르겠다. 왜 여성 혐오가 이 Y세대에서 강해졌는지, 그리고 이게 왜 Y세대에서 큰 이슈가 됐는지 모르겠으면 (일단 90년대부터 남아-여아 성별 비율 차이부터 다시 떠올려보고, 강남역 살인사건을 기억해 보시길) 다른 학자들의 연구나 책을 참고해서 배우면 되지, 왜 뇌피셜로 글을 쓰시는 건지. 이런 글은 개인 블로그에 올려도 욕을 먹을 텐데, 이걸 아무런 여과 없이 책으로 낸 게 더 큰 문제다. 편집자가 이런 부분은 잡아내서 다시 조사를 해서 글을 쓰게 하든지, 아예 이 부분을 삭제하든지, 어떤 식으로든 조취를 취해야 했던 거 아닌가. 사실 저 두 문단 말고도 또 말도 안 되게 틀려먹은 부분이 더 있는데 더 옮겨 봤자 내 손가락만 아플 거 같아서 그쯤 해 두었다. 일단 저자 자신이 공평한 척하지만 사실은 한쪽에 심하게 기울어져 있다는 거 잘 알겠습니다.

이렇게 '꽤 날카롭고 핵심을 꿰뚫는 척하는' 글을 읽으면서 나는 이 트윗들을 떠올렸다.

출처: https://twitter.com/JSerin_M/status/1571729183491125248?s=20&t=76mU_MMsqa3WAQCX6WVPPQ

(아래는 위 트윗에 딸린 이미지 파일들)

 

출처: https://twitter.com/DuckWho_hh/status/1571774549515177984?s=20&t=1KHnpSgL2kzGF9mOszj6qw

 

'인스턴트 문화' 운운하는 이들과 이 책의 저자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어떤 상황이 발생하게 된 계기, 근원적인 이유는 보지 못하고 현상을 제멋대로 풀이하며 그 당사자들을 비웃는다는 거다. 객관적이라는 말이 단순히 대상에게 어떤 애정도 가지지 않고 냉정하게 바라본다는 뜻이 아닌데, 이들은 밀레니얼 또는 Y세대를 조롱하는 데 그친다. Y세대에 대한 애정이라는 게 정말 조금이라도 있으면 이렇게 비뚤어진, 자의적인 해석은 불가능하지 않나?

이런 책에도 놀랍게도 장점이 있었으니, '그래서 구체적으로 Y세대를 어떻게 대해야 한다는 건데?'라는 질문에 답을 해 준다는 것이다. 

이들은 직장에서도 피드백과 인정, 칭찬을 해주길 바란다. 그렇다면 얼마나 자주 피드백을 해주어야 할까? 한 외국계 회사에서 강의 중에 질문해보았다. 그들은 하루에 한 번 정도는 피드백을 원한다고 답했다. 이 대답을 들은 X세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도 모르지만 이들은 그만큼 즉각적 피드백을 원하고 있다.

세밀한 피드백은 업무 성과를 높이고, 팀 성과를 내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리더가 신경을 쓰면 좋다. 일에 대한 결과 피드백이야 일에 따라 다를 테지만, 리더는 그때그때 피드백을 줄 수가 있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리더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습관처럼 자주 반복하길 권한다.

'잘하고 있다, 수고한다, 고생한다, 잘될 거다, 고생하는 거 알고 있다.'

깊은 의미를 담거나 구체적 조언은 아니더라도 구성원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리더가 인식하고 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 필요하다. 피드백을 필요로 하는 것이 불안을 달래고, 개인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피드백은 필요할 때 해주면 된다. '내가 이런 것까지 이야기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친절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늘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 몇 번을 섬세하게 해주면 좋다. 불안이 어느 정도 다스려지고 자신감이 붙으면, 더 이상 그런 피드백을 원하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감이 붙으면 자기 혼자의 힘으로 해내고 싶은 동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성원이 잘했을 때는 즉각적으로 작은 보상을 해주는 것이 좋다. 커피를 한 잔 건넨다거나 모바일 쿠폰을 보내주는 것도 좋다. 이것이 연말 평가에서 고과를 잘 주겠다고 약속하거나 승진할 때 챙겨주겠다는 것보다 효과적이다. 연말에 나눠 받는 인센티브보다 지금 당장 들어온 모바일 쿠폰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들은 대학 시절 선배가 밥을 사주던 세대가 아니다. 따라서 커피 한 잔만 사주더라도 매우 고마워한다. 법인카드로 사줘도 될까? 아니다. Y세대는 법인카드는 '우리 돈'인데 상사가 생색낸다고 생각한다. 개인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또한 X세대가 모바일 쿠폰은 그저 커피 마실 때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Y세대는 쿠폰이 생기면 그것을 쓰러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낸다. 그들에게 모바일 쿠폰은 커피 한 잔이 아니라 관심의 표현이며 하나의 이벤트를 선물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 쿠폰을 보낼 때는 반드시 받는 사람의 상황에 맞는 메시지를 같이 보내야 한다. 누구라도 쿠폰만 받는 것보다 메시지와 함께 받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다.

— 오늘 날이 더운데 외근하느라 수고했어요.
— 다른 사람들이 귀찮아하는 일인데 기꺼이 맡아줘서 고맙다.
— 요즘 고생이 많은데 카페인 충전하고, 파이팅!

이처럼 각 개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에게만 보내는 특별한 관심과 선물임이 드러나도록 한다. 이 방법은 예상보다 현장에서 반응이 매우 좋았다.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수 있지만 X세대 리더들도 손쉽게 해볼 수 있을 뿐더러, 이를 통해 이야기를 시작할 수가 있다. 오늘 힘든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다면, 일찌감치 퇴근을 허락해주고 아이스크림케이크 모바일 쿠폰 하나씩 보내주면 어떨까.

겉만 보면 (X세대인 저자가) X세대가 상사의 입장에서 Y세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모양새지만, 실제로는 Y세대가 X세대에게 '타인은 이렇게 대하는 것입니다' 하고 가르쳐 주는 듯하다. 마치 자녀가 부모에게 핸드폰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려 주듯이. 생각해 보면 X세대도 사람인데 그들이라고 해서 이렇게 '잘하고 있다, 수고한다, 잘될 거야' 같은 말을 듣고 싶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Y세대는 섬세하고 예민한 눈꽃송이 같은 아이들이니까 이렇게 대해 주어야 한답니다~' 같은 태도로 이런저런 조언을 하는 거 보면 살짝 웃기기도 한다. X세대도 똑같이 그런 말을 듣고 싶었을 텐데 먹고사느라 힘들고 바빠서 그걸 표현을 못 했다가 이제 좀 먹고살 만해지니까 그걸 좀 더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시대적 배경이 되어서 Y세대들이 그걸 바라게 된 거 아닌가. Y세대가 유난히 '나약'하거나 '섬세'하거나 '예민'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장단점이 극명히 갈리는 책이라 추천할 수 없다. 물론 장점은 정말 너무너무 유용하고 좋은데, Y세대의 현상의 원인을 잘못 짚었으니 전반적으로 저자와 이 책에 대한 신뢰감이 하락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또한 이것 하나만 보고 90년대생, 밀레니얼, Y세대, 또는 그들을 무슨 용어로 부르든, 이 세대를 다 이해했다고 하기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참고할 만한 책을 두어 권 꼽아본다면, 일단 그 유명한 임홍택의 <90년생이 온다>가 있겠다. 여기에 참고로 붙이려고 내가 이전에 쓴 서평을 다시 읽어 보니 75% 정도 공감했다고 써 놨더라. 괜찮은 책이다. <90년생이 사무실에 들어오셨습니다>보다는 훨씬 더 공감이 되고 훨씬 더 잘 분석했다. 같은 한국 이야기라는 것도 장점이고.

2019.10.11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임홍택, <90년생이 온다>

 

[책 감상/책 추천] 임홍택, <90년생이 온다>

[책 감상/책 추천] 임홍택, 이 책은 워낙 출간 당시부터 세간의 관심을 많이 끌고 반응도 좋았어서, 내가 따로 소개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니 그냥 바로 내 감상 본론으로 들어가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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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앤 헬렌 피터슨의 <요즘 애들>. 이건 미국인 저자가 미국 밀레니얼 세대를 분석한 책인데, 저자 본인이 밀레니얼에 속해서 그런지 정말 보는 눈이 정확하다. 미국 이야기라고 해도 한국인 밀레니얼인 내가 거의 90%는 공감할 수 있었을 정도로. 또한 플랫폼 경제, 긱 경제가 이 세대의 경제 생활와 노동의 의미를 바꾸어 놓았는지 정말 잘 살펴보았다. 2020년 책이라 꽤 최근이기도 하고(위 책은 2018년 말에 출간). 이거야말로 진짜 밀레니얼 입장에서 본 밀레니얼 세대 보고서이다. 이 책을 강력 추천한다. 이 책들이 세대 간 소통과 화합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2021.11.22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앤 헬렌 피터슨, <요즘 애들>

 

[책 감상/책 추천] 앤 헬렌 피터슨, <요즘 애들>

세상에, 정말 놀랍다.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를 관찰해서 (저자 본인이 밀레니얼 중 나이 든 편에 속한다) 그들이 왜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는지를 분석한 책이다. 읽으면서 내내 공감했다.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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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유경현, 유수진, <별 다섯 개 부탁드려요!>

 

 

KBS <다큐 인사이트 - 별점 인생>에서 미처 다 다루지 못한 플랫폼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엮은 책. 여기 호주에도 '배민'처럼 음식 배달 앱들이 여럿 있는데, 이걸 자주 이용하는 나로서는 참 씁쓸해지는 책이었다. 

플랫폼이라는 게 정말 누구에게 실질적으로 이득이 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내가 어릴 적, 최소한 대학 시절 이전에는 배달 대행 업체가 이렇게 일반적이지 않았고 그냥 음식점에서 전화를 해서 주문해 음식을 받고 카드나 현금으로 결제하는 형태였다. 음식은 음식점에서 자체 고용한 배달 기사가 배달했고, 손님들은 따로 배달료를 내지 않았다. 배달비는 음식값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배달 대행 업체와 '배민' 같은 플랫폼이 나타났고 (뭐가 먼저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손님들은 이제 배달비를 따로 내야 했다. 배달비가 이제 9천 원이나 되는 곳도 있다는데, 결국 그래서 손님, 음식점, 배달 기사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졌나? 손님은 음식값 외에 배달비를 또 내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그냥 음식점에서 미리 주문만 하고 직접 찾아간다거나 아예 배달 음식을 줄이거나 끊기도 하고, 음식점은 그 배달비 때문에 손님들이 줄어들까 걱정이며, 배달 기사들은 악천후에도 위험을 감수하며 배달하는데 배달로 '부자'가 되었다는 사람은 못 봤다. 이 책에서도 다큐 제작진들이 확인했듯이, 어떤 플랫폼이든 처음 시작해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힐 때까지는 노동자들에게 인센티브를 넉넉히 주는 편이다. 그때는 노동자들을 많이 모아야 하고 고객들도 끌어와야 하니까. 그러다가 노동자가 많이 모집되면 인센티브를 줄 필요가 없어지고, 그래서 건당 노동자가 받는 실질적 보상은 줄어든다. '아무 때나 원하는 시간에 일할 수 있다'라는 홍보 문구는 실질적으로 '먹고 살만한 수준의 돈을 벌려면 아무 때나 다 일해야 한다'라는 현실을 교묘하게 감추는 것이다.

게다가 별점 제도는 또 어떤가. 예전에는 동네 입소문을 통해 어떤 가게가 맛이 좋다거나, 서비스가 별로라는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이런 이야기는 대개 동네 사람들에 한정돼 전해졌다. 하지만 이제는 별점이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된다. 고객들이 언제나 '공정'하게 별점을 주는 것은 아닌 데다가, 고객과의 오해 또는 갈등이 있어도 플랫폼은 개입하지 않는다. 예컨대 책에 나온 '대리주부' 플랫폼의 노동자 이동희 씨의 실례처럼, 고객이 부당하게 항의를 해도 노동자가 이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어떻게 오해가 잘 풀린다고 해도 이전에 준 5점 아닌 별점 때문에 내려간 평점이 다시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높은 별점이 가장 먼저 노출되므로, 노동자들은 우선 노출권을 위해 자발적으로 더 일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일뿐이랴, 별점 다섯 개를 달라고 부탁하는 감정 노동도 해야 한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 플랫폼이 실질적으로 고객이나 노동자, 어느 쪽에게 도움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 배를 불리는 건 플랫폼뿐인데 말이다. 

노동문제를 다루고 실질적으로 플랫폼 노동자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점이 좋다. 한국의 예가 80%, 외국의 예가 20% 정도라 국내 실정에 맞는 점도 좋고. 게다가 그리 길지도 않고 (종이책 기준 232쪽) 정 읽기가 힘들다면 그냥 다큐 영상을 봐도 되니까 그 점도 장점이라 할 수 있겠다. 플랫폼 노동자들의 처우가 개선되기를 바라며, 당장 나부터 별점에 후해져야겠다.

➕ 이 책에서 다룰 범위를 벗어나긴 하지만 만약에 이런 '긱 경제(gig economy)'가 이 세대의 정신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즉 이런 경제 때문에 밀레니얼(millenial)들이 어떤 사고를 가지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면 앤 헬렌 피터슨의 <요즘 애들>을 참고하시라. 진짜 아주 정확하게 밀레니얼 세대를 분석한 책이다. 미국 밀레니얼 세대의 이야기지만 한국 밀레니얼 세대에게도 거진 다 들어맞고 공감할 만하다. 내가 작년에 읽은 책들 중 단연코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책이다.

2021.11.22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앤 헬렌 피터슨, <요즘 애들>

 

[책 감상/책 추천] 앤 헬렌 피터슨, <요즘 애들>

세상에, 정말 놀랍다.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를 관찰해서 (저자 본인이 밀레니얼 중 나이 든 편에 속한다) 그들이 왜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는지를 분석한 책이다. 읽으면서 내내 공감했다. 미국

eatsleepandread.xyz

 

➕ 아래에는 유튜브에 공개된 <다큐 인사이트 - 별점 인생> 클립들을 올려 놓았으니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번 보시라. 당연히 책 내용과 거의 같은데, 책에서는 플랫폼 이름이 공개되지만 아래 영상들에서는 그냥 '플랫폼'이라고만 나온다. 그래도 대충 보다 보면 어디겠구나 하고 감은 오지만. 책을 다 읽기가 부담스럽다면 이 다큐만 따로 보셔도 괜찮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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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지비원, <왜 읽을 수 없는가>

 

 

최근 '심심한 사과의 말씀' 논란이나 '사흘' 논란으로 인해 (이 논란들을 잘 모르시는 분들은 여기를 클릭) 요즘 세대의 문해력에 대한 탄식과 비판이 많이 나왔다. 많은 이들이 '어떻게 그렇게 기본적인 단어도 모르냐', '모르는 것 자체도 모르지만 모르는 것을 배우려고 하지 않고 뻔뻔하게 왜 어려운 말을 쓰냐고 공격적으로 나오는 게 더 문제다' 같은 반응을 보였다. 다 맞는 말이고 다 공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이해시키고 싶다면 어떡해야 할까? 상대방에게 문해력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이해시켜야 한다면?

이런 질문에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지비원의 <왜 읽을 수 없는가>라는 책을 추천받게 되었다(글 하단 링크 참조). 저자는 주로 일본어 인문교양서를 만드는 편집자 겸 번역가이다. 그는 노야 시게키의 <어른을 위한 국어 수업>이라는 책을 번역하며 '어떻게 하면 상대를 이해시킬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고, 그간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에세이 형식으로 쓴 게 바로 이 책이다.

요즘 10대, 20대들 문해력이 떨어진다고 비판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이해시켜야 하는 의무가 있는 교육자들(교과서나 인문, 과학 등 전문서적의 저자들 포함)이나 현대 사회의 소식을 전하고 그에 대한 비평이 업인 기자들이 비판만 하고 손을 놓고 있을 순 없는 일 아닌가. 어떻게든 상대를 이해시키기 위해, 그들의 눈높이에서 글을 쓰고 이야기해야 한다. 저자는 '들어가며'에 이렇게 썼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진단과 해결책이 쉽게 나올 수는 없고, 전문 분야에 따라 그 해법도 다를 것이다. 나는 출판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했지만 이 문제에 대해 견해를 내놓을 만한 주제는 못 된다. 그러나 오랜 시간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이들, 특히 인문학 연구자들의 문장을 많이 다루었고, 이를 오류가 없고 되도록이면 독자층에게 가장 적합한 형태로 전달해야 하는 책임을 지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어떤 '글'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일차적으로 글쓴이와 그 글을 편집하는 사람에게 있다고 믿는다. 그 때문에 나는 '안 읽는' 독자들을 먼저 탓하고 싶지는 않다. 그 대신 글쓰기가 직업인 사람들, 자신이 쓴 글에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의 문장을 한번 돌아보고 싶다. 글이 길고 조금만 어려워도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는 현상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질책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넓고 얕은 지식'이든 뭐든, 기왕이면 머릿속을 채우는 게 채우지 않는 것보다 백배 낫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왜 전문가가 조금만 재미있게 설명한다 싶으면 시청률이 그렇게 뛰어오르는가? 왜 '넓고 얕은 지식'을 표방하는데 책이 그렇게 많이 팔리는가? 단언컨대 사람들이 웬만하면 교양을 쌓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또 자신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지식은 누구나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 한다. 쉽고 얄팍해 보이는 프로그램이나 책이 인기를 얻는 현상은 사람들의 지식욕을 이해하지 못하면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일반인들의 지식욕이 누군가 아무렇지 않게 구사하는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문장에는 접근할 길을 찾지 못하는 것뿐이다.

솔직히 어려운 글이 너무 많다. 전문 서적이야 전문가를 위해 쓰인 것이니 어려운 게 당연하지만, 전문가가 아닌 독자를 위해 쓰인 글인데도 어려운 게 많다. 글을 전혀 안 읽는, 또는 어떤 주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아, 이런 내용이구나' 하고 이해할 텍스트가 있어야 하는데, 초급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이 없다. 그러니 어떤 주제가 됐든 흥미를 가져도 조금 파 보려다가 어렵다고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뉴스 매체에 실리는 글조차 그냥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렵다. 이걸 과연 10대, 20대 젊은이들이나 노인들이 보고 한번에 이해할 수 있을까? 저자가 '뉴스'로 분류되는 글 중에서 가져온 아래 예들을 보시라(순서가 달려 있지만 각각 다른 글에서 나왔으며, 이어지는 내용은 아니다).

1. 이런 단일 토지세론보다 현대 사회에 더 묵직한 한 방을 날리는 것은 그[헨리 조지-인용자]의 정치경제학 밑바탕에 흐르는 자연정의론적 세계관이다. 그가 정치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그의 정치경제학에 있는 자유방임론적 요소를 상당 부분 포기했을 것이다.

2. 2020년대에 바우만의 사상이 던지는 함의는 그렇다면 뭘까. 바우만의 탁월성은 새로운 개념의 발굴에 있다. 특히 그는 흥미로운 개념틀을 주해 우리 시대를 날카롭게 분석해왔다. 그 대표적인 개념틀들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입법자와 해석자'다. 바우만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 개입한다. 그에 따르면, 모더니스트들은 확실성과 보편성의 기준을 세우려는 입법자로서의 입장을 취한다.

3. 슈미트주의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아예 보편성과 일관성 자체를 포기한다.

자유주의자들은 (A 이른바 '원칙이성(Grundsatzvernunft)'에 따라 사유하고 행동한다. 그들은)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보편적﹒추상적 기준을 갖고 있다. (……)

이와 달리 전체주의자들은 (B '기회이성Gelgenheitsvernunft'에 따라 사유하고 행동한다. 그들은) 보편적 기준 없이 매사 그때그때 상황의 필요에 따라 판단한다.

보자마자 '그게 뭔데 씹덕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자연정의론은 뭐고 바우만이랑 슈미트주의자는 누구인가? 이걸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가 이해할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건가? 글만 봐도 '네가 이 정도 글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너와 이야기해 주겠다'라는 오만한 태도가 엿보인다. 이런 글을 대중매체에 써 놓고서 독자들이 이해를 못한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독자인 이쪽이 화가 나는 게 당연하다. 애니 오타쿠가 애니 캐릭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늘어놓으면 '으, 사회성 없는 씹덕'이라고 비웃으면서 왜 이런 글을 전문 서적도 아니고 전문가들을 위한 논문도 아닌 '대중매체'에서 쓰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글의 저자가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글을 쓴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독자들은 이런 글을 읽지 못하는 것에 부끄러워하며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존나 가만히 있어야겠다' 해야 하나?

'나도 이해하고 싶다. 이해하고 싶으니 제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해 달라.' '심심한 사과'나 '사흘' 논란을 일으킨 그 소위 '무식한' 사람들의 심정도 사실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너무나 미세하고 또 자존심에 가려 사실 본인들도 잘 몰랐겠지만 그들도 이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다 해도 그건 너무 기본적이고 쉬운 단어인데, 그걸 심지어 찾아보지도 않고서 자기네들이 옳다고 우겼잖아?' 하며 반박하고 싶은 분들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교양'이나 '상식'처럼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도 없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뫄뫄 정도는 상식 아닌가요?' 같은 글이 올라오면 언제나 뜨거운 반응을 얻게 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예시로 든 저런 글을 쓰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헨리 조지, 바우만, 슈미트 등을 모르는 나를 무식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잘 안다'와 '모른다', '유식하다'와 '무식하다'의 차이는 언제나 자의적이니까.

솔직히 나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글쓴이들이 글을 쉽게 써야 한다는 생각에 그쳤다. 그런데 이 서평을 쓰기 위해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대중을 상대로 이해하기 쉬운, 쉽게 설명하는 글을 쓰는 것은 교육자 또는 기자 들의 의무이고 또한 그런 글을 읽을 권리가 대중에게 있다. 자기만의 감상에 벅차올라 그것을 상대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전달하는 데는 관심이 없는 씹덕을 만나면 그와의 정상적인 대화를 포기하게 되듯, 이 시대의 많은 이들도 '('심심하다', '사흘' 같은) 어려운 말을 이해할 수 없으니 너와 대화하지 않겠다'라는 결정을 내린 게 아닐까. 그들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게다가 태어날 때부터 핸드폰, 인터넷, 유튜브 같은 미디어를 접해 긴 글 읽기가 더 어렵게 느껴지겠지. 이런 상황에서 그냥 그들을 비웃고 비난만 할 게 아니다. 그들을 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책 후반에는 '어려운 글'뿐 아니라 입문서도 때때로 어려운 이유 중 하나로 전문 용어 자체가 일본에서 번역해 들여온 용어를 가져왔기 때문임을 (내가 보기에는) 다소 길게 설명한다. 예컨대, '철학(哲學)'이라는 단어는 'philosophy'라는 영어 단어를 일본인들이 번역할 때 만들어낸 단어이다. 우리는 이 단어를 그대로 가져왔으니 왜 'philosophy'가 '철학'이 되는지 알 길이 없다. 안 그래도 어려운 개념인데 번역어가 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전혀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점은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분명히 좋은 지적이다. 그렇지만 역시 개인적으로는 이 논의가 이 책에서 다루어야 할 분량 이상으로 조금 길게 느껴졌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길지 않은 (종이책 기준 180쪽) 좋은 책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교육자나 기자라면 꼭 읽어 보아야 할 책이다. 

 

➕ 이 책을 가지고 소통을 위한 읽기와 쓰기의 문제를 해찰한, 뉴스레터 '인스피아(Inspia)'의 해당 이슈는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이 책을 소개받았다. 또한 이 문제를 다룬 바로 그다음 주에 인스피아 측에서 저자 지비원을 인터뷰한 뉴스레터도 발행했으니 이것도 같이 보시면 좋을 듯.

https://stibee.com/api/v1.0/emails/share/9kCGVSU0U7UJpNqa4JgbHEVVGmZB5QI=

 

🎓읽을 수 있는 글, 읽을 수 없는 글

 

stibee.com

https://stibee.com/api/v1.0/emails/share/rbzNPrFofjXitNuX1GYIndfRv58DuNM=

 

🎓사람들은 인문학에 관심 없을까?[지비원 저자 인터뷰]

 

stib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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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라일라 리, <난 그저 미치도록 내가 좋을 뿐>

 

 

일전에 유튜브에서 케이팝의 인기와 그 영향을 분석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때 자료 화면으로 뒤에 깔린 어느 걸그룹의 뮤직 비디오를 보게 됐는데, 노랫소리도 그대로 들렸다.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날씬하고 예쁜 한 걸그룹 멤버가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가 좋아'라는 내용의 가사를 부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너는 이미 엄청 날씬하고, 매일매일 전문가에게 메이크업도 받고, 옷도 스타일리스트가 골라 준 대로 입잖아. 완벽하게 관리받은 외모를 가지고 있으니 당연히 지금의 너를 사랑하기 쉽겠지!' 맹세컨대 그 멤버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자존감 뿜뿜하는' 노래를 부르는 당사자가 그렇게나 완벽하게 관리된 외모를 갖추고 있다면, 그런 맥락에서는 그 노래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기만적으로 들리거나, 최소한 원래 의도보다는 미약해진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똑같은 노래를 비만인 사람이 부른다고 하면 맥락도, 메시지도 달라지지 않을까?

하지만 여러분이 이미 알다시피 연예계에서, 특히 아이돌 판에서 마른 몸 이외에 다른 몸은 보기 어렵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 남녀를 불문하고 많은 아이돌들이 화면에 잘 보이기 위해 다이어트를 한다. 비만인 아이돌은 말 자체가 아이러니일 것이다. 미디어에서 볼 수 있는 연예인이라면 거의 다 날씬하다 보니 (특히 여자라면 더더욱), 청소년들은 그만큼 더 날씬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이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오픈서베이에서 제공하는 <Z세대 트렌드 리포트 2022>를 보게 됐는데, 한국은 '자기 몸 긍정주의(body positivity)'에 대한 관심이 전무하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아래 그래프 맨 오른쪽 항목을 보시라.

출처: 오픈 서베이(https://blog.opensurvey.co.kr/trendreport/gen-z-2022/)

 

자기 몸 긍정주의란 한마디로 '내 몸을 사랑하자'라는 메시지라 할 수 있다. 자기 몸 긍정주의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낮은 상황에서, 플러스 사이즈(다시 말해 '뚱뚱한', 또는 비만인)인 청소년이 케이팝 스타가 되는 꿈을 꿀 수 있을까? 글쎄, 자신감이 엄청나지 않고서야 불가능하지 않을까(자신감 얘기는 조금 이따 다시 하겠다)? '케이팝계에서 플러스 사이즈 아이돌을 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다 보면, 이 말이 떠오른다.

아니, 아니, 우리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음, 왜 아니냐고? 그거야 이 쇼는 판타지(fantasy; 환상)이니까(No. No, I don’t think we should. Well, why not? Because the show is a fantasy.).

2018년에 란제리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Victoria's Secret)의 당시 최고 마케팅 경영자(Chief Marketing Officer) 에드 라젝(Ed Razek)이 '왜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 쇼에는 플러스사이즈나 트랜스젠더 여성을 캐스팅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한 말이다(출처). 빼빼 마른 '사이즈 0'의 모델들 말고 좀 더 현실 여성에 가까운 몸매를 가진 여성들을 보고 싶다, 다시 말해 현실을 반영해 달라는 요구에 '빅토리아 시크릿 쇼는 환상을 보여 주기 때문에 안 된다'라는 뻔뻔한 말을 하다니. 마른 여성들, 마른 몸매만이 '환상', 즉 바람직한 기준, 이상(理想)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무엇이 바람직한지 제멋대로 재단하려는 태도가 아주 재수 없다. 빅토리아 시크릿이 이렇게 '덜' 포용적이고, 다양성을 추구하지 않는 태도로, 다시 말해 '마른 여자들만 우리 옷을 입을 수 있다!'라는 식으로 장사를 해 왔으니 다른 란제리 브랜드에 비해 뒤처져 수익이며 대중적 인식이 폭망한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최근 들어서야 조금 태도를 바꿔 '다양한' 몸을 포용하려는 노력을 보이고는 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런 쪽에서 이미 앞서 나간 브랜드가 한둘이 아니라는 말씀. 이 얘기는 이쯤 해 두자.

어릴 적에 미국으로 이민 간 한국계 미국인 작가 라일라 리는 청소년 소설 <난 그저 미치도록 내가 좋을 뿐>에서 케이팝 스타가 되는 것이 꿈인 플러스 사이즈 소녀의 이야기를 그렸다. 신하늘, 영어 이름은 스카이 신. 스카이는 어릴 적부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지만 '뚱뚱하기' 때문에 스카이의 엄마는 스카이가 가수가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스카이의 아빠와 좋은 친구들이 스카이의 편을 들어 주고 언제나 지지해 준다. 스카이는 <너는 나의 샤이닝 스타>라는 경연 프로그램에 도전해 결국 우승을 거머쥐기까지 엄마와의 갈등도 있고 온라인 악플 문제도 겪지만 중간중간에 (LA 한인 타운에서 이미 연예인이나 다름없는) 헨리 조와의 로맨스도 즐긴다.

스카이가 '퀸 스카이(Queen Skye)'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인기를 모는 것은, 물론 노래와 춤 실력이 탄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당당하게 드러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뚱뚱한 몸을 가진 많은 소녀와 여자들이 스카이의 편이 된다. 참 가슴 따뜻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는 이런 의문이 든다. '왜 뚱뚱한 사람들, 특히 여자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말을 듣는 걸까?' 물론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게 싫어하고 혐오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학력이 좋지 않든, 가난하든, 외모가 좋든 안 좋든, 자기 사랑은 중요하고 또 모든 이들이 하면 좋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완벽한' 몸매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긴장을 놓치면 살이 찔까 두려워 계속 꾸준히 '관리'를 하지 않나. 그런 사람들도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어려운데 (왜냐하면 삐끗해서 몸매가 망가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늘 존재하니까) 굳이 뚱뚱한 사람들, 이미 벌써 뚱뚱하다는 이유만으로 가족, 친지, 친구, 주위 사람들,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과 구박, 비난을 듣는 이들에게 '네 몸을 사랑해, 자신감을 가져'라고 말하는 게 정말 그들을 위한 일이냐는 말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넌 왜 당당하지 못해? 널 사랑하지 못하는 거야?'라고 하는 건 그들에게 이중의 고난을 씌우는 게 아닌가 싶다. 중요한 건 뚱뚱하든 날씬하든 스스로를 사랑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남의 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쓸데없는 참견을 하지 않는 예의를 지키는 게 문제지. 와타나베 나오미(일본의 가수, 예능인, 코미디언)나 리조(Lizzo)처럼 당당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첫째, 뚱뚱하다고 그들을 비난하는 일이 용납되는 것은 아니며, 둘째, 그런 비난을 들었을 때 아프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은 뚱뚱한 사람들에게 당당하라고, 다시 말해 '내가 네 몸매를 가지고 놀리고 비웃고 욕해도 너는 쿨하게 넘어가'라고 강요하는 것 좀 그만하고 자기 입이나 좀 관리했으면 좋겠다.

소설 자체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페이스가 엄청 빠르다. <너는 나의 샤이닝 스타>의 한 단계 한 단계가 훅훅 진행된다. 심지어 마지막 최종 우승자를 가리는 장면까지 정말 빠르게 진행되어서, "드디어 결과 발표 시간이다. 참가자들 모두 무대 뒤로 모여 댄스와 보컬 파트로 나누어 섰다. 나는 헨리와 이마니와 눈빛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응원했다." 이렇게 말한 후 바로 다음 문단에서 결과가 발표된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열심히 연습했던 기억, 이 도전이 본인과 다른 플러스 사이즈인 여자(애)들에게 가지는 의미 등을 떠올려 보며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같은 회상을 하는 시간 따위 없다. 이렇게까지 긴장감 없이 바로 결과를 공개해도 되는 건가 싶다. 아니, 물론 청소년 소설이고 이런 소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우리 모두 다 아니까 결과는 이미 스카이가 이 경연에 참가하는 장면에서 예측 가능하긴 하지만, 작가님, 이렇게까지 긴장감 없이 진행해도 되는 건가요? 사실 내가 지금 이 부분을 언급하면서 결과를 밝히지 않으려고 하는 게 더 바보같이 느껴진다. 어차피 위에서 결과를 다 스포일러 했는데! 그렇습니다, "헨리의 예상이 맞았다. 내가 다른 참가자들보다 100점이나 앞서 <넌 나의 샤이닝 스타> 보컬 파트에서 우승했다. 그리고 댄스 파트 우승은 예상대로 이마니가 차지했다." 스카이가 압도적인 점수 차로 우승이랍니다! 이거 예상하지 못하신 분?

어떻게 보면 이런 결과가 더 의외일 수 있다. 플러스 사이즈인 여자애가 케이팝 스타가 된다고? 플러스 사이즈는 둘째치고, 그냥 보통 몸매를 가진 아이돌 찾아보기도 쉽지 않은 이 판국에? 그래서 스카이가 우승을 한다는 결말 자체가 일종의 '환상', 꿈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우리가 위에서 '환상' 이야기 한 거 기억하시나요?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이 이야기로 돌아왔네요!). 사실 그런 꿈은 당연히 꿔 볼 수도 있고, 또 실제로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렇게 미디어에서 먼저 그런 '꿈'을 보여 주는 것도 중요하다. 1960년대 미국 TV에서 <스타 트렉(Star Trek)>이 방영될 때 흑인 여성 통신 장교인 '우후라(Uhura)' 캐릭터가 그 당시 흑인 여성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듯이. 소수자가 '될 수 있는' 모습을 미디어에서 보는 것은 그들에게 희망을 준다. 스카이가 우승한 것도 비슷한 의미 아닐까. 하지만 작가 자신도 '우승은 했지만 케이팝 스타가 된다고 단언하는 것은 너무 앞서갔나?' 싶어서 일단 '우승 특권으로 (스카이의 학기가 끝나는) 다음해 6월에 한국에서 트레이닝을 받게 된다'라는 조건을 단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속편을 염두에 둔 영리한 결정일지도? 만약 속편에서 스카이가 진짜 케이팝 '스타'가 될 수 있는지 살펴본다면 <넌 나의 샤이닝 스타> 심사위원 중 한 명인 장보라에 대해서도 좀 더 다루어주면 좋겠다. 장보라는 스카이가 뚱뚱하다는 이유만으로 심사 첫 단계부터 그녀를 못마땅하게 본다. 다른 두 심사위원들이 '합격'을 줄 때 자기 혼자 '불합격'을 주기도 하고. 은퇴했지만 전성기 시절 잘나갔던 걸그룹 멤버였다는 설정을 살려서 왜 장보라가 스카이를 그토록 못마땅하게 여겼는지 조금 확실하게 보여 주면 좋겠다. 예컨대 자기는 걸그룹 시절 식이장애가 있어서 먹고 싶은 걸 제대로 먹은 적이 없는데 스카이 같은 사람을 보면 먹고 싶은 걸 다 먹어서 그런 거라고 꼬아서 보고 미워한 거라든지. 뭔가 이유가 밝혀지고 장보라가 스카이에게 사과해서 둘의 관계가 개선되면 좋겠다. 난 사실 그걸 기대했는데 그런 이야기는 안 나와서 아쉬웠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스카이의 엄마는 본인도 어릴 적에 뚱뚱했었고 그걸로 사람들의 눈총, 차별을 많이 받았기에 자기 딸이 뚱뚱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당연히 스카이는 이런 엄마와 갈등을 겪는데, 후에 스카이가 우승하자 엄마가 다소 누그러진 태도로 축하하는 말을 건넨다. 그렇지만 둘이 완전히 화해하거나, 스카이가 '그래도 엄마는 나를 사랑해!'라는 믿음을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한다. 어떻게 보면 다소 기운 빠지는, 불완전한 '타협' 정도로 느껴지고, 어떻게 보면 현실적인 결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몇십 년을 살아오신 분의 생각을 바꾸는 게 더 어려울 테니, 직접적으로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게 되는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거 아닌가 싶고.

케이팝이라는 소재를 쓴 데다가 플러스 사이즈인 소녀가 주인공이기까지 하니 (이는 다시 말해 당연히 십 대의 풋풋한 연애도 딸려 온다는 뜻이다) 트렌디한 십 대용 영화로 만들기에 제격 아닌가. 그래서 이미 2020년 1월에 HBO 맥스가 이 소설을 영화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출처; 참고로 이 소설의 영어 제목은 <I'll Be the One>이다). 그런데 HBO 맥스는 2019년 6월에 이미 (역시 청소년 소설인) <언프레그넌트(UNpregnant)>를 영화화겠다고 발표했고 실제로 완성된 영화가 2020년 9월에 공개된 점을 고려하면, <난 그저 미치도록 내가 좋을 뿐>은 영화화가 왜 이리 오래 걸리는지 모르겠다. 영화화하겠다는 기사 외에 얼만큼 진행이 되었는지, 언제 공개될 건지 왜 아직도 업데이트가 없는지 궁금하다. 설마 엎어진 건 아니겠지? 얼른 영화로 보고 싶은데!

요약하자면, 부족한 점은 있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재미있고 청소년이 읽기에 좋은 소설이다. 속편도 나오고 이 책이나 영화가 크게 흥하면 좋겠다. 몸매에 상관없이 재능 있는 사람이 그 재능을 빛내는 꿈을 꾸고 실제로 이룰 수 있도록.

 

➕ 사족: 말이 나온 김에 언급하자면, <언프레그넌트> 영화는 내가 평을 쓴 적이 있다. 완전 추천!

2022.05.30 - [영화를 보고 나서] - [영화 감상/영화 추천] Unpregnant(2020, 언프레그넌트) - 엿 먹어라, 미주리 주 입법 기관!

 

[영화 감상/영화 추천] Unpregnant(2020, 언프레그넌트) - 엿 먹어라, 미주리 주 입법 기관!

[영화 감상/영화 추천] Unpregnant(2020, 언프레그넌트) - 엿 먹어라, 미주리 주 입법 기관! 감독: 레이첼 리 골든버그(Rachel Lee Goldenberg) 영화는 미주리 주의 한 고등학교 여자 화장실에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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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박상영,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재미있고 짠하다. 분명 엄청 웃으면서 시작했는데 중반 이후부터는 마음이 찡해져서 '저런...'을 연발하며 읽었다. 분명 시작할 땐 이렇게 빵빵 터졌는데!

세상에 출근보다 더 싫은 게 존재할까? 다들 이런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서른몇 해를 살아본 결과 이보다 더 싫은 건 없었다. 채근하듯 울려대는 알람을 끄면서 하루를 시작하면 욕부터 튀어나온다. 10년 전에 라식수술을 한 뒤로는 아침마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안구건조를 느끼기 때문에, 감은 눈으로 침대 옆 협탁을 더듬어 인공누액부터 찾아 넣는다. 텔레비전 교양 프로그램에 자주 나오는 피부과 전문의의 말에 따르면 한국 남성의 대부분은 지성 피부이며 자신이 지성인 걸 모르고 있을 뿐이라고 하던데, 아침에 내 피부를 보고도 그 말이 나오는지 묻고 싶을 정도로 나는 악건성이다. 각막과 입술을 포함한 온몸이 건조하고 대부분의 건성인들이 그러하듯 종종종 참을 수 없이 간지럽다. 빙하처럼 추운 욕실로 들어가 건조한 몸에 미지근한 물을 끼얹으며 나는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낀다. 살아 있음의 거지 같음을. 새로 산 보디로션의 점도가 높아서 그런지 걸을 때마다 다리에 바지가 달라붙는 것 같은 기분으로, 나는 등 한가운데 정확히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간지러운 어떤 지점을 긁기 위해 노력하며 영하의 거리로 나선다.

이게 첫 꼭지의 세 번째 문단이다. 기가 막힌 명문이다. 그다음 문단도 만만치 않다.

우리 집에서 회사까지는 도어 투 도어 50분 내외의 시간이 소요되며 총 세 번의 환승을 거쳐야 한다. 이는 서울 시내 직장인의 평균에 매우 가깝다. 이미 만원인 채로 정류장에 멈춰 선 버스에 몸을 구겨 넣으며 나는 오늘 하루에 대한 기대를 저버린다. 내 인생에 대한 희망을 저버린 것과 같은 방식으로. 목 뒤에 닿는 모르는 사람의 입김과 어디선가 풍겨 오는 썩은 내. 나는 양치질과 샤워, 빨래를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을 사살할 수 있는 살인면허가 발급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도 쉬이 고개를 들거나 신경질이 가득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볼 엄두를 내지는 못한다. 냄새의 출처를 추적하는 또 다른 누군가와 눈이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그가 아주 높은 확률로 이 공간에서 가장 덩치가 큰 — 즉 도리 없이 뚱뚱한 — 남자인 나를 범인으로 지목할 것만 같아서다. 높은 확률로 적중하는 피해의식. 있잖아요. 당신, 날 왜 그렇게 봐? 저 매일 아침 샤워하고요, 데오도런트에 향수까지 뿌리고 다니거든요. 일주일에 한 번은 세탁기도 돌리고, 수건에서 걸레 냄새 나는 게 죽기보다 싫어서 없는 살림에 건조기까지 장만했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보실 필요 없거든요?

이렇게 다소 신경질적인 유머로 시작해(진짜 출근 시간대의 내 기분 같다) 점차 작가가 본인의 만성질환, 그러니까 만성위염과 역류성식도염, 야간 식이 증후군과 기분장애(양극성장애와 공황발작)를 털어놓는 데까지 가면 '아...' 하는 탄식이 흘러나오게 된다. 코미디언 또는 코미디 배우 중에 우울증인 이들이 많다더니, 남을 웃게 하는 이들은 속에 슬픔과 힘듦을 숨기고 사나 보다. 다니던 직장을 마침내 관두실 때에는 정말 괜찮으실지 내가 다 걱정할 정도였는데, 다행히 그 이후로 일이 잘 풀리신 듯.

어련히 열심히 잘 사시는 분께 짠하다고 연민을 보내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이 에세이를 읽으며 발견한 작가님의 모습, 그러니까 멋진 점들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한다. 작가님은 첫 소설로 등단하기 전에 동료 작가들(이미 등단하신 분들)과 스터디를 짜서 정말 간절하게 글을 쓰셨단다. 와, 대단해. 지나고 나니까 2년 반 후에 등단했다, 하고 쓸 수 있게 되는 거지 그 당시에는 미래를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으니 얼마나 막막했을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계속 글을 쓰셨다는 게 너무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작가님께 '여사친'인 작가분들이 여럿 계신 것 같은데, 글을 읽다 보면 '여자들이 친구로 잘 지낼 수 있는 좋은 남자구나' 하는 느낌이 온다. 예컨대 본인이 뚱뚱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나마 '남성'이기 때문에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보다는 그래도 상황이 낫다는 걸 인정하는 부분이나, 본인이 패스트 패션을 이용하기 때문에 환경 오염에 일조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시인하는 부분. 

그래도 비만한 '남성'인 나는 사정이 좀 나은 편이다. 살찐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멸시와 비하는 상상을 초월한다. 일단 여성인 배우나 가수가 조금이라도 살이 찌면 어김없이 살이 쪘고, (도대체 무슨 범위의 관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관리에 실패했고, 프로 의식이 모자란다는 댓글이 달리기 일쑤다. 따지고 보면 배우는 연기하는 직업이고 가수는 노래하는 게 직업의 본질인데 왜 당연히 날씬한 몸을 직업적 소양에 포함하는 것일까.
내 좁은 방에는 M 사이즈부터 XXL 사이즈까지 엄청나게 많은 티셔츠와 속옷이 발 디딜 틈 없이 자리하고 있다. 폭식과 다이어트를 반복하며 족히 100킬로그램은 찌고 빠진 몸을 감당하기 위해 마구잡이로 사들인 싼 옷들이다. 패스트패션의 풍토 속에 함부로 사서 입고 버려지는 옷들이 얼마나 큰 공해인지 이제는 상식으로 모두가 알고 있다. 나 역시도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지만,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옷 더미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는 것도,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싼 옷을 사는 습관도 멈출 수가 없다. 때때로 나는 그저 먹고 소비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만 같다. 한아가 내 방을 본다면 기함을 하며 호통을 칠 것만 같다.

이 정도의 섬세한 (그리고 인권에도 미치는) 감수성이 있으니 과연 여사친들이 있을 만하구나 싶었다. 패스트패션이 환경 오염의 큰 원인 중 하나라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해도, 이렇게 순순히 자신이 패스트패션을 통해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는 남자들은 별로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남자들에게 패션은 그저 '가오', 또는 멋내기, 자랑의 수단이라는 느낌이 더 강해서일까. 자신이 소비하는 패션을 이렇게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의식이 있기에 역시 작가는 작가구나 싶어 감탄이 나왔다.

재미와 짠함이 단짠단짠의 느낌으로 뒤섞여 있는 이 솔직한 에세이와 작가님을 만나게 되어 너무 기쁘다. 작가님의 다른 책들도 찾아봐야지. 그리고 나에게 이 책을 대출해 준 서울시 전자도서관에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아니, 왜 나 이제서야 전자 도서관의 존재를 떠올렸지? 멍청... 어쨌거나 이제는 더 많은, 더 다양한 책을 접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앞으로 올라올 서평을 기대해 주시라! 이 책도 완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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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남형도, <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남기자의 체헐리즘'은 많은 이들이 이미 잘 알 것이다. 브라질리언 왁싱을 직접 체험해 보고 쓴 기사가 웃기다며 인터넷 커뮤니티에 퍼진 것을 나도 보았으니까. 그 기사들이 모여서 책으로 나왔다. 안타깝게도 그 브라질리언 왁싱 기사는 이 책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왜죠!).

그래도 좋은 기사들이 많다. 내가 보기에 제일 잘 쓴 건 '사람이 버린 강아지, 사람 보고 환히 웃었다'라는 제목의 꼭지인데, 기자가 유기견 보호소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나서 쓴 거다. 나는 애완동물을 비롯해 동물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므로 이 꼭지에 등장하는 강아지들 이야기가 나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고, 그냥 그 글의 구조가 내가 생각하기에 제일 바람직했다.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주는 주제인 데다가 농림축산검역본부 통계를 빌려와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 주고 유기견 보호소 운영자의 말을 인용해 '강아지 공장'에 대한 허가와 처벌을 엄격하게 할 것, 강아지들에게 칩을 심어 주인을 추적할 수 있게 해서 동물 유기를 막을 것, 현행법과 제도를 개선할 것을 주장한다. 완벽한 구조다. 이 외에도 폐지 줍기 체험('폐지 165킬로그램 주워 1만 원 벌었다'), 환경미화원 체험('홍대의 중심에서 토사물을 쓸었다'), 시각장애인 체험('눈 감고 '벚꽃축제'에 갔다'), 소방관 체험(''35킬로그램 방화복' 입고 계단 오르니 온몸이 울었다') 등은 정말 훌륭하다. 이런 건 교과서에 실어도 좋을 듯하다.

물론 '이 기사는 도대체 왜?' 싶은 것도 있긴 하다. '62년생 김영수'라는 꼭지는 도대체 무엇을 보여 주고자 한 것인지 모르겠다. 일단 제목부터가 많은 여성들에게 의미가 깊은 작품, <82년생 김지영>을 오마쥬한 것인데, 그만큼의 사회 비평이 들어 있는 것 같지 않다. 62년생, 그러니까 현재 50대, 60대인 남성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알겠는데 (글 앞머리에 '5060 아버지 세대 네 분을 인터뷰해 그를 바탕으로 만든 소설'이라고 기자도 밝히고 있다) 딱히 새로운 점은 없다. 회사에 충성하며 일했는데 IMF가 닥쳐 명예 퇴직을 당하고, 그 후에도 자녀들을 부양하기 위해 어떻게든 열심히 일을 했다, 하는 이야기에 우리가 모르는 점이 뭐가 있지? 우리 아버지들이 힘들게 살아오신 거 알겠는데, 이걸 이렇게 써 봤자 '라떼는 말이야' 그 이상, 그 이하의 무엇도 안 되지 않나? 감상주의적으로 '우리 아버지들이 이렇게 열심히 일했어요!' 말하는 것에 어떤 효용이 있는지 모르겠다(그럼 뭐 그 시대 여성들은 열심히 일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느라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자녀들과 부드럽고 원만한 의사소통이 안 되고, 스스로 부성을 키울 수 없었던 것은 후회되지 않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이렇게 평생 열심히 일했는데 국민 연금이 자금 운용을 잘 못해서 그것만으로 여생을 지내기 어려워 또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같은 흐름이었다면 이 정부가 노인들을 잘 돌보지 못한다는 데 초점을 맞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건 적어도 꼰대의 감상주의적인 자기 연민처럼 들리지는 않을 거고, 노인 일자리 확충이라든지 노인에게 주어지는 혜택 문제를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근데 '62년생 김영수'는 그 기회를 놓쳤다. 이 꼭지에 비하면 내가 별로라고 생각했던 다른 꼭지들(예컨대 )은 차라리 선녀로 보인다.

이 글을 마무리 짓기 전 기자님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기자님, 이 책 맨 첫 꼭지가 '브래지어, 남자가 입어봤다'인데, 브라가 얼마나 답답한지 직접 체험해 보는 정신은 정말 멋집니다만, 사람들이 기자님을 쳐다본 건 '남자가 브라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브라를 입었다고 쳐다보진 않죠. 왜냐하면 여자에게 브라는 그냥 기본, 디폴트 장착 아이템이니까요. 하지만 여전히 온갖 이유를 갖다 붙이며 여자들을 쳐다본답니다. 가슴이 크다, 노출이 많다, 브라를 안 입었다, 심지어는 그냥 가슴이 거기 있으니까 등등. 브라가 비싸게 느껴지는 것은 맞지만, 브라를 입음으로써 타인의 불쾌한 시선을 100% 피할 수 있다면 차라리 기꺼이 입겠습니다. 문제는 브라가 아니라는 거죠. 또한 와이어가 달린 브라가 너무 답답하기 때문에 요즘엔 그런 브라보다 편한 브라렛이 트렌드가 아닌 그냥 하나의 옵션으로 자리잡았어요. 국내에도 브라렛을 만드는 브랜드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건 기자님이 여성이 아니라서 잘 모르실 수 있습니다. 기사 말미에 나중에 딸이 생기면 브라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고 말해 주겠다고 하셨는데 따님이 브라가 너무 불편하다고 한다면 브라렛을 권해 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물론 개인적으로는 다음 세대를 위해 성차별이 적은, 여성 혐오가 덜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선순위라고 생각합니다만.

책 표지에는 당당히 '네이버 기자 페이지 구독자 수 독보적 1위'라고 쓰여 있는데, 그건 많은 이들이 그의 기사를 읽는다는 뜻이다. 또 거기에서 한 발짝 나아가면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기레기' 말고 기자다운 기자를 보고 싶어 했는지 보여 주는 증거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저 누가 불러주거나 써주는 대로 받아적기 바쁜 기레기들 말고, 정치권 또는 가진 자들의 시각으로 국민들을 우롱하는 기레기들 말고, 진짜로 자기 발로 나서서 취재하고 자기가 쓴 글에 책임을 지는 그런 기자 말이다. 진정한 의미의 기자, 국민들이 존경심을 담아 기자라고 부를 수 있는 기자들이 많아지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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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Taylor Jenkins Reid(테일러 젠킨스 리드), <The Seven Husbands of Evelyn Hugo(에블린 휴고의 일곱 명의 남편들)>

 

 

⚠️ 이 서평은 Taylor Jenkins Reid(테일러 젠킨스 리드)의 <The Seven Husbands of Evelyn Hugo(에블린 휴고의 일곱 명의 남편들)>의 강력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제목부터 압도되는 느낌이다. <에블린 휴고의 일곱 명의 남편들>이라고? '에블린 휴고는 도대체 어떤 여자길래 결혼을 일곱 번이나 해서 남편을 일곱 명이나 둔 거야?' 싶다. 에블린 휴고는 1950년대 할리우드, 소위 '할리우드의 황금기'에 육감적인 몸매와 수많은 염문으로 할리우드를 달구었던 여배우이다. 아, 물론 이건 소설이니까 에블린은 허구의 인물이다. 그녀의 삶은 여덟 번이나 결혼을 했던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나 자신의 삶 이야기를 저널리스트를 통해 전기로 탈바꿈시킨 에바 가드너(Ava Gardner), 또는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위해 자신이 스페인 출신이라는 점을 감추었던 리타 헤이워스(Rita Hayworth)에 느슨하게 기반하고 있다고 한다. 확실히 결혼을 일곱 번 한 것과 전기 작가를 통해 자기 삶의 내밀한 면을 공개한다는 점, 그리고 '완벽한' 미국인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쿠바 출신이라는 사실을 숨겼다는 점이 닮긴 닮았다.

소설과 주인공인 에블린 휴고에 대해 조금 더 깊게 보자면, 진짜 저자가 어떻게 이렇게 촘촘하게 이야기를 짰는지 놀라울 정도다. 전체적인 구조는 액자 구조이다. 이제 은퇴한 지 한참 됐지만 여전히 사생활에 대해 잘 알려진 게 없는, 79세의 대배우 에블린 휴고가 한 잡지 기자인 모니크 그랜트(Monique Grant)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모니크는 처음에는 자신이 에블린이 소장한 드레스를 내놓은 경매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에블린을 만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모니크와 에블린은 모종의 관계가 있고 (이건 소설 끝에 밝혀진다) 그래서 에블린이 자기 전기를 쓰게 만들 전기 작가로 일부러 모니크를 선택한 것이다. 전기 제목은 이름하여 <에블린 휴고의 일곱 명의 남편들>. 에블린은 자기가 소녀였던 시절부터 어떻게 몸뚱아리 하나만 가지고 할리우드에서 육감적 몸매의 여배우로 이름을 날리며, 일곱 번이나 결혼했는지 그 역사를 다 밝힌다. 요약하면 이렇게 될 테지만 그 '역사' 자체가 진짜 흥미진진하다. 반전과 예상 못 한 전개가 책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정말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다 만들어냈을까 감탄하게 되고, 에블린의 시점에서 과거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잠시 모니크의 시점이자 현재로 돌아오게 되면 진짜 맛있는 사탕을 먹다가 빼앗긴 것처럼 그렇게 감질날 수가 없다. 얼른 이야기를 이어서 더 듣고 싶다. 그 정도로 에블린의 삶 이야기가 정말 기가 막히게 드라마틱하다.

아니, 생각을 해 보시라. 1950년대 할리우드의 대스타가, 성공을 위해 자신의 몸을 이용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꺼리지 않는 이 당당한 여성이 바이섹슈얼일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녀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은 첫 남편 돈 애들러와 이혼하고 난 후인데, 그 전까지는 그저 친구였던 실리아 세인트 제임스에게 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실리아도 '그런' 여자, 그러니까 레즈비언이었던 것이다! 비록 실리아는 진성 레즈비언이고 에블린은 바이섹슈얼이라는 점이 두 사람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되긴 하지만, 오히려 그렇다는 설정이기에 더 이 소설이 의미있다고 본다. 레즈비언/게이와 바이섹슈얼 사이의 갈등(전자가 후자에게 '박쥐'라고 비난한다든가 하는)은 실제로도 존재하는 것이고, 그냥 레즈비언이나 게이만 보여 주는 게 아니라 바이섹슈얼까지 등장한다는 게 진짜 LGBTQ+ 스펙트럼을 더 넓게 묘사할 수 있으니까. 게이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에블린의 절친이자 나중에 에블린과 (위장) 결혼을 해서 넷째 남편이 되는 해리 캐머론은 게이다. 에블린은 그와 (시험관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통적인 방식으로, 무슨 말인지 아시죠?) 딸 코너를 낳는데, 이 딸 이야기가 또 진짜 눈물샘을 자극한다. 나는 에블린이 실리아랑 정말 어렵게 서로의 마음을 헤어져서 실제로는 결혼한 것과 다름없이 같이 사는데도 그 사실을 공개하지 못하고 숨겨야 하는 부분이라거나, 실리아가 자신과 얽혀 있다는 게 대중에게 알려져서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해 에블린이 벌이는 많은 일 같은 에블린과 실리아 사이의 애틋한 사랑보다는 코너 얘기에서 더 감동을 많이 받았다. 뭔가 감동 포인트가 남과는 다른 것 같은데 어쨌거나 그래도 에블린과 실리아 사이의, 당시 현실 때문에 차마 당당하게 드러낼 수 없었던 사랑도 정말 절절하긴 하다. 아니, 하나뿐인 소중한 딸이 어릴 적에 아빠(=해리)의 죽음으로 방황하다가 마음 잡아 기행을 그만두고 공부도 다시 착실하게 하며 예쁘게 잘 컸는데, 유방암에 걸려 39세에 자기 엄마보다 일찍 죽는다니? 게다가 유방암은 유전이라 에블린은 자신에게도 유방암이 발생할 거라는 걸 알게 되는데, 에블린에게 성공을 가져다준 그 가슴이 에블린의 죽음도 가져오게 된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에블린의 남편 이야기는 요약만 해도 엄청 길어질 것 같아서 굳이 따로 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각각의 남편은 별명이 있고, 그와 함께한 시기가 소설상 하나의 '장(章)'으로 구분된다. 예컨대 에블린이 할리우드로 가서 배우가 되어야겠다 결심하고 계획적으로 유혹해 결혼한 첫 남편인 어니 디아즈는 '불쌍한 어니 디아즈(Poor Ernie Diaz)'라는 장에서 소개되고, 멋져 보였고 정말 최고의 스타였지만 가정 폭력을 휘두른 두 번째 남편 돈 애들러는 '망할 돈 애들러(Goddamn Don Adler)'라는 장에서 자세히 다루어진다. 일곱 명의 남편 모두 이런 별명 또는 각 장의 부제목을 통해 일종의 캐릭터성을 부여한다고 해야 할까. 책 제목이 <에블린 휴고의 일곱 명의 남편들>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남편들' 각각보다는 "뭐야, 어떤 여자이길래 남편이 일곱이나 돼?"라는 반응이 제일 먼저 나올 거고, 그러면 그 남편들을 거느린 에블린 휴고에게 더 관심이 가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책 말미에 모니크는 전기의 제목이 '남편들'이 들어가는 점, 그래서 자신의 커리어나 그녀 자신보다 남편들을 더 내세우는 점이 마음에 안 들지 않느냐고 묻는데, 에블린은 이렇게 답한다.

"아니. 그들은 그냥 내 남편들일 뿐이니까. 나야말로 에블린 휴고지. 그리고 어쨌든간에, 사람들이 진실을 알게 되면, 내 아내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질걸("No," she told me. "Because they are just husbands. I am Evelyn Hugo. And anyway, I think once people know the truth, they will be much more interested in my wife.")."

아하! 앞에서 말한 '남편을 일곱이나 거느린 여자(=아내)'라는 사실 자체가 이미 흥미로운데 알고 보니 그 여자에게 또 아내가 있다? 이거야말로 진짜 상상도 못한 정체 아닌가! 이렇게 해서 제목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더 정확해지려면 책 제목은 <에블린 휴고의 일곱 명의 남편들과 한 명의 아내>가 되어야겠지만 보통 결혼은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하는 것으로 여겨지니까 이 책 제목을 읽는 독자는 당연히 '아내'는 에블린 휴고 한 명일 거라고 추측하게 된다. 그래서 결혼이라고 할 때 동성들의 결혼(동성 결혼 또는 시민 결합)이 인정되지 않듯, 실제로 에블린이 평생 열렬히 사랑했던 실리아, 즉 에블린의 진짜 아내의 존재는 지워진다. 와, 이런 점까지 다 고려해서 이야기를 짜고 책 제목을 지었을 작가 생각을 하니 진짜 감탄이 다 나온다. 덕분에 이게 꽤 긴 책인데도 내내 '미쳤다 미쳤어' 하면서 읽었다.

아마 인류가 석기를 만들어 쓰던 시대부터 LGBTQ+ 같은 성소수자들은 언제나 존재했을 것이다. 그들이 당당하게 존재를 인정받게 된 것은 그에 비하면 아주 극히 최근, 짧디짧은 시간이고. 그래서 있는 그대로 인정받을 수 없었던 사람들의 모습을, 사회적으로 그들을 인정하기에는 너무 편협했던 시절, 1950년대를 바탕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99% 다 허구이지만, 실제로 일어났던 스톤월 항쟁(Stonewall Riots, 1969년 6월 28일에 일어난, 이후 동성애자 커뮤니티로 하여금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는 항쟁을 일으키는 데 발단이 된 사건)이나 레이건(Reagan) 당시 대통령 이야기(여담이지만, 레이건 대통령은 토니 쿠시너의 희곡 <엔젤스 인 아메리카>에도 언급되는데 레이건이 어떻게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짓밟았는지 하는 내용이다. 성소수자라면 레이건을 좋아할 수 없으리라), 에이즈로 사망한 록 허드슨(Rock Hudson) 등은 예외적으로 언급된다. 에블린도 스톤월 항쟁 이후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싶어 하지만 해리가 이를 저지하고, 결국 아직은 때가 이르다는 결론을 내리고 대신 동성애자들을 위한 단체에 큰 액수를 후원한다. 언젠가는 자신도 그들처럼 당당하게 자신이 누구인지 밝힐 수 있는 시대가 오기를 바라면서.

이 소설은 영어권 북튜브나 북톡(각각 책을 다루는 유튜브와 틱톡)에서도 꽤 인기였는데, 그래서인지 최근(2022년 3월)에 넷플릭스가 이 소설의 판권을 사서 영화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공개했다. 사실 나는 이 소식을 듣기도 전에 책을 읽으면서 '이거 영상화하면 딱이겠는데? 영화는 2시간 남짓의 러닝타임으로는 조금 부족할 거 같고, 드라마로 만들면 두어 시즌은 뚝딱 나오겠군' 생각했다. 일단 원작 소설이 잘 팔렸으니 영화가 개봉할 때 팬들이 궁금해서라도 한 번쯤 볼 거고, 원작 소설의 이야기가 아주 촘촘하게 잘 쓰여 있어서 각색하기도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다만 분량 문제는 팬들도 우려하는 점이긴 하다. 이야기가 워낙 많으니 2시간 분량의 영화에 다 욱여넣을 수 있으려나?). 원작 소설을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화려운 여배우의 비밀이 밝혀지는 이야기'라는 점과 'LGBTQ+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점을 내세우면 쉽게 흥미를 가질 듯하고. 영화가 공개될 즈음엔 내가 쓴 이 글도 다시 발굴되어 읽히려나? 그러면 좋겠다. 일단 이 책이 한국에서 정발되는 일부터 먼저 바라야 할 듯하지만. 그래도 아직 번역도 안 된 이 두꺼운 소설을 읽는 경험이 어땠는지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엄청 뿌듯하고 재밌었다고 대답해 주겠다. 400쪽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고! 완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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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다키자와 슈이치, <아니, 이 쓰레기는 뭐지?>

 

 

좋은 책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지난 며칠간 내가 떠올려 본 질문이다. 이 질문을 시작한 것은, 일본의 코미디언이자 청소부 일을 하는 다키자와 슈이치가 쓴 <아니, 이 쓰레기는 뭐지?>라는 에세이를 읽으면서였다. 저자는 코미디언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수입이 충분하지 않아 생계를 위해 쓰레기 청소부 일을 시작한다. 그것이 6년 전. 베테랑 청소부가 된 그는 이제 그간의 경험을 소개해 주는데, 이 책은 단순히 '이러이러한 놀라운 에피소드가 있었답니다' 수준에서 끝나지 않고 타인에게 어떤 생각할 거리나 배울 것을 주며, 또한 사회적인 면에 대한 나름대로의 비평을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나름대로의 '좋은 책'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이렇다. 청소부인 저자는 여러 군데를 다녀보았기 때문에 부자 동네와 그렇지 않은 동네의 차이를 통찰할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쓴다.

이런 예를 통찰하는 가운데 내 나름대로 몇 가지 생각이 들었다. 맨 처음으로 든 생각은 사소한 의존이 커다란 소비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부자 지역에서는 생수통으로 쓰이는 대형 특수 페트병이 자주 나왔다는 사실 말이다. 부자들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 득이 된다는 소비 방식을 알고 있다. 확실히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500밀리미터 페트병을 매번 사는 것보다 대형 용량으로 물을 사 마시는 편이 단연 이득이다. 이제 좀 짐작이 가는지?

물을 사러 편의점에 들렀을 때 500밀리리터보다 2리터들이가 가격 면에서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을 것이다. 500밀리리터 콜라를 열다섯 병이나 쟁여놓고 마시려면 어느 정도 비용이 든다. 계산해보면 웬만한 금액이 들어가는 소비에 해당한다.

담배, 술, 비타민 음료도 마찬가지다. 소소한 사치를 부리며 자기 자신에게 상을 주는 마음으로 그런 것을 사는 것을 그다지 대단한 쇼핑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1년 치로 환산하면 상당한 금액이다. 부자 동네에서 이런 쓰레기가 적게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다. 건강을 지향한다는 명분 아래 자신에게 투자할 여유가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대형 쓰레기에 건강 용품이 나온다는 것은 당연히 건강에 신경을 쓴다는 경향을 말해준다. 또한 부촌이 아닌 동네에 비해 담배꽁초 쓰레기가 적은 것, 부모의 원수를 때려잡듯 술을 마시지 않는 것도 비슷한 경향의 반영이다. 승마 운동 기구가 나오는 것도 운동을 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고, 미용 관련 쓰레기도 자기 투자라는 측면에 속할 것이다.

술, 담배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건강을 생각해서인지 부유한 지역에서는 감자 칩 봉지나 초콜릿 상자도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때때로 부촌이 아닌 지역에서는 커다란 쓰레기봉투가 찢어질 때 감자 칩 봉지가 튀어나올 만큼 감자 칩을 많이 먹는 사람이 있다.

나는 이 부분을 읽고 린다 티라도의 <핸드 투 마우스>가 떠올랐다. 실제로 가난을 경험한 저자가 쓴 이 에세이에는 이런 부분이 나온다.

발이 아프고 등은 쑤시는데 잠도 자고 싶고 샤워도 하고 싶다면, 오븐에 들러붙은 기름 찌꺼기를 닦는 것은 내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의 목록에 오르지도 못한다. (...) 나를 힘들게 하는 또 하나는 균형 잡힌 식사다. (...) 슬프게도 건강한 음식은 나를 위로해주지 못했다. 그 점에서는 브라우니 한판이 더 나았다. (...) 가난한 사람들이 합당한 이유 없이 자기파괴적으로 보이는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건, 건설적인 방법은 모두 돈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헬스클럽에 가입할 수 없다. 내 속내를 공짜로 들어줄 정신과 의사는 없다. 

이 인용문은 테이 존데이(Tay Zonday)라는 유튜버가 트위터에 쓴 이 트윗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지금 당장 치약 칫솔을 살 돈이 없는가? 그럼 내년에는 임플란트 비용을 청구받을 것이다. 지금 당장 새 매트리스를 살 돈이 없는가? 그럼 내년에는 척추 수술을 받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 그 혹을 검사 받을 비용이 없는가? 그럼 내년에는 3기 암 치료비를 내게 될 것이다. 가난에는 이자가 붙는다."

가난하면 기본적인 건강에 투자할 돈조차 없다는 사실을 저자는 쓰레기에서 통찰했다는 게 놀랍다. 

이뿐만 아니라 저자는 쓰레기장에서 시민의식까지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사할 때 부동산에서 부동산에서 몇몇 매물을 소개받고 실제로 이사 갈 집을 방문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럴 때 그 동네 쓰레기장을 둘러보기를 권한다. 깨끗하게 쓰레기장을 사용하는 곳이라면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제대로 규칙을 지키며 생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청소부는 보통 쓰레기를 수거하는 날 다른 종류의 쓰레기가 나와 있으면 쓰레기차에 싣지 않고 그냥 놓아둔다. 쓰레기가 남아 있거나 깡통과 병만 놓여 있다는 것은 수거할 수 없는 쓰레기를 내놓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 규칙을 지키지 않고 쓰레기를 내놓은 것이다. 그것은 단지 쓰레기 배출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얘기에 그치지 않는다. 하나의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다른 규칙도 어길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

그래서 쓰레기장은 그곳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하나의 척도가 된다. 관리인이 관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쓰레기장을 깨끗하게 사용한다는 것은 서로 규칙을 잘 지키게끔 하는 '눈'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사 갈 곳 근처를 걸어 다녀보았는데 주변의 쓰레기장에 깨끗한 상태라면, 아마도 각 쓰레기장마다 집단적으로 쓰레기 당번제를 정해놓고 담당자가 책임지고 정리하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쓰레기봉투에 타는 쓰레기와 타지 않는 쓰레기를 마구 섞어 넣어버리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담당자의 얼굴을 떠올리고 '저 집 사람은 쓰레기 분리수거도 제대로 못하느냐'는 비난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쓰레기를 잘 분리하여 배출할 것이다.

쓰레기 당번을 둘러싸고 대화가 이루어지면 자연스레 어느 집에 누가 사는지도 알게 되고, 이웃 사이에 인사를 주고받는다. 이런 동네는 이웃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는 추천하기 어렵다.

그런데 오늘날 어린이를 표적 삼아 벌어지는 범행의 원인은 대부분 지역 커뮤니티의 관계성 상실이라는 인식이 벌써 오래 전부터 자리 잡고 있다. 이런 곳이라면 이웃 사람들이 서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저 아이는 뉘 집 아이라든지, 오늘도 씩씩하게 잘 뛰어놀고 있다든지, 굳이 말을 걸지 않아도 지켜보는 '눈'이 있기 마련이다. 가족 단위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동네를 추천한다.

(...) 앞에서 말한 내용을 트위터에 올렸을 때 이런 반응이 나왔다.

"나는 부동산 중개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이사 오기 전에 가까운 편의점의 쓰레기통을 보라고 권합니다. 쓰레기통이 가정집 쓰레기로 가득 채워져 있는 곳은 그리 예절을 잘 지키는 지역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렇고맗고, 맞는 얘기야. 역시 그랬구나. 선배님이셔!' 하고 격렬하게 동의했다. '부동산 업계에서도 그랬구나!' 하고 괜히 감동하는 동시에 내 생각이 맞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자기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은 쓰레기를 내놓는 일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한국와 일본의 쓰레기 처리법이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도 이 방법을 통해 그 동네 주민의 시민의식을 살펴보는 것은 전 세계 어디에서든 가능할 듯하다. 이사하실 분들에게 진짜 좋은 꿀팁인 듯. 이사 갈 곳이 아파트 단지라면 경비원님께 아파트 입주자들이 쓰레기를 잘 분리해 버리는지, 재활용 날마다 애로 사항은 없으신지 슬쩍 여쭤보는 것도 한 방법이겠다. 그건 그렇고, 정말 통찰을 하려는 의지와 통찰할 수 있는 혜안만 있다면 그 대상이 무엇인지는 정말 문제가 안 되는 것 같다. 쓰레기를 통해서도 통찰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또한 저자는 쓰레기를 통해 통찰뿐 아니라 일본 사회에 대한 비평까지 한다. 쓰레기가 너무 많다고 말이다. 단순히 쓰레기 청소부의 일은 이러이러한 것입니다, 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직업을 가진 사회인으로서 사회에 바라는 바를, 어떻게 보면 가볍게 읽고 넘길 수도 있는 에세이에 썼다는 점이 감탄스러웠다. 그가 코미디언이라는 일뿐 아니라 청소부라는 일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다.

쓰레기의 양이 줄면 우리 일이 편해지니까 그렇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정상이기 때문입니다. 무시무시하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조사 결과를 보면 인정할지 모르겠습니다. 한 사람이 1년 동안 내놓는 쓰레기의 양은 일본이 단연코 세계 제일입니다.
미국은 그렇게 해도 될지 모르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은 좁은 나라입니. 유감스럽게도 고양이의 이마지요. 농담이 아닙니다. 일본은 새로운 매립지를 마련하는 일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정말로 고양이 이마만 합니다.

개중에는 매립지를 늘리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느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도쿄에 관해서만 말하면 더 이상 매립지를 늘리면 도쿄만이 무역항으로 기능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도쿄만뿐 아니라 제가 조사해본 바로는 다른 지방도 매립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재활용에 힘쓰자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알고 나서 쓰레기를 회수하고 있으면 소름이 돋을 만큼 두렵습니다. 매일매일 미친 듯이 나오는 쓰레기를 본다면 무서워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겁니다. (...)

청소부 선배는 확실한 숫자를 들려주었습니다. 도쿄의 매립지는 앞으로 50년밖에 쓸 수 없다고 합니다. 매립지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들었다고 운전기사가 말해주었습니다.

매립지는 20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쓰여 있는 어느 지방의 홈페이지를 봤습니다. 도쿄의 매립지보다도 수명이 짧습니다.

또한 그는 기가 막히게 스웨덴의 예까지 들어서 '일본 사회가 이렇게 변화해야 한다'라는 것을 보여 주는데, 정말 이런 전개는 가벼운 에세이(이 책의맨 첫 번째 장은 한 컷 그림과 그에 딸린 짧은 글, 그러니까 일종의 그림 일기 같은 포맷이다)에는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기에 좋은 쪽으로 놀라웠다.

쓰레기의 메이저리그 선수 격인 스웨덴에서는 전국적으로 쓰레기 문제와 씨름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쓰레기 부족 상태에 빠졌다고 합니다. 뭐라고? 쓰레기 부족 상태라고? 일본인으로서는 이해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스웨덴에서는 쓰레기를 에너지로 변환시키기 때문에 원료가 되는 쓰레기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왠지 오금이 저릴 것 같습니다. 더구나 이웃 나라의 쓰레기를 수입한다고 하니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 듯합니다. 

그리고 원래 쓰레기가 적습니다. 스웨덴에는 상품을 만드는 기업이 쓰레기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법률이 있기 때문입니다. 재활용, 폐기에 관한 비용을 기업이 전부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쓸데없는 쓰레기가 나오지 않도록 기업 자체가 노력하고, 판매 단계에 들어가면 쓰레기가 될 만한 것을 제거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나오는 쓰레기조차 극단적으로 재활용해서 쓰레기가 나오지 않도록 해온 결과가 바로 놀라 쓰러질 만한 숫자를 내놓은 것입니다. 매립지에 파묻은 쓰레기의 양은 배출 쓰레기의 1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는 경악할 만한 수치입니다.

스웨덴의 뒤를 따라가려고 덴마크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 쓰고 버린 접시나 숟가락에 과세를 30퍼센트 부과하기 때문에 소비가 별로 없습니다. 불필요한 쓰레기를 내놓지 않으려고 국가가 솔선수범하여 노력하는 모습에 일본인으로서 그저 감탄스럽기만 합니다.

나도 혹시나 싶어서 '쓰레기 스웨덴'이란 키워드로 검색해 보니 정말로 스웨덴의 쓰레기 매립률이 2013년에 0.7%까지 낮추었다는 기사가 보였다(출처는 여기). 스웨덴에서 환경학과 지속가능성을 공부하신 분이 쓴, 스웨덴의 쓰레기 재활용법에 대한 글도 읽었다(여기). 여하튼, 스웨덴의 예를 들며 일본 사회가 지혜롭게 쓰레기 처리 문제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이 참 멋졌다. 단순히 개인의 경험을 묘사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배움이나 어떤 바람직한 감정을 제공하고, 또한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해서까지 한마디 덧붙이는 것, 그것이 좋은 책의 역할이자 기능 아닐까?

물론 이 책도 완벽하지는 않다. 쓰레기를 보고서 그 쓰레기를 버린 사람을 프로파일링하는데 남성보다 여성에 대해 더 가혹하다는 느낌이다. 말로는 가정적이라고 하지만 쓰레기를 제대로 분류해 버리지 않던 한 화려한 여성 이야기를 하면서 "멋쟁이 여성은 청소를 잘 못한다고 보면 대체로 틀리지 않다"라는 말을 떠올린다. 곧바로 "뭐, 그렇다고 한들 상관은 없다. 모든 사람이 다 거기에 들어맞지는 않을 테니까."라고 덧붙이는데, 그럴 거면 애초에 그런 말은 왜 꺼낸 건지? 그 바로 앞 꼭지에서는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생활에 충실한지는 알 수 없지만, 쓰레기 배출에는 건성이고 허랑한 여자라고 생각하면서 타지 않는 쓰레기는 딱 분리해서 지정 박스에 두고 왔다."라고 썼으면서 말이다. 어떤 아줌마가 수거할 수 없는 쓰레기를 내놓아 '현재는 타는 쓰레기를 수거하는 중이라 깡통은 가져갈 수 없다'라고 거절했더니 그때부터 완전히 그렘린처럼 돌변해 1년 반이나 매번 쓰레기차를 따라다니면서 청소부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는 오싹한 에피소드도 그렇고. 그보다는 왜 가정집 또는 주거 지역의 쓰레기를 수거할 때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남성보다 여성의 모습을 더 자주 볼 수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게 좋지 않았을까? (그거야 쓰레기 버리기 같은 집안일은 여성의 일이라는 의식이 아직도 팽배하니까 그렇지!)

세상에 완벽한 책이라는 게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아닐 거다. 하지만 그래도 이 책은 여전히 좋다. 아쉬운 점 몇 가지만 보완했으면 흠잡을 데 없었겠지만, 그래도 좋은 책이란 어떤 것인지 하는 물음에 나름대로의 답을 줄 수 있을 정도는 되니까. 리디셀렉트에 올라와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라. 그건 그렇고, 이제 나도 쓰레기 줄이기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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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제나 매카시, <우아하게 나이들 줄 알았더니>

 

 

중년 여성의 솔직한 에세이. 이렇게 간단히 책 소개를 하면서 벌써부터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데 실패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책 겉표지에도 쓰여 있듯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는' 중년 여성의 이야기에 '와, 재미있겠다!' 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렇다면 다시 시작해 보자. '진짜 재미있고 공감되는 에세이' 정도면 어떨까. 그러면 좀 더 관심을 끌 수 있을까?

아무래도 내 말솜씨로는 안 될 거 같으니 그냥 저자의 말 중 내가 생각하기에 제일 웃긴 부분을 몇 군데 보여 드리겠다. 여러분들의 관심을 끄는 데는 그게 더 나을 것 같다.

살면서 그만큼 공포에 얼어붙었던 적이 없다. 점잖은 눈썹이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서 3센티미터나 벗어난 지점에 불한당 같은 검은 눈썹이 마구 자라 있었고 코의 모공은 푹 파인 더러운 동굴처럼 보였다. 지우개 크기만 한 바싹 마른 각질이 얼굴 전체를 뒤덮고 있었고 코 주변에는 지하철 노선도처럼 가느다란 실핏줄이 터져 있었다. 게다가 열다섯 살짜리 남자애나 부러워할 빌어먹을 콧수염도 있었다. 어떻게 전에는 이걸 몰랐지? 나는 함께 쇼핑을 하던 막내딸을 붙들고 아이의 완벽하고 촉촉한 얼굴을 거울 앞에 디밀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열두 배 확대한 아이의 얼굴은 원래보다 훨씬 더 촉촉하고 완벽해 보였다. 그때 나는 이 악마의 거울에 흠을 찾아내서 부각하는 재주가 있기를 바랐던 것 같은데, 결국 이 거울은 그저 자기를 들여다보는 사람의 원래 모습을 더 자세히 보여줄 뿐임을 깨달았다. 나의 경우 그 원래 모습이란 관리가 시급히 필요한 중년 여성이었다. - 1. 우아하게 나이 드는 법과 그 밖에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것들
나이에 맞게 옷 입는 비법이 딱 하나 있는데, 내가 한 단어로 요약해드리겠다. 바로 스팽스Spanx다. 스팽스가 뭔지 모른다면 이 책을 잠시 덮고 두 손을 동그랗게 말아 입에 댄 후 다음과 같이 큰소리로 외쳐주시길 바란다. "누가 제발 동굴 입구를 막고 있는 이 엄청나게 커다란 바위를 치워주지 않겠어요? 제가 기어 나가서 처음으로 밀레니엄을 맞이할 수 있게요!" 여러분이 동굴에서 도와줄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내가 스팽스가 뭔지 알려주겠다. 스팽스는 마술 같은 가공 원단으로 만든 엄청나게 매끈한 초고기능 천 쪼가리로, 보기 싫은 바늘땀이나 살을 파고드는 고통스러운 코르셋 없이 살을 깔끔하게 빨아들인다. 그렇다, 스팽스는 거들이다. 하지만 이건 우리 할머니들이 입던 그런 거들이 아니다.(겉포장만 바꾼 테이프도 아니다. 내 맹세한다.) 스팽스의 대표 문구는 '더 가볍고 날씬해지는 비결'이지만 나는 날씬해지고 싶어서 스팽스를 입는 것도 아니다. 날 미워해도 괜찮다. 하지만 나는 정말 말라 보이려고 스팽스를 입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피부가 덜 처져 보이고 싶은 마음이 큰데, 내 몸을 감싸고 있는 표피가 장기를 붙드는 데 필요한 양 이상으로 많은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팽스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면 누가 나한테 스프레이를 뿌려서 모든 것을 밀어 넣고 고정하는 수축포장 코팅을 입힌 것 같다. 그것도 테이프 없이. - 6. 미니스커트와 아줌마 청바지에 대하여

(수면 전문가들이 제안하는 몇 가지 방법에 대해)

낮잠을 너무 많이 자지 말 것. 하하하하하하. 아니, 내가 네 살인 줄 아나? 내가 마지막으로 낮잠을 잔 것은 5년 전으로, 지독한 장염에 걸려 화장실 바닥에서 밤을 홀딱 샌 다음 날이었다. 하지만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이런 좋은 지식은 의대에서 배우셨나요? - 13. 얼마나 피곤한지 설명하는 것도 지친다
물론 경제적 타격 문제를 빼고 외도 반대를 논할 순 없다. 내가 지금 이 순간 바람을 피울지 말지 고민하고 있다고 해보자. 그리고 논의를 위해 내 금지된 사랑의 대상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자나 은퇴한 마취과 의사, 또는 워런 버핏이 아니라고 치자. 말인즉슨 내가 호텔방과 비행기 티켓, 섹시한 란제리, 개인 트레이닝, 로맨틱한 저녁식사, 콘돔, 곧 필요해질 휘핑크림 비용의 절반을 지불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돈은 전부 현금으로 내야 할 텐데, 그래야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이 찾거나 추적할 행적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밀회를 한 달에 딱 두 번만 가져도 1천 달러는 쉽게 넘을 것이며, 내가 들키지 않고 현금을 그만큼 모을 가능성은 첼시 핸들러*가 수녀가 될 확률만큼 낮다.
* Chelsea Handler. 미국의 배우이자 코미디언. 진행자로 최근 가슴해방운동을 벌이며 상반신 노출 사진을 여러 차례 공개했다. — 옮긴이
내 깜찍한 연하남이 말도 안 되는 부자라서 우리 만남의 비용을 전부 댄다고 해도 나는 분명히 새 란제리 몇 벌을 갖고 싶을 것이고 가끔씩 태닝 스프레이도 사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소파 쿠션 밑에 숨겨놓은 잔돈 몇 푼으로는 살 수 없는 것들이다. 늘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니 무척이나 당혹스럽다. "음, 무함마드 알리-알제브라? 나한테 50달러만 빌려줄 수 있어? 고무줄이 탄탄한 팬티 좀 몇 장 사려고. 이 은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보답할게. (윙크 윙크)" - 17. 내가 절대 바람피우지 않을 여러 이유들

 

이렇게 내가 생각하기에 제일 재미있는 부분을 보여 드렸는데도 이 책에 별 흥미를 못 느끼신다면, 그것도 괜찮다. 사람들은 흔히 상대로 하여금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게 만들 때 '안 하면 네 손해'라고 하지만, 여러분이 이 책을 안 읽는다고 큰 손해를 볼 리는 없으니까. 아마 단돈 1원의 손해도 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여자들 책이고 나는 여자가 아니니까' 또는 '나는 여자들(또는 아줌마들) 얘기엔 관심 없어' 라는 생각에 전 세계 인구의 절반과 그들이 대표하는 것을 '별거 아닌 것',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일축해 버린다면 그게 더 크나큰 손해일 거다.

'이(2)항 대립(binary opposition)'이라는 개념이 있다. '언어 또는 사유에서 두 개의 이론적인 대립을 엄격하게 정의하고 하나에 다른 하나를 대립하게 하는 체계'를 말하는데(출처: 위키 백과), 남자-여자, 0-1, 빛-어둠, 위-아래 등이 그 예다. 이 개념들은 서로가 있기에 각자가 존재할 수 있다. 높은 것은 낮은 것이 있어야 높은지 알 수 있으며, 차가움은 따뜻함이 있어야 비교가 가능하다. 원칙적으로 이 개념들은 둘 다 동등하고, 어떤 것이 그 상대보다 더 낫지 않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우월하다고 여긴다. 남자가 여자보다, 아름다움이 추한 것보다, 진지한 게 가벼운 것보다 더 낫다고.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기에열등한 것들을 다 하나로 묶어 버린다. '여자들은 진지한 얘기는 할 줄 몰라. 시시하고 가벼운 사변이나 하지 진지한/정치적인/사회적인 글은 쓸 줄 모른다니까' 하는 식으로. 그 말은 그 자체로도 틀린 말이지만 (진지한 글을 쓰는 여성 작가가 없다고? 실례지만 눈이 없는 게 아니신지) 삶의 절반을 그런 식으로 묵살해 버린다면 그런 태도가 삶에 더 유해할 것이다. 영화로 치자면 드라마도 가치가 있고 코미디도 가치가 있다. 정치적인 것도 가치가 있고 개인적인 것도 가치가 있다(어쩌면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비롯해 삶을 단순한 이항 대립으로 나누고 그쪽에서 자신이 좋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면만 취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애초에 무엇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지조차 다시 한 번 살펴볼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한번 거들떠보는 것은 어떠신지! 생각지도 못한 재미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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