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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영화 추천] Old Boys(올드 보이즈, 2018) -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현대 소년 버전

 

 

감독: 토비 맥도널드(Toby MacDoland)

 

우리의 주인공 앰버슨(Amberson, 알렉스 로더 분)은 칼더마운트(Caldermount)라는, 소년들을 위한 명문 사립 학교에서 아침마다 물벼락 세례를 맞으면서도 꿋꿋하게 학교 생활을 하는 소심한 소년이다.

어느 날, 그는 평소처럼 아침에 일어나 물벼락 세례에 쓰일 물을 떠서 (다른 학생들이 시켰다) 돌아가는 길에 넘어지고, 한 소녀를 만난다. 

만나자마자 처음 하는 말이 프랑스어를 내뱉는데, 일단 예쁘다. 이름은 아녜스(Agnes, 폴린 에티엔 분). 보자마자 사랑에 빠질 것 같은 느낌!

앰버슨은 소녀가 근처로 이사 왔구나 싶어 종이 상자를 옮겨 주려다가 다시 넘어지고 만다. 그 안에 든 건 책 한 무더기.

그런데 갑자기 무척 성난 것 같은 프랑스 남자가 나타나더니 그 소녀에게 무어라고 계속 이야기한다. 대략 소녀의 아버지인 모양.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당당한 풍채의 남자는 새로 온 프랑스어 선생님이었다. 이름하여 바비노(Babinot, 드니 메노셰 분) 선생님.

첫 수업 때 바비노 선생님이 학생들을 랜덤으로 한 명씩 지목해 지난번 선생님께 배운 내용을 읊어 보라고 시키고 있는데, 선생님의 딸 아녜스가 뭘 가져다주러 왔다.

마침 이때 암기 순서는 학교에서 거의 왕처럼 군림하는, 같은 남자들도 인정하는 초인싸 훈남, 윈체스터(Winchester, 조나 하우어-킹 분)다.

윈체스터가 암기해야 할 내용을 떠올리지 못해 버벅거리는 걸 앰버슨이 뒤에서 살짝 알려 줘 다행히 자연스럽게 (그리고 능청스럽게) 암송 시작.

아녜스는 윈체스터가 너무나 멋지게 프랑스어로 시를 암송하는 순간을 감상하고,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얼마 후, 아녜스가 전화로 앰버슨을 따로 불러내더니 윈체스터에게 이걸 전해 달라며 작은 소포를 건넨다. 

'왜 내가 이걸 윈체스터에게...?'라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윈체스터에게 소포를 가져다준다. 윈체스터가 뜯어 보니 그건 비디오 테이프였고, "나 원래 이런 여자 아닌데, 너는 좀 달라 보여"라는 메시지를 담은, 다소 도발적인 아녜스의 메시지가 다소 예술적인 영상이 녹화돼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에 뒤지지 않을, '예술적인' 영상을 찍어서 아녜스에게 답장을 한단 말인가? 윈체스터는 솔직히 잘생기긴 했지만 예술적인 타입과는 거리가 멀고, 아주 똑똑한 편도 아니다.

윈체스터가 말주변이 없다는 걸 알게 된 후, 보다못한 앰버슨은 윈체스터를 도와주기로 하는데... 앰버슨은 과연 다른 남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와 잘되도록 도와주는 큐피드 역할에 만족할 것인가?

 

중간에서 살짝 오른쪽에, 안경 쓰고 두 팔을 위로 쭉 뻗고 있는 게 우리의 주인공 앰버슨.
윈체스터 (왼쪽) 대신 아녜스의 전화를 받아 멋있게 대답해 주는 앰버슨 (오른쪽)
이 영화는 스틸 컷도 많이 없어서 아녜스 사진도 정말 어렵게 구함...
그래도 영화 쓰리탑 중 한 명인데 얼굴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어 열심히 찾은 윈체스터 사진. 

 

프랑스 작가 에드몽 로스탕(Edmond Rostand)의 유명한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Cyrano de Bergerac, 이하 시라노)>를 기초로 하여, 현대를 배경으로 다시 쓴 영화.

원작 <시라노>의 큰 틀대로, 체구도 작고 소심하지만 예술적 감성을 가진 앰버슨이 학교에서 제일 잘나가는 미남이지만 똑똑하지는 못한 윈체스터가 예쁜 아녜스와 잘되도록 도와준다는 게 큰 플롯이다.

 

<시라노>는 워낙에 인기가 많은 작품이라 영화로도 여러 번 만들어졌고, 현대식으로 각색한 버전도 여럿 있다. 나도 스티브 마틴(Steve Martin)이 시라노 역할(극중 이름은 찰리)을 맡은 <Roxanne(록산느, 1987)>를 봤는데, 이것과 그걸 비교하자면, 음, 옛날 영화이긴 해도 <록산느>가 더 나은 것 같다.

<올드 보이즈>는 연기는 둘째치고, 대사가 별로다. '이런 멘트에 여자가 넘어간다고?' 싶은 멘트를 조언이랍시고 앰버슨이 윈체스터에게 해 주는데, 나라면 '뭐라는 거야, 이 자식이?' 했을 듯.

아녜스가 그 말에 넘어갔다면, 그건 전적으로 윈체스터 역의 배우 조나 하우어-킹이 잘생겨서 그런 게 아닐까.

 

이걸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자들만 자신의 외모를 의식하고 비관하는 줄 알았는데, 남자들도 그러는구나.'

보통 남자들은 여자들을 예쁜 여자 아니면 못생긴 여자로 구분하고 (실생활에서는 꼭 그렇지 않더라도) 미디어에서는 '못생겼는데 착하거나 똑똑하거나 해서 사랑받는' 여자의 모습은 거의 보여 주지 않는다. 예쁜데 착하거나 똑똑하기까지 한 여자는 있지만.

다시 말해 여자는 '예쁜' 게 기본 디폴트이고, 그렇지 않으면 여자 취급도 받지 못한다는 소리다.

반면에 남자는 아무리 (좋게 표현해서) 호감형 외모가 아니어도 능력이 있다든가, 성격이 좋다든가, 하여간 뭔가 하나 있으면 여자 하나는 꿰찰 수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심지어는 호감형 외모가 아니고 정말 쥐뿔도 가진 게 없는데 제작자(작가나 감독 등)의 욕망이 반영되어 예쁜 여자를 얻기도 한다(심지어 그 남자가 병X 짓을 해도 귀엽고 웃기다고 봐 주는 것으로 설정된 여자는... 이건 진짜 제작자들이 '현실'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표현했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즉, 다시 말해, 남자들은 대개 외모가 어떻든 그것이 여자를 얻는 데 크게 걸림돌이 된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개인 한 명 한 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지만) 대체적으로 사회는 그렇게 주장한다. 여자는 예뻐야 하지만 남자는 '반드시 잘생겨야 한다'는 압박을 받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시라노>의 틀이 되는 구도가 내게는 신선했다. 똑똑하고, 재치 있고, 알고 보면 나름대로 매력도 있지만 얼굴이 잘생기지 못해서(시라노의 경우 보기 흉할 정도로 큰 코라는 설정) 여자를 얻지 못하는 남자, 그리고 그 반면에 엄청 잘생겼지만 머리나 가슴 안에 든 게 없는, 속 빈 강정 같은 남자.

그걸 보고 '음, 남자들도 자신의 외모를 의식하고 잘생긴 남자에게 부러움 또는 박탈감 등을 느끼는구나' 싶었다.

보통 남자들은 워낙에 사회적으로 우쭈쭈를 받고 자라서 외모와 상관없이 자신감을 느끼고 여자 하나쯤 차지할 자격이 있다는 믿음을 마음속 깊이 품고 사는 줄 알았는데. 

그런 점에서 <시라노>는 내게 신선했다. '외모야 어떻든 내면이 중요한 거야!'라는, 다소 교과서적이고 뻔한 교훈은 별로였지만.

 

그런데 <올드 보이즈>는 원작만큼의 깊은 고뇌라든지, 시라노의 번득이는 재치라든지 하는 게 보이지 않는다.

후반에 앰버슨과 윈체스터가 서로를 '친구'로 생각하는 건 감동적이었지만, 그뿐이다. 스포일러가 될까 봐 더 말하지는 않겠지만 결말이 나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원래 영국 내셔널 시어터(National Theatre)에서 하는, 제임스 맥어보이가 시라노 역을 맡은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를 보려고 했는데 이 코비드-19 사태로 영화관을 갈 수가 없어서 취소돼 버려 이 아쉬운 마음을 이 영화(어쨌든 큰 틀은 <시라노>니까)로 달래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나도 제임스 맥어보이가 나오는 <시라노>를 보고 싶다... 😭물론 그 잘생긴 얼굴로 '못생긴 시라노' 연기하는 것도 설득력은 없겠지만.

어쨌든 <올드 보이즈>는, 앰버슨 말대로, '바지 입은 래브라도 강아지' 같은 윈체스터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시기를.

아니면 원작 <시라노>의 큰 팬이어서 그와 관련된 작품이라면 뭐든 섭렵하고 싶은 분들, 또는 넷플릭스 시리즈 <The End of the F***ing World(빌어먹을 세상 따위)>에서 알렉스 로터는 귀엽게 보신 분들. 영화 속에선 안경 때문에 더 찌질하게 보이는데 사실 안경을 벗으면 이 친구도 귀엽고 준수하게 생기긴 했다.

[영화 감상/영화 추천] Good Boys(굿 보이즈, 2019) - 애들은 가라! 어른이들을 위한 폭소 만발 영화!

 

 

감독: 진 스툽니스키(Gene Stupnitsky)

맥스(Max, 제이콥 트렘블레이 분)는 이제 6학년에 올라갔다. 가장 친한 친구 둘, 루카스(Lucas, 키이스 L. 윌리엄스 분)와 토르(Thor, 브래디 눈 분)와 함께 '빈 백 보이즈(Bean Bag Boys)'를 결성해 탄탄한 우정을 쌓아 가는 중.

이 '빈 백 보이즈'를 잠시 소개하자면, 맥스의 최대 관심사는 브릭슬리(Brixlee, 밀리 데이비스 분)라는 여자애. 열렬히 짝사랑 중이고 미술 시간에 그 애에게 주려고 목걸이도 만들었는데 현실은 아이 컨택트도 부끄러워서 못 하고 있다. 그래도 세 친구들 중 유일하게 이성에 눈을 뜬 편.

루카스는 모범생에 가까운 편으로, 예컨대 CPR 인형에 대고 뽀뽀 연습을 해 보기 전에도 '그 전에, (인형의) 동의는 얻었어? 그렇지 않으면 성추행이 된다고!'라고 말하는 그런 애다. 부모님이 이혼하게 되어서 무척 마음 아파하지만 친구들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으려 한다.

토르는 거칠고 터프하게 보이고 싶어 하는, '상남자'를 꿈꾸는 소년이다. 노래하기를 좋아하고 교내 뮤지컬 <락 오브 에이지(Rock of Ages)> 오디션에 참여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쿨하지' 않아 보일까 두려워한다. 

그런데 어느 날, 맥스가 학교 최고 '쿨한' 애인 소렌(Soren, 아이작 왕 분)에게 '키스 파티'에 초대받는다. 그 파티에 브릭슬리도 올 거라고 해서 더욱 흥분한 맥스는 두 친구와 함께 '도대체 어떻게 하면 키스를 하는 건지' 배우려고 인터넷 검색도 해 보지만 무소용.

그런데 토르가, 이웃에 사는 한 고등학생 누나를 염탐해 보자고 제안한다. 그 누나의 이름은 해나(Hannah, 몰리 고든 분)인데, 친한 친구 릴리(Lily, 미도리 프랜시스 분)와 수영장에서 이야기하다, 남자 친구와 싸우고 헤어진다.

남자 친구가 떠난 후, 릴리가 해나를 위로하려 포옹하자 이 둘이 키스할 거라고 생각한 세 소년은 맥스의 아버지가 출장을 가기 전 절대로 갖고 놀지 말라며 엄포를 놓은 드론을 떠올린다. 그리고 드론을 가져와 담장을 넘어 해나 누나네 수영장 쪽으로 띄웠는데 아뿔싸! 드론이 떨어져 버렸다! 

이거 잃어버리면 아빠에게 엄청 혼날 텐데! 이 드론을 되찾으려면 누나들에게 가서 돌려 달라고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누나들 뽀뽀하는 걸 염탐하려고 했다는 걸 들키면 어떡하지!? 

 

왼쪽부터 루카스, 가운데가 맥스, 오른쪽이 토르. (루카스 티셔츠 졸귘ㅋㅋㅋㅋㅋ)
이렇게 빈 백을 깔고 앉아 놀아서 '빈 백 보이즈'라는 멋진(?) 팀명이 탄생했다.
음, 네, 뭐... CPR 인형이라고 해 둡시다. ((빈 백 보이즈))는 소중하니까...

 

 

제목이 <굿 보이즈>인 데다가 포스터 속 애들이 너무 무해해 보여서 '아, 애들이 나오는 되게 귀여운 영화인가 보다 ㅎㅎ' 하고 틀었는데, 웬걸...

아니, 애들이 귀엽긴 한데, 이건... 예상 밖이었다. 너무너무 웃기고 재미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일단 결론부터 말씀드리겠다. 이건 절대로 가슴 따뜻해지는 아이들용 영화가 아니다! 이건 솔직히 내가 보면서 '저 애들... 대본 사기를 당한 건 아니겠지?'라고 생각할 정도로, 아주 100% 성인용 영화다.

그렇다고 해서 잔인한 게 나온다거나, 야한 장면이 나온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 영화의 웃음 포인트가 다음 두 가지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1. 아이들이 어른들 하는 것을 따라 하며 쿨해 보이려 한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이는 아이라서, 어떤 것들에는 전혀 무지하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첫 번째, 아이들이 어른들 뺨치게 욕을 많이 한다든가, 애들이 몰래 구한 맥주를 한두 모금 마시면서 엄청 '터프 가이'인 척하는 데서 웃음이 나온다는 거다.

맥스가 브릭슬리와 키스하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모험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자, 모험에 지친 토르가 '그깟 년(skank) 하나 때문에 그래?'라고 말하고 이에 맥스가 분노하는 장면은, 분명 다 큰 남자 어른들이 할 만한 말싸움을 따라 하는 거라 웃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어른 세대가 여성을 하찮게 보고 그렇게 대하는 것을 벌써 이 어린애들에게 가르쳤구나' 싶어서 착잡해지기도 한다. 일종의 거울이 되어 준달까.

그리고 두 번째, 이게 진짜 이 영화가 아이들 영화일 수 없는 이유다. 아이들이 아무리 어른들을 따라 쿨해 보이려 해도 성적인 면에는 아직 무지하기에, 본의 아니게 어른들에게 웃음과 민망함을 둘 다 선사한다.

예를 들어, 토르의 부모님이 가지고 계신 'CPR 인형'은, 세 소년들 중 아무도 'CPR 연습용'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지만, 성인이 보기엔 누가 봐도 너무나 리얼 돌인 것...

토르네 부모님 취향이 상당히 의심되는 대목인데, 어째서인지 토르네 집에 SM 플레이용 도구(라텍스 가면, 채찍, 애널 비즈 등)가 있어서 세 아이들이 낯선 남자(루카스가 가진, D&D 또는 유희왕스러운 카드를 팔려고 매물로 올려 놨더니 구매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를 집에 들이기 전, 나름대로 '무기'랍시고 챙긴 게 이거. 이걸 보면서 웃는 동시에 제발 애들이 적어도 촬영 당시엔 저게 뭔지 몰랐기를 바랐다. 

음, 그래, 얘들아. 한 10년쯤 더 지난 후에 커서 알아차리게 되는 게 정신 건강에 나을 것 같구나... 어른들이 이런 거 시켜서 미안해... 근데 너무 웃겼어ㅠㅠㅠ

그리고 애초에 고작 중학생(미국 학년제 기준) 데리고 뮤지컬 <락 오브 에이지>를 프로덕션 한다는 게 말이 되냨ㅋㅋㅋ 섹스, 로큰롤, 마약 이런 이야기인뎈ㅋㅋㅋㅋㅋ 뮤지컬 지도 교사 미쳤냐곸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영화 후반에 나오는 장면인데 너무 깜찍하게 웃기니까 꼭 보시길!)

 

이제 왜 이게 애들 영화가 아닌지 아시리라 믿는다. 애들을 데리고 만든 영화인데 전체 관람가가 아니고 15세 이상 관람가라니... 그나마 19금이 아닌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어쨌거나, 아이들이 해맑게 성인용품을 가지고 노는 것에 대해 별 거부감이 없고 그냥 웃기다고 생각하는 분이면 이걸 추천한다. 정말 배꼽 빠지게 웃을 수 있다.

하지만 '아니, 이건 아동 학대 아니얏!?'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음, 당신은 루카스 같은 타입이군요. 루카스와 함께 'S.C.A.B.(Student Coalition Against Bullying, 괴롭힘에 맞서는 학생 연합)'에 참여하셔서 많은 꿈나무들을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이건 영화를 봐야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만).

이렇게 말하는 나도 루카스가 최애니 오해는 마시길. 애가 너무 착하고 반듯한데 그게 상황이랑 안 어울리니까 더욱 웃기고 짠하다.

어쨌거나 15세 이상이라면 웬만큼 알 건 다 아니까 이것도 재미있게 볼 수 있을 듯. 아이들을 보며 귀여움과 재미를 동시에 느끼고 싶다면 강력 추천!!

 

+ 트리비아 하나. 영화에서 루카스의 카드를 사러 온 구매자 '클로드(Claude)' 역은 영국 코미디언 스티븐 머천트가 맡았다.

+ 트리비아 둘. 루카스의 어머니 역할은 미드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Parks and Recreation)>의 '도나(Donna)' 역을 맡았던 레타(Retta)이다.

+ 트리비아 셋. 영화 제목은 마틴 로렌스와 윌 스미스가 나오는 <나쁜 녀석들(Bad Boys, 1995)> 시리즈의 패러디로 추정.

+ 트리비아 넷. 각본 작업에 코미디언 세스 로건이 참여했다.

[영화 감상/추천] Empire Records(엠파이어 레코드, 1995) - 우리 엠파이어 레코드를 구하자!

 

감독: 알란 모일(Allan Moyle)

 

자정까지 영업하는 레코드(와 CD) 가게, '엠파이어 레코드'의 야간 매니저인 루카스(Lucas, 로리 코크레인 분)는 점장인 조(Joe, 안소니 라파글리아 분)의 책상을 뒤지다가, 엠파이어 레코드의 경영이 부진해 곧 레코드사 프랜차이즈 브랜드인 '뮤직 타운(Music Town)'으로 바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엠파이어 레코드 경영에 도움이 되고자 루카스가 선택한 방법은, 그날 매출인 9천 달러를 가지고 라스 베이거스로 가는 것.

그곳에 있는 카지노에서 9천 달러를 밑천 삼아 대박을 터뜨리고 돈을 불려 돌아와 엠파이어 레코드를 살린다는 게 그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 루카스는 다른 사람들 도박에 훈수는 참 잘 두는데(한 블랙잭 게임에선 어떤 숫자가 나올지 예측하기까지 한다) 실제로는 결과가 형편없다.

어쩌다 보니 첫 판은 좋아서 돈을 크게 땄는데, 바로 그다음 판에 전부 다 잃었다. 아뿔싸, 어떡하지? 엠파이어 레코드 매출을 훔쳐 와서 도박을 한 건데...

다음 날 다른 아르바이트생들과 점장이 출근하고 이를 알게 되면 어떡하지? 엠파이어 레코드는 이제 망하는 걸까?

 

엠파이어 레코드에서 하루 동안 일어나는 일을 그린 유쾌한 코미디 영화.

이 영화의 매력은 등장인물들 하나하나가 다 매력적이라는 거다.

사진 왼쪽, 스티브 잡스 뺨치는 검은 터틀넥을 입은 게 루카스.

일단 영화 처음에 만나게 되는 루카스는 '더 도어스(The Doors)' 같은 밴드의 노래 가사를 인용하기를 좋아하는, 다소 현학적이고 청산유수인 캐릭터이다.

처음에는 '뭐야, 돈 불리려고 가져갔다가 망해서 돈 다 잃었잖아! 돈 날린 주제에 나불나불 말은 잘해요' 하는 마음으로 좀 미워했는데 보다 보니 본성은 착한 애라는 걸 알게 되어 좋아하게 됐다. 

A.J.(조니 휘트워스 분)와 마크(Mark, 에단 엠브리 분)는 다음 날 루카스가 "너희들을 알게 되어 좋았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는 걸 알아 둬."라는 말을 남기는 걸 마지막으로 볼 뻔한(어차피 루카스가 다시 돌아온다) 아르바이트생이다. 얘들이 제일 먼저 출근했거든.

얘가 마크. 이 짤은 마리화나가 들어간 브라우니를 먹으면서 TV로 메탈 밴드 콘서트 장면을 보다가 환각을 보는 장면이다.

마크는 백치미가 매력인 아르바이트생이다. 애가 나쁜 건 아닌데 약간 어리바리하고 눈웃음이 참 예쁘다.

A.J.

A.J.는 미술적 감각이 풍부한 청년으로, 예쁜 아르바이트생 코리(Corey, 리브 타일러 분)를 짝사랑하고 있다. 오늘은 꼭, 점심 전까지, 1시까지, 아니, 꼭 1시 37분 전까지는 고백하리라고 다짐한다.

또한 AJ는 고운 마음씨의 소유자인데, 단발로 출근해 화장실에서 머리를 밀고 나온 데브라(Debra, 로빈 튜니 분)의 손목에 붕대가 감겨져 있다는 걸 누구보다도 먼저 눈치채고 무슨 일 있는 거냐고 물어본다(데브라는 전날 밤에 자살 시도를 했다고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이때 다른 애들은 '너 화장실 들어가기 전까지는 머리카락이 있었던 것 맞지?' 하고 확인하거나 '역시 정신이 좀 불안정한 애인가 봐' 하고 수근거리는 게 전부인데 말이다.A.J.가 코리를 좋아하긴 해도 친구인 데브라를 걱정해 주는 모습이 참 좋았다.

오른쪽 반삭발 머리가 데브라. 반항적이고 머리가 살짝 돈 애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마음에 깊은 슬픔이 있는 아이다.

데브라도 처음 봤을 땐 '뭐야, 왜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갑자기 원빈의 <아저씨>마냥 삭발을 해?' 하고 그저 이상한 애라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마음이 참 깊고 착한 애더라.

대존예 코리...

코리는(무려 리브 타일러!) 지나(Gina, 르네 젤위거 분)와 같이 이곳에서 일하는 여학생으로, 하버드에 갈 거라는 아버지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어 부담스러워하는 우등생이다.

A.J.의 짝사랑 상대이기도 한 코리는 오늘 이 엠파이어 레코드에서 열리는 '렉스 매닝(Rex Manning)의 날(한물간 가수 렉스 매닝이 엠파이어 레코드에 사인회 하러 오는 날)'에, 렉스 매닝에게 자기의 '처음'을 주기로 결심했다.

가운데에서 앞치마만 입고 있는 게 지나. 이 짤로 지나의 성격 설명을 대신한다.

지나는 코리와 정반대다. 우등생도 아니고 청순 콘셉트도 아니랄까. 대신에 섹시 스타일이라고만 해 두겠다. 

 

나는 코리와 지나가 처음엔 친구이다가 나중에 싸우고 화해하며, 또 코리와 데브라가 서로 사이가 안 좋다가 모종의 이유로 친해지는 흐름이 너무 좋았다.

코리와 지나는 반대이지만 서로 없이는 못 사는 절친이라는 것도 흥미로웠고, 코리와 데브라도 처음엔 서로를 이해 못 하다가 나중에 서로를 위하는 행동을 해 준다는 게 감동적이었다.

 

루카스가 9천 달러를 가져가서 날려 먹었다는 사실을 점장인 조가 알게 되었을 때 루카스가 얼마나 차분하게 자기가 잘못한 걸 인정하는지 정말 직접 봐야 한다.

루카스는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싶게 얄미우면서도 절대 싫어할 수 없는 매력을 뿜어낸다.

근데 내가 그때 조 입장이었으면 뒷목 잡고 쓰러졌을 듯. 게다가 일이 진행되는 꼴을 보면 이 영화는 제목을 <엠파이어 레코드>가 아니라 <점장 조의 험난한 하루> 뭐 이 정도로 지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르바이트생들 때문에 아저씨 늙겠다...

어떤 서사든 갈등이 서사의 재미를 더하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뭐.

 

사실, 위에서 소개한 아르바이트생들이 이 영화의 전부가 아니다. 이 영화를 더 골 때리게 웃기게 만드는 약방의 감초 같은 조연이 있다.

코리 소개할 때 언급한 렉스 매닝이 나오는 부분도 웃기고, 엠파이어 레코드 직원도 아니면서 계속 직원들 공간에 들락날락하는 에디(Eddie, 제임스 '키모' 윌스 분)도 웃기다. 

A.J. 옆(사진 오른쪽) 반항적인 표정의 이 청소년이 워렌이다.

그 조연들 중 워렌(Warren, 브렌단 섹스톤 분)은 이 레코드 가게에 CD를 훔치러 왔다가 루카스에게 바로 붙잡힌 현행범인데, '워렌 비티'라는 가명을 댔다가 끝까지 워렌으로 불린다(본명은 영화에서 확인하시라).

하여간 얘는 경찰서에 인수되어도 청소년이라 뭘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서 금방 풀려나고, 또 엠파이어 레코드로 돌아온다. 너무 웃긴데 이건 진짜 영화를 봐야 함ㅋㅋㅋㅋ

 

이러한 웃긴 장면이 있다고 하나하나 다 설명해 드리고 싶지만 그러면 재미가 없을 테니까 그런 짓은 안 하겠다.

대신에 한번 틀면 80분가량 즐겁고 유쾌하게 웃으실 거라고 보장할 수 있다(만약에 재미가 없으면? 음, 그렇다면 우리는 영화 취향이 무척 다르다는 데 합의하는 것으로...).

90년대, 젊은 스타들(리브 타일러나 르네 젤위거 같은) 모습을 보는 재미도 있다.

참고로 2003년에 '엠파이어 레코드 리믹스, 팬 에디션(Empire Records Remix, the Fan Edition)'이라는 타이틀로 발매된 DVD는 기존 영화를 새롭게 편집한 버전과 공개된 적 없는 새로운 장면들도 들어가 있다고 한다.

나는 이 2003년 버전도 한번 구해서 보고 싶다 ㅎㅎㅎ 두 번 보고 싶을 정도로 재밌는 영화니까! 강력 추천~

 

[영화 감상/영화 추천] Never Surrender: A Galaxy Quest Documentary(네버 서렌더: 어 갤럭시 퀘스트 다큐멘터리, 2019) - 과몰입 오타쿠들 만세!

 

감독: 잭 베넷(Jack Bennett)

 

딘 패리소트(Dean Parisot) 감독의 SF 영화 <갤럭시 퀘스트(Galaxy Quest, 1999)>의 제작 과정에 숨겨진 사연 등을 알아보고 이 영화를 추억하는 다큐멘터리이다.

이 다큐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이 끝장나게 멋진 영화(<갤럭시 퀘스트>)를 아직 보지 않으신 분이 계시다면, 부럽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이 영화를 처음 보는 그 감격적인 순간을 누릴 수 있다니!

<갤럭시 퀘스트>의 시놉시스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때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한 SF 드라마의 배우들이 코믹콘을 위해 한자리에 모인다.

이 드라마의 캐스트는 다들 개성이 있다. 예컨대, 잘나갔던 때를 떠올리며 노스탤지아에 젖어 사는, 대장 역할을 맡았던 배우(팀 알렌 분)라든지, 쭉쭉빵빵 금발 미녀라는 이유로 지성이나 연기력보다는 외모로만 평가받은 게 불만인 여배우(시고니 위버 분)라든지, '내가 원래 이런 걸 할 배우가 아닌데... 내 진정한 연기 혼을 아무도 몰라 줘!'라며 자신이 맡았던 역할을 부끄러워하는 배우(알란 릭맨 분)라든지.

그런데 진짜 놀라운 일은 이제 일어난다. 이 드라마를 송출했던 전파를 우연히 잡아 보게 된 어떤 외계 종족이 이를 '드라마', 그러니까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을 기록한 '다큐'라고 받아들이고, 그들의 모험에 감탄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종족이 위험에 처했다며 이 우주 영웅들(을 연기한 배우들)에게 도움을 처한다. 이제 이들이 외계인들을 도와주지 않으면 지구도 파괴될지 모른다! 이들은 과연 외계인과 지구를 구할 수 있을까?

 

뭐, 대략 이런 이야기인데, 눈치 빠르신 분들은 벌써 감 잡으셨을지도 모르겠다. '아, 이거 <스타 트렉(Star Trek)> 시리즈에 대한 메타(meta) 아냐?'

정답! 영화를 보면 우주선 내부라든지, 크루들이 입은 우주복이라든지, 아니면 크루들 각각의 캐릭터 설정 등이 <스타 트렉>과 비슷하다.

애초에 <스타 트렉>이 SF라는 장르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그 후에 나온, '우주 오페라(space opera)'물이라면 스타 트렉을 기준으로 '얼마나 비슷하냐, 또는 다르냐' 평가받는 게 기본이 된 것 같긴 하다.

어쨌거나 외적인 면에서도 <스타 트렉>을 연상케 하는 이 영화는 사실 <스타 트렉>(또는 그 어떤 영화나 스타로 대체해도 무방)과 팬(fan)들의 관계를 그 주제로 삼고 있다.

아래에서 논하는 '팬'이라는 큰 주제는 이 다큐(<네버 서렌더>)에서 여러 인터뷰어의 입을 통해 여러 번 지적되고 잘 설명되는 내용이다.

물론 이 다큐에는 이 영화에 대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예컨대 우주선을 디자인할 때 절대 <스타 트렉>의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변호사들과 같이 일했고, 심지어 우주선 모델명도 '엔터프라이즈호가 아니다(Not The Enterprise)'란 뜻의 'NTE'로 정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들을 여기에서 다 소개할 수는 없으니 팬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만 집중하기로 하겠다.

 

<갤럭시 퀘스트>에서 토니 중위/그웬 역을 맡았던 시고니 위버(오른쪽). 왼쪽에 몸을 기울여 갤럭시탭(으로 추정되는 태블릿 PC)을 보고 계신 분은 이 다큐의 감독인 잭 베넷.
<갤럭시 퀘스트>에서 태거트 함장/제이슨 네스미스 역을 맡았던 팀 알렌
<갤럭시 퀘스트>에서 외계 종족들 중 이름도 있고 나름대로 비중도 있었던 마테자르 역의 엔리코 콜라토니
<갤럭시 퀘스트>의 프로듀서 중 한 명인 엘리자베스 캔틸론

 

'팬'이라는 주제는 이 영화/다큐에서 여러 가지 층위에서 의미를 가진다.

이 영화에서 '팬'이라고 볼 수 있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애초에 <갤럭시 퀘스트> 자체가 <스타 트렉>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고, 메타적인 발언이기도 하므로, 감독을 비롯한 제작자들도 (<스타 트렉>의) 팬이다.

그리고 둘째, 극 중 '갤럭시 퀘스트'라는 SF 드라마를 보고 감탄하며 이것이 실제 있었던 일이라 믿는 테르미안(Thermian) 족도 팬이다(요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자주 쓰는 말대로 하자면, '과몰입 오타쿠'들이다. 현실과 허구도 분간을 못하니까).

셋째, 이 드라마가 실제가 아니라 허구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여전히 열광하는 (인간) 팬들도 있다. 영화 속 코믹콘에 모인 사람들을 포함하며, 극 중 저스틴 롱의 캐릭터(캐릭터 이름은 브랜든)와 그 친구들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무려 저스틴 롱의 캐릭터는 자신의 덕질하는 대상인 태거트 함장/제이슨('태거트 함장'을 연기한 배우의 이름)에게 이 우주를 구할 수 있게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이거야말로 모든 덕후들이 꿈꾸는 최고의 상황 아닌가! 내가 존잘님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대상이 된다니! 덕후들 좋아서 기절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이건 <스타 트렉>이 팬이 있었기에 시리즈가 계속되고, (첫 세대)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몇십 년이 지난 후에도 다시 리부트될 수 있었다는 점을 표현한 것이다.

영화 또는 스타가 인기를 얻고 돈을 버는 등, 대략 '잘나간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현상의 원동력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팬들이다.

내가 팬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팬, 그러니까 지지자가 없으면 그 어떤 매체도 저 혼자서 지속될 수 없다.

책이 됐든 노래가 됐든 간에 그걸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어떤 영향력을 가지거나 기록에 남을 수가 있는 것이다.

팬이 있어서 스타가 있을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이 영화는 감동적으로(여러분이 계를 탄 이 덕후라 상상해 보시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 다큐는 그러한 주제 의식을 가진 영화에 대한 메타이기도 하다.

이 다큐의 감독은 <갤럭시 퀘스트>를 제작하는 데 참여한 프로듀서, 감독, 디자이너, 배우들뿐 아니라 이 영화를 너무나 사랑해 마지않는 팬들의 모습도 보여 준다.

그중 개인의 이름까지 밑에 자막에 뜰 정도로 따로 섭외된(그러니까 그냥 코믹콘에서 인터뷰할 때 몇 번 잠깐 나오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단독 샷을 받아 추가 촬영을 했다는 뜻이다) 인물이 바로 해롤드 웨어(Harold Weir)와 록새인 웨어(Roxane Weir)라는 커플이다.

이들은 이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극 중 테르미안들 코스프레까지 하고, 테르미안들처럼 박수를 치고 말하는 것까지 따라 한다. 이들은 정말 '찐'이다. 진정한 과몰입 오타쿠들이라고 할까.

이게 다 <갤럭시 퀘스트>의 유산(legacy)이 아니고 무엇인가!

다큐 후반에 <갤럭시 퀘스트> 상영회에 참여한 배우와 관객들 모습을 보여 주는데, 그걸 보고 가슴이 찡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는 무언가, 또는 누군가의 팬이다. 꼭 연예인이 아니라도 어떤 성공한 사업가라거나 존경하는 선생님의 팬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우리 모두 어떤 것에 몰입해서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기 어려워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29)>을 보고 나서 며칠간 영화 후반의 그 무서운 장면이 떠올라 소름 끼쳤던 적이 있다.

내가 '몰입'을 하지 않았다면 그런 장면이 떠올랐을 때, '아 뭐야, 그냥 영화 장면일 뿐이잖아' 하고 웃어넘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게 단순한 영화가 아니라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제시한다고 믿기 때문에 '이 영화에 숨겨진 디테일'이라든가 '뫄뫄 장면의 의미' 같은 걸 캐내려고 하는 게 아닌가.

우리는 어쩌면 모두, 과몰입 오타쿠다. 나쁜 뜻이 아니라 순수하게 그것에 깊이 빠져들었다는 뜻으로.

과몰입 오타쿠들 만세다!! 

 

이 다큐를 보면 2016년에 우리를 떠난 알란 릭맨을 제외한 캐스트, 그러니까 팀 알렌, 시고니 위버, 토니 샬호브, 샘 록웰, 다릴 밋첼 등을 한자리에서 보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어제 이 다큐를 볼 때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내가 좋아하는 미시 파일도 여기에 나왔더라! 레인 윌슨도! 아는 배우들의 초기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ㅎㅎㅎ 

모쪼록 이 리뷰가 <갤럭시 퀘스트>를 보신 분에게는 이 영화를 해석하는 한 가지 방법의 제안으로,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에게는 재밌고 좋은 영화를 추천하는 글로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태거트 함장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우리가 과몰입 오타쿠들이라 해도,

"포기하지 말고, 항복하지 말라(Never give up, never surrender)!"

 

(그렇다, 이 다큐의 제목도 바로 이 인용문에서 따 왔다!)

 

[영화 감상/영화 추천] The Kingmaker(킹메이커, 2019) - 모든 국가는 그에 걸맞은 정부를 가진다

 

 

감독: 로린 그린필드(Lauren Greenfield)

 

스탠(Stan., 호주의 영화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약 한 달 전 처음 소개되었을 때부터 흥미롭다 생각했는데 최근에 시간이 나서 드디어 보게 되었다.

필리핀의 악명 높은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1917~1989) 시절 영부인이자 현재 과부인 이멜다 마르코스를 인터뷰한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나는 솔직히 필리핀에 대해 잘 몰랐다. 이멜다 마르코스라고 하면 '구두를 미친듯이 사들인, 필리핀 독재자의 아내' 정도로만 알았다.

그런데 로렌(네이버 영화 정보에는 '로린'으로 되어 있는데 스펠링을 보면 발음은 로렌이 맞는 것 같다) 그린필드의 이 다큐를 보자 "모든 국가는 그에 걸맞은 정부를 가진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멜다 마르코스의 집안 꼬라지...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마르코스 독재 시절은 우리나라 박정희 시절 즈음이다(둘은 서로를 극히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확히 말하자면 마르코스 통치 초기만 해도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꽤 잘사는 국가에 들었다. GDP도 우리나라의 몇 배는 됐고.

그런데 마르코스가 나라를 아주 조져 놔서, 필리핀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현재의 처지가 되어 버렸다.

마르코스가 필리핀을 어떻게 말아먹었느냐면, 국가의 부를 전부 뽑아서 자기네들 사치하는 데에 갖다 처박았다.

2019년 블룸버그 통신의 한 기사에 따르면, 필리핀 법원은 마르코스 가문이 부정부패로 모은 2천억 페소, 또는 39억 5천만 달러를 회수하려는 소송을 기각했다고 한다(여기에서 이미 느끼신 분이 있을 것이다. '아, 현재 필리핀 정부도 이미 마르코스와 짝짜꿍이하는 편이라 이 돈을 빼앗아오지 못하는구나'라고. 맞다. 그 얘기는 아래에서 다시 하겠다).

이 정도면 필리핀이라는 나라를 아예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고 무방할 정도다. 그래서 한때 잘나가던 필리핀은 빈국으로 추락...

 

이멜다의 사치는 내가 앞서 말한 구두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참고로 마르코스 가가 하와이로 도피할 때 미처 챙기지 못한 이멜다의 구두만 3천 켤레였다고 한다).

이 다큐 인터뷰에 참여한, 마르코스 가문의 부정한 재산을 회수하려고 노력하는 위원회(정확한 명칭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 분의 말씀에 따르면 이멜다의 집에 피카소 그림이 있고, 최근에는 미국에서 모네 그림을 낙찰받았다고.

아니, 도대체 그때 얼마나 해 처먹었길래 마르코스가 죽은 지 30년이나 지난 지금도 그만큼의 재산이 있는 거지? 모든 필리핀인들에게 애도의 마음을 전한다. 왜냐하면 그게 다 필리핀인들이 마땅히 누려야 부를 쪽 빨아간 거니까.

 

이 다큐의 모든 내용, 또는 필리핀의 현대 정치사를 모두 여기에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이 리뷰에 저런 부제("모든 국가는 그에 걸맞은 정부를 가진다")를 붙인 이유 정도는 설명해야겠다.

마르코스와 이멜다 사이의 아들, 봉봉 마르코스가 대통령이 되려고 몇 번이나 도전했다가 그게 잘 안 되니까 부통령에 도전했다(다큐에서는 그가 캠페인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제일 유력한 다른 후보 레니 래브라도를 인터뷰하기도 한다).

결과는? 레니 래브라도 후보가 승리했는데 봉봉은 선거가 부정했다며 법원에 소송을 건다. 어라, 치졸한 정치인들 하는 건 국적을 막론하고 똑같네. 어디서 배워 오나 보다. 정작 본인 아버지, 마르코스가 부정 선거 했던 건 생각 못 하나 보지?

어쨌거나 법원은 레니 래브라도가 정당하게 부통령에 당선되었음을 알린다. 하지만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두테르테라는 자가 2016년 필리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이자의 아버지가 마르코스 시절 장관을 해 먹던 자였다. 즉, 다시 말해 두테르테가 대통령이 된 건 마르코스 가문에 절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마르코스 가문에 힘을 실어 준다고 봐야 한다.

어느 정도냐면, "봉봉 마르코스가 부통령으로 당선된다면, 나는 대통령직에서 물러서겠다"라고 공언했을 정도. 레니 래브라도 부통령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시하며 그녀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말을 공석에서 하는 두테르테 클라쓰~!  

 

이 다큐는 이런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멜다가 차를 타고 가는데 빨간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춘다. 이멜다는 창문을 열고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미는 아이들에게 지폐를 한 장씩 건네준다. 빨간 불 대기 시간이 다 갈 때까지, 계속 아이들이 몰려들어 돈을 구걸한다. 

마침내 차가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게 되자 이멜다의 수행원이 차가 움직여야 하니 비켜 달라고 하고 창문을 닫는다. 

그리고 마침내 이멜다가 도착한 곳은 한 병원. 그곳에서 소아 암 환자들을 만난 이멜다는 자기 수행원을 불러 아이들에게 줄 돈을 가져오라고 한다.

아이들에게만(성인들은 ㄴㄴ) 한 장씩 주어지는 지폐. 이멜다는 그러고 나서 그 병동을 나와, 원래 아이들 놀이터였던 곳을 바라보며 눈물 짓는다.

 

처음에 이 장면을 볼 때는 '뭐야, 왜 돈을 나누어줘? 포퓰리즘의 좋은 예~' 이러고 말았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 이상하다.

보통 정치인이 유권자들을 방문하면 그들 마음을 살 정책 한두 가지는 제시하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학교라면 교육 예산에 얼마는 더 편성하도록 노력하겠다, 병원이라면 환자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 줄 방법을 찾아보겠다 같은 것. 

그것을 실제로 실천하느냐는 그다음 문제고, 일단은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정책이라도 일단 주워섬기지 않나.

이멜다 마르코스도, 믿기지 않지만, 필리핀의 하원 의원이다(적어도 이 다큐 촬영 당시엔 그랬다). 

그런데 이멜다는 정책에 대해서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는다. 그저 돈을 건네줄 뿐이다. 이멜다가 그런 정책을 제시했는데 다큐 감독이 시간상 또는 이야기상 편집을 했을까? 글쎄, 별로 그럴 것 같진 않다.

마르코스가 그렇게 나라를 말아먹었는데도 마르코스의 아들이라고 봉봉을 찍어 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뭐하러 정책 어쩌고 그런 얘기를 하겠어? 애초에 할 필요가 없지.

다큐 중간중간에 나오는 한 반정부 운동가(마르코스 시절 그에 반대해 데모를 하셨다가 고문까지 당하신 분) 말씀대로, "필리핀인들은 참 용서를 잘해 주는(forgiving)" 민족인가 보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자기 나라 국민을 수천 명 고문하고 죽인 독재자를, 그때는 지금보다 형편이 조금 나았다는 이유로(그나마 그때도 빈부 격차가 심했다) 한 표 던져 준다는 게 말이 되나? (잠깐만, 혹시 마르코스가 이런 살해범인 거 모르셨던 분? 독재자가 그냥 돈과 권력만 즐기고 자기 국민들에게 잘해 줬을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가지는 법이다. 정말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마르코스 가문의 말도 안 되는 돈지랄 중 제일 우스꽝스러운 건 이게 아닐까 한다.

마르코스는 케냐에서 기린이나 얼룩말 같은 '이국적인' 동물들을 여럿 들여와 칼라우이트 섬에 풀어놨다.

그리고 이 동물들이 살아야 한다며, 동물들을 '보호'하는 의미에서 그곳에 살던 주민들을 내쫓았다.

동물들에 밀려서 원래 살던 곳에서 쫓겨난 주민들은 나중에 마르코스 가족이 하와이로 도피한 후 다시 섬에 돌아와 살게 됐지만, 주민과 동물의 공존은 어려워 보인다.

주민들이 농사를 지으면 동물들이 먹거나 망쳐 놓기가 일쑤인 데다가, 이 '사파리'는 적절한 관리인도 없다.

그래서 예컨대 아빠 기린이 자기 딸인 기린과 짝짓기를 하고, 엄마 기린이 아들 기린과 짝짓기를 하는 식으로 근친이 일어났다고 한다.

일부 기린은 벌써 목이 짧아졌다고. 또한 벌레 또는 구더기에 물려서 앓고 있는 동물들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 가고 있다.

동물도 불행하고 주민들도 불행한 이 끔찍한 상황을 만든 건, 이기적인 마르코스 가문의 변덕과 욕심이었다.

 

다큐 내 인터뷰에서 이멜다는 여러 번 반복해서 자신을 '어머니'라고 표현한다. 어릴 적에 어머니를 잃고 고아가 되었는데 마르코스를 만나 다시 온전해진 느낌이 들었고, 퍼스트 레이디가 되어 필리핀의 어머니가 되었으며, 해외 순방을 나가 전 세계의 어머니 노릇을 했으며 계속 하고 싶다 운운.

이 여편네의 현실 인식 능력이 얼마나 떨어지느냐면, 자신이 카다피도 만나 봤고, 사담 후세인도 만나 봤고, 마오 쩌둥도 만나서 손에 키스도 받아 봤다, 이러고 있을 정도다.

저기, 말씀하신 세 명 전부 다 지금 죽었거든요? 하기야,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 모르니까 그렇게 시대착오적인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겠지만.

(참고로 이멜다 마르코스는 2020년 현재 기준 90세다. 어쩜 90세에도 그렇게 탐욕스러울 수가 있지?)

 

마르코스 가에 대해 욕을 하다 보면 끝이 없을 테니 이쯤 해서 총평을 내리고 마무리를 짓도록 하겠다.

필리핀에 대해 잘 몰랐고 관심이 없었던 분들이라도 꼭 한 번쯤 봤으면 좋겠는 다큐멘터리다.

과거를 반복하지 않도록 과거에서 교훈을 얻는 의미에서 필리핀의 예를 가벼이 넘겨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도 박정희의 딸이라는 이유로 박근혜라는 대한민국의 오점을 당선시킨 전적이 있으니까.

정말 충격적이면서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는 좋은 다큐멘터리다. 강력 추천!

[영화 감상/추천] Emma.(엠마, 2020) - 원작에 가까운 에마를 만나다

 

 

감독: 어텀 드 와일드(Autumn de Wilde)

 

이 영화는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원작 소설 첫 문장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아름답고 영리하고 부유한 (...) 에마 우드하우스는 스물한 살이 다 되도록 고민하거나 짜증을 낼 일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에마(Emma, 안야 테일러 조이 분)는 지금까지 친한 친구가 되어 주었던 가정 교사 테일러 양이 결혼을 해서 우드하우스 가문의 저택(하트필드)을 떠나자 슬픔, 안타까움, 그리고 무료함에 젖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친구 해리엇 스미스 양(Harriet Smith, 미아 고스 분)에게 적절한 남자를 찾아 이어 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부유하고 잘나가는 아가씨만의 소소한 즐거움이자 취미라고나 할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에마 본인이 자부심을 가지는 것과 달리, 본인이 사람들 보는 눈이 별로 정확하지 않아 일이 틀어지고 만다.

(애초에 이 아가씨는 너무나 잘나서, 에마의 아버지 우드하우스 씨(Mr. Woodhouse, 빌 나이 분)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이웃이기도 한 나이틀리 씨(George Knightley, 자니 플린 분) 말고는 정면으로 '이러이러한 것은 네가 잘못했다'며 지적해 줄 수 있는 상대도 없었다.)

해리엇은 소작농인 마틴 씨(Mr. Martin, 코너 스윈델스 분)에게 호감을 가지고 그분 역시 해리엇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는데, 에마가 보기에 마틴 씨는 해리엇에게 적절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보다 에마가 보기에는 하이버리의 목사인 엘튼 씨(Mr. Elton, 조쉬 오코너 분)가 해리엇의 남편감으로 더욱 적절해 보였고, 또한 그도 해리엇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해리엇이 마틴 씨에게 청혼을 받았을 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해리엇의 질문에 '결정은 네가 내려야지'라며 절대 대신 결정을 내려 주지는 않는 척하면서, 은근히, 교묘하게 해리엇이 이를 거절하게 만든다.

해리엇을 자기 뜻대로 움직였다는 기쁨도 잠시, 나이틀리 씨는 왜 해리엇에게 적절한 혼인처인 마틴 씨를 거절하게 만들었냐, 마틴 씨 정도면 해리엇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신랑감 아니냐 하고 에마를 비난한다.

에마는 나이틀리 씨와 이 일로 싸우고 나서, 엘튼 씨와 해리엇을 이어 주려고 부단히 노력하나 결국 어느 날, 엘튼 씨가 에마를 사모한다고 고백하고 만다.

잠깐, 그렇다면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보았다는 건가? 자신 때문에 소중한 친구가 괜찮은 남자를 뻥 차게 되었다는 죄책감에 에마는 고민에 빠지는데...

 

해리엇 스미스(왼쪽)와 에마 우드하우스(오른쪽)
내가 미란다를 좋아해서 이 스틸도 넣어 보았다. 왼쪽부터 우드하우스 씨, 베이츠 양(미란다!), 그리고 베이츠 부인(베이츠 양의 어머니).
나중에 반전을 가져오는 주인공, 프랭크 처칠.
빌 나이도 좋아해서 이 스틸도 넣어 봤다. 에마의 아버지 우드하우스 씨.
안야 테일러 조이는 정말 귀족 아가씨다운 태도를 잘 살려 연기했다. 
나이틀리 씨 역의 자니 플린 분. 나는 조금 더 성숙하게 생긴 신사를 기대했는데...
우리의 금사빠 해리엇ㅋㅋㅋㅋㅋ
에마가 해리엇에게 헛바람을 불어 넣어 좋아하게 만들었던 대상인 엘튼 씨(왼쪽)와 그의 아내 오거스타(오른쪽)

 

너무나 잘 알려진 데다가 이미 출간된 지 200년이나 된 작품이라 굳이 시놉시스가 필요할까 싶지만 일단은 간략하게 적어 보았다. 누가 무슨 역할인지 대략 안내도 할 겸.

하지만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의 경우 결말을 논해도 스포일러로 치지 않는다는 원칙을 여기에도 적용할 예정임을 알려 드린다. 혹시나 '스포일러'를 피하고자 하시는 분은 원작 소설을 먼저 읽을 것을 추천 드린다.

참고로 나는 시공사에서 나온 최초의 제인 오스틴 한국어판 전집 판본에 속한 <에마>를 읽었는데 번역이 좋았다. 일단 '엠마'라고 안 쓴 것 자체가 너무 마음에 든다(그런데 영화 국내 개봉명은 또 '엠마'다. 이런...).

 

영화를 보기 전, 영화 포스터에서, 그리고 영화에서 에마가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 에마 역 안야 테일러 조이를 보고 놀랐다.

제임스 맥어보이(James McAvoy)가 나온 <23 아이덴티티(Split, 2016)>나 <글래스(Glass, 2018)>에서 케이시(Casey) 역할로 이미 얼굴은 알고 있었는데, 뭐랄까, 정석적인 미녀 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왜 감독은 이렇게 고전적인 미녀 상이 아닌 배우를 캐스팅했을까 의아했는데, 영화를 보다 보니 이해가 됐다.

눈짓이라든지 몸짓, 자세와 태도 등이 정말 영락없는 귀족 아가씨다. '깍쟁이'나 '새침데기 아가씨'라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그냥 너무나 자연스럽게 세련되고 우아한 몸짓을 배우며 큰 아가씨 같다는 느낌. 이래서 에마로 캐스팅되었구나 싶었다.

 

원작의 표현에 따르면 나이틀리 씨는 "서른일곱 내지 서른여덟 살가량의 분별 있는 사람"인데, 신기하게도 나이틀리 씨의 자니 플린이 딱 그 나이다(83년생).

기가 막히게 캐스팅 잘했네! 개인적으로는 원작을 읽을 때 받았던 느낌으로 나이틀리 씨는 자니 플린보다 조금 더 성숙한 얼굴을 상상했다.

자니 플린도 연기를 잘했지만 그래도 나이틀리 씨 치고는 젊은 느낌이 난달까? 내 느낌으로는 마틴 씨 역의 배우(코너 스윈델스)가 더 잘생겼다...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 취향이니까 그냥 그렇다 치자.

참고로 프랭크 처칠(Frank Churchill) 역의 칼럼 터너도 어디서 본 얼굴이다 했는데,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Fantastic Beasts: The Crimes of Grindelwald, 2018)>에서 테세우스 스캐맨더 역을 했더라. 그래서 반가웠다.

BBC 버전 <셜록(Sherlock, 2010-2017)>에서 레스트레이드 경감 역을 맡았던 루퍼트 그레이브스도 한국인 관객들은 많이 알아보지 않을까?

하지만 영드를 좋아하는 팬들에게 제일 반가운 얼굴은 역시 영드 <미란다(Miranda, 2009-2015)>의 미란다 하트일 것이다.

미란다가 맡은 역할은 베이츠 양(Miss Bates)인데, 원작의 표현에 따르면 "하이버리의 전임 교구 목사였던 베이츠 씨의 미망인"의 "외동딸"이다.

영화에서는 수다스럽고 다소 경망스러워 에마에게 비웃음을 사는데, 원작에는 이렇게 돼 있다.

부인의 딸[베이츠 양]은 젊지도 아름답지도 부유하지도 않은 미혼 여성으로서는 대단히 이례적이라 할 만큼의 인기를 누렸다. 베이츠 양은 그렇게 만인의 사랑을 듬뿍 받은 탓에 더 없이 고약한 곤경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마음속으로나마 우쭐해하거나,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외경심을 불러일으켜 겉으로나마 존경을 표하게 할 만큼 지적으로 우월한 구석ㄷ은 조금도 없었다. 뽐낼 만한 아름다움이나 영민한도 없었다. 청춘은 별 볼일 없이 흘려보냈고, 중년은 노쇠해져가는 어머니를 보살피고 빠듯한 수입으로 살림을 꾸려나가려 애쓰는 데 바쳤다. 그럼에도 그녀는 행복한 사람이었고 모두가 선의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런 불가해한 일이 가능했던 건 그녀의 본원적인 선의와 느긋한 기질 덕이었다. 베이츠 양은 모두를 사랑했고, 모두의 행복에 관심을 가졌으며, 모두의 장점을 금세 찾아냈다. 또한 자신이 가장 복 받은 사람이며,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어머니와 수많은 선량한 이웃들과 친구들, 그리고 아쉬운 데라고는 전혀 없는 집의 가호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순박하고 쾌활한 본성, 느긋하고 기분 좋은 기질은 다른 모든 사람에겐 귀감이, 그녀 자신에겐 무한한 행복의 원천이 되었다. 그녀는 시시콜콜한 일로도 굉장히 수다를 잘 떨었으므로, 사소한 잡담과 악의 없는 뒷공론이 일상인 우드하우스 씨와는 제대로 죽이 맞았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제일 부러워하는 인격의 소유자이다. 에마나 나이틀리 씨처럼 금수저로 태어나기는 어렵고, 해리엇은 사람은 순박한데 자신의 의견이 없다고 할까, 자신이 존경하는 에마의 말에 너무 잘 휘둘리는 데다가 금사빠여서 부러워할 만한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베이츠 양의 넉넉하지 못한 처지는 현실적인 데다가 그런 상황에 대처해 나가는 태도는 정말 긍정적이고 밝다. 이러니 이 소설에서 베이츠 양을 제일 따라 할 만한, 또는 존경할 만한 인물이라 보지 않을 수가 있나.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오자면, 미란다 하트가 워낙에 코믹한 연기를 잘해서 이 베이츠 양에게도 다소 경망스럽고 가벼운 느낌이 입혀졌는데, 영화 후반에 에마가 말실수를 해서 분위기가 싸해지는 장면이 있다.

원작에서는 베이츠 양도 차마 에마의 말에 상처 입었다는 티를 잘 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심각하게 '에마가 잘못했네...'라는 분위기로 흘러 가지는 않는데, 영화에서는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지고 베이츠 양도 상처받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자리를 떠서 확실히 에마가 잘못했다는 걸 좀 더 분명히 했다.

나이틀리 씨는 당연히 그 모임이 파하고 난 후에 오늘 왜 그런 말실수를 해서 베이츠 양에게 무례를 범하느냐며 직언을 하고, 그것은 영화에도 잘 표현돼 있다.

여기가 에마가 가진 성격의 단점(자신이 너무 잘났다고 자신만만해 해서 자신이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아주 잘 보여 주는 장면이라 영화에서 이를 살린 게 아주 잘한 결정 같다.

이때 나이틀리 씨가 에마의 실수를 지적하는 장면도, 나이틀리 씨가 얼마나 에마에게 꼭 필요한 사람인지를 나타내기 때문에(그 말고는 그녀의 실수를 대놓고 지적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이 작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고.

나는 이 영화에서 그 점을 잘 살린 게 무척 마음에 들었다.

 

전반적으로 원작을 그대로 옮겼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원작에 가깝게 잘 살렸다고 할 수 있겠다.

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을 읽는다면, 얼마나 원작에 가깝게 잘 살렸는지를 직접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감상/영화 추천] 하이, 젝시(Jexi, 2019) - 내 인생을 구하러 온 내 인생의 파괴자, 젝시

 

 

감독: 존 루카스, 스캇 무어(Jon Lucas, Scott Moore)

 

필(Phil, 아담 드바인 분)은 어릴 적부터 휴대전화와 자랐다. 엄마아빠가 싸울 때면 늘 자신에게 이거나 갖고 놀라며 당신 휴대전화를 주셨으니까.

그렇게 휴대전화에 온갖 정신이 팔린 채로 성장한 필은 현재 '라이언 고슬링같이 생긴 고양이' 같은 시답잖은 리스티클(listicle, 목록으로 된, 가벼운 내용의 글)을 써서 업로드하는 버즈피드(buzzfeed) 같은 미디어 회사에 다니고 있다.

그런데 오늘 상사 카이(Kai, 마이클 페나 분)가 퇴근 전까지 리스티클을 무려 스무 개나 써서 내란다. 안 그러면 잘릴 줄 알라고. 물론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필은 자기 옆에 앉은 동료, 크레이그(Craig, 론 푼체스 분)에게 자신이 미리 작성해 둔 리스티클이 열 개나 있다며, 그걸 넘겨 주겠다고 제안한다.

크레이그는 무척 고마워하며, 역시나 필 근처에 앉아 있는 다른 여자 동료 엘레인(Elaine, 샤린 이 분)과 같이 킥볼하러 오라고 한다.

사실 오늘 저녁 아무 일도 없는데 괜히 바쁜 척하며 이를 거절한 필. 역시 휴대전화에 정신이 팔린 채로 집으로 가다가 어떤 여자와 부딪힌다.

그런데 필의 반응은 여자에게 "괜찮으세요?"라고 묻는 게 아니라, 땅에 떨어진 자기 휴대전화가 괜찮은지 먼저 살피는 거였다. 다행히 휴대전화는 무사했다.

이에 약간 기분이 상한 여자는 먼저 뾰로통해서 "저도 괜찮아요" 하고 말한다. 자기에게 괜찮은지 물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듯.

그제서야 뒤늦게 예의를 차리러 뒤를 돌아보니 세상에, 엄청 예쁜 여자다! 새로 생긴 자전거 가게 주인인데 이름은 케이트(Cate, 알렉산드라 쉽 분)란다.

그녀랑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데, 그녀도 웃는다. 왠지 느낌이 좋아! 그런데 그녀와 인사를 하고 헤어지려는 찰나, 뒤에서 자전거를 탄 사람이 지나가며 필을 밀치고, 필은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떨어뜨린다.

이번엔 완전히 사망했다. 세 토막이 나 버린 폰을 들고 고치러 가게에 가니 고칠 수가 없단다. 그러면서 점원(완다 사이스크 분)은 "너희 휴대전화 중독자들은 마약 중독자보다 더해. 마약 중독자들은 적어도 가끔 한 번씩 일어나서 마약을 구하러 가는데, 너희들은 그러지도 않잖아!"라고 일침을 놓는다.

어쨌거나 따끔한 독설을 들으면서 구입한 새 휴대전화를 들고 집에 온 필. 설레는 마음으로 상자를 열고 새 휴대전화를 켜니 시리 같은 여성의 기계음이 자신을 맞이한다.

자신의 이름은 '젝시(Jexi)'라며, 자기 목표는 필의 인생을 더 낫게 만드는 거라고 한다. 그런데 이 인공지능, 어딘가 좀 이상하다.

사용자 약관을 읽어 보겠느냐 물었을 때 필이 "아냐, 됐어"라고 대답했더니 "멍청하긴"이란다. 

응? 잘못 들었나? 순간 귀를 의심하지만 다시 태연하게 이전 휴대전화의 기록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필의 계정 비밀번호를 물어본다. 필이 "비번은 필(phil)123456이야"라고 대답하니 또 다시 멍청하다고 욕하는 젝시. 얘 왜 이래?

그래 놓고 다시 태연하게 뭐 하고 싶으냔다. 필이 저녁을 주문해 달라고 하니 늘 먹던 그런 거 말고 샐러드를 먹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며 제멋대로 샐러드를 주문하는 젝시. 이 인공지능, 정말 괜찮은 걸까? 이 휴대전화를 계속 써도 아무 문제 없을까?

 

젝시를 만나기 전, 휴대전화로 SNS에 글을 올리며 잘 살고 있는 척하지만 내심 공허한 느낌을 감출 수 없는 필.
필의 짜증 나는 상사 카이
필에 동네에 새로 생긴 자전거 가게를 운영하는 케이트. 이 스틸 컷보다 영화로 보는 게 오백 배쯤 더 예쁘다!
필 근처에 앉는 두 동료 일레인(왼쪽 여자)과 크레이그(가운데 남자). 등을 보이고 있는 게 당연하게도 필이다.
휴대전화 중독자들을 마약 중독자에 비하며 '너는 참 노답이다'를 시전하고 계시는, 전자기기 가게 점원.

'인공지능의 발전, 이대로 좋은가'라는 질문의 코믹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 영화다. <그녀(Her, 2013)>의 코미디 버전이랄까?

<그녀>의 사만다보다 좀 더 성격이 더러운 인공지능과 좀 더 저속한 개그, 그리고 욕을 좀 더 많이 섞으면 이것 비슷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현대인들은 휴대전화 없이는 못 살 정도로 24시간 휴대전화를 달고 살고, 인공지능이 인간의 삶을 더 낫게 만들어 줄 거라고 광고하는데 '과연 그럴까?'라고 비웃는 듯한 느낌이다. 

이 영화가 뭐 엄청난 메시지를 담고 있거나 생각해 볼 거리를 준다고는 솔직히 말하기 어렵다.

현대인들이 휴대전화에 중독됐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 그리고 휴대전화를 적당히 이용하되 의존하지 않으면서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배우기 위해 이 영화를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서 초등학생도 알 테니까.

그렇지만 깊이 생각할 필요 없이 당신을 웃게 해 줄 영화를 찾는다면 이것도 썩 괜찮다.

 

이 영화를 웃기게 만드는 건 아무래도 '젝시'라는 이름의 인공지능이다(로즈 번(Rose Byrne)이 목소리를 연기했다).

젝시는 성격이 정말 글라도스(GLaDOS, 게임 '포탈(Portal)' 시리즈에 나오는 인공지능 컴퓨터) 뺨치게 더럽다. 

자기 주인인 필에게 욕하는 것은 기본이고, 필의 인생을 '낫게' 만든답시고 필을 곤란한 지경에 빠뜨리지만, 그래도 정말로 그 목표를 성취하는 데 성공한다.

문제는 음... 영화의 후반부에 일어나는데 이건 굳이 스포일러 하지 않겠다. 근데 약간 저속할 수 있다는 것은 말씀드리겠다. 이런 게 취향이 아니신 분들은 피하시는 게 좋겠다.

 

아담 드바인은 원래 <워커홀릭스(Workaholics, 2011-2017)> 같은 골 때리는 코미디 작품에서 코미디 연기를 많이 해서 이번에도 코미디를 잘 살렸다.

나는 의외로 멕시코계 갱이나 뭔가 위험한 인물 연기를 자주 하던 마이클 페나가 필의 짜증 나는 상사 '카이'로 코미디 연기를 한 게 신선했다.

론 푼체스도 나는 <언데이터블(Undateables, 2014-2016)>에서 알았는데, 여기에서 봐서 너무 반가웠다.

또한 휴대전화를 파는 가게의 점원으로 분한 완다 사이크스도 재능 있는 코미디언답게 영화 중간중간에 등장해 웃음을 준다.

 

영화 러닝 타임이 1시간 24분밖에 안 되어서 그런지 영화 중반에 흐름이 너무 빠르다는 느낌인데, 뭐 그렇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어차피 영화 중후반부에 앞보다 더 웃긴 일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후반부로 빨리 넘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큰 생각 없이 그저 웃고 싶다면 이 영화를 고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이 영화의 웃음은 상황도 상황이지만 젝시의 대사에서 많이 나오는데, 예고편 보니 아주 훌륭하지는 않아도 무난하게 중박 정도는 한 듯.

기계음 특유의 무미건조하고 액센트 없는 억양으로 하는 젝시의 찰진 욕이 웃음을 줄 것이다.

(여담이지만 로즈 번은 젝시 역의 대사를 촬영 후에 따로 녹음했고, 필 역의 아담 드바인은 초소형 이어폰을 끼고 다른 사람이 로즈 번을 대신해 대사를 쳐 주는 걸 들으면서 연기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어폰이 자주 고장 나서 아예 그냥 안 끼고, 남들 대사 쳐 주는 것도 안 듣고 그냥 연기한 적도 많다고.)

[영화 감상/영화 추천] 파이팅 위드 마이 패밀리(Fighting with My Family, 2019) - 레슬링을 모르셔도 좋습니다, 재미와 감동을 원하신다면 강추!

 

 

감독: 스테판 머천트(Stephen Merchant)

 

여기 한 이상한 가족이 있다. 열네 살 소년이 거실 TV에서 하는 WWE 경기를 보고 환호한다. 

그런데 그 남자애의 여동생이 TV 채널을 (현대에 사는 마녀들 이야기인 TV 시리즈) '참드(Charmed)'로 바꿔 버린다.

"내가 TV 보고 있었잖아!"로 시작한 이 남매의 싸움은 오빠가 여동생에게 헤드락을 거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건, 남매가 싸우는 걸 본 아빠가 "너 여동생에게 뭐하는 거니? 헤드락은 그렇게 거는 게 아니지!"라며 '바른(?) 헤드락 자세'를 가르쳐 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때 엄마가 끼어들어 "우리 딸, 그렇게 당하고만 있을 거니?"라며 딸의 반격을 부추긴다. 마침내 힘을 짜내 오빠를 메다꽂아 버린 딸.

이 이상한 가족은 아빠, 엄마, 두 아들, 그리고 딸까지 모두 레슬러인 집안이다. 이런 집안에서 살아남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어쨌거나 아빠는 레슬링 쇼가 며칠 안 남았는데 레슬러가 한 명 부족하다며, 딸에게 경기에 나가 달라고 부탁한다.

딸은 자신이 열세 살인데 레슬링 경기에 나가면 사람들이 자길 이상하게 볼 거라고 한번 거절하지만, 아빠의 애절한 부탁에 결국 허락하고 만다.

경기 당일, 이 소녀는 링 위에 올라 역시나 레슬러인 오빠를 상대로 싸워 이긴다.

사실 여동생이 이기는 쪽으로 결과는 미리 정해져 있었고, 둘은 각본에 맞춰 적당히 합을 맞춰 관객들에게 '쇼'를 보여 준 것이다.

그런데 온 가족이 레슬러인 이 가족, 정말 괜찮을까?

 

 

이 이야기는 최연소 WWE 디바스 챔피언(Divas Champion, 후에 여성 챔피언십(Women's Championship)으로 이름이 바뀜)이 된 페이지(Paige)의 이야기다.

본격적으로 리뷰를 시작하기 전에 전체 평부터 밝히고 시작하겠다. 나는 이 영화를 "재미와 감동 모두 잡은 영화"라고 소개하고 싶다.

레슬링, 그것도 여성 레슬러라는 소재를 다룬 것 자체가 흥미롭긴 하지만, 사실 레슬링은 마니아들이 아닌 일반 대중에게는 이미지가 그다지 좋지 않은 게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경기가'너무 폭력적'이라며 싫어하고, 어떤 이들은 '어차피 다 짜고 치는 쇼'라며 우습게 여긴다.

나도 솔직히 레슬링을 잘 모르고 이 영화를 봤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이 영화를 정말 진심으로 즐기고 감동받을 수 있었다.

 

위에서 영화 줄거리를 너무 극초반만 언급한 거 같으니 조금 더 살펴보자.

위 시놉시스에서 아들은 '잭 조디악(Zak Zodiac)'이라는 레슬러 이름을 가진 '잭(Zak, 잭 로던 분)'이고, 딸은 '사라야(Saraya, 플로렌스 퓨)'다.

사라야는 본명이고, 링 위에 올라갈 때는 '브리타니(Britani)'라는 레슬러 이름을 쓴다. 

사라야의 부모님도 앞에서 언급했듯 레슬러인데, 아빠는 리키(Ricky, 닉 프로스트 분), 엄마는 줄리아(Julia, 레나 헤들리)다(참고로 딸 사라야의 이름은 엄마 줄리아가 자신의 레슬러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잭 위에 로이(Roy)라는 이름의 큰아들도 있는데, 얘는 WWE 트라이아웃(tryout, 선수 선발 심사)에 떨어졌다고 화를 내며 물건을 집어던졌다가 죄 없는 불쌍한 사람을 맞혀 큰 부상을 입힌 죄로 감옥에 가 있다. 

잭과 사라야는 어릴 적부터 같이 합을 맞춰 레슬링을 해 왔고, 큰형/큰오빠가 그랬듯이 이 둘도 WWE 트라이아웃에 도전한다. 결과는?

놀랍게도 잭은 떨어지고 사라야만 붙는다. 사라야는 잭이 없으면 레슬링을 할 수 없다며 포기하려 하지만, 가족을 위해서라도 이 기회를 잡으라는 잭의 조언에 다시 마음을 돌려 WWE에 도전하기로 한다...

이 정도면 일단 영화에 흥미를 가지게 할 정도의 줄거리 소개는 한 것 같다.

아래에서는 본격적으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이상의 줄거리도 언급될 것 같으니, 더 이상의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신다면 스크롤을 쭉 내려 실제 페이지의 사진 이후 문단들만 읽으시면 되겠다.

 

왼쪽이 이 특이한 레슬러 집안의 엄마 줄리아, 오른쪽이 아빠 리키
햇병아리 레슬러들에게 조언을 해 주는 '더 락'
WWE에 도전하기 위해 트라이아웃에 나간 페이지(=사라야=브리타니)(맨 왼쪽)와 잭(중간 금발)
자신의 캐릭터 색 확고하게 드러내는 페이지

 

어차피 실화에 기반한 영화라 스포일러라는 개념을 그다지 칼같이 적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만(이미 이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지기 전부터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페이지에 대해 찾아보고 그녀의 사연을 알 수 있었으니까), 어쨌든 영화를 보러 가기 전 영화 정보는 최소한으로만 접하고자 하는 분들이 있으니 적당히 이렇게 나누어 보았다.

내가 이 영화를 감동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첫째, '관객이 몰입할 수 있는 주인공'이, 둘째,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단순히 페이지(사라야/브리타니가 WWE에 도전하며 레슬러 이름을 '페이지'로 바꿨다)가 지옥 훈련을 통해 신체적으로 강인해지고 마침내 WWE 여성 챔피언이 되었다는 데에서 끝나지 않는다.

챔피언이 되려고 훈련하는 과정에서 페이지는 인격적으로도 성장한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일단 페이지는 영국 노리치(Norwich)라는, 별로 유명할 것도 없는 동네 출신이다.

그녀는 고스(Goth)족이다. 고스족이 뭔지 몰라도 페이지의 까만 머리, 창백한 피부, 검은 옷을 보면 '음, 하여간 평범하지는 않군'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오빠도 없이 홀로 NXT 챔피언십(NXT Championship, 그냥 간단히 WWE에 본격적으로 출전하기 전 신진 선수들이 자신을 알릴 기회가 되는, 2군들 리그라고 보면 된다)에 도전하지만, 자기와 달리 다른 여자 선수들은 금발에 쭉쭉빵빵.

게다가 그들은 자기처럼 '본격 레슬러'도 아니고 모델이나 댄서 출신이다.

자기만 튀고, 자기만 그 여자 선수들과 어울리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페이지는 자기 캐릭터를 바꿔야 하나 하는 생각에 머리도 밝게 염색하고 태닝도 해 본다.

(실제로도 페이지 본인이 첫 번째 트라이아웃 때 금발 염색과 태닝을 시도했는데, 심사위원들은 이미 그런 이미지의 여자 레슬러는 많다고 판단해서 페이지를 뽑지 않았다.

페이지가 두 번째로 트라이아웃에 도전했을 때는 (지금도 유지하는) 그 유명한 고스 룩으로 돌아왔고, 이걸 색다른 캐릭터라고 판단한 심사위원들에 의해 통과했다.)

그래도 뭔가 나아지는 게 없는 것 같고 오히려 훈련이 죽을만큼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정도다.

다행히 잭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색을 고수하는 게 맞는다는 깨달음을 얻고 다시 까만 머리, 창백한 피부, 검은 옷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자신이 알지도 못하면서 무시했던 다른 여자 선수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들과 친구가 된다. 나중에 페이지가 챔피언이 되었을 때 그들에게서 진심 어린 축하를 받을 정도로.

 

이렇게 페이지처럼, 자신이 너무 이상하다고,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외톨이라고 느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남들과 다른 점을 오히려 자신의 매력, 셀링 포인트로 여겨야 한다는 교훈은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교훈도 관객들이 페이지에 몰입하고 감정 이입해 페이지의 입장에서 직접 '겪게' 된다면, 그 울림은 크고 오래 간다.

 

또한 이 영화는 형제/자매/남매 간에서 흔히 느끼는 경쟁 의식에 대해서도 다루고, 남을 빛나게 해 주는 이들의 고마움과 소중함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이 두 가지를 모두 보여 주는 캐릭터가 '잭'이다. 잭은 WWE에 데뷔하겠다는 열망을 가지고 열심히 훈련했지만, 트라이아웃에서 뽑힌 건 그가 아니라 페이지였다.

페이지가 훈련을 위해 미국 플로리다로 떠날 때부터 그들 사이는 소원해지고, 잭은 훈련이 힘들어 오빠에게 위안을 얻으려던 페이지의 전화도 일부러 받지 않는다.

페이지가 훈련이 힘들어 죽을 것 같아 포기하겠다는 마음으로 잠시 고향에 돌아왔을 때(공식적으로 주어진 휴가 기간 중이었다) 그제서야 둘은 서로에게 진심을 드러낸다.

잭은 자신이 갖지 못한 기회를 여동생이, 그것도 자신만큼 그 기회를 강렬하게 원하지 않은 여동생이 그걸 잡았다는 게 너무 분하고 억울한데, 심지어 트라이아웃 심사위원 허치(Hutch, 빈스 본 분)에게서 'WWE에 나갈 재능이 없다'라는 소리까지 듣는다.

열등감과 분노에 사로잡힌 잭은 동네 술집에서 난동을 피운다. 이걸 아빠가 발견해 질질 끌고 데려오자, 페이지는 오빠와 이야기해 보겠다고 한다.

그리고 페이지에게서 "오빠가 아니라 내가 트라이아웃에 뽑힌 건 오빠 잘못도, 내 잘못도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빠 이름을 환호하지 않는다고 해서, 오빠가 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듣는다.

 

사실 이 말은 두 개의 층위가 있는데, 첫 번째는 잭이 '나이트(Knight, 이 가족 성씨)' 가족의 레슬링 훈련소에서 하고 있는 일 자체를 가리킨다.

그는 동네 양아치로 전락할 위기에 있는 청년 에즈(Ez, 모하메드 아미리 분)를 나쁜 친구들로부터 떼어내고, 시각 장애가 있는 칼럼(Calum, 잭 굴드본 분)에게 소리를 신호 삼아 레슬링하는 법도 가르친다.

누가 주위에서 이걸 두고 그에게 '잘하는 일'이라고 칭찬해 주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들은 여전히 의미 있고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들이다.

두 번째 층위는 WWE 트라이아웃 심사위원이자 코치인 허치에게도 해당되는 건데, '남들을 빛나게 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으로서의 잭이다.

경기를 이기는 사람(=페이지)이 있으려면 지는(또는 져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잭이었다.

영화 속 드웨인 '더 락' 존슨(Dwayne 'The Rock' Johnson)은 허치를 두고 '나를 멋져 보이게 해 주려고 30피트(=약 10m) 케이지에서 떨어진 사람'이라고 언급하는데, 생각해 보라, 별은 암흑 속에 있어야 그 빛이 제대로 보일 것 아닌가.

이렇게 스타가 빛나게 하기 위해 암흑 바탕인 저니맨(journeyman, '그냥 보통 솜씨의 장인, 제구실을 하는 정도의 일꾼'이라는 뜻)이 필요한 거다.

그리고 잭은 이 말을 듣고 나서야 'WWE에 나갈 정도의 실력은 안 되지만, 그래도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은 될 수 있다'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래서 소홀히 하던 일(밴 몰고 레슬링 수업 듣는 학생들 태워 오기)도 부지런히 하고, 페이지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도 모두 놓아버리고 정말 진심으로 그녀를 응원해 준다.

잭의 서사는 페이지의 서사에 비해 (서사에서조차!) 약간 뒤로 밀리는 느낌이 있으나, 그래도 영화의 의미를 풍부하게 해 주고, 감동을 더 깊게 만들어 준다.

 

이 영화의 기초가 된 실화의 주인공 페이지(사진은 WWE 공식 웹사이트에 있는 것을 가지고 왔다)

 

요약하자면, 이 리뷰 부제처럼 "레슬링을 모르셔도 좋습니다, 재미와 감동을 원하신다면 강추!" 하고 싶은 심정이다.

(스포일러 없이 단순히 주제만 나열하자면) 자신의 고유한 캐릭터를 유지하는 것, 타인과 어울리는 것, 형제/자매/남매 간의 경쟁 의식, 스타와 스타를 빛나게 해 주는 스턴트맨의 관계 등, 정말 생각해 볼 만한 거리를 많이 제공한다.

그렇다고 관객들에게 이것들을 마구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웃음과 재미를 제공하면서 은근슬쩍 관객들이 그냥 '알아서' 느끼도록 은근히 제시한다.

페이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드웨인 존슨이 먼저 스테판 머천트(참고로 둘은 영화 <미스터 이빨요정(Tooth Fairy, 2010)>에 같이 출연한 인연이 있다)에게 연락해 이 소재를 영화로 만드는 것에 대해 제안했다는데, 페이지의 서사는 가히 그럴 만하다.

레슬링에 대해 모르고 관심이 없더라도 한번 꼭 보면 좋을 영화다. 제발 한번 봐 주세요!!

영화와 현실의 다른 점에 대해서는 아래 페이지들을 참고하시라. 다른 점을 찾아보는 것도 꿀잼(참고로 빈스 본이 연기한 '허치'라는 캐릭터는 전적으로 허구의 창작물이다)!

https://www.imdb.com/title/tt6513120/trivia?ref_=tt_trv_trv

http://www.historyvshollywood.com/reelfaces/fighting-with-my-family/

그리고 영화 끝에 크레디트 올라갈 때 잠깐 (영화의 기초가 된) 실제 인물들의 인터뷰 영상이 나오는데, 한 장면의 페이지 부모님 대사는 여기에서 바로 갖고 온 것들이 많다.

사실 이 영화 속 부모님 캐릭터의 외관을 아예 이 실제 부모님께 빌려 왔다고 해도 될 정도인데, 특히 어머니 줄리아의 빨간 염색 머리는 줄리아 역의 레나 헤들리가 거의 똑같이 따라 했다.

 

아, 감독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혹시 게임 좋아하시는 분들은 그를 '포탈 2(Portal 2)'의 휘틀리(Wheatley) 목소리로 기억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바로 그 영국 코미디언 스테판 머천트다

아니면 영국 개그 좋아하시는 분들은 리키 저바이스(Ricky Gervais)와 친구로 그의 시리즈에 자주 나오는 그 키 큰 코미디언으로 기억하고 계실 듯. 어쨌거나 그 스테판 머천트가 맞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잭의 여자 친구 코트니(Courtney, 한나 레이 분)의 아버지 역으로도 잠깐 출연한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영화를 보면 페이지 역을 맡은 플로렌스 퓨(할리우드의 떠오르는 신예!)가 키가 작아서 '응? 저렇게 작은 체구로 레슬링을 한다고?' 하고 걱정이 될 정도인데, 실제로 페이지 본인은 173cm로, 키가 작은 편은 아니다.

사실 플로렌스 퓨가 162cm라서 그렇게 작은 건 아닌데, 주위 배우들 키가 커서 상대적으로 정말 아담하고 소중해 보인다('잭' 역의 잭 로덴이 185cm, '허치' 역의 빈스 본이 무려 196cm다 ㄷㄷㄷ).

 

[영화 감상/영화 추천] 호텔 쿨가디(Hotel Coolgardie, 2016) - 호주 오지에서 만난 차별의 민낯

 

 

감독: 피트 글리슨(Pete Gleeson)

 

오스트레일리아/호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Western Australia) 주의 오지에 위치한 쿨가디(Coolgardie). 이곳은 많은 주민들이 광산업으로 먹고 사는, 정말 조용하고 지루한 마을이다.

이곳 '덴버 시티 호텔(Denver City Hotel)'에는 광산에서 일하는 거친 남자들이 일이 끝난 후 모이는 펍 '스완(Swan)'이 있다.

어느 날, 이 동네 모든 남자들을 설레게 하는 소식이 날아들었으니, 그것은 그동안 이 펍에서 일하던 여직원(barmaid)들 클리오(Clio)와 베키(Becky)가 일을 그만두고 대신에 새로운 여직원들이 오게 될 거라는 사실이었다.

새로 오는 여직원들은 누굴까? 예쁘면 좋겠다. 남자 손님들은 그런 기대감으로 부풀어 오른다. 

행운(?)의 주인공은 리나(Lina)와 스테파니(Stephanie)라는 이름의 핀란드 여성들. 그들은 원래 발리(Bali)를 여행 중이었는데 가지고 있던 돈을 도둑 맞았다.

그래서 호주에서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일을 해 돈을 모으기로 계획했고, 인력 사무소를 통해 이 외딴 동네, 쿨가디의 펍 여직원 자리를 소개받았다. 조건은 숙식 제공과 최소 3개월은 일할 것. 하도 탈주를 하는 직원들이 많았던 탓인지, 주인이 그런 조건을 내걸었던 것이다.

새로운 '고깃덩어리'들이 쿨가디에 도착하는 날, 펍의 주인 피터(Peter)는 펍 앞의 안내판에 "오늘 밤 새로운 여직원들 도착!(NEW GIRLS TONITE!)'이라고 써 놓고 그녀들을 맞으러 간다.

기차역에서 피터를 만나 그의 차를 타고 쿨가디에 도착한 리나와 스테파니. 피터가 동네를 소개해 주는데 참 별것 없다. 

시골 중에서도 깡시골답게, 놀 것도, 할 것도, 볼 것도 없다. 사람들이 일 끝나면 펍으로 몰려들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과연 이 두 홀리데이 메이커들은 이 호주의 외딴 오지에서 3개월 동안 무사히 일을 마치고 목돈을 벌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쿨가디 마을의 전경. 오른쪽에 보이는 '스완'이라고 쓰인 건물이 우리의 두 주인공이 일하는 펍이다
왼쪽 금발이 리나, 오른쪽 갈색 머리가 스테파니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호주산 다큐멘터리 영화다. 나는 이게 아마존 프라임에 올라와 있었고 IMDB 평도 좋아서 한번 거들떠나 봐야겠다 생각해서 본 건데, 국내에서는 심지어 네이버 영화에도 정보가 없을 정도로 완전히 마이너다.

혹시나 싶어서 왓챠를 확인해 보니 이걸 봤다고 기록을 남긴 사람은 0명. 외국에서만 개봉하고 국내에 들어오지 않은 영화라고 해도 대개 몇십 명, 또는 백 몇 명 정도는 있던데, 이건 정말 0명이었다.

지금 이 리뷰를 쓰면서도 과연 몇 명이나 이 리뷰를 읽을지, 또 그중 몇 명이나 이 영화를 보고 싶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뭐, 편지가 담긴 병을 바다에 던지는 심정으로 리뷰를 써 보려 한다.

(이 영화를 보신 분은 아마 없을 것 같지만 리뷰 진행을 위해 영화 초반 이후의 내용도 누설할 수 있음을 양해 바란다. 어차피 픽션 아니고 다큐멘터리니까 이래도 괜찮겠지.)

 

리나와 스테파니가 쿨가디에서 경험하는 것은, 많은 이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미숙한 영어와 문화 차이에서 비롯하는 웃긴 에피소드'가 아니다(이 둘은 영어 실력이 제법 좋아서 큰 어려움 없이 의사소통할 수 있다). 

대신 그들이 경험하는 것은 차별이다. 첫 번째는 인종 차별.

어찌나 오지에 사는지, 리나 말대로 '문명과 떨어진' 곳에 살아서 그런지(그래도 TV 있고 컴퓨터 있고, 있을 건 다 있다), 제대로 된 교육도 못 배웠나 보다.

아무리 핀란드에 대해 아는 게 없어도 그렇지, "핀란드에서는 뭐 먹어? 물개랑 그런 거? 돌고래라든지?" 따위의 말을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문명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런 게 인종 차별이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무식자들이다.

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 더욱 노골적인데, 여성 혐오적 차별이다. 감독이 딱히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카메라를 잡은 것도 아닌데, 그냥 너무나 명백히 보인다.

남자 손님들은 끊임없이 리나와 스테파니에게 추파를 던져 대고, 누가 먼저 그들과 자게 될지 내기 따위를 한다.

중반쯤 리나와 스테파니와 좀 친해진, 모텔 직원 앤소니(Anthony)가 다른 남자 손님 데이브(Dave)와 함께 넷이서 캠핑을 가자고 하는데, 리나와 스테파니는 혹시나 남자들이 이게 '갱뱅(gang bang, 윤간)'이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래서 안전을 위해, 둘의 친구인 제임스(James)를 초대한다. 다 같이 텐트에서 자게 되면 그가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여자들을 보호해 주도록.

그런데 이 이야기(넷이 캠핑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펍 주인 아저씨의 말이 가관이다. 스테파니에게 대뜸 "너 밧줄 묶을 줄 알아? 밧줄 줄까?" 이러는 거다.

무슨 말인지 파악하지 못한 스테파니가 "저보고 밧줄로 뭘 하라고요?" 하고 되묻자, "남자 둘이랑 캠핑 간다며. 그 밧줄로 네 다리를 묶어. 안 그러면 험한 꼴 볼 거다." 하고 내뱉는다. 아니, 그런 일이 일어나면 전적으로 가해자가 나쁜 거지 피해자 잘못인가요?

하지만 이런 여성 혐오적 문화는 이곳에 너무나 짙게 배어 있어서, 이 둘이 어떻게 노력으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애초에 리나와 스테파니가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피터는 남자 손님들이 새로운 여종업원들에게 환장을 한다며 '다리 사이에 세 번째 다리가 자라날(grow a third leg)'라고 말한 위인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리나와 스테파니가 뭘 어쩔 수가 있었겠는가? 

 

캠프에서 술에 너무 취해 앤소니와 기억도 못하는 섹스를 하고 돌아온 리나는 열이 펄펄 끓기 시작하는데, 설상가상 그녀는 원래 당뇨가 있었다.

인터넷으로 엄마(로 추정되는 인물. 정확히 누군지는 안 나온다)와 통화를 할 때에 그렇게 혈당 체크를 하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리나는 이를 게을리했고, 캠프에서 얻은 심한 물집은 악화되어 물집 있던 곳 피부가 새까맣게 변했다. 

도무지 일할 상태가 아닌 리나를 대신에 스테파니가 리나의 스케쥴을 모두 도맡아 일을 하게 된다.

그래도 스테파니가 밥은 먹을 수 있게 리나가 한 시간은 일을 하려고, 잠을 자다가 깨서 거실로 나왔는데 웬 남자가 거기 소파에 누워서 자고 있는 게 아닌가!

당황한 리나가 그 남자를 쿡쿡 찔러서 깨워 말을 걸어 보니, 자기는 여기 바 손님인데 리나가 아픈 게 걱정되어서 살펴보러 왔다가(리나와 스테파니는 바 건물 2층에 있는 숙소를 쓴다) 리나가 자고 있길래 자기도 여기 소파에서 쓰러져 잤다고 한다.

낯선 남자가 여직원들 숙소 거실에서 쓰러져 잤다고? 생각만 해도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겁을 먹고 놀란 듯하지만 리나는 그래도 최대한 차분하게, 그 남자를 설득해 돌려보내려 한다.

자기는 피곤하니 자야겠다고 리나가 말을 꺼내자 이 멍청한 남자는 '그럼 나도 같이 가서 잘래(Then I'll join you)'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꾸준히 리나가 철벽을 치고 가라고 하니까 그제서야 꾸물꾸물 일어나서 움직이는데, 저러다가 리나가 저 덩치 큰 남자에게 뺨이라도 맞는 건 아닌지 보는 내가 다 불안해지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그 남자가 1층으로 내려가서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애초에 손님 주제에 왜 여직원들이 쓰는 2층을 자신이 올라가도 된다고 생각한 건지, 정말 얼탱이가 없다.

 

그리고 이쯤 되면 다들 예상했겠지만, 이 촌동네에서의 홀리데이 메이커 경험은 안 좋게 끝이 난다.

다음 날, 리나는 동네 병원에 갔다가 상태가 안 좋아 그보다 조금 더 큰, 옆 도시 병원으로 실려 가고 이 와중에 스테파니는 '너는 이곳 일이 안 맞는 것 같다'라며 해고당한다. 애초에 약속한 3개월도 되기 전에.

남자들의 끊임없는 성희롱("내 페니스는 아주 작아서, 나랑 하면 하나도 안 아플 거야"라는 말을 씨부리는 남자 손님이 초반에 등장한다)에 곤란해하며 스트레스 받는 리나와 달리 스테파니는 해탈을 했는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는 경지에 도달한 것 같았는데(스테파니 본인이 그렇다고 말하기도 했고) 아마 그게 이 해고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이 소식을 어이 없이 받아들이긴 하지만(그 더러운 꼴 참아 가며 버텼더니, 고작 돌아오는 건 해고?) 그래도 스테파니는 나은 편이다.

영화 끝 에필로그 자막으로 안내되는 내용에 따르면, 스테파니는 다행히 퍼스로 가서 다른 일자리를 구했다고 나온다.

리나는 지병인 당뇨가 악화되어 아예 대도시인 퍼스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거기에서 7주를 지낸 후에야 고국 핀란드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그나마도 당뇨 합병증으로 한쪽 눈의 시력을 전부 잃고 다른 한쪽도 시력의 30%를 잃은 상태였다.

영화 개봉 후 인터뷰에서도 리나는 그날 캠핑을 갔던 것을 후회한다고, 가능하다면 그때로 돌아가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호주 오지라고는 해도 정말 이 정도로 여성 혐오적이고 끔찍할 수가 있을까?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너무 놀랐다.

광산업이 남성의 노동력에 심하게 의존하다 보니 유난히 더 마초스러운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대놓고 이런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그래서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아봤다. 위키페디아에 올라온 2013년 젠더 갭(gender gap) 인덱스를 보니 우리나라가 0.55-0.60이고 호주는 0.70-0.75였다(참고로 1에 가까울수록 양성이 평등한 대접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단계로 치면 우리나라보다 두 단계나 높았는데도, 2016년 당시 호주 오지에서는 이런 뻔뻔하고 노골적인 성차별이 존재했다는 얘기다.

믿을 수가 없지만 사실이다. 

 

전반적으로 이 놀라운 다큐멘터리는 우리가 흔히 기대할 법한, '외국인의 유쾌한 호주 모험기'가 아니라 '여성 혐오가 만연한 오지의 현실'을 보여 준다.

불과 4년 전 이야기니까 지금도 크게 차이는 없을 것이다. 나도 호주에 있지만 만에 하나 호주 오지로 여행 또는 일하러 가는 여성분이 계시다면 정말 조심하시는 게 좋겠다(물론 가해자가 애초에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게 예방률 100%겠지만, 지금 당장은 여러분께 조심하라는 당부의 말씀밖에 내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이 영화 공식 사이트(아래 링크)에서 이 영화 스트리밍이 가능한 서비스(아이튠스, 아마존 비디오, 구글 플레이, 비메오)를 안내하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확인해 보시라. 정말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다큐멘터리다. 러닝 타임도 무려 83분밖에 안 해서 부담도 없다.

http://www.hotelcoolgardiethefilm.com/

아니면 내가 위에서 인용한, <가디언>지와의 인터뷰를 읽어 보셔도 좋겠다.

https://www.theguardian.com/film/2017/jun/22/i-was-crying-and-i-was-angry-hotel-coolgardies-shocking-portrait-of-sexism-in-the-outback

 

[영화 감상/영화 추천] 저스트 비포 아이 고(Just Before I Go, 2014) - 내가 죽기 전에 해야 할 일

 


감독: 커트니 콕스(Courtney Cox)

테드 모건(Ted Morgan, 숀 윌리엄 스코트 분)은 자살할 것이다. 삶을 밝게 비춰 주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떠났고, 직업도 변변찮은 데다가 자식도, 애완동물도 없는 불쌍한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첫 번째, 고향으로 돌아가서, 7학년 시절 자신에게 못되게 굴었던 로렌스 선생님(Mrs. Lawrence, 베스 그랜트 분)에게 왜 내 인생을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뜨렸느냐고 따지기.

두 번째, 그 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롤리 스탠스필드(Rowley Stansfield, 롭 리글 분)에게 복수하기.

세 번째, 그 힘든 시절 자신에게 친절했던 소녀 비키(Vickie, 맥켄지 마쉬 분)를 다시 만나 보기.

그러고 나서 테드는 미련 없이 자살할 것이다.

이 이상한 '버킷 리스트'를 가지고 고향을 찾은 테드. 일단은 고향에 눌러 살고 있는 형 럭키(Lucky Morgan, 가렛 딜라헌트 분)네 집에서 머물기로 한다.

형은 본성이 나쁜 건 아닌데 인권 감수성은 전혀 없이 말을 생각 없이 내뱉는 스타일이다. 뚱뚱한 사람 앞에서 뚱뚱한 사람을 놀리는 농담을 하고, 게이 앞에서 게이에 대한 농담을 하는 식. 그런 그의 직업은 놀랍게도 경찰.

게다가 테드의 형수님 되는, 럭키의 아내 캐슬린(Kathleen, 케이트 월쉬 분)도 좀 이상하다. 대뜸 한밤중에 테드의 방에 찾아와 대놓고 그 앞에서 자위를 하는데, 럭키 말로는 몽유병이라고 한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문을 단단히 잠그고 자는 수밖에. 어쨌든 테드는 오랜 숙적, 로렌스 선생님을 찾으러 양로원에 간다.

그리고 치매가 왔는지 그저 TV를 보며 벙글벙글 웃고만 있는 로렌스 선생님에게 그동안 쌓인 원한과 분노를 담아 욕설을 퍼붓는다.

그런데 그의 뒤통수를 때린 여자가 있었으니, 바로 로렌스 선생님의 손녀딸인 그레타(Greta, 올리비아 썰비 분).

테드가 오해를 풀기 위해 자신은 자살하기 전에 버킷 리스트를 실행하러 왔다고 설명하자, 그레타는 걱정한다.

테드는 그냥 모른 척해 달라고 부탁하지만, 그레타는 다음 날 테드네 집 앞에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다.

그리고 테드의 이야기를 영상 기록으로 남기도록 허락해 주지 않으면 형 럭키에게 모든 사실을 불겠다고 협박한다.

어쩔 수 없이 '자살 다큐멘터리'를 찍게 될 영상 기사를 달고 다니게 된 테드. 그는 버킷 리스트를 모두 성취하고 마침내 원하던 대로 미련 없이 이 세상을 하직할 수 있을까?

 

형 럭키(왼쪽)와 테드(오른쪽)
테드(왼쪽)와 그레타(오른쪽)
롤리(왼쪽)와 테드(오른쪽)

 

사실 정말 큰 기대 없이 본 영화였고, 처음 30분 정도는 "이거 리뷰 쓸 만한 영화일까? 지금이라도 멈추고 다른 영화를 트는 게 현명한 거 아니야?" 하고 고민했다.

그래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감탄을 하든 욕을 하든 일단 끝까지 보고 나서 하자는 마음으로 계속 봤다.

끝까지 보고 난 감상은? "예상 못 했는데 꽤 감동적인 영화!"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뭐가 감동적인지 이야기하려면 불가피하게 영화 시작 30분 이후의 이야기도 해야 하므로, 스포일러를 피하고 싶은 분들은 다음 짤부터 스크롤을 쭉 내려, <저스트 비포 아이 고> DVD 짤 이후의 마지막 한 문단만 보시라.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테드가 고향에 돌아와 만난 사람들은 다 테드의 생각 이상이었다.

롤리 스탠스필드는 지금 만나 보니 완전히 사람이 변해 있었다. 그 시절 테드를 괴롭힌 것이 미안하다며 사과할 정도로.

운명의 장난인지 그는 아내는 먼저 떠나보냈으며, 다운 증후군인 아들을 끔찍이 사랑하며 아끼지만, 어릴 적부터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아버지 아래에서 정말 힘들게 일하고 있었다. 

테드는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친구까지 된다. 롤리가 아버지를 죽이고 싶으니 도와 달라고 하자, 술에 취해서인지 테드는 별로 깊이 생각도 하지 않고(어쩌면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겠다고 한다.

그리고 어릴 적에 자신에게 친절하던 비키를 다시 만나 보니, 살이 상당히 붙었고, 애도 다섯이나 낳은 상태였다. 다행히 다정하고 착한 마음씨는 잃지 않았지만.

비키는 부모님의 세탁소에서 일하는데, 어릴 적부터 계속된 단조로운 삶에 지겨움을 느껴 왔던 터라, 테드의 다정함에 판단력을 잃고 만다.

그리고 테드에게 모텔 방에서 만나자고 하고, 테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 제안에 응한다.

그레타는 테드를 따라다니며 테드의 따뜻한 성정을 알아보고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테드는 여전히 자살할 계획을 취소하지 않았다.

테드는 자신의 버킷 리스트를 이루기 위해 만난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되지만, 그들이 정말로 테드를 걱정하고 신경 쓰고 아낀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미 많은 이들의 삶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살 계획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보다 먼저 자살하겠다고 나선 것은 테드의 조카(=형 럭키의 큰아들) 지크(Zeke, 카일 갈너 분)였다.

지크는 같은 학교의 로미오(Romeo, 에반 로스 분)라는 흑인 혼혈 게이 소년과 몰래 사귀고 있는데, 하필이면 지크가 같이 다니는 친구들이 호모포비아였다.

그 패거리는 화장실이건 학교 복도건 로미오만 봤다 하면 시비를 걸고 폭력을 행사한다. 지크도 게이이지만, 그 사실을 들켰다가는 친구들이 로미오에게 가하는 혐오와 분노, 폭력을 자신도 당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섣불러 로미오를 도울 수도, 친구들을 말릴 수도 없다.

지크가 테드에게 속내를 털어놓으며 하는 이야기가 정말 가슴이 아픈데, 대략 요약하자면 이런 거다.

어느 날, 지크가 복도를 가다가 게이인 다른 학생과 마주쳤다. 그때 그 학생이 지크를 보고 씨익 웃었는데, 지크는 그게 '나는 다 알고 있다(=네가 게이라는 걸 난 알지롱)' 하는 의미라고 느껴졌단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이 게이라는 게 들통 날까 봐 너무나 두려워져서, 다음 번에 그 남학생을 만났을 때 일부러 어깨빵을 세게 쳤는데, 상대는 철퍼덕 넘어졌다.

지크는 그때 그 학생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빛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자신도 그 순간 다른 누구보다 그 학생을 격하게 증오했다고, 자신이 그런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 될까 봐 너무너무 두렵다고 말하며 울었다.

지크가 이야기가 전개되면서부터 나는 '영화를 멈춰야 하나' 하는 생각을 그만뒀다. 이렇게나 흥미로우면서 가슴 아픈 서사라니.

영화가 갑자기 두 배는 진지해져서, 숨겨 놨던 의미의 층위를 드러내는 느낌이었다.

 

로미오를 사랑하지만, 게이임이 알려졌다가는 극심한 혐오와 분노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은 "게이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울던 지크.

로미오가 자신의 친구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는데 친구들을 말리지 못하고 오히려 "저 호모 녀석을 보면 역겹다"며 호모포비아인 척하고 로미오를 주먹질하는 지크.

그러고 나서 친구의 차를 훔쳐 로미오와 자주 가던 한적한 호숫가로 도망쳐 그곳에 떨어져 죽으려던 지크.

정말 예상도 못하고 있다가 섹슈얼리티와 혐오에 대한 서사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테드가 마음이 따뜻해서 지크가 미리 자신의 성적 취향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지크가 도망가서 죽으려던 것을 테드와 다른 가족들, 그리고 로미오가 따라와서 어떻게 말릴 수 있었을까.

 

지크 덕분에 테드는 자신이 그간 주위의 사람들에게 신경 쓰지 않았으며, 자신이 죽어도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이 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지크가 실수로 호수에 빠져 버렸을 때 자신도 모르게 그를 따라 호수로 몸을 던진다.

깊은 물속에서 정신을 잃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나 나누는 대화가 정말 이 영화의 꽃이자 눈물을 제일 많이 뽑아 내는 부분인데, 이건 꼭 봐야 한다.

아버지는 "두려움은 텅 빈 마음에 쉽게 자리잡는다"며, 인생을 알차게, 풍성하게 살아서 두려움이 들어설 곳이 없게 만들라고 말한다.

와 정말 옳은 말씀이자 명대사...

아버지와 이야기하던 테드가 어릴 적 모습으로 돌아가 아버지와 포옹하고 헤어지는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감동적이다.

커트니 콕스(우리가 아는 그 배우 커트니 콕스 맞는다. 이 영화는 커트니 콕스의 감독 데뷔작이다)가 이런 연출을 할 수 있구나, 대단하고 느끼게 한 장면이었다.

혹시나 걱정하실까 봐 덧붙이자면, 아버지와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나서 테드는 물속에서 눈을 뜨고, 호수 속 괴물(네스 호의 괴물 같은 그런 괴물)을 보고 짧은 교감을 나눈 후, 구조되어 살아난다. 해피 엔딩이니까 걱정 마시라.

 

<저스트 비포 아이 고> DVD 커버

 

중간에 스포일러까지 하면서 길게 썼는데, 다시 한 번 요약하자면, 가벼운 마음으로 웃으며 시작해 마지막에는 눈물 콧물 다 뺄 수 있는 영화다. 의미도 있고 감동도 있다.

만에 하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끝내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신 분이 있다면, 이 영화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자세히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이 이야기는 위에서 많이 했으니까) 섹슈얼리티와 혐오에 관한 서사도 있으니 혹시 게이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면 이 영화를 보셔도 좋겠다.

정말로 추천하고 싶은 영화다. 따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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