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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김지승, <아무튼, 연필>

 

 

솔직히 책 표지는 이상한데 내용은 정말 놀랄 정도로 좋다.

나는 나름대로 '취존'이 잘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나도 이런 걸 파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분야를 파는 이, 또는 그런 덕질의 대상을 보면 "아,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 하는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죄송합니다…).

몇 년 전에 내 친구가 물고기(집에서 어항에서 키우는 그거)를 덕질한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이만큼 놀란 적은 없었다. 이 책의 저자는 무려 '연필 덕후'이다!

아니, 물론 문구류를 좋아해서 1300K나 핫트랙스 가면 이것저것 쓸어담는 사람은 봤는데, 같은 문구류이긴 해도 '연필'은 뭔가... 너무 사소하다는 느낌?

'만년필'은 그래도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있고 실제로도 비싼 것들은 꽤 비싸니까 굳이 '덕질'이 아니라 '수집', '애호'라는 (다소 우아하게 들리는) 표현으로도 닷소 접해 봐서 놀랍지 않았다.

그렇지만 연필이라는 것은, 대개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바로 샤프로 갈아타기 때문에 아주 어린아이들이나 쓴다는 이미지가 (적어도 내게는) 있었다.

미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면 필기할 때 굳이 연필을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어?'라는 게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의 내 생각이었다(내가 모를 수도, 떠올리지 못헀을 수도, 내가 무지했을 수도, 내가 감히, 내가 또 잘못을...).

 

(연필 덕후님들은 분노하지 마시고, 여기서부터가 진짜 본문이니까, 고정하시고 읽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런데 이 책이 내 그런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다 저자의 기가 막힌 글솜씨 덕분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놀란 건 (연필을 덕질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 말고) 저자가 '연필'이라는 소재를 여성, 또는 여성주의와 연결지었다는 점이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곧바로 '연필'과 여성을 연결짓는다. 어떻게? 흑연 심 연필을 처음 만든 것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한 여학생에 의해 발명되었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것으로.

연필의 초기 역사는 힘을 들이지 않고 그은 4H 연필 선 정도의 흔적만 남아 있다. 연필 같은 초기 발명품들을 만든 장인들이 대부분 무학자여서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고도 하고, 밑그림이나 초안 아이디어 등은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싸라지는 것들이라 그 과정에서 사용한 연필도 더불어 중요하지 않게 취급되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어떤 이유든 연필에 관한 기록은 아예 기록되지 않았거나 쉽게 지워져왔다는 걸 알 수 있다. 약자와 소수자들의 역사처럼.

연필이라는 명칭과 그 실체가 우리 가 익히 아는 현대의 그것과 가까워지는 건 대략 17세기 말, 그도 영국을 비롯한 유럽 대륙에 한해서였다. 유럽에서 발명하고 미국에서 완성했다는 연필을 미국에서 자체 생산하기 시작한 건 19셋기 초반에 이르러서다. 1840년쯤 미국에서 최초로 흑연 심 연필을 만든 사람은 한 여학생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ㅆ다. 여학생은 영국 보로데일(Borrowdale) 흑연 조각을 고운 가루로 만든 다음 아라비아고무, 아교 용액에 섞어 굳혔다. 뜨개질 바늘을 이용해 딱총나무 가지 속을 비우고 굳은 흑연을 끼워 쓰는 과정은 기록 속에 구체적으로 남아 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여학생의 이름을 전해들을 수는 없다.

연필은 앞에서 내가 말한 만년필처럼 '고오급'스러운 필기구가 아니다. 구하기도 쉽고, 저렴하며, 아이들도 쓰는 있는 물건이다.

또한 연필은 쉽게 지워지기 때문에 최종적인 결정, 또는 확실한 사실을 기록할 때 쓰지 않는다. 그보다는 무엇을 연습할 때처럼 쉽게 지워 버릴 수 있고 또 그러고 싶을 때 쓴다.

이런 '권위 없음'은 여성의 처지와도 닮았다. 쉽게 지울 수 있는 연필을 가지고 남성 결정권자가 결정을 내리기 전 임시적이고 잠정적인 내용을 수첩에 받아적는, 또는 권력자의 미팅 약속을 스케줄러 따위에 적어넣는 비서처럼, 여성은 대체로 타인을 돕고 보조하는 일을 맡는다.

연필과 펜슬스커트와 아이브로펜슬은 하나의 검색어에서 태어난 혈연들처럼 연결되었다. 아이브로펜슬로 화장을 하고 펜슬스커트를 입은 여성 비서가 연필을 들고 있는 70, 80년대 미국의 지면 광고는 그 세 가지를 한 장에 모두 담는다. 광고 속 여성의 이미지만으로 보면 세월감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뉴트로 유행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미지 속 여성의 역할과 업무 라인이 지금과 그리 다르지 않아서이다. 주로 여성이었던 비서는 연필을 들고 무언가를 '임시로', '예비로' 쓴다. 마지막 결정, 명령, 실행은 대부분 남성 상사의 결재로 이루어지며 공공의 의미 체계를 획득하는 결재란의 그 표식은 연필이 아닌 볼펜이나 만년필로 남겨졌다. 그곳은 연필의 자리가 아니다. 연필의 자리가 아니면 여성인 나의 자리도 아니기 쉬웠다. 비서가 타이핑하는 문서의 내용을 이해할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공식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문서의 효력과 그것을 발생시키는 서명으로부터 여성은 지속적으로 소외되어 왔다.

 

저자는 연필과 여성을 연결짓는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 줄 뿐 아니라 엄청 재미있다. 책의 앞부분은 저자가 자라며 연필과 관련된 기억을 추억하는 부분이라 다소 쓸쓸한 분위기가 드는데, 그것만 벗어나면 바로 유쾌한 분위기로 변모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부분.

우리가 벽에 말을 거는 건 괜찮지만(나는 주로 냉장고) 벽이 대답을 하면(냉장고는 자주 대답을 한다) 병원에 가보라는, 자가 격리 시대의 자가 멘탈 검진용 조언은 유효하다. 양배추의 잎맥이 자꾸 말을 건다고 양배추를 병원에 보내는 건 좀 그래서 내가 상담을 받기로 했다. 때마침 모 재단에서 운영하는 상담 지원 프로그램을 신청할 수 있었다. 10회에 걸친 심리 상담을 무료로 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양배추는 잎맥을 꿈틀거리며 분명 내게 좋은 시간이 될 거라고 했다. 그런 말은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어떤 말이냐가 아니고 양배추가 말을 하는 것임을 내가 잊지 말아야 할 텐데….
(...) 나처럼 혼자 오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이상한지 잘 모르기 쉽다. 이상함의 정도를 체크할 상대적 리스트가 부족하기 때문이다(양배추가 말을 건다고 하면, 서양배추니까 영어로? 라고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나의 친구들아 보아라). 그 리스트를 제공해준다는 면에서도 상담은 유용했다.

저자가 상담가와 이야기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사는 줄 알았다"라고 말하자, 상담가는 "지승 씨, 사람은 그렇게 강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단다.

유머로 읽는 이의 긴장을 풀어 놓고 나서 저자는 이 사실을 연필과 연결짓으며 깨달음으로 슬그머니 다가간다.

다들 알다시피, 흑연이나 다이아몬드 둘 다 탄소로 구성돼 있다. 

다이아몬드와 흑연 구성 성분의 일치와 구조적 차이를 소비하는 한국적 방식은 그리 신선하지는 않았다. 이 자기 계발의 나라에서 둘은 노력하는 사람과 노력하지 않는 사람의 예시로 곧잘 쓰였다. 흑연처럼 헐렁하고 약하고 잘 부서지는 이들은 패배자가, 고온과 고압을 견딜 만큼 단단한 다이아몬드는 승자가 되었다. 그 뒤로 당연한 수순처럼 다이아몬드가 되려면 어떻게 하라는 조언이 이어졌다. 모두가 동일한 욕망을 즉, 다이아몬드 같은 삶을 살고 싶어 할 거라고 전제한 글들이 많았다. 그중 '작은 자극에서 무너지는 흑연 같은 삶'을 나무라는 표현은 당황스럽게 문학적이었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이기도 했다. 다른 것들과 포기해지고 더해지고 섞이는 삶을 쌍상하는 건 무너지고 부서져본 사람들이다. 홀로 단단할 수는 없어서 '약한 인간 1'과 '약한 인간 2'가 손잡고 '좀 덜 약한 인간들'로 살아가는 먹먹함에 대해 아는 것도 그들이다. 몇 세기에 걸쳐 흑연에 점토(주로 고령토) 등을 섞어 강도를 높이고 잘 부서지지 않는 연필심을 만드는 데 투자한 것도 흑연의 약함을 충분히 이해한 사람들이었다. 어둡고, 가벼우며, 검은 광택을 가진 흑연은 어째서 아름답지 않다는 건가. 과도한 열정 없이 언제든 자유로울 준비가 되어 있는 이 검은 친구가.

(...) 사람이 어떤 순간에 무너질 수 있으며 그 무너짐이 어떤 죄책감을 만드는지에 예민할 쑤 있는 건 내가 잘 무너지고 부서지는 사람이어서다. 모를 수가 없다. 모른 척은 해도. 연필을 쓰는 사람은 부서진 흑연 가루가 종이의 섬유질에 남는 것이 연필 필기의 원리임을 매순간 경험한다. 종이 위에 남는 건 바로 그 부서짐의 노력이니까.

정말 기가 막힌 발상 아닌가. 연필과 여성을 잇고, 다이아몬드와 흑연을 비교하는 말을 살짝 틀어서 '약한 인간들'을 위로하는 말로 바꾸어내다니.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는데, 1부가 연필에 대한 저자의 개인적 추억과 명상을 담은 부분이라면, 2부는 역사적 인물(대개 작가들, 그리고 전부 여성들)과 그들의 연필에 대한 글이다.

2부에서는 버지니아 울프, 다와다 요코, 도롯시 파커, 조앤 디디온, 루이자 메이 올컷 등의 인물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어서 뭔가 횡재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보석 같은 (아니, 흑연 같다고 해야 하나?) 책을 만나게 되어 정말 너무 기쁘다.

연필도 덕질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뿐 아니라 흑연처럼 까맣게 빛나는 통찰을 전해 준 저자에게 감사한다.

(참고로 이 책은리디셀렉트에서 바로 볼 수 있다.)

이 책 외에도 내가 사랑하는 '아무튼' 시리즈도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번 거들떠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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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이연실, <에세이 만드는 법>

 

 

에세이를 발간하는 편집자의 에세이. 글자 그대로 '에세이 만드는 법'을 이야기한다(이 점을 이보다 어떻게 더 자세히, 잘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 이틀 정도 시간이 나지 않아 독서를 못 했는데, 사흘째 되는 날 아침에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아, 맞아. 나 이래서 책 좋아했지!' 하고 새삼 깨달았다.

저자가 책을 사랑한다는 느낌이 모든 페이지에서 폴폴 풍기니 나 역시 책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같은 마음을 가진 '책덕후'를 만나 기쁠 뿐이다.

 

에세이는 기본적으로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다. 그 말을 편집자의 입장에서는, 누구나 글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고, 편집자의 일은 그중 흥미롭고 놀라운 이야기를 가진 사람을 잘 구슬려(?) 적절히 글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생활인을 마치 아직 쓰이지 않은 책처럼 바라보고 대하는 저자의 태도에서도 '이 사람은 이야기도 좋아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가진 사람도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한 팀에서 일했던 원보름 편집자는 검색과 구독의 달인이다. 그는 월급을 털어서 항시 무언가를 다량 구독 중인 상태고,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신박한 콘텐츠 소식이 들릴라치면, 이미 그 사실을 인지하고 책이 될 만한지 탐색 중이다. 어느 날 그가 이런 말을 했다.

"팀장님, 저는 예술가보다 생활인이 좋아요!"

나는 허리를 접고 웃었다.

에세이 편집자는 '예술가 되기'에 별 관심도 동경도 없고, 딱히 예술사가 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생활의 달인들을 책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에세이 편집자의 신선한 기획거리는 서점에 이미 나와 있는 완전한 도서 너머에 있을 때가 많다. 신문과 잡지, SNS, TV 뉴스나 다큐멘터리, 인터뷰, 쪽글에서 자신의 일과 삶을 예술처럼 꾸려가는 생활인과 직업인을 볼 때 나는 심장이 뛴다.

 

우리는 일상과 생활이 이미 예술인 사람들, 예술가 이전의 예술가를 발견해 작가가 되어 보자고 유혹한다. 자신은 작가나 예술가가 될 깜냥이 아니라고, 그저 먹고살다 보니까 이렇게 됐다고 말하는 사람, 자신이 얼마나 아름답고 대단한지 잘 모르는 사람, 그러나 곁에서 조금만 대화해 보면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모조리 주워 담아 간직하고픈 사람, 나는 이런 사람들을 붙들어 내 작가로 만들고 싶다.

 

에세이 편집자의 작가는 도심의 카페와 집필실, 교수 연구실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거리에, 출근길 만원 버스와 전철에, 시장에, 가게에, 정신없이 돌아가는 회사에, 이름도 몰랐던 시골 마을에, 세상 방방곡곡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하며 생활하고 있다. 메일함에 꽂히는 완전 원고 너머의 세계에도,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단 하나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이걸 어떻게 책으로 만들어야 하나, 조금은 막막하기도 하고 내 힘과 노력과 용기를 조금 더 쏟아야 하는 곳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는 툭툭 튀어나온다.

아직 원고를 써 본 일은 없지만 이미 삶 자체가 책보다 아름다운 사람, 예술가가 되기 전의 생활인, 자기 자신의 업과 삶에 그 어떤 헝영이나 자만도 없이 하루하루를 묵묵히 쌓아 저절로 대가나 달인이 된 사람, 생생한 삶의 현장 속에 숨은그림찾기처럼 박혀 있는 예술적인 생활인……. 그런 이들의 울퉁불퉁하고 유일한 이야기를 찾아서, 나는 오늘도 책 밖의 세상을 기웃거린다.

참 사람을 보는 눈이 따뜻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에 보면 홀든이 '좋은 책이란 내가 그 책의 저자와 친구여서 책을 읽고 나면 정말 좋았다고 감상을 나눌 수 있기를 바라게 되는 책'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말을 떠올렸다.

책을 사랑하는, 이 저자 같은 친구가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그럼 얼마나 신날까! 같이 책 이야기도 하고!

 

내가 이 저자가 만든 책을 읽은 적이 있나 살펴봤는데, 아마 없는 것 같다. 그래도 덕분에 좋은 책들 많이 알게 되어서 다행이다(저자가 자신이 만든 책들을 본문에서 몇 번씩 언급하기 때문에 관심 있는 분들은 쉽게 찾아 보실 수 있다).

편집자라는 직업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이 책을 통해 좋은 편집자의 자질이 무엇인지(디자인 감각을 키우기 위해 자신만의 '갤러리'를 항시 채워 놓는다든가)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쪽에 관심이 없더라도 책을 좋아하는 이에게 이야기를 듣는다는 감각으로 읽어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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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이재범, <1분 과학>

 

 

리디셀렉트에서 만난 책이다.

과학 관련 인기 유튜브를 만화화한 거라는데 나는 본 적 없어서 모르겠다. 총 14꼭지가 담겨 있다.

운동을 하면 신체 건강을 젊게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뇌도 젊고 활동적이 된다는 이야기는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다큐 캡처본 같은 것으로 본 기억이 난다.

그리고 게이는 후손을 남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전체 인류의 약 10%는 게이로 타고나는지도 진화나 심리학 관련 책에서 본 듯하다.

텔로미어는 아마 중학교 생물 교과서에도 나올 테고(라떼는 그랬다는 뜻이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네…) 시간과 차원의 관계는 여기저기에서도 잘 다루는 소재인 것 같다.

그것 빼고는 처음 보는 내용이다. 14개 중 10개 소재가 신선하니까 전반적으로 새롭다고 봐도 좋을 듯.

 

내가 원본 유튜브를 찾아보지 않아서 만화 버전과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과학 쪽 교양을 쌓고 싶을 때 읽기는 괜찮다.

만화도 썩 재미있고. 다만 만화로 되어 있기 때문에 리디북스/리디셀렉트에서는 PDF 파일로 다운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형광펜 하이라이트를 못 한다는 뜻이다. 이 점 참고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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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데이비드 엡스타인,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

 

 

오랜만에 논픽션을 읽었는데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책이었다.

저자가 열심히 자료를 조사해서 쓴 게 티가 나고, 흥미로운 일화와 실험 결과가 풍부하다. 책에서 전하는 메시지도 고무적이고.  

 

일단 책의 부제목("전문화된 세상에서 늦깎이 제너럴리스트가 성공하는 이유")이 말해 주듯, 이 책은 '일찍 시작해 한우물만 판 스페셜리스트'가 되기보다는 '이런저런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은 제너럴리스트'가 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서문에 등장하는 예를 빌리자면, 타이거 우즈처럼 되는 것보다 로저 페더러처럼 되는 것이 더 이 시대에 적절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이과든 문과든 예체능이든 일찍 진로를 정해서 거기에 올인을 해서 평생 그 분야의 경험을 쌓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하는지 찾기 쉽지 않은 것이 첫째 이유고(우리는 너무 이른 나이에 진로를 정하라는 압박을 받는다), 또 직접 경험해 보아도 그것이 자신의 생각이나 원하는 바와 달라 다른 길을 선택하는 일도 흔하다.

게다가 요즘 예상 수명은 또 얼마나 긴가. 한 가지 일 또는 분야에만 종사하기에는 참 긴 시간이다.

두 번째, 세 번째 이직 또는 분야 전환이 낯설지 않은 이유다. 그리고 저자의 말에 따르면 오히려 이렇게 다양한 분야를 경험해 보는 것이 우리에게 더 나은 성공 가능성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서문에서 언급된 타이거 우즈와 로저 페더러 같은 스포츠 선수들의 맥락에서 이를 알아보자.

과학자들이 유년기 초부터 운동선수들의 발달 과정 전체를 살펴보았는데, 엘리트 선수와 준엘리트 선수들을 나누어 비교했다(여기에서는 엘리트 선수가 성공한 이들을 나타낸다고 보면 되겠다).

이윽고 엘리트가 되는 이들을 보면, 대개 초기에는 훗날 자신이 전문가가 될 바로 그 종목에서 신중한 훈련에 쏟은 시간이 사실상 더 적었다. 대신에 그들은 전문가들이 <샘플링 기간>이라고 부르는 시기를 거친다. 대개 체계적이지 않거나 체계가 엉성한 환경에서 다양한 스포츠를 경험하는 기간을 말한다. 그런 경험들을 통해 그들은 몸을 쓰는 기술들을 폭넓게 습득할 수 있다. 또 자신의 능력과 적성을 알게 된다. 그런 뒤에야 그들은 한 분야에 집중해 기술을 갈고닦을 준비를 한다. 개인 스포츠 종목의 운동선수들을 연구한 한 논문은 제목에서 <늦은 전문화>가 <성공의 열쇠>라고 단언했다. 또 다른 논문의 제목은 이러했다. ❮단체 스포츠에서 최고가 되는 법: 늦게 시작하고, 집중하고, 단호해져라❯. 

책에서도 나오는 일화 비슷한 에시를 들자면, 예컨대 자녀에게 악기를 가르친다고 치자.

양육자가 '자, 너는 이제부터 바이올린을 배워!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기 위해 훈련하는 거야!' 하는 것보다 자녀에게 바이올린, 피아노, 피콜로 등등 다양한 악기를 접하게 해 주고 그중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전공하게 하는 것이 자녀 본인의 만족감도 높고 성공 가능성도 높을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악기를 골라서 더 집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여러 악기를 배우는 과정을 통해 악기와 음악에 대한 여러 경험을 다양하게 습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4년에 나는 첫 책 ❮스포츠 유전자(The Sports Gene)❯의 후기에 스포츠에 늦게 뛰어든 이들을 조사한 연구 결과들을 조금 언급했다. 다음 해에 나는 의외의 사람들로부터 강연을 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운동선수도 코치도 아닌 퇴역 군인들이었다. 강연 준비를 하면서 나는 스포츠 세계 바깥에서 전문성과 전직을 다룬 연구가 있는지 과학 학술지들을 뒤졌다. 나는 논문들을 읽으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연구는 일찍부터 한 분야을 파고든 이들이 대학을 졸업한 뒤 더 먼저 자리를 잡지만, 늦은 전공자가 자신의 역량과 성향에 더 맞는 일자리를 찾음으로써 늦게 시작한 사람의 불리함을 보완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기술 발명가들이 한 분야를 더 깊게 파고든 또래들에 비해, 여러 분야에서 경험을 쌓을 때 창의력이 더 향상된다는 것을 보여 준 연구도 많았다. 깊이를 조금 희생하더라도 적극적으로 폭을 넓히는 쪽이 경력이 쌓여 갈수록 더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예술 창작자들을 조사한 연구도 거의 동일한 결과를 내놓았다.

 

한 가지 분야에 깊게 천착하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 아주 좁은 전공 분야만 집중하다 보면 그 세부 분야가 아닌 다른 부분에는 오히려 까막눈이 될 수도 있다.

예컨대 동물학자라면 일반적으로 개, 고양이, 양, 소, 닭 등 다양한 동물들을 연구할 텐데, 그중에서도 고양이, 또한 그중에서도 페르시안 고양이 한 종만 들입다 판다고 생각해 보자. 이런 동물학자는 동네 동물병원에서도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너무나 전문 분야가 좁기 때문이다. 

예시를 좀 가볍게 고양이로 들어서 그렇지, 공학, 과학 쪽으로 눈을 돌린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질 수 있다. 우리가 풀고자 하는 문제는 자연에 실재하는 존재를 가지고 하는 것인데, 그 자연이란 게 우리가 딱 칼로 자르듯 나눈 학문 한 가지만 적용해서 풀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떤 문제를 풀 때 두 가지 이상의 학문에 관한 지식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아니면 자신이 아는 메인 분야와 완전히 다른 시각이나.

나는 고도의 자격을 갖춘 전문가들이 실제로는 경험이 쌓일수록 더 편협한 사고방식을 지니게 될 수 있으며, 그런 와중에 오히려 더 자신만만해지기까지 할 수 있다는 것 — 위험한 조합이다— 을 보여 주는 연구들을 살펴보았다. 또 여러 인지심리학자들을 만나면서, 너무나 많은 놀라운 연구 결과들이 무시되곤 해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오래가는 지식을 쌓으려면 학습 자체가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좋다는 연구들이 대표적이었다. 그 말은 설령 학습한 직후에 치르는 시험에서는 성적이 형편없게 나올 때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다싯 말해 가장 효과적인 학습은 별 효과가 없는 양 보인다. 즉 뒤처지는 듯이 보인다.

 

빙엄은 기존 기업들이 이른바 국소적 탐색을 통해서 문제에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즉 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써서 전에 효과가 있었던 해결책을 써보는 것이다. 한편 외부인들을 초청하는 그의 방식이 너무나 효과가 좋았기에, 일라이릴리는 아예 독립시켜서 별도의 기업을 세웠다. 이노센티브(InnoCentive)라는 이 회사는 어떤 분야의 기관이든 간에 <의뢰자>로부터 비용을 받고 그 <도전 과제>를 사이트에 올려서 해결책을 제시한 외부 <해결자>에게 보상을 한다. 도전 과제 중 약 3분의 1 남짓은 완전히 해결되었다. 이노센티브가 선정하는 문제들이 당사자인 전문가가 해결 못 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놀라운 비율이다. 그러면서 이노센티븐은 해결책이 나올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방향으로 의뢰자가 올리는 문제를 다듬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다양한 해결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도록 다듬는 것이 바로 요령이었다. 도전 과제가 과학자들뿐이 아니라 변호사와 치과 의사와 수리공에게도 달려들 만한 것으로 비칠수록, 해결될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

이노센티브는 어느 정도는 전문가들이 점점 더 협소하게 초점을 맞추어 감에 따라서 <상자>가 러시아 인형과 더 비슷해지기 때문에 작동한다. 전문가들은 더 하위 분야들로 전문화하며, 그 하위 분야들은 더욱 하위 분야들로 나뉜다. 설령 작은 인형 바깥으로 나간다고 해도, 여전히 좀 더 큰 인형 안에 들어 있을 뿐이다. 크래진과 데이비스는 애초에 상자 바깥에 있었고, 훈련과 자원의 모든 이점을 지닌 듯한 내부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뻔한 해결책을 보았다. 해결자 자신도 어떤 기업이나 산업 전체가 풀지 못하고 있는 과제를 자신이 해결할 때 의아해하곤 한다.

한 외부인 해결자는 결핵 치료제의 제조에 생긴 생산 문제를 도와 달라는 존슨앤존슨의 요청에 응답한 뒤 ❮사이언스❯에 이렇게 말했다. "사흘에 걸쳐서 저녁에 그 해답을 적었어요. 큰 제약 회사가 이런 문제를 왜 풀지 못하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요." 하버드 혁신과학연구소의 공동 소장 카림 라카니(Karim Lakhani)는 이놋센티브 해결자들에게 문제가 자신의 전공 분야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등급을 매겨 달라고 했다. "문제가 해결자의 전문 분야와 거리가 멀수록, 풀 가능성이 더 높았다."

 

살다 보면 어떤 일에 끈기를 가지고 매달려야 할 때도 있고,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는 경험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과 맞지 않아 힘든데 여기에서 포기하면 비웃음받을까 봐, 또는 나약하다는 평을 받을까 봐 억지로 질질 끄는 것은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게 직업이든, 취미든, 무엇이든 자신과 맞지 않는다, 또는 가능성이 아무래도 없다 싶으면 빨리 관두고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것도 삶의 지혜다. 그러면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또는 좋아하는 일을 찾게 되는 거니까.

윈스턴 처칠의 <결코 포기하지 마라. 결코, 결코, 결코>라는 말이 종종 인용되곤 한다. 하지만 그 문장의 나머지 부분은 으레 빼먹는다.  <명예와 양식에 따라 확신이 들 때를 제외하고.>

 

혹시나 오해할까 봐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이 책은 '전문성'을 무시하는 건 전혀 아니다. 전문성을 가지되, 다양한 분야에 경험, 관심, 지식을 가지는 게 좋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자신의 '메인'이 되는 전문 분야를 가지되 다양한 관심사를 가지면 그 관심사에 관한 지식을 자신의 메인 분야와 융합해 큰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

 

자신이 오래 해 온 일을 그만둘까 고민 중이라거나, 전직, 업종 전환 등 큰 변화를 앞두고 있다면 이 책이 심적으로도 큰 위로가 될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진로를 고민해야 하는 학생이나 진로 상담을 해 주어야 하는 교사 등이 읽으면 참 좋을 것 같다.

리디셀렉트를 이용한다면 꼭 찾아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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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엘리, <이번 생은 나 혼자 산다>

 

 

솔직히 전체평부터 하자면, 저자의 이전 책보다 못하다.

엘리라는 작가 이름을 보고 "오, 나 예전에 이 저자의 <연애하지 않을 권리> 재미있게 봤는데!" 하고 별 걱정 없이 대여했다.

그런데 음... 책의 주제가 '연애하지 않을 권리'에서 '결혼하지 않을 권리'로 옮겨갔을 뿐이고 그 사이엔 큰 간격도 없는데 왜 이렇게 예전 책만큼 재미가 없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이번 책도 저번 책과 마찬가지로 인터넷에 미리 연재되었던 글들을 바탕으로 쓰였는데, 저번 것이 카카오 브런치에 연재한 글이었고 이번 것은 네이버 연애﹒결혼 판에 연재한 글이었다.

둘 다 예전 글을 바탕으로 정리한 책인데 왜 이번 책은 저번 책보다 별로인지 모르겠다.

 

오해는 마시라, 나도 비혼이라는 아이디어에 찬성이고 비혼을 선택한 이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런데 이 책은 그냥... 별로다. <연애하지 않을 권리>는 첫 시작(그러니까 서문)부터 빵 터졌는데. 나는 책을 읽으면서 재밌는 부분이나 멋진 부분, 또는 맞춤법이나 표기가 잘못된 부분을 하이라이트하는데, 이 책에는 진짜 좋은 의미에서 하이라이트할 게 딱 두 곳밖에 없었다.

인생이란 꼭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그냥 두면 축제 같은 것이 될 터이니.
길을 걸어가는 아이가
바람이 불 때마다 날려오는
꽃잎들의 선물을 받아들이듯이
매일매일이 네게 그렇게 되도록 하라.

꽃잎들을 모아 간직해 두는 일 따위에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제 머리카락 속으로 기꺼이 들어온
꽃일들을 아이는 살며시 떼어내고,
사랑스러운 젊은 시절을 향해
더욱 새로운 꽃잎을 달라 두 손을 내민다.
- <나의 축제를 위하여>,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여성의 우울증에 대한 모든 문헌을 검토하고 유전학에서부터 월경 전 증후군, 피임약 등 다양한 요인들을 테스트해본 저명한 건강 연구자 제럴드 클러먼(Gerald Klerman)과 미르나 와이즈먼(Myrna Weissman)은 여성 우울증에는 2가지 원인밖에 없음을 확인했다. 그것은 바로 낮은 사회적 지위와 결혼이었다.

 

둘 다 좋은 문장이지만 안타깝게도 둘 다 저자가 직접 쓴 문장이 아니고 인용한 문장들이다. 저자의 문장력이 형편없다고 말하려는 건 절대 아니지만 이전 작품만큼의 재기발랄함, 유쾌함, 유머가 없달까?

아쉽다. 저자의 이전 작품을 읽고 기대가 높아진 독자라면 나처럼 아쉬울 것이다. 이전에 내가 쓴 <연애하지 않을 권리> 리뷰로 마무리를 대신하겠다. 끝.

2019.01.16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엘리, <연애하지 않을 권리>

 

[책 감상/책 추천] 엘리, <연애하지 않을 권리>

[책 감상/책 추천] 엘리, <연애하지 않을 권리> 그렇다, 나도 리디셀렉트에서 이 책을 보고 작년에 읽고 나서 감상을 쓴 그 책인가 했다. (그 책이란 이 책을 가리킨다. 018/12/21 - [책을 읽고 나서]

eatsleepandread.xy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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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도널드 커시, 오기 오거스, <인류의 운명을 바꾼 약의 탐험가들>

 

 

저자들은 역사 속에서 제일 기억할 만한 신약 열두 가지를 꼽아 이 약들이 어떻게 개발되었는지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내용은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어렵지 않고 또 흥미롭다.

읽기만 해도 과학 분야의 교양을 쌓는 느낌이 들어서 아주 뿌듯하다.

 

책을 읽기 전, 신약을 만드는 데 물론 행운이 필요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인간관계가 중요한 줄은 몰랐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의약품이 최신 장비를 갖춘 실험실에서 비범한 과학자들이 애를 써서 찾아낸 최첨단 발명품이라고 생각한다. 신약 발견에 일급 과학자가 필요하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기술적인 능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팀워크와 협동도 뛰어난 과학만큼은 아니지만 그 못지않게 신약 발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 싸람이 발견한 가장 최근의 약은 1846년 윌리엄 T. G. 모턴이 발견한 수술용 마취제, 에테르였다. 그 뒤로 모든 신약은 집단에 의해 발견됐다.

안타깝게도 팀워크와 협동은 과학도로 훈련받는 동안에는 종종 무시를 받기 때문에 신약 사냥꾼은 보통 현장에서 협동하는 방법을 배운다. 나는 경력의 여러 단계에서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 팀의 일원으로서나 협업자로서 더 성장하게 되었다. 그분들의 노력에 감사하며, 그들과 쌓아온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

 

열두 가지 신약 이야기를 다 공유하고 싶지만 그러면 재미가 없을 테니 내가 가장 신기하게 생각했던 이야기 두어 가지만 들려드리겠다.

첫 번째로, 피임약 개발 이야기가 나는 제일 흥미로웠는데, 긴 이야기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마가렛 생어라는 페미니스트가 '여성들도 피임을 할 권리가 있다'라는 믿음으로, (자신은 과학자가 아니니까) 잘은 모르지만 그런 방법이 분명 있을 거라 생각하고 그걸 할 수 있을 법한 과학자를 수소문한다.

그녀는 그레고리 핀커스라는 과학자를 찾아갔고, 그에게 연구비를 지원하로 한다. 그 돈은 자신의 친구이자 뜻을 같이 하는 백만장자(정확히는 백만장자의 아내이자 상속녀) 캐서린 덱스터 맥코믹에게서 나왔다.

어쨌든 핀커스는 그 연구비로 연구를 계속했고, 마침내 프로게스테론을 이용한 피임약을 개발했다. 존 록 박사라는 의사를 임상시험 감독자로 임명하고 실험만 하면 되는데, 문제는 당시 법은 이 약을 가지고 인체 실험 하는 걸 금지했다는 점이다.

그들이 찾아낸 방법은, 그런 법이 없는 나라에 가서 실험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푸에르토리코로 갔고, 거기에서 실험해 본 결과, 이 약이 효과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 물론 여성들은 메슥거림, 자궁 출혈 등의 부작용을 보고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이 약을 챙겨 먹어야 하는 귀찮음을 감수하고서라도 피임약을 사용하겠다는 여성들은 많았다. 지금도 그러하듯이.

이 내용은 한 문단으로 요약하자면, 본문의 이 문단이 아닐까.

'그 알약'은 대형 제약회사의 연구실이나 영업팀 회의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먼저 소가 더 빨리 임신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던 스위스 낙농업자들이 특이한 해부학적 발견을 해냈다. 그리고 한 수의학 교수가 그 발견을 출판해 배란 억제 약으로 쓸 수 있는 프로게스테론을 찾아냈다. 한 기이한 외톨이 화학자는 단순히 그게 흥미로운 문제라는 이유로 프로게스테론을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다. 70대 페미니스트 두 명은 불명예를 안은 생물학자를 골라 경구피임약을 만든다는 꿈을 실현했다. 독실ㅇ하고 대책 없는 이상주의자인 가톨릭교도 부인과 의사는 경구피임약의 첫 임상시험을 하는 데 동의했다. 이 생물학자와 부인과 의사 두 사람은 함께 연방과 주의 법을 — 그리고 의학 윤리를 — 피해 푸에르토리코에서 임상시험을 벌였고, 부작용이 있다는 명확한 징후를 무시했다. 이들은 가톨릭의 불매운동을 두려워하다가 뜻하지 않게 여성들이 알아서 자사의 약을 인가박지 않은 피임 목적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회사를 설득해 그 약을 생산하ㅏ게 하는 데 성공했다. 

 

두 번째, 첫 항정신성 약물 클로르프로마진. 이 약이 나오기 전까지 의사들은 '정신병'을 약으로 낫게 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프로이트 같은 정신분석학자들도 오로지 상담 치료만을 통해서야 정신병이 나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앙리 라보리라는 외과 의사가 운 좋게 클로르프로마진이라는 화합물을 얻었고, 이 약이 정신병 환자에게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정신과 의사를 설득해 자신의 약을 시험해 보게 했고, 이 약을 투여받은 한 (대단히 폭력적이고 흥분 상태에 있는) 정신병 환자는 금세 진정했고 몇 시간 동안 차분한 상태를 유지했다.

이것이 바로 첫 항정신병제였다. 

스미스, 클라인, 앤 프렌치의 수익은 향후 15년간 8배로 늘어났다. 1964년까지 전 세계에서 50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금세 조현병 환자를 위한 가장 중요한 치료제로 자리 잡은 이 약을 복용했다. 공공 요양소라는 지하 감옥 같은 곳에 갇혀 인생을 잃어버렸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고, 놀랍게도 활발하고 생산적인 삶을 살아갔다. 클로르프로마진의 성공은 정신분석학과 미국 정신의학계를 지배하고 있던 프로이트주의의 종말을 고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러분이라면 알약 하나 삼키면 증상이 사라질 수 있는데, 몇 년 동안 매주 정신과 의사의 소파에 앉아서 어머니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겠는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찾아낸 오류는 딱 하나였는데, 보통 '갈레노스'라고 하는 고대 희랍 의사를 그냥 '갈렌'이라고 해 놓은 것이었다.

물론 전공자는커녕 이쪽에 관심도 없던 내가 의학에 대해 뭘 알겠느냐만은, 갈렌이 아니라 갈레노스라고 하는 것 정도는 안다. 이것 외에 오타 두어 가지가 있는데 그것도 같이 수정해 주면 완벽한 책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도 너무나 흥미롭고 정보가 넘치는 책이니까 꼭 한번 읽어 보시면 좋겠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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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딜루트,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

 

 

오랜만에 리디셀렉트에서 정말로 보석 같은 책을 만났다.

자고로 리디셀렉트 같은 플랫폼의 장점은 분명 내가 흥미롭게 여길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 검색력이 좋지 않거나 최근 출판계 소식 업데이트가 재깍재깍 되지 않아 만나 보지 못할 책들을 대신 모아 주어 나에게 들이밀어 주는 데 있다 하겠다.

그리고 이번에 리디셀렉트가 그 목표를 정확히 이루었다.

여성 게이머가 쓴 국내 게임판에 대한 비판과 평가라니! 정말 내가 너무나 읽고 싶어 했던 그런 종류의 책을 접하게 되어 너무 기뻤다.

 

내용도 실망스럽지 않다. 나는 여성주의에 관심이 있지만 게임은 잘 플레이하지 않는데, 저자가 나 대신 다 해 보고 이야기해 주니 얼마나 감사한가.

사실, 게임을 잘 모르는 나도 '여성용' 또는 '전연령용' 또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게임'이라고 하면 '보통', '주류' 게임과 다른 무언가로 취급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저자는 그런 현상을 이렇게 표현한다.

게임 시장이 커지면서 온갖 게임들이 쏟아지자, '여성을 위한' 또는 '여아들을 위한' 게임이라는 홍보 수식어를 내건 게임들이 은근슬쩍 판매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이것들은 어릴 때 TV에서 만화 캐릭터 신발 광고가 나올 때 곁다리로 끼워 팔던 핑크색의 '여아용' 신발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게임 시스템은 또 어찌나 조악한지 옷 갈아입기, 화장하기, 색칠 공부 같은 대충 얼기설기 끼워 맞춘 콘텐츠로 '여심 저격'을 하겠다니, 어떤 상상 속의 여자들이 그 게임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괘씸하게 느껴질 정도다.
2020년 봄에 출시된 <동물의 숲>이 엄청난 일기를 끌고 전국적으로 품귀 현상을 일으킬 때, 이 게임이 '여심을 저격'해서 성공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도대체 그 '여심'이 뭐냐고 물어보면 명확하게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경쟁적인 요소가 없고, 아기자기해 보이고 귀여운 이미지인데 인기가 있으면 '여성용 게임'으로 취급해 버리는 게으름은 게임 업계가 소년을 위한 마케팅을 해 온 이래로 변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게임의 주류 문화는 남성을 주고객으로 설정하고 '여성용 게임'을 하위 문화로 따로 분류해 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업계나 다른 게이머가 보기에 '여성 게이머'는 어떤 존재일까? 대형 게임 광고에서 말하는 '게이머'에 여성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오프라인으로 만나 함께 게임했던 수많은 여성 친구들은 이미 게임을 그만두었고, 온라인상에서 만날 수 있는 먼 곳의 여성 게이머들은 "계집애들은 여기서 어울릴 생각 하지 말고 꺼져라"(순화된 표현임)"라는 이야기를 듣고 물밑에 숨었다. 놀이터의 불균형을 눈치채고 여성들이 자신들의 공간에 모이면, 그런 공간을 또 어떻게 알아내고 굳이 찾아와 "우리의 게임판에서 나가라"며 쫓아내려 들거나,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바라볼 뿐이다.

맞다. 기본적으로 남성, 그것도 18-35세의 백인 남성이 게임의 주요 타깃으로 설정되고, 여성은 뒷전이다. 게임은 '남자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 게이머들은 뭔가의 번데기 같은 취급을 받는다.

저자도 책 내에서 그런 경험을 여럿 공유하는데, 일례로 (어릴 적에)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고 있으면 꼭 남자들이 와서 시합을 걸거나 굳이 그 바로 옆에 와서 게임을 한다. 어떤 게임을 하든,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이런 '시비'는 이어진다.

지금은 오락실이 거의 사라졌으니 이런 문화도 사라졌을까? 그럴 리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여성이 상위에 랭크되거나, 나아가 프로 게이머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날리면 외모 평가부터 시작된다. 그다음에는 실력이 뛰어나지 ㅇ낳다면 게임도 못 하는데 나왔다는 이유로, 실력이 뛰어나면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고 의심을 받는다. 때로는 자신의 게임 실력이 진짜임을 공개적으로 '인증'하라는 식으로 게이머의 자질을 시험받기도 한다. 얼마 안 되는 여성 프로 게이머가 실력을 드러내면 그에게 패배하는 남성 프로 게이머는 놀림의 대상이 된다.

여성 프로 게이머는 현역에서 활동하는 동안 온갖 괴롭힘의 대상이 되다가 은퇴하고 나서야 "그 여성 게이머는 게임을 잘했다"라며 뒤늦게 평가받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런 사건들은 확실하게 말해 준다. 오락실이 사라진 지 10년, 20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그 정신은 뿌리 깊게 이어져 아직도 현대 온라인 게임에 지리멸렬하게 눌어붙어 있다는 사실을.

여기에 성희롱은 거의 기본 바탕이나 마찬가지다. 백인 시스젠더 남성이 아닌, 여성, 비백인 인종들, 또는 성소수자들의 관점을 반영한 게임을 만들거나 그런 관점으로 비평을 하면, 살해와 강간 협박을 받기 일쑤다. 

 

그러고 보니 대학 시절, 모 야구 팀의 본거지인 지방에서 올라온 여성 학우가 있었는데, 그 지역 사람이면 으레 그러듯이 자기 고향 팀 경기를 경기장에서 직관하면서까지 열렬하게 응원을 했다.

그런데 여성이 스포츠를 좋아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다 그 여성이 다 잘생긴 선수 때문에 얼굴만 보고 좋아한다고 생각하거나, 남친이 좋아하니까 그냥 덩달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좋아하는 거라고 먼저 생각을 해 버린다.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진지한지를 그 스포츠에 대한 규칙이나 현재 응원하는 팀의 현황 등을 줄울이 읊는 것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준다고, 그게 너무 싫다고 하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게임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성 게이머에 대한 멸칭은 또 얼마나 많은지. 나는 이 책에서 그중 몇 가지를 정리해 놓은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세상에, 왜 이런 말을 만들어서까지 여성을 비하하려고 하는 거지? 너무 충격적이었다.

 

(...) 그러나 여성 유저가 자신의 성별을 밝히면 낯선 생물을 보기라도 한 듯 이목이 쏠리곤 했다. 그러고 나서 여성 게이머라면 응당 지나쳐야 할 일종의 관문을 거치게 된다.

- 여자가 이런 게임을 왜 함?
- ◎◎(여성 멤버 이름)? 걔 게임 쥐뿔도 모르는데 예쁘다고 하는 거잖아.
- A 회사 게임은 캐릭터만 내세우고 게임성은 떨어지는데 겉모습 때문에 여성 팬들이 더 많은데, B 회사 게임은 시스템이 좋아도 (캐릭터 디자인이 나빠서) 여성 팬이 없다.
- ☐☐는 애인도 군대 갔는데 이 게임 계속해? 왜?

이런 문장들은 공통적으로 밑바탕에 하나의 사상을 깔고 있다. '여자 게이머는 진짜 게이머가 아니다.'

그러니 여성 유저가 자신의 성별을 드러내면 어떤게든 엮여 보려고 껄떡대거나, 지면 여자 탓을 하거나, 목소리만 들었는데도 온갖 성추행을 입에 올리는 것이다. 여성을 자신(남성)과 같은 '진지한' 게이머로 인식한다면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는가? 

 

272쪽밖에 안 되는, (내 기준으로는) 길지는 않은 책이지만 한국 게임판이 고치려고 노력해야 할 많은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짚어 주는 정말 좋은 책이다. 

각 챕터 사이에는 기존의 남성주의적 게임관에서 벗어난, 추천할 만한 게임을 소개하는 코너도 있다.

게임 자체는 무생물이고, 성별이 없다. 그러니 성별과 무관하게 모두 즐겁게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도록 게임판 문화도 바뀌어야 한다.

이 책의 부제처럼, 그냥 게임이나 좀 하게 해 주시길. 모든 게이머들에게, 그리고 여성주의자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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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조경숙, <아무튼, 후드티>

 

 

'후드티'라니? 책의 소재가 참 일상적이면서도 신기하다. 이런 경험은 작가 구달의 <아무튼, 양말> 이후 처음인 듯.

2020.01.31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구달, <아무튼, 양말>

 

[책 감상/책 추천] 구달, <아무튼, 양말>

[책 감상/책 추천] 구달, <아무튼, 양말> 오늘 리뷰를 쓸 책은, 내가 입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한 책 <일개미 자서전>의 저자 구달이 쓴 <아무튼> 시리즈의 한 편이다. 2019/10/04 - [책을 읽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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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흥미로워하며 읽어 보았는데, 후드티 하나에 이런 다양한 의미를 담을 수 있구나, 하고 놀랐다.

 

후드티의 짱팬, 그야말로 후드티가 제2의 피부라 할 수 있는 저자에게 후드티는 (이 에세이의 꼭지 개수인) 열한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1. 전투복

[<바람의 나라>를 플레이할 때] 이 사냥에 집중력을 쏟아붓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나의 현실 갑옷, 후드티였다. 후드티를 입는 것 자체보다는 후드티의 후드를 뒤집어쓰는 게 중요하다. 양 옆 시야를 차단해 집중력을 향상하는 독서실의 책상 칸막이처럼 일단 후드를 쓰고 나면 눈앞의 모니터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스스로에게 마법을 걸어 방어력을 향상시키는 내 주술사 캐릭터처럼, 나는 후드를 뒤집어쓰는 것으로 나 자신에게 집중력 향상의 마법을 걸었다. 그러면 키보드 조작이 능숙해지고 몬스터의 돌발적인 공격에도 더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통스러웠던 학창 시절, 나는 혼자임을 견디는 데 언제나 필사적이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절망에 지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그럴 때는 언제나 후드티를 입고서였다.

 

2. 부지런하게, 열심히 살아낸 하루하루의 증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옷이다. 새벽 다섯 시부터 늦으면 밤 열 시까지 이어지는 열일곱 시간 가까운 강행군이 가능하려면 옷이 불편해선 절대로 안 된다. 가슴이나 허리, 팔이나 소매, 어디 한군데라도 옷이 몸을 조이거나 거슬리면 저녁 무렵부터 이미 초주검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옷이 넉넉해야 한다. 옷에 이것저것 수납까지 되면 더 좋다. 그러니 캥거루 같은 주머니가 달린 후드티만을 극성맞게 찾게 된다.

편하다는 것 외에 후드티의 장점은 또 있다. 후드티는 내가 다니는 장소 어디에나 착 어울린다. 그뿐이랴, 내 역할에도 무리 없이 들어맞는다. 시위 현장에서 후드티는 유니폼이나 다름없다. 그건 개발자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가 후드티를 입든 원피스를 입든 아이는 항상 날 사랑해 주니까 엄마 역할을 해내는 데도 문제없다. 오히려 아이를 안는 데 미끄러지지도 않고 아이의 물건을 언제든 수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후드티는 가산점을 얻는다.

흔하디혼해 모자가 달린 것 외에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여도, 그렇기 때문에 이 옷은 무던하게 내 모든 일상을 받아 안는다. 그뿐만 아니라 후드티는 내 일상을 낱낱이 알고 있는 유일한 동료이기도 하다. 피곤한 하루가 끝나고 귀가하는 버스에 몸을 싣고 나면 기나긴 하루를 함께했던 후드티를 괜스레 만지작거린다. 

 

3. (개발자가 참석한 콘퍼런스의) 기념품

그렇지만 이런 체크무늬 셔츠조차도 후드티를 따라올 수는 없다. 그저 편하기만 한 체크무늬 셔츠와 달리 후드티에는 기념품으로서의 효용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개발자 콘퍼런스에서는 종종 후드티를 나누어주곤 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하는 게임 개발자의 이야기를 다룬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에서도 주인공 가야는 IT 회사 로고가 인쇄된 기념 후드티와 후드집업을 번갈아 입고 다닌다.

  

4. 몸을 가려 주는 마법의 망토

그런 내게 후드티는 몸을 가려 주는 마법의 망토였다. 나는 뱃살이 드러나지 않게 펑퍼짐한 옷을 입고 말린 어깨를 가리기 위해 두꺼운 후드를 찾았다. 신기하게도 후드티를 입고 나면 내 몸에 대해 아무런 부끄러움도 들지 않았다.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펑퍼짐한 원피스를 입어도 이 옷 안에 감추어 둔 살들이 빼꼼 드러날까 봐 바람이 세차게 불면 신경이 쓰였는데 후드티를 입으면 그러거나 말거나. 똑같이 펑퍼짐해도 원피스는 여리여리한 느낌을 주기 위해 가벼운 소재로 제작된 게 많다. 후드티는 바람 따위에는 끄덕없는 단단한 소재로 되어 있다. 웬만한 압력으로는 내 살을 노출시킬 수 없으니 두꺼운 후드티를 입고 나면 내 몸에 대해 의식하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나는 부단히 몸을 미워했는데 후드티는 오갈 데 없이 쏟아지는 내 미움을 잠시 멈추게 해 줬다. 모두가 내 동그란 배를 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도 후드티는 그 시야를 막아 줬다.
후드티를 입을 때 마음 편한 건 그저 배를 가려 주어서가 아니다. 후드티를 입으면 무언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해방된다. 투피스건 원피스건 후드티와 마찬가지로 사이즈를 넉넉하게 입는 건 똑같다. 그럼에도 그런 옷들을 입을 땐 이상하게 더 여성스럽고 우아한 사람처럼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그래서 시폰 소재 원피스를 입을 땐 단화라도 신고 배낭 대신 핸드백을 멘다.

후드티를 입으면 그런 건 생각할 필요가 없다. 물론 후드티로 감싼 내 몸이 건강미 넘치는 몸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래도 살이 쪘건 배만 나온 E.T. 체형이건 굳이 더 여성스러워야 한다거나 어떤 이미지에 맞추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후드티를 입은 나는 예쁘거나 멋지거나 귀엽거나 상냥하거나 똑똑하거나 잘난 싸람이 아니라 그냥 후드티를 입은 한 명의 사람이다.

 

몇 개 더 있지만 책 내용을 다 스포일러 할 수는 없으니 여기까지만. 후드티에서 이만큼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건 그만큼 후드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는 뜻일 거다. 

후드티를 피부처럼 입고 살아가는 저자에게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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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시루, <시루하루>

 

 

나는 몰랐는데 이미 트위터에서 인기 있으신 '시루'라는 작가님이 그린 본인 가족 일상을 그린 만화를 책으로 엮은 게 바로 이거다.

나는 리디셀렉트에 있길래 그냥 귀여워 보여서 골랐을 뿐인데!

서열 3위 장녀 '시루', 희미한 분위기의 인싸 차녀 '제로', 그리고 막둥이 남동생 '주노'. 이렇게 셋이 메인이고 가끔 소녀 같으신 엄마와 후덕한 아빠 캐릭터도 등장한다.

 

엄청나게 특별하게 배꼽 빠지는 에피소드는 없는 것 같은데 하나하나가 그저 다 귀엽고 사랑스럽다.

내가 원래 화목한 가족에 어떤 환상 같은 게 있는 사람이 아닌데, 이걸 보는 동안만큼은 나도 형제자매가 더 있었으면 좋겠고 사이 좋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덮고 난 후에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ㅋㅋㅋㅋㅋ

 

귀엽고 힐링되고 재미있는 일상물을 찾으신다면 퍽 볼만하다. <시루하루>가 2권, 3권 계속 나왔으면 좋겠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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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윤이나, <라면: 지금 물 올리러 갑니다>

 

 

내가 2권까지만 읽고 나랑 안 맞는 거 같으니 더 이상 손대지 않겠다고 했던 그 <띵> 시리즈의 한 권이다.

(그때 읽은 책들 리뷰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시라!)

2021.05.10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이다혜, <조식: 아침을 먹다가 생각한 것들>

2021.05.17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미깡, <해장 음식: 나라 잃은 백성처럼 마신 다음 날에는>

 

사실 <띵> 시리즈 중 이걸 제일 먼저 알게 됐는데 1권부터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도전했다고 낭패를 봤던 것이다.

2권도 내 취향은 아니어서 포기할까 하다가, 애초에 이게 너무 재밌어 보여서 이 시리즈에 관심을 갖게 된 거니까 이것까지는 읽어 보자고 생각했고, 도전했다.

그 결과는, '재밌는데?'였다. 저자가 드디어 내 취향이랑 맞는 경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 책은 정말 대단하다. '라면'이라는 소재를 놓고, 라면 중독자라 부를 만한 저자가 라면 끓이는 법을 각 꼭지의 첫머리로 해서 글을 이끌어 나가는데, 라면과 관련한 재미있고 흥미로운 자기 경험을 정말 신기하게 잘 녹여 냈다.

'라면이라는 소재로 이렇게까지 재밌는 글을 쓸 수 있다고?' 싶을 정도로 놀랐고, 저자의 글솜씨에 감탄했다.

예컨대, 저자의 아버지는 저자처럼(아니, 저자가 아버지를 닮아서) 라면을 좋아하시는데, 아버지와 라면 이야기를 하면서 부녀간의 사랑으로 옮겨가는 식이다.

딸이 오전에 깨어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ㅅ을 알 생각이 엇는 것인지 받아들이지 못한 것인지 여전히 아무 때나 전화를 건다. 전화를 걸어서 언제 오냐고 묻곤, 밥 잘 챙겨 먹으라고 한다. 통화의 전후로 내가 라면을 먹었거나 먹게 될 확률은 매우 높지만, 나는 그러겠다고 한다. 그러면 아빠는 말한다.

"딸, 사랑한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는 사랑한다는 말만큼은 절대 아끼지 않는 사람과 나는 닮았다. 특히 입맛이, 가장 닮았다.

나는 이런 글쓰기가 참 멋지다고 생각한다. 라면 이야기로 시작했고 라면이라는 중심 소재에서 멀어지지 않지만, 라면뿐 아니라 다른 이야기(이 글에서는 아빠에 대한 사랑, 아빠의 딸에 대한 사랑)도 같이 하는 것.

 

라면을 평가하는 저자의 기준은 사뭇 진지한데, "어떤 음식의 대체제가 아니라, 그냥 라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개장칼쿡수'를 줄인 '육칼'이라는 이름의 인스턴트 라면이 출시되었을 때, 저자는 이를 꽤 괜찮게 생각했지만(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라면 라인업을 짤 때, 후보군 정도에는 언제나 올려줄 만한 균형감 있는 라면"), 리뉴얼 이후 방향이 틀려졌다고 저자는 평한다.

"식당에서 판매하는 그 육개장 칼국수의 맛을 목표로" 삼았고, 그래서 예전의 그 매력적인 '육칼'이 아니라 '육개장이 되고 싶어 하는 무언가의 번데기 같은 라면'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육칼'을 먹을 때 저자는 생각한다.

리뉴얼이 된 육칼을 먹으면, 나는 쓸쓸해진다. 그건 더 나은 나, 더 괜찮은 내가 아니라 더 멋ㅅ진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누군가를 볼 때의 마음과도 비슷한 것 같다. 1,000원이 조금 넘는 인스턴트 라면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건 육개장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육개장은 한 그릇에 8,000원으로, 반찬으로 석박지와 김치가 곁들여지고 계절과일 한 조각이 디저트로 함께 나온다. 나는 육개장을 먹고 싶으면 그 가게로 갈 것이다.

지금 내가 먹고 싶은 것은 라면이다. 라면은 먹고 싶은 어떤 음식을 대체해서 가성비로 먹는 그런 카테고리의 음식이 아니다. 라면은 오직 라면이어서 먹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육칼'에서 다른 누구처럼 되고자 하는 내가 아닌, 더 나은 버전의 나를 꿈꾸는 태도, 다른 누구와 나를 비교하지 않고 내 개성을 온전히 내 매력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까지 연결해 글을 쓸 수 있다니, 나는 라면을 이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을 처음 본다.

 

'셋째, 컵라면을 골랐다면'이라는 꼭지에서는 저자가 호주에서 워킹 홀리데이로 육가공 공장에서 일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통해 일과 나란 사람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는 점도 정말 놀라운데, 바로 다음 꼭지인 '넷째, 물을 끓이기에 앞서'에서는 '토지문화관'에서 머물던 시절 겪었던, 납량 특집 뺨치게 스릴 넘치는 여치 이야기를 풀어 놓는 것도 기가 막히다.

이 두 꼭지가 내 최애 꼭지인데, 후자에서 웃겼던 부분을 조금만 옮겨 적어 보겠다.

그 여름에 나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만나는 모두를 그렇게 부르다 보니 입에 완전히 붙어버린 탓이었다. "간밤에 찾아왔다는 멧돼지 선생님이…"라고 문장을 시작하곤 하는 식이었다. 호칭을 선생님으로 통일하고 보니 어디에나 선생님이 있었다. 7월 한 달 사이 여름의 연례행사라는 멧돼지 선생님이 자녀들과 함께 다녀갔고, 포수 선생님도 다녀가셨으며, 어느 밤에는 보름달 선생님도 떴다 지며 착실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고 나서 슬슬 풀리기 시작하는 '여치' 썰이 진짜 너무 웃긴데 이것까지 공개하면 책 안 찾아보실 거 같으니까 이건 남겨 두겠다. 구입해 보시거나 도서관 또는 서점에서 딱 이 부분만이라도 살펴보시라. 정말 최고다.

 

리디북스에서 '미리보기'로 봤을 때 '이거 괜찮겠는데?' 느낌이 와서 구입해 본 건데 역시나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만인이 사랑하는 라면이라는 소재로 다양한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내는 저자의 글솜씨가 참 맛깔나다. 가볍게, 재미있게 읽을 에세이를 찾으신다면, 그리고 라면을 먹을 구실이 필요하시다면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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