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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베키 앨버탤리, <첫사랑은 블루>

 

 

우리의 주인공 사이먼 스파이어는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절친 닉과 레아도 있고, 남매(앨리스 누나와 여동생 노라)끼리 사이도 좋다.

그에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게이라는 것 정도? 아직 아무에게도 커밍아웃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학교 텀블러 사이트에서 자신이 게이라고 밝힌 한 익명의 남학생이 쓴 글을 읽고 그에게 동질감을 느껴 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한다.

상대는 '블루'라는 닉네임을 쓰는데, 사이먼과 그는 잘 통한다.

사이먼은 '블루'에게 학교 얘기, 친구 얘기, 공연(사이먼은 연극부원이다) 얘기 등등을 하면서 점점 더 그와 친해지고, 그는 얼굴도, 본명도 모르는 이 소년에게 점점 빠져 버리고 마는데...

 

라는 것이 간단한 줄거리이다. 학교의 누가 '블루'인지 찾아내는 게 큰 줄거리랄까.

주인공이 게이 소년이다 보니까 당연히 그의 성 정체성을 이용해 협박을 하는 악역도 있다.

마틴 애디슨이라는 동급생이 사이먼의 비밀 이메일(블루에게 보낸 이메일)을 우연히 보게 되고, 그래서 이 비밀이 널리 퍼지는 게 싫으면 애비(최근에 사이먼과 친해진 예쁜 흑인 여자애)와 자기가 잘되게 도와 달라고 협박한다.

(스포일러 아니냐고? 아니다. 소설 시작하자마자 사이먼이 마틴에게 이메일을 들키기 때문이다. 글자 그대로 책 펴자마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책은 아시는 분들은 아실 영화, <러브, 사이먼(Love, Simon, 2018)>의 원작 소설이다. 난 영화는 아직 안 봤는데,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고 싶어서 그랬다.

이 소설의 원제는 <사이먼 대 호모 사피엔스 어젠다(Simon vs. the Homo Sapiens Agenda)>인데, 미국에서 첫 출간됐을 때 많은 공감과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저자 베키 앨버탤리가 임상 심리학자로서 많은 청소년들을 상담해 보았기에 생생한 게이 소년의 목소리를 잘 담아서 글을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아, 원제가 무슨 뜻이냐면, 중반에 사이먼과 블루가 '왜 게이들만 커밍아웃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이성애자들도 자신이 이성애자라는 걸 밝히는 어색하고 괴로운 시간을 겪어 봐야 해'라는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에서 언급되는 표현이다.

게이들뿐 아니라 이성애자들도 커밍아웃을 겪어 봐야 한다는 주장을 블루는 '호모섹슈얼 어젠다'라고 부르는데, 사이먼이 '인간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라는 의미에서 '호모 사피엔스 어젠다'라고 정정해 준다.

(영화 버전에서도 '이성애자들도 커밍아웃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력이 유머스럽게 잘 표현된 것을 트레일러에서 보았다. 보신 분들은 무슨 말인지 아실 듯. "저 남자가 좋아요"라고 흑인 소녀가 커밍아웃을 하니 그 어머니가 "아이고 세상에, 예수님, 절 도와주세요!"라며 신음하는 장면ㅋㅋㅋ)

 

사이먼의 1인칭 시점 서술과 사이먼과 블루가 주고받은 이메일을 몇 통 보여 주는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막 엄청 빵빵 터지는 말투나 장면은 없지만 과연 블루가 누굴까 추측하는 재미가 있어서 재밌게 잘 읽었다.

십 대 게이 소년은 되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십 대 첫사랑의 풋풋한 귀여움이 느껴져서 좋았다. 청소년 학급 문고 같은 데에 추천해도 괜찮을 것 같다.

[책 감상/책 추천] 필 바커, <남자다움의 사회학>

 

 

'남자라면 마땅히 이래야 한다'라는 생각을 '맨박스(manbox)'라고 하는데, 대개는 신체적으로 강인해야 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이성애자여야 하고... 등등, 여러분도 익히 잘 알고 있을 그런 생각이다.

저자는 이런 '남자다움'을 강요하는 것이 남자들에게 어떤 피해를 주고 여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치는지는 여러 각도에서 살펴본다.

맨박스 안에 남으려는 투쟁은 벽을 통과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에게도 심각한 피해를 초래한다. 소통, 공감, 우정, 열린 마음,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능력 같은 것은 모두 상자 밖에 있다. 상자 안에서 허용되는 표현은 분노와 약간의 성적 공격성이 전부다.

 

맨박스는 부서지기 쉽다. 우리가 조금씩 깎아낸다면 결국 무너지고 말 것이다. 남자라면 누구든지 (자신에게 정직하다면) 살아가면서 적어도 한 번은 '남자다움을 연기'하려는 단순한 이유로, 상처를 주고 폭력적이거나 그보다 더 나쁠 수도 있음을 자신도 알고 있는 방식으로 타인을 대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한 번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앞의 불쾌하고 짤막한 문장에서 '연기'라는 단어가 얼마나 의미심장한가? 남자다움의 모든 법칙을 따르는 일은 가장 확실한 연기이기 때문이다.

연기는 현실이 아니다. 그런 연기를 잘해낼 수는 절대로 없다. 항상 누군가가 우리에게 더 남자다워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보다 더 남자다운 삿람들, 우리처럼 남자답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항상 있을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우리 중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이는 위험한 일이다. 우리를 분노에 빠뜨린다. 너무나 맹렬한 분노. 누군가는 다치게 될 것이다.

 

맨박스가 남자에게 끼치는 해악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남성들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말라고 배우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 서투르다.

이것은 남자들의 인간관계(특히 여성 파트너와의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정신적이거나 신체적 문제가 있어도(예컨대 우울증이나 체력 저하 등) 전문가의 도움을 구하기 어렵게 만든다(자신이 알아서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고 도움을 구하는 남자는 '남자답지 못하다'고 여겨지니까).

또한 남자들이 어릴 적부터 노출되는 포르노에는 진정한 사랑이 없고 오직 성적 이미지만 있다. 포르노는, 저자 표현대로, "젊은 남자들이 여성과 풍요롭게 성공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방해하는 으뜸가는 요인이다."

 

남성권리운동가, 또는 인셀(involuntarily celibate, '비자발적 독신(주의자)'이라는 뜻)에 대한 장을 읽으면서는 '와, 일베충 같은 놈들은 전 세계 어디에나 있구나' 싶어서 놀랐다.

도대체 자기가 남성으로 태어났다 해서 섹스가 왜 자연스럽게 그냥 자신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하긴, 정상인이 또라이의 정신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겠느냐만은. 그래도 이들에 관한 장이 흥미롭긴 했다.

그들은 여성이 자신을 원하지 않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어느 인셀은 '여자들은 나를 무시하면서도 남자들 찾을 수 없다는 멍청한 말을 한다. 밖에 나가면 핫도그가 널렸는데 배고프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이 불쌍한 사람의 문제는 버려진 음식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 책은 남자다움을 다시 생각하는 의미에서 남자들에게 요리할 것을 추천한다. 심지어 간단한 닭고기 요리 레시피까지 들어 있다! 올ㅋ

그리고 (남자라고 해서 모두 아버지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지만) 아버지가 되는 일에 대해 생각하는 장도 따로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자녀를 가질 계획이 전혀 없어서 딱히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해당 사항이 있으신 분들은 읽어 봐도 좋겠다.

 

책 자체는 괜찮은데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다. 영어적인 표현을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바꾸지 못했달까.

번역가가 자꾸 '-'(마이너스 부호)를 이용해서 문장 사이사이에 삽입된 절을 이어붙이는 나쁜 버릇이 있다. 심지어 엠 대시(em dash)도 아니야!

아니, 저자는 그럴 수 있다. 영어에서는 그렇게들 쓰니까. 하지만 한국어로 번역할 때 그렇게 게으르게 하면 안 되지. 

예를 들어, 

여자들에 대하여 쓰레기 같은 말을 하는 것은, 그와 반대되는 말 - 부드럽게 다정하고 공감하는 - 을 하면 '푸시'라 불리기 쉬운 표적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장 안에 '-' 부호를 써서 삽입구를 넣을 거면 적어도 그 앞에 오는 말과 같은 형태로 맞춰 주는 게 읽기 편하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앞에 나오는 말이 명사면 삽입구로 명사로 만들라는 거다. 이렇게.

여자들에 대하여 쓰레기 같은 말을 하는 것은, 그와 반대되는 말, 즉 부드럽게 다정하고 공감하는 말을 하면 '푸시'라 불리기 쉬운 표적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만 해도 번역을 건드리지 않고도 훨씬 읽기가 편해지지 않나. 예시 하나 더.

본보기와 애정 어린 조언을 통해 그들에게 사랑하고 존중하는 여성과의 관계가 소중하고, 기쁨을 주고, 경이로운 관계임을 보여 주는 일은 우리 - 쉰세 살인 나도 '나이 든 남자'에 속한다-의 몫이다.

이건 그냥 "(생략) 보여 주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쉰세 살인 나도 '나이 든 남자'에 속한다)." 이렇게 괄호에 넣어서 뒤로 보내는 게 나았겠다.

 

그리고 어떤 문장은 번역 자체가 너무 별로다. 예를 들어, 다음 문장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가 되시는지?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소녀의 귀여운 막대 그림 주위에 다음과 같은 기괴하고 섬뜩한 문구들이 보인다.

'귀여운 막대 그림'이 도대체 뭔가 싶을 것이다. 내 추측으로는 '(cute) stick figure'를 말하는 것 같다. 아이들이나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들이 간단히 동그라미와 직선으로 사람을 그리는 그런 거 말이다. 졸라맨처럼.

이런 게 'stick figure'다.

그러니까 위의 예시 문장은, "단순하게 동그라미와 선으로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소녀를 그린 귀여운 그림 주위에~ (이하 생략)" 정도로 표현하는 게 낫겠다.

편집자가 저 위의 삽입어구들이나 이런 어색한 문장들을 도대체 왜 그냥 놔뒀는지 모르겠다.

내가 왜 책을 읽으면서 교정을 봐야 하지? 이럴 거면 나에게 돈을 주든가, 아니면 책값을 할인해 주든가 해라ㅡㅡ

 

어쨌거나, 편집만 좀 더 잘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책 내용 자체는 괜찮다. 리디셀렉트에도 있으니 한번 살펴보시라.

 

  1. Fancy_kang 2020.10.05 20:51 신고

    책 제목이 매우 흥미로웠는데 번역이 엉망이란걸 보니 못읽겠군요ㅠㅜ

[책 감상/책 추천] 아리 투루넨, 마르쿠스 파르타넨, <매너의 문화사>

 

 

각 시대별로 '매너'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살펴보는 책이다.

매너의 시작, 몸가짐과 바디랭귀지, 인사법, 식사 예절, 자연 욕구와 분비물, 눈물과 웃음, 공격성, 성생활, 디지털 중세시대 등으로 각 장이 구분돼 있다.

사실 매너라는 게 시대에 따라, 그리고 문화에 따라 다르다는 건 굳이 이 책을 읽지 않아도 누구나 상식적으로 안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바뀜에 따라 대중의 사고방식이 바뀌면서 매너도 같이 변화한 과정을 알아보는 것은 퍽 재미있는 일이다.

 

매너가 곧 예의라고는 할 수 있지만, 예의가 곧 도덕성이라고 볼 수는 없다.

저자들은 1장 '매너의 시작'에서 이렇게 썼다.

하지만 그들이 선한 의도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그저 정교하게 정해진 행동 규범을 외형적으로만 따른 것에 불과하다. 성폭행 미 혐의로 체포된 도미니크 슈트라우스 칸(Dominiquer Strauss-Kahn) 전 IMF 총재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전 이탈리아 대통령만 보더라도 훌륭한 매너가 곧 선한 마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궁전을 찾은 손님 앞에서 우아하게 차려입고 형식상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대화를 이끌어 갈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이 책은 눈앞에 드러나는 형식의 이면을 파고들어 '도대체 훌륭한 매너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자 한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과연 훌륭한 매너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지, 아니면 그저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인간의 행동을 억제하기 위해 고안된 정신적 울타리를 그렇게 부르는 것에 불과한지를 탐구하려 한다. 이를 위해선 하나의 행동 규범으로 묶여 버린 유럽 연합을 떠올리기 전에, 일단 유럽의 매너가 형성된 역사와 몇몇 엄격한 행동 규칙이 갖는 이른바 '미덕'이라는 것의 실체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매너라는 건 일종의 구분선으로 작용한다. 예의가 있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들, 고귀한 사람들과 천한 사람들, 내국인과 외국인 등.

자신이 속한 집단의 문화가 다른 집단의 문화보다 낫다는 생각의 뿌리는 매우 깊다. 고대 이집트 떄부터 이미 인간은 자신의 견해를 다른 민족들과 차별화하려고 노력했다.

고대 그리스어에 나타난 '야만(barbar)'의 개념을 살펴보자. 그리스인들의 귀엔 외국어가 마치 '봘봘(barbar)' 하고 개가 짖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래서 그들은 외국인들을 개와 같은 발달 수준에 있는 것으로 규정했다.

인도어에도 외국인을 비하하여 부르는 '바르바라(barbar)'란 단어가 있다. 이 비속어는 어원학적으로 그리스어의 '야만'과 유사하다. 산스크리트어를 잘하지 못하는 외국인들이 그 언어에 유독 많이 등장하는 'r'을 더듬거리면서 발음하는 것을 흉내 내 '바르바라'라고 부른 것이다. 곧 이 단어는 '어릿광대'나 '멍청이'의 동의어로 자리잡는다.

 

식사 예절도 마찬가지다.

세계가 자기네 저녁 식탁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건 인간의 오만함을 드러내는 생각 중 하나다. 사람들은 자신의 음주 습관이나 식문화는 미덕으로 여기면서, 이웃의 습관에는 자꾸만 천반하다거나 야만적이라는 꼬리표를 갖다 붙이려고 한다.

 

내가 가장 흥미롭게 여겼던 건, 6장 '눈물과 웃음'에서 저자가 보여 주는, 이 두 가지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또는 그렇게 보이는) 감정에 대한 '매너'가 지금과 얼마나 달랐느냐 하는 점이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우는 것이 금지되었던 시대에도 눈물을 허용하는 몇 가지 상황이 있었다. 이는 비단 극장 안에 한정되지 않았고 일상에서 우는 일이 가능했다. 그때 적용되는 규정은 한 가지, 즉 품위가 있을수록 더 많이 운다는 것이었다.

 

성 안에서도 눈물이 때때로 유용한 도구로 쓰였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ㅅ인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치 않았다. 백년전쟁 당시 부르고뉴 공작이었던 필리프 3세를 회유하기 위해 프랑스 왕이 파견한 특사는 항상 눈물을 흘렸다. 젊은 공작이 송별회를 열어 주면 모두가 들으라는 듯 소리를 내어가며 울었다. 부르고뉴 궁에 묵은 루이 11세도 몇 번이고 눈물을 흘렸다. 부르고뉴와 프랑스, 잉글랜드가 아라스에서 연 평화회의에 파견된 특사들이 감동적인 발언을 하면 청중들은 말없이 바닥을 내려다보며 코를 훌쩍이고 흐느끼다가 결국은 엉엉 울어 버렸다.

옛날엔 이처럼 다른 사람 앞에서 운다고 해서 난처할 게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울 수 있는 능력은 연민과 품위의 증거였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지체가 높은 사람일수록 감정이 풍부해야 한다고 믿었다. 눈물이야말로 엘리트 계층이 '감정적일 수 있는 특권'을 눈에 보이게 드러낼 수 있는 도구였다. 당시를 지배하던 사고방식은 이 특권은 타고나는 것이었다. 일반인들의 땀이나 짐승들의 배설물과 다르게 눈물은 귀족 계층의 감수성을 나타내는 정결한 분비물로 대접받았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Blast from the Past(1999, 블래스트)>에서 남자 주인공 애덤(Adam, 브렌단 프레이저 분)은 이렇게 말한다.

"매너는 다른 이에게 우리가 그들에게 마음 쓴다는 걸 보여 주는 방법이죠(Manners are a way of showing other people we care about them.)."

이 말을 들은 트로이(Troy, 데이브 폴리 분)는 여주인공 이브(Eve, 알리시아 실버스톤 분)에게 이 예의 바르고 상냥하고 친절한 남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글쎄, 그거(남주의 완벽한 테이블 매너)에 대해서도 물어봤지. 그가 말하기를, '좋은 매너를 지키는 건 다른 이에게 우리가 그들을 존중한다는 걸 보여 주는 방법일 뿐이에요'라는 거야. 와, 난 그걸 몰랐네. 난 그게 그냥 거만하게 구는 방법인 줄 알았잖아. 그리고 그거 알아?" (이브: 뭐?) "그는 내가 신사고 네가 숙녀라고 생각한대."

Troy : You know, I asked him about that. He said, good manners are just a way of showing other people we have respect for them. See, I didn't know that, I thought it was just a way of acting all superior. Oh and you know what else he told me?

Eve : What?

Troy : He thinks I'm a gentleman and you're a lady.

애덤은 핵 전쟁이 난 줄 알고 몇십 년간 지하 벙커에서 살아 온 부모님에게 잘 배워서 정말 티라고는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는 순수 청년이고, 트로이와 이브는, 음, 찌들대로 찌든 현대인이라고 할까.

그래서 애초에 무엇을 위해 매너라는 게 생긴 건지도 모르고, 매너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이 살아 온 이들이다(사실 대부분의 현대인이 그렇지만). 

그런 그들이 완벽하게 예의 바르고 스윗하기 짝이 없는 애덤을 만났으니 얼마나 충격이 컸겠는가.

내가 책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다소 뜬금없이 이 영화 이야기를 꺼낸 건, 매너에 대해 생각할 때 애덤의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다.

 

매너, 예의, 예절이란 게 나라마다, 문화마다, 또 시대마다 다른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특정한 나라, 문화, 시대의 풍습을 따르지 않고서 타인에 대한 존중을 보여 줄 수 있을까? 

매너의 형태는 달라도 결국에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보여 주는 '틀, 방식'이 곧 매너 아닌가.

예를 들어, 지금 우리나라가 기사들이 활약하던 중세 유럽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전히 가위나 칼 등 날카로운 칼붙이를 누군가에게 건네줄 때 상대가 날카로운 쪽을 잡아야 하도록 건네준다면 그런 행위는 분명히 상대를 불쾌하고 불편하게 할 것이다.

손잡이를 상대가 안전하게 잡을 수 있도록 방향을 돌려서 건네주는 게 (현대 우리나라에서) 기본 매너라는 것은 유치원 애들도 안다('이렇게 날카로운 걸 잡으면 아야 하잖아~' 이 정도로만 설명해 줘도 애들을 이해한다).

그러니까, 내가 상대를 아무리 좋아하고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매너를 따르지 않으면 나의 그 마음이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매너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다시금 그런 결론에 이르렀다.

 

한 줄 요약: 매너라는 규칙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재밌지만, 매너의 필요성 자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드는 점이 더 마음에 드는 책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영화도 짱 재미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번 보시라! 브렌단 프레이저가 엄청 잘생겼고 알리시아 실버스톤이 짱 예쁘게 나온다!ㅇ)

[책 감상/책 추천] 곽재식, <지상 최대의 내기>

 

 

'환상 문학 웹진 거울 서버를 다운시킬 정도로 인기가 폭발했다는 <초공간 도약 항법의 개발>을 담은, 곽재식 SF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참고로 곽재식 작가는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라는 작법서를 쓰신 그분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SF 소설의 큰 팬은 아닌데, 우주선이랄지 외계 생물체의 모습을 상상하는 게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상상력이라는 건 어느 정도 지식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나는 (자주 SF 소설의 배경이 되는) 우주라든지 우주선 따위에 대한 (관심이 없으니) 지식이 많지 않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런 '전형적인' SF 소설을 접하게 되면 상상하기가 어렵고 과학적 내용이 이해가 안 되고, 따라서 줄거리를 따라가기가 힘들어지며 너무나 당연하게도 재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곽재식 작가의 이 SF 단편소설들은 생활 밀착형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의 일반적이고 평범한 생활에 기반하고 있다.

그래서 낯선 우주선이나 외계인 따위를 상상해야 할 필요 없이도 편하고 술술 읽을 수 있다.

 

이 단편집에 실린 11편의 단편소설을 간단히 평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다만 줄거리를 일일이 소개하지는 않겠다.

나처럼 줄거리를 모르는 채로 읽는 걸 선호하시는 분이 계실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하나하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게 약간 지루하기도 하고.

다만 특히 재밌는 부분, '나는 여기에서 빵 터졌다' 하는 부분이 있으면,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조금 인용해 보여 드리겠다.

<01_초공간 도약 항법의 개발>

회사 생활 하면서 관료주의적인 관행 또는 '까라면 까'라는 관행을 접해 본 적이 있는 이라면 이 단편에서 너무나 현실적으로 묘사된 이 관행에 PTSD가 올지도 모르겠다.

김 박사의 영혼은 이미 분실된 상태였다. 김 박사는 시키는 대로 고쳤다.

'지난겨울 우주선에 쓰이는 HLO를 연구했는데 실제 우주선을 제작해 연구한 것은 아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02_지상 최대의 내기>

낭만적인 SF 연애 소설. 한승희라는 상대를 향한 마음이 아주 담담하달까, 담백하게 그려져 있는데 "나 연애 소설이야!!"라고 소리치지 않아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그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아주 훈훈하고 재밌게 읽었다.

나는 한승희의 그러한 성격이 그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보고 있다. 알파 산업의 회장은 한승희의 어머니였는데, 회장님, 그러니까 한승희의 어머니께서는 옛날 환락과 정열의 20대를 뻐근하게 보낸 결과, 결혼할 남자에 대해서는 단 두 가지 특징만 따지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셨다고 한다.

그 두 가지 중 첫 번째는 선량한 마음이었고, 두 번째는 뒤에서 보았을 때 어깨 근육의 아름다움이었다고 한다. 어머님께서는 알파 산업을 여든 배로 성장시킨 수완가답게 그 둘을 완벽하게 가진 남자를 찾아내고 자신의 배필로 삼는 데 썽공했다. 그러니까 한승희의 선량함은 그 아버지의 선량함을 물려받은 것이고, 한편으로는 그런 선량한 사람을 찾아다닌 어머니의 마음을 같이 물려받은 더 새로운 선량함이었다. 게다가 한승희가 완벽한 어깨선을 가진 것 역시,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전자의 간접 영향은 아니었을까 나는 짐작한다.

<03_로봇 살 돈 모으기>

제목 그대로 10살짜리 고아가 아동을 돌봐주는 로봇을 사기 위해 돈을 모으는 이야기인데, 퍽 귀엽다.

<04_체육대회 묵시록>

체육대회 망해라! 김 박사 불쌍해... 일 좀 할라치면 사람들이 말 걸어서 집중력 다 깨지고...

<05_다람쥐전자 SF팀의 대리와 팀장>

SF 소설만 읽으면서 돈을 받을 수 있는 일자리가 있다면 나라면 평생 뼈를 묻겠다!! 그런데 주인공은 '회사가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왜 SF 소설을 읽기만 하면 돈을 준다는 거지?' 하고 의문을 가지게 되고, 이 신의 직장의 비밀을 캐려 하는데...

팀장님은 그렇게 말하고 '흐흐흐' 웃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괜히 따라 웃었다. 회사원의 본능이었다. 물고기는 수영할 줄 알고, 새는 날 줄 알며, 박쥐는 초음파로 볼 줄 알듯이 회사원이라면 상사가 웃으면 같이 웃을 줄 아는 것 아니겠는가.
많은 사람이 만족을 모르며 지나친 탐욕을 품다가 신세를 망치곤 한다. 사람이 천국에서 오래 살다 보면 가끔은 "혹시 유황불에 몸을 구우면 좀 짜릿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궁금하다." 하는 생각도 하게 되나 보다. 나도 그때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06_치카우>

작가님이 애가 있으신가 보다... 육아의 힘듦을 이 단편소설로 승화시키신 게 아닐까...

저 머나먼 외계에서 온 우주인들 말투가 사극 말투를 닮은 것도 웃음 포인트. 예를 들어 이런 거.

"(...) 다만 2억 년 동안 이어온 선대의 조종세업이 내 대에서 끝나게 되어, 그 종묘사직을 지키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닥쳐라, 이 비열한 놈. 블랙홀이 물질을 내뿜고 우주가 수축한다 할지라도 나의 충심이 조금이라도 흔들림이 있겠느냐?"

<07_2백세 시대 대응을 위한 8차 산업혁명 기술 기반 컷 앤 세이브 시스템 개발 제안서>

뭐가 컷 앤 세이브얔ㅋㅋㅋㅋㅋㅋㅋ 그냥 SF 버전 고려장일 뿐이잖아!

제안서의 형태로 된 단편소설인데, 마지막에 보면 "이상, 제안서 작성자: 주식회사 모디스트 프로포절 테크놀러지(대표: 조너선)"이라고 돼 있다.

이 글이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 <걸리버 여행기> 쓴 그 사람 맞다)가 쓴, 아이들을 잡아먹어서 식량 문제를 해결하자는 풍자 에세이 <어 모디스트 프로포절(A Modest Proposal)>에 대한 오마주임이 틀림이 없음을 밝히는 부분이다.

이걸 읽다 보면 죽어가는 사람의 뇌를 포함한 머리 부분을 자르고 그 뇌 안에 있는 데이터를 온라인 버추얼 세상에 업로드하여 '죽음 후의 세상'을 영원히 살게 한다는 설정을 가진, 아마존 프라임(Amazon Prime) 시리즈 <업로드(Upload)>가 떠오른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이 미드도 한번 살펴보시라. 꽤 재밌다.

<08_종속선언서>

인간 대표 33인이 로봇 황제에게 '우리를 다스려 주시오!'라고 다소 강압적으로 부탁하며 '거절을 거절하는'데, 꽤 웃기다. 이래서 인간은 안 된다니까!

33인 그런 것이다. 특히 우리에게는 시급한 문제도 있어.

로봇 황제 어떤 겁니까?

33인 일단 많은 문제 중에 어떤 게 제일 시급한 문제인지 결정하는 것부터가 시급한 문제다. 인도 사람들은 지난번 태풍에 대한 복구 계획을 세우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고, 러시아 사람들은 어제 핵무기를 훔쳐 간 이반 4세 유치원 아이들을 다시 잡아들이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고, 한국 사람들은 어제 TV에서 어쩐지 버르장머리 없어 보인 가수를 어떻게 처벌하는지 결정하는 문제가 가장 시급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들 결사적으로 자기 문제가 가장 시급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우선 그것부터 정리해야 한다.

<09_납량특집 프로그램의 공포>

이건 납량 소설인가... 아니, 으스스한 느낌이랑 반전도 괜찮은데 어디가 SF스러운지는 모르겠다. 이게 왜 SF 단편소설 모음집에 들어 있는 거죠...?

<10_멧돼지의 어깨 두드리기>

제목이 다 했다. 제목만 딱 들어도 '어, 그게 무슨 소리지?' 하고 흥미를 끌기에 딱 적합하잖아. 이야기만 따지자면, 대충 세계관과 설정을 이해하면 그다지 엄청 충격적인 반전이 있다든가 하지는 않다.

<11_종말 안내문>

이것도 충격적인 반전이라든가 엄청 신선한 소재는 아니지만 표현을 재밌게 잘했다.

 

결론적으로 너무 어렵지 않고 읽을 만한 SF 소설을 찾는다면, 아니면 딱히 SF 소설을 찾는 건 아니지만 재미만 있다면 SF 느낌이 조금 버무려진 정도는 괜찮다 하는 경우라면 이걸 한번 거들떠보시라고 하고 싶다. 굿! 

[책 감상/책 추천] 캐서린 A. 샌더슨, <생각이 바뀌는 순간>

 

 

나는 리디 셀렉트로 읽었는데, 읽을 분량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뒤에 참고 문헌이 꽤 길다) 금방 끝났다는 느낌이다. 

안 그래도 책이 쉽게 쓰여서 잘 읽히는데 길지도 않으니 본문의 끝에 다다랐을 때 '어, 벌써?' 하게 됐다.

 

저자는 메사추세츠 대학교 애머스트 캠퍼스의 심리학과 교수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행복을 주제로 한 강연에서 만난 어떤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강연이 끝나고 한 여성이 무척 감동받은 표정으로 다가와 감사 인사를 했는데, '솔직히 선생님 강연은 듣지 않으려고 했다'라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행복에 대해 1시간씩 떠드는 사람은 고양이나 무지개만 봐도 행복해지는 사람일 게 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이야기를 1시간이나 듣고 나면 그 사람의 목을 조르고 싶어질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심리학 논문을 바탕으로 해서, 꽤 실용적이고 실천하기 어렵지도 않은,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려 준다.

저자도 본인이 걱정을 끌어안고 사는 타입이라고 인정하기에, 그래서 사소하지만 인식을 바꿀 수 있는 방법들 위주로 책을 쓴 것 같다.

예를 들어, 값비싼 유명 상표의 약은 일반 약보다 통증 완화에 더 효과적이다. 심지어 약의 성분이 똑같을 때도 그렇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고, '비싸니까 더 효과가 좋겠지'라고 사람들이 믿기 때문이다. 이른바 플라세보 효과다.

이처럼 아주 간단한 예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생각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히말라야 산으로 가서 명상을 하라는 게 아니다.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들 몇 개만 바꿔도 삶을 충분히 더 좋아진다. 저자가 제시하는 것처럼, 나에게 자비 베풀기, 스트레스가 정신과 신체 건강에 해를 끼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행복하고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믿기 등등.

나는 3장, '생각이 뇌를 나이 들게 한다'의 앞머리에 나오는 이 일화가 제일 인상 깊었다.

텍사스 대학교 기계공학 및 물리학 교수님 존 굿이너프(John Goodenough)는 전지 개바롤 많은 상을 받았다. 2014년에는 리튬 이온 전지 개발에 기여한 공로로 공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찰스 스타크 드레이퍼상(Charles Stark Draper Prize)d을 수상했고, 2017년에는 새로 개발한 전지으 ㅣ특허를 신청했다. 또 노벨화학상의 후보로도 자주 거론됐다.

놀라운 것은 굿이너프의 나이다. 그는 무려 95세다! 굿이너프는 자신의 훌륭한 업적 대부분을 노년기에 이뤘다며 이렇게 말했다. "거북이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홀로 아주 힘겹게 느릿느릿 기어가죠. 30살쯤에는 아마 그 사실을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멈추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굿이너프는 70대에도, 80대에도 심지어 90대에도 다양한 연구를 할 수 있었다. 그는 노년의 진정한 이점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마음껏 시도해 볼 수 있는 자유'를 꼽았다. "계속 직장을 다녀야 한다는 부담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해 보니, 강제수용소에 한동안 갇혀 있다가 생존한 사람은 수용소를 바로 탈출한 같은 연령의 사람에 비해 평균 14개월 더 오래 살았다고 한다.

이 결과가 납득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 후 얻게 되는 유익, 즉 '외상 후 성장'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도 이 같은 성장 유형을 보였다. 가까운 사람에게 더 많이 관심을 가졌고 회복 탄력성이 더 강해졌으며 일상의 작은 기쁨에 진정으로 감사했다. 이런 놀라운 결과는 극심한 스트레스의 힘을 보여 준다. 즉, 고통이 사고방식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며 이는 곧 삶의 질 향상과 수명 연장에도 큰 도움을 준다.

과연, 삶의 사소한 즐거움을 즐기고 감사하며 가족이나 배우자/연인, 친구 등 소중한 사람들과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게 곧 행복인 것 같다. 그것 외에 다른 행복이 있을까?

 

이것들 외에도 소개해 드리고 싶은 내용이 많은데 책 전부를 다 미리니름할 수는 없으니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하고 끝맺어야겠다.

비교하는 습관을 버리자! 이게 정말 진짜 리얼 트루 완전히 중요하다. 비교는 기쁨을 앗아간다. 비교를 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나을 거라고, 더 행복하고, 더 부유하고, 더 상황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한 연구에서 대학생들에게 지난 2주간 있었던 부정적인 사건(시험 성적이 나빴던 일이나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가 거절당한 일)과 긍정적인 사건(재밌는 모임에 참석한 일이나 친구들과 즐거운 활동을 한 일 등)의 빈도 수를 물었다. 그리고 다른 학생은 그런 사건을 얼마나 자주 경험했다고 생각하는지도 물었다.

결과가 예상되는가? 학생들은 친구들보다 자신이 부정적인 사건을 더 많이 겪는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지난 2주간 시험에서 실제로 나쁜 점수를 얻은 학생은 참가자의 60퍼센트였지만 참가자들은 44퍼센틔 학생만이 나쁜 점수를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긍정적인 사건은 자신보다 남들이 더 많이 경험한다고 답했다. 지난 2주간 재밌는 모임에 참석한 학생은 41퍼센트였는데, 참가자들은 62퍼센트의 학생이 그런 즐거운 경험을 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슬프게도 학생들의 이런 인식은, 그것이 잘못된 추측인 경우에도 부정적 결과를 불러온다. 자신에 비해 친구들이 부정적인 경험은 덜하고 긍정적인 경험은 더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생은 고독감을 더욱 많이 느끼며 삶의 만족감도 더 낮았다.

 

내용도 어려울 것 없고, 번역도 무난해서 잘 읽힌다.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겠다고 다짐하되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하면 좋겠다.

[책 감상/책 추천] 네이딘 버크 해리스,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한 2주쯤 전에 시작한 것 같은데 현생이 바빠서 이제야 다 읽었다. 휴!

책 내용은 띠지에 잘 요약돼 있다. "자가면역질환, 암, 심장병, 웨궤양, 만선 기관지염, 뇌졸중, 편두통"처럼, 언뜻 보기에는 정신적 스트레스와 무관하고 오히려 생활 방식과 더 연관이 있을 것 같은 이런 질병들이 사실은 아동기의 정신적, 심리적 상처가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인 네이딘 해리스는 소아과 의사이자 공중보건 전문가로, 2007년 샌프란시스코의 가난한 동네에 진료소를 열었는데, 그곳에서 놀라운 케이스들을 목격했다.

신체적 폭력이라든지 학대, 방임, 부모의 알코올 또는 약물 중독, 정신 질환, 이혼 등등으로 아이들이 받은 마음의 상처가 여러 가지 질병으로 발현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발견을 반신반의했으나, 이미 이런 현상을 보고한 논문을 접하고 자신의 의견에 확신을 얻는다.

그리고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기 전, 환자 또는 보호자가 환자의 유년기에 관한 정보(위에서 예를 든 것과 같은 정신적 상처를 겪었는지에 관한 정보)를 묻는 설문지에 답하게 하는 프로토콜을 수립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다른 의사나 상담사 등의 조력자들과 힘을 모았다.

그 결과가 바로 '부정적 아동기 경험(ACE, Adverse Childhood Experiences) 조사'이다(책 뒤에 부록으로 ACE 질문지가 실려 있다).

이 설문지에서 높은 점수(최고 점수는 10점)를 받은 환자일수록, 심혈관계라든지 암 같은 만성 질환이 생길 위험이 더 높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설문지로 펠리티와 안다가 '부정적 아동기 경험(Adverse Childhood Experiences)', 줄여서 ACE라는 용어로 표현한 것에 관한 결정적인 정보가 수집되었다. 비만 프로그램에서 목격했던 만연한 역경들을 바탕으로 두 사람은 학대와 방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가정에 대한 정의를 ACE의 열 가지 구체적 범주로 분류했다. 그들의 목표는 18세가 되기 전에 이 열 가지 범주 중 어떤 것을 경험했는지 질문해 각 환자가 아동기에 부정적 경험에 노출된 수준을 판단하는 것이었다.

1. 정서적 학대(반복적)
2. 신체적 학대(반복적)
3. 성적 학대(접촉)
4. 신체적 방임
5. 정서적 방임
6. 가정 내 약물남용(알코올 중독자나 약물 남용 문제가 있는 사람과 함께 거주)
7. 가정 내 정신질환(우울증이나 정신질환을 앓은 사람 또는 자살을 시도한 사람과 함께 거주)
8. 어머니가 폭력을 당함
9. 부모의 이혼 또는 별거
10. 가정 내 범죄행위(가족 중 투옥된 사람이 있는 경우)

각각의 학대와 방임과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가정에 대한 항목은 하나당 1점으로 계산되었다. 총 열 가지 범주이므로 가장 높은 ACE 지수는 10점이다.

펠리티와 안다는 건강 검진과 설문에서 얻은 데이터를 가지고 건강에 위험한 행동들과 건강 상태가 ACE 지수와 상관관계를 보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충격적이지 않은가. 어린 시절에 학대 같은 트라우마를 겪은 것만으로도 억울한데, 성인이 되고 난 후에도 큰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니.

무엇보다 이것은 가난한 동네뿐 아니라 부유한 지역에서도 똑같이 해당되는 사항이다. 다시 말해, 보통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위에 언급된 트라우마를 겪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유소년기의 부정적 경험으로 상처를 입는 아이는 가난한 흑인 동네뿐 아니라 부유한 백인 동네에도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해리스 박사의 팀은 이 ACE 설문을 모든 의료 행위의 기본 프로토콜에 필수로 포함되게 노력했던 것이고 아직도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아동기에 유독성 스트레스에 노출된다 하더라도, 그 영향을 줄이거나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미니 박사의 연구 팀이 어미 쥐와 새끼 쥐를 가지고 한 실험 이야기를 통해 후성유전적 조절, 그러니까 쉽게 말해 '유전이 100%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니 [박사의] 연구 팀은 두 무리의 어미 쥐와 새끼 쥐를 관찰했다. 그들은 새끼 쥐가 연구에 사용되고 나면 어미 쥐가 스트레스를 받은 새끼를 핥아 털을 다듬어 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사람으로 치면 포옹과 입맞춤 같은 행동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모든 어미 쥐가 똑같은 정도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어미 쥐는 높은 강도로 핥고 털을 다듬는 반면 어떤 어미 쥐는 그 정도가 낮았다. 이는 힘든 하루를 보낸 자식에게 정다운 입맞춤과 따뜻한 포옹을 얼마나 해 주느냐의 차이였다. (...)

연구자들은 새끼 쥐의 스트레스 반응이 어미 쥐가 '많이 핥아 주는가' 아니면 '적게 핥아 주는가'에 따라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새끼 쥐들을 연구에 사용하거나 그 밖의 방법으로 새끼 쥐들에게 스트레스를 주었을 때 많이 핥아 주는 어미 쥐의 새끼들은 코르티코스테론을 비롯한 스트레스호르몬 수치가 낮았다. 많이 핥아 주면 스트레스가 낮아지는 이 효과는 용량-반응 관계도 보였다. 즉 어미 쥐가 더 많이 핥아 주고 털을 골라 줄수록 새끼 쥐의 스트레스호르몬 수치는 그만큼 더 낮아졌다. 게다가 많이 핥아 주는 엄마를 둔 새끼 쥐들의 '스트레스 온도 조절 장치'는 더 민감하고 효과적이었다. (..)

또한 미니의 연구는 어미 쥐가 새끼 쥐를 충분히 핥아 주지 않으면 새끼 쥐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에 더해, 더 많이 핥아 주는 것이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도 보여 주었다. 환경은 우리가 고칠 수 있는 요소이므로 이는 '적게 핥아 주는' 엄마에게 태어난 사람 아기에게도 많은 희망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 아이는 하자가 있는 존재도, 결함이 생긴 존재도 아니다. 생물학은 아이가 이른 시기에 안전하고 안정적이고 따뜻한 보살핌을 받는다면 성인기의 건강한 스트레스 반응 체계가 발달될 수 있다고 말한다. 앞서도 말했듯 힘들지만 견딜 수 있는 스트레스 반응이 유독성 스트레스 수준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 주기 위한 핵신은 스트레스 요인의 충격을 적절히 완화해 줄 수 있는, 즉 완충제 역할을 해 줄 성인의 존재다. 새끼 쥐에게 그 존재는 핥아 주고 털을 다듬어 주는 어미 쥐였다. 사람의 경우에는 꼭 안아 주고 귀 기울여 말을 들어 주는 아빠일 수 있다. 이렇게 충격을 흡수해 주는 존재는 스트레스호르몬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뿐 아니라, 스트레스 반응 조절 장애와 주요한 건강 문제들로 이어질 수 있는 후성유전적 변화를 예방하기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그래요, 아동기의 트라우마가 성인이 되고 나서도 신체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건 인정한다 치자고요. 그러면 이제 어쩌란 말입니까?"

일단은 자신이 겪은 경험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아는 것만 해도 큰 도움이 되고, 그러고 나서는 자신의 스트레스 레벨을 조절하려고 의식적인 노력을 쏟을 수 있을 것이다. 운동을 한다든지, 명상을 한다든지, 상담사를 정기적으로 만나 상담을 받는다든지, 아니면 가족이나 친구 등 주변 사람들과 돈독한 유대관계를 유지해 정신적으로 안정감과 만족감을 느낀다든지 등등. 

유독성 스트레스에 대처하기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여섯 가지 접근법은 수면과 운동, 영양, 마음챙김, 정신 건강, 건강한 관계이다.

유독성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 운동이 있다. 요가와 암벽 등반을 싫어하는 사람도 달리기나 수영은 좋아할지 모른다. 무엇이든 괜찮다. 어떤 운동이든 하루에 한 시간 정도 규칙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정신 건강 개입법에도 효과가 있는 여러 유형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반드시 트라우마에 초점을 맞춘 개입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독성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여섯 가지 압법 모두를 가능한 한 최대한도로 실행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성인은 아동기에 비해 뇌의 가소성이 떨어지므로 특히 더 그렇다. 하지만 아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위의 여섯 가지를 더 많이 실천할수록 스트레스호르몬이 감소하고, 염증이 줄어들며, 신경 가소성이 향상되고, 세포 노화가 지연된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말을 인용하며 이 리뷰를 끝맺고자 한다. 유년기에 부정적 경험을 받은 이들이 이 리뷰를 읽고 있다면, 여러분의 지나온 삶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치유하며 사랑해 주기를 기원합니다.

나는 어린 시절에 부정적 경험을 하며 자란 사람들이 자신의 유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역경을 잊어버리거나 탓하는 것이 쓸모 있는 일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첫걸음은 그것의 상태를 평가해 파악하고, 그 영향과 위험을 비극도 동화도 아닌, 의미 있는 현실로서 명료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특정한 상황에 처했을 때 몸과 뇌가 어떤 식으로 반응하게 맞추어져 있는지 이해하고 나면, 자신의 반응을 미리 예측해 조정하는 방식으로 매사를 처리할 수 있다. 반응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무엇인지 알면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도울 방법도 알 수 있다. 

[책 감상/책 추천] 톰 필립스, <인간의 흑역사>

 

 

와, 짱잼!

이 책의 부제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인데, 역사상 인류가 저지른 가장 멍청한 일들을 들춰내 보는 책에 꼭 들어맞는 부제라 하겠다.

 

책은 이런 헌정사로 시작한다.

진짜 큰 바보짓을 저질러 본 모든 사람에게 이 책을 바친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그리고 프롤로그에서 소개되는, 인류 최초의 바보짓은, 첫 인류(누구나 들어 봤을, '루시'라는 이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은 것이다.

하지만 루시가 유명해질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냉정히 말해서, 어이없이 횡사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 후로 인류가 펼칠 온갖 바보짓의 예고편이 아니었을까.

이 책은 인간에 대한 책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일을 말아먹는 재주가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한 책이다. 인간은 지금까지 이루어낸 자랑거리도 많지만(예를 들어 과학,예술, 법), 어이없고 참담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되는 오점도 그만큼 많다(예를 들어 전쟁, 환경 오염, 공항의 펍).

독자 여러분도 최근에 한 번쯤은, 개인의 가치관이나 정치적 신조를 막론하고,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 이렇게 한탄한 적이 있을 것이다. "나 원 참, 세상이 어쩌다 이 꼴이 됐지!"

이 책은 그런 독자에게 좁쌀만큼이라도 위안이 되고자, 이렇게 말하려고 한다. 걱정 마시라, 인간 세상은 항상 그 꼴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살아 있지 않은가?

 

저자는 정말 기발하고 멍청하며 어이가 없는 (하지만 물론 흥미로운) 일화들을 여럿 이야기해 주는데, 여기에서는 맛보기로 몇 가지만 간략히 소개할까 한다.

인류가 아무리 눈부시게 발전하고 아무리 많은 난관을 극복했다 해도, 파국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역사 속에서 예를 찾아보자. 9세기 북유럽의 장수였던 '천하장사 시구르드'는 적장 '뻐드렁니 마엘 브릭테'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고 의기양양하게 귀환했다.

그러나 마엘 브릭테의 뻐드렁니가 말 타고 달리던 시구르드의 다리를 계속 긁었고, 그 상처의 감염으로 시구르드는 며칠 만에 죽고 만다.

천하장사 시구르드는 자기가 이미 죽은 적에 의해 죽임을 당한 불명예스러운 주인공으로 전쟁사에 길이 남았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두 가지다. 첫째, 자만은 금물이다. 둘째, 적의 치아 위생에 유의하자. 이 정도일 것이다. 이 책의 중심 주제는 자만과 그로 인한 파멸이니, 옛사람들의 구강 위생에 더 관심 있는 독자에게는 양해를 구한다.

 

그뿐이 아니다. 인간은 가축을 사육하면서 자신이 자연의 지배자이며, 동물이건 식물이건 자기 뜻대로 부릴 수 있다는 인식을 확실히 갖게 되었다. 지금부터 알아보겠지만, 동식물을 제 뜻대로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인간의 과신은 번번이 큰 화를 초래했다.

가령 1859년 오스트레일리아에 살면서 고향이 그리웠던 남자, 토머스 오스틴의 이애기를 해 보자. 오스틴은 영국인으로, 10대 때부터 식민지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민 와 살았다. 이제 40대인 오스틴은 부유한 지주이자 목양업자로, 면적 120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넓은 땅을 빅토리아 부근에 소유하고 있었다. 야외 스포츠 애호가였던 그는, 영국인들의 전통 스포츠를 자기 땅에 정성스레 재현해 놓았다. 경주마를 키워 훈련시키고, 땅의 상당 면적을 야생동물의 보금자리이자 사냥터로 만들었다. (...) 그렇게 지구 반대쪽 나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전통적 지방 유지의 삶을 살리라 결심했던 그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곳에 영국의 환경을 조금이나마 재현해 놓으려 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역대급 사고를 치게 된 계기였다.
오스틴은 영국의 고전적인 사냥감들을 좀 풀어놓으면 사냥이 훨씬 흥미로워지지라 생각했다(캥거루는 아마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조카에게 꿩, 자소개, 토끼, 지빠귀 등을 보내 달라고 했다. 거기에 영국산 토끼 24마리를 받은 것이 화근이었다. "토끼 몇 마리 들여온다고 별 해가 될 리는 없고, 사냥감으로 유용할 뿐 아니라 고향의 향취를 조금이나마 느끼게 해 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토끼가 사냥감으로 유용하리라는 판단을 옳았지만 "별 해가 될 리 없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오판이었다. (...)

오스틴이 토끼를 들여오고 10년 후, 빅토리아에서는 매년 토끼 200만 마리를 쏘아 죽였지만 토끼 수는 계속 늘기만 했다. 토끼 군단은 매년 130킬로미터를 이동하여 곧 빅토리아 전역에 퍼졌다. 1880년에는 뉴사우스웨일스(남동부)에 나타났고, 1886년에는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남부)와 퀸즐랜드(북동부), 1890년에는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서부), 1900년에는 노던테리토리(북부)에 출현했다.

1920년대에 오스트레일리아의 토끼 수는 100억 마리로 추산된다. 국토 1제곱킬로미터당 1천 마리가 넘는 토끼가 있었던 것. 오스트레일리아의 땅은 말 그대로 토끼로 뒤덮였다.

어떤 또라이가 호주에 토끼를 들여와 풀어놓았나 했더니, 이 자식이었구만?

(저자 말대로, 호주에 토끼를 처음 들여온 것은 오스틴이 최초는 아니었지만, 대재앙을 낳은 주된 원인은 그가 들여온 토끼였다.)

토끼 번식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는 걸 몰랐나? 게다가 호주는 거대한 섬이라 외부에서 들어온 천적에 취약한데!

도대체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멍청한 짓을 저지를 수가 있을까? 뭐, 그러니까 이 책에 언급된 거겠지만.

정말이지 인간의 멍청함은 거의 백과사전 급이라니까. 모든 분야에 걸쳐서 무식하니까 이런 짓도 저지를 수가 있었던 거겠지.

 

그럼 이번엔 같은 중국에서 17세기 정도 뒤인 1505년, 명나라 정덕제의 이야기를 해 보자. 정신 연령이 떼쓰는 아이 수준인 사람에게 나라를 맡기면 안 되는 이유를 알아보는 첫 사례로 좋을 듯하다.

황제가 국정에는 전혀 취미가 없고 호랑이 사냥이나 어마어마하게 많은 후궁들과 잠자리를 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던 사실은 일단 제쳐두기로 하자. 이상적인 황제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황제도 있는 걸 어쩌겠는가.

그보다 더 기이한 행동은 자신의 '분신'을 창조해 일인이역 놀이에 빠진 것. 그 분신은 주수라는 용맹한 장수였다. 정덕제는 이 주수에게 북방에 출격해 전투를 수행할 것을 명했고, 그러고는 자기가 주수가 되고 황제의 명을 충실히 따랐다. 주수가 싸우러 나가면 우연의 일치인지 황제는 여러 달 동안 자리를 비우곤 했다.

정말 기이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기이하기로 치면 그건 약과였다. 그는 궁궐 마당에 시장을 실제와 똑같이 차려 놓게 하고는, 재상과 장군들에게 모두 상인 복장을 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평민 복장을 하고 시장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사는 놀이를 했다. 신하들로서는 이 무슨 헛짓거리이고 굴욕인가 싶었지만, 조금이라도 뚱한 표정을 짓다가 황제에게 걸리면 파직되는 것은 물론 더 험한 꼴도 당했다.

그런가 하면 등불 축제를 앞두고 엄청난 양의 화약을 궁궐 안에 쌓아 놓으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화약이 폭발해서...... 그다음은 생략한다(그는 화재에거 목숨을 건졌지만, 뱃놀이하다 물에 빠져 얻은 병으로 29세에 사망했다).

 

이 외에도 희한하고 골 때리는 바보짓, 때로는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르게 만든 바보짓이 많이 소개된다.

예컨대 엔진의 노킹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에탄올이라는 멀쩡하고 무해한 해결책을 두고 돈 몇 푼 더 벌겠다고 납을 선택한 자나(이미 그 당시에도 납의 위험성은 잘 알려져 있었다) 오존에 구멍을 내는 프레온 가스를 만든 자(적어도 이때는 그게 그런 결과를 낼 줄 아무도 몰랐다)처럼. 참고로 이 둘이 같은 인물이다.

이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다 소개해 드릴 수가 없어서 안타깝다. 책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라!

 

한 가지 더 이 책이 내 마음에 드는 점: 내가 인용한 부분들만 봐도 어느 정도 느낌이 오겠지만, 번역이 정말 유머러스하고 깔끔하게 잘됐다.

원문 자체도 그런 말투인데 마치 원래 한국어를 유머러스하게 잘 구사하는 한국어 화자가 글을 쓴 것처럼 초월 번역이 잘돼 있다. 이 번역자분도 한번 눈여겨봐야겠다.

그러한 재앙의 한 예는 1969년의 어느 따뜻한 여름날, 쿠야호가강에 불이 난 사건이다.

맞다. 강이란 원래 불이 나는 곳이 아니다. 혹시 강이 무엇인지 잠시 헷갈리는 독자를 위해 설명하자면, 강이란 자연적으로 흐르는 큰 물줄기를 말하며, 물이란 일반적으로 불에 잘 타는 물질이 아니다. 강은 여러 가지 작용을 해서, 상류에서 하류로 물을 운반하고, 세월의 흐름을 빗대어 표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며, 삼각주를 형성해 중학생들에게 지구과학 시간에 외울 거리를 안겨 주기도 하지만, 불에 활활 타는 재주가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 보았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영어로든 한국어든 이렇게 웃긴 글을 쓸 수가 있지?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저자와 번역가 두 분 모두.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래, 내가 그때 멍청한 실수를 하긴 했지만 이에 비하면 양반이지'라고 생각하며 안심할 수 있게 된다.

적어도 나는 인류에게 그만큼 큰 해를 끼치진 않았으니까! 밤마다 나의 흑역사가 떠올라 잠 못 이룬다면, 또는 이런 바보짓을 한(또는 하는) 게 나뿐은 아닐 거라 믿고 싶다면, 또는 남이 멍청한 짓을 하는 거 보며 하하 비웃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어느 쪽이든 인류의 멍청함에 놀라 혀를 내두르게 될 테니. 저자의 유머러스한 감각을 즐길 수 있는 기회는 덤이다!

[책 감상/책 추천] 서귤, <어피치, 마음에도 엉덩이가 필요해>

 

 

안다, 여러분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지.

캐릭터의 인기에 힘입어, 감상적인 문구만 대충 나열하고 사진이나 그림으로 내용을 채워 종이를 낭비하는 이런 인스타그램용 책을 읽었다고?

사실 나도 '이런' 책을 읽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내 블로그 책 리뷰를 꾸준히 거들떠 보신 분이라면 알겠지만, 내가 서귤 작가님께 푹 빠져서(아래 책 리뷰 참고) 이분의 다른 책을 조지려던 참이었다.

2020/08/24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서귤, <회사 밥맛>

 

[책 감상/책 추천] 서귤, <회사 밥맛>

[책 감상/책 추천] 서귤, <회사 밥맛> 와 씨, 너무 재밌고 귀엽다. 7년차 직장인 서 대리의 회사 에세이인데, 특이하게도 그냥 회사 얘기뿐 아니라 먹는 얘기도 담겼다. <디 오피스>와 <고독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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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북으로 발행된 책이 이거(어피치 책) 아니면 어떤 독립 서점에 관한 책(서귤 작가님이 만화를 그리는 데에만 참여한) 두 권뿐이더라.

또 마침 이 어피치 책이 리디셀렉트에 올라와 있어서 내가 가욋돈 쓸 필요가 없길래 '그래, 나는 이 작가님 좋아하니까. 어차피 내 돈 나가는 것도 아닌데 한번 들여다보기나 하자' 하는 마음으로 다운 받아 읽은 것이다.

 

물론 이 책을 읽기 전, 그 전에 읽은 이주윤 작가의 책에서 본 그 말이 떠오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 작가는 어쩜 이리 다작을 하는가. 한 인간의 머릿속에서 이다지도 많은 말이 쏟아져나오는 게 정녕 가능한 일인가. 혹시 허언증은 아닌가. 글 두 줄로 한 페이지를 채우는 이 구성은 뭔가. 이 책을 사는 사람은 글을 사는 것인가 공백을 사는 것인가. 그러니까 이건 읽기 위한 책인가 인스타그램 업로드를 위한 책인가. 이 캐릭터 에세이는 또 뭔가. 사람이 아닌 캐릭터가 화자인 이 상황을 아무래도 납득하기가 어려운데, 어 그러니까 이건 뭐랄까. 개를 산책시키다가 마주 오는 누군가가 "아이고 예뻐라, 너 몇 살이니?" 하고 개에게 물으면 "세 짤이에영!" 하면서 개의 말을 대신하는 주인처럼 말 못하는 캐릭터의 속마음을 저자가 대변하는 것인가. 허이구야, 하다하다 고길동에 마이콜까지. 그렇다면 꼴뚜기 왕자를 주인공으로 한 책은 왜 나오지 않는가. <꼴뚜기 왕자, 변기에 빠져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라는 책도 나와야 마땅한 것 아닌가. 지금 꼴뚜기 왕자를 무시하는가. 오자와 탈자 범벅인 이 문장은 뭔가. 이다지도 무책임한 문장을 쓰는 인간을 작가라 칭해도 되는가. 아니, 작가는 그렇다 치고 이 책의 편집자는 뭐 하는 사람인가. 말도 안 되는 문장을 손보지도 않고 그대로 낸 이 편집자는 일을 하는 것인가 마는 것인가. 어머어머, 근데 이 잘생긴 작가는 뭔가. 혹시 글을 잘 쓰는가. 에라이, 얼굴만 믿고 책을 넀는가. 냉정하게 작가치고 잘생긴 거지 그리 대단한 얼굴은 아니지 않은가. 뭐 어찌 됐든, 왜 반듯한 얼굴에 스스로 먹을 칠하는가.

(이 문단은 이주윤 작가의 <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계속 쓰는 삶을 위해> 리뷰에서도 인용했다.)

2020/08/10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이주윤, <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계속 쓰는 삶을 위해>

 

[책 감상/책 추천] 이주윤, <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계속 쓰는 삶을 위해>

[책 감상/책 추천] 이주윤, <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계속 쓰는 삶을 위해> 내가 매달 읽고 있는 '먼슬리 에세이' 시리즈의 두 번째 권. 첫 번째랑 세 번째 권은 이미 읽고 리뷰도 썼다. 20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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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난 감상을 한 줄로 정리하자면, '음, 역시 서귤 작가님은 프로페셔널하셔.'

온통 핑크 천지에다가 어피치 캐릭터가 한 페이지마다 삽화로 들어가 있는 책에서 약간 나 중학생 시절 러브장을 연상시키는 그런 감성의 글을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잘 쓰실 수 있다니, 역시 프로다...!

한두 페이지를 넘어가는 글이 없는데 이 역시 출판사/편집자 쪽에서 일부러 그렇게 써 주십사 바란 게 아닌가 싶다. 원래 이것보다 긴 글도 재밌게 잘 쓰시는 분이니까.

 

솔직히 러브장 감성은 아직도 내가 받아들이기 좀 버겁지만, 그래도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진짜 중요한 건, 이 책을 접함으로써 인해 책에 대한 인식이 조금 바뀌었다는 거다.

도서 정가제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대개 이북이나 장르 소설을 우습게 보고 낮춰 보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도정제에는 결사 반대하지만 솔직히 '책의 등급'을 아예 나누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실용서는 약간 아래에, 인문 서적은 그 위에, 고전 소설은 가장 위에, 하는 식으로 '무엇이 무엇보다 낫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이런 캐릭터 책은 진짜 폐급, 책 안 읽는 사람들이 인테리어용으로 사들이는 책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순문학, 순수 예술을 추구한답시고 상업성, 대중성, '엘리트'(라 자처하는 사람들)에 끼지 못하는 일반 대다수의 사람들을 무시하는 행태를 보면 얼마나 우습고 유치한지 알면서 내가 그 비슷할 걸 하고 있었던 거다.

캐릭터 책이 어때서? 그리고 그런 책을 쓰는 사람이 뭐 어때서? 내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다 깎아내릴 필요는 없었는데.

그런 마음에서 위에 인용한 이주윤 작가의 글 뒷부분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왜, 낯선 편집자로서 '이주윤 작가님 출간 제의드립니다'라는 제목의 메일이 오면 열어 보기를 두려워하는가. 혹시 그 내용이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제가 이렇게 메일을 드린 이유는 캐릭터 에세이 출간 제의를 드리고 싶어서인데요. 감성적인 캐릭터 에세이 시장에 꼴뚜기 왕자와 같은 파격적인 캐릭터가 등장한다면 독자에게 색다르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해당 건을 기획 중에 있습니다. 여러 명의 저자를 후보에 올려 두었으나 꼴뚜기의 이미지와 가장 어울리는 건 역시 작가님이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시궁창 같은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작가님의 삶의 태도를, 변기에 빠진 꼴뚜기 왕자에 녹여 글을 써 주실 수 있으실는지요. 이른 예측이기는 합니다만 에세이 베스트 진입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만나 뵙고 자세한 이야기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럼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하며 나를 유혹할 것 같아서는 아닌가. 그 제안을 뿌리쳐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차마 그리하지 못할 것 같아서가 아닌가......

 

(내 안의) 엘리트주의자는 꺼져라! 아, 쓰고 나니 마라톤에서 꼴등으로 들어왔지만 운동 엘리트주의자들에게 기죽지 않고 당당히 마라톤 그 자체를 즐겼던 작가가 떠오른다. 이걸 다시 한 번 읽고 싶어지는군. 

이 위에 언급된 책들과는 전혀 관련은 없지만 이것도 재밌는 운동 에세이이니 추천한다.

2018/10/31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조엘 H. 코언, <마라톤에서 지는 법>

 

[책 감상/책 추천] 조엘 H. 코언, <마라톤에서 지는 법>

[책 감상/책 추천] 조엘 H. 코언, <마라톤에서 지는 법> 저자 조엘 H. 코언은 유명 만화 <심슨 가족(The Simpsons)>의 작가 중 한 명으로, 탄수화물 간식이 가득한 일터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농담을 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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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오늘은 이만 여기까지! 주말에 시간을 좀 내서 더 재밌는 책을 읽고 돌아올 수 있기를... (너무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책 감상/책 추천] 서귤, <회사 밥맛>

 

 

 

 

와 씨, 너무 재밌고 귀엽다. 7년차 직장인 서 대리의 회사 에세이인데, 특이하게도 그냥 회사 얘기뿐 아니라 먹는 얘기도 담겼다.

<디 오피스>와 <고독한 미식가>가 만난 듯한 느낌? 예컨대, 서 대리의 출입증을 빌려서 그날 점심을 두 번이나 먹은 모 과장이 팀장에게 대차게 까이는 모습을 본 날의 메뉴는, 그날 과장이 먹은 짜파게티라는 식이다.

어떻게 글로 쓸 만한 가치가 있는 사건이 일어나는 날과 그날 먹은 메뉴를 연결지을 생각을 다 했을까? 정말 너무 천재적이라 감탄스럽다.

게다가 맛 묘사는 어쩜 이렇게 기가 막히게 하는지. 먹는 얘기가 나오니까 당연히 그 맛도 묘사를 잘해야 하는 게 맞는 거긴 한데, 나처럼 입맛도 무던하고 별로 까다롭지 않은 사람은 미묘한 맛을 구분 못해서 그런가, 묘사도 잘 못하겠더라.

그래서 난 음식 묘사를 잘하는 사람이 참 신기하다.

우선 참치김밥.

참치 기름이 주변 재료를 적시는 바람에 참치김밥은 늘 조금 헐렁하다. 젓가락으로 들어 올릴 때 내용물이 흩어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약간의 주의를 기울여 그 흐물거리는 김밥을 입에 넣었을 때의 기쁨은 모든 노력을 보상한다. 짭조름하고 기름진 참치가 흰밥과 촉촉하게 섞이며 자아내는 바다 내음, 그리고 뒤이어 밀려오는 단무지와 야채들의 앙상블. 참치에는 마요네즈가 들어가도 좋고 들어가지 않아도 좋다. 들어가면 고소하고 크리미한 느낌이 더해지고, 들어가지 않는다면 참치의 맛을 온전히 더 느낄 수 있다. 참치김밥에서 참치의 거대한 존재감은 어떤 상황에서도 줄어들지 않는다.

아니면 이런 거.

큼직한 뼈다귀 두 점이 올라간 갈비탕이었다. 숟가락으로 기름이 둥둥 뜬 누르스름한 국물을 먼저 떠 올렸다. 입술 주변이 번들번들해질 수 있으니 주둥이를 쭈욱 내밀어 꼴딱 삼켰다. 혀와 식도가 환호성을 지르는 듯했다. 기름! 너무! 좋아! 이제 흑미가 섞여 얼룩덜룩한 밥을 담뿍 떠서 혀에 올리고, 시간차공격으로 뼈에 붙은 살코기를 뚝 끊어 입에 넣을 차례. 촉촉하고 야들야들한 살점이 물 흐르듯이 매끄럽게 목구멍을 넘어갔다. 보드랍게, 한없이 보드랍게, 솜사탕처럼 갈빗살이 위장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느껴질 듯 말 듯 코끝을 스치는 풋풋한 대파 향과 알싸한 후추 향. 좋아, 오늘의 갈비탕은 브이아이피다. 베리, 임폴턴트, 피‧‧‧‧‧‧ 피스. 마음의 평화. 

 

음식 얘기도 좋은데 저자가 풀어놓은 회사 얘기도 너무 공감이 된다. 실연당했을 때처럼 너무 마음이 힘들 때에도 회사에서는 티를 낼 수 없으니 불편하다는 얘기라든지,

인생 최초의 실연은 방학 때여서 일주일을 방 안에만 누워 있었다. 생각해 보면 마음껏 슬퍼할 수 있어서 충만했던 시간이었다. 이제 나는 밤새 잠을 설치고 새벽 내내 울더라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출근을 해야 한다. 사랑을 잃었다고 직장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퀭한 눈으로 출근을 했더니 사람들이 어디 아프냐고 물어왔다. 회사 사람들의 공연한 관심이 싫어서 남자 친구가 있다는 것도 말한 적 없는데, 헤어졌다는 얘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대충 몸살 기운이 있다고 둘러댔다. 점심시간에는 아예 싟사를 거르고 지하 수면실로 내려왔다. 어둡고 건조한 그곳에서 몸을 쌔우처럼 구부리고 누웠다.

일전에 남긴 음식을 아까워하는 얘기라든지,

어제 점심, 파리 출장의 마지막 식사라며 거하게 코스 요리를 먹었다. 감자를 돌돌 말아 바삭하게 튀긴 새우가 애피타이저였고, 기름이 좔좔 흐르는 거대한 립스테이크가 메인, 달콤하고 부드러운 크림브륄레가 디저트 나왔다. 식전 빵과 애피타이저로 이미 배가 차서 스테이크를 남겼다. 미디엄 레어로 익혀서 속살이 발갛던, 살포시 누르면 반동으로 탱탱하게 흔들리며 고소한 육즙이 흘러나오던, 따뜻하고 말랑말랑했던‧‧‧‧‧‧ 스테이크를.

그걸 남겼단 말이지. 그걸, 내가.

상사를 미워하면서도 때로는 조금 동정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온갖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느낌 등등.

그가 팀장이었을 때 나는 인사고과에서 2년 연속 최하점인 C를 받았다. 꽤 충격이었는데, 한 번만 더 C를 받으면 성과 관리 대상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가 사내벤처로 떠난 후 새로 온 팀장은 내게 A를 줬다. 다행스러운 일이었고 좀 웃기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1년 사이에 업무 능력이 C에서 A로 바뀔 만큼 드라마틱한 변화가 나에게는 없었다.

한때 G 부장을 싫어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좀 불편할 뿐 크게 부정적인 감정은 없다. 그는 이미 나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영향력 없는 사람'이란 '일 못하는 사람'보다 못해서, 이들에게는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평가받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G 부장은 복직 이후 아무 일도 맡지 않고 외딴 자리에 하루 종일 앉아만 있었다. 그가 매일 누구와 어디서 점심을 먹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회사를 유령처럼 오가는 G 부장을 볼 때마다 임원이 되지 못한 옷십 대 직장인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건 나의 앞날일까. 나는 과연 몇 살까지 이 회사를 다니게 될까.

 

글도 물론 재미있지만 내가 이 책에서 제일 좋아한 건 만화였다.

한 페이지에 8컷짜리 만화가 군데군데 삽입돼 있는데, 저자가 직접 그린 것 같다(다른 삽화가가 그린 거면 판권 페이지에 그린 사람 이름이 나올 텐데 없더라).

근데 이게 너무 귀엽고 재밌어서 난 이것까지 꼼꼼히 읽고 제일 웃긴 거에는 책갈피까지 해 놨다ㅎㅎ

아래는 출판사에서 홍보용으로 공개한, 본문 속 만화 두 개.

 

개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만화는 구피 이야기다. 이건 지문과 대사를 간단히 옮겨 보겠다.

F 대리는 사뭇실 자리에서 구피를 키운다.

(구피: 열대어, 몸기링 3~4cm)

서 대리: F 대리님, 저 토요일 특근인데 구피 먹이 제가 줄까요?

F 대리: 와, 너무 좋죠.

서 대리: 근데 평소 주말엔 밥 어떻게 줘요?

F 대리: 일단 금요일 퇴근 때 많이 주고요, 여차하면 서로 잡아먹더라고요.

서 대리: *충격*

인간으로 비유하자면, 지구라는 수조에 인간들을 넣고 먹을 걸 주지 않는다.

(NO 햇빛, NO 식물, NO 동물)

(서 대리가 어떤 사람 손을 꽉 깨물어 냠냠 먹고 상대는 '으악' 소리지르는 컷)

서 대리: 안 돼엣!!

F 대리: 하하, 감정 이입은 적당히.

마지막 컷의 서 대리가 눈이 약간 미묘하게 돌아간 게, 그 상상으로 충격받은 것 같아 보여서 정말 너무 웃기고 귀엽다. 

 

아, 이 재치 넘치고 식욕 당기는 이 책을 모두가 한 번쯤 봐 줬으면.

나는 이 책 덕분에 내 마음에 드는 작가를 만난 셈이라 두 배로 더 기쁘다. 이제 이 작가분 비블리오그래피도 조져 버려야지^^

작가님, 회사 다니기 힘드셔도 작품 활동은 꾸준히 해 주세요... 사랑합니다...🥰

[책 감상/책 추천] 토드 로즈, <평균의 종말>

 

 

혁명적으로 놀라운 책이다. 책 띠지에서 광고하듯 저자인 토드 로즈는 ADHD 장애를 가진 자퇴생에서 하버드대 교수로 탈바꿈한 인물이다.

그가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성취를 이룰 수 있었을까? 그 답은 '개개인성'에 있다.

 

개개인성이란 간단히 말해 타인과 다른 개인의 특성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에이, 그게 뭐야. 너무 당연하잖아. 당연히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다르지."라고 대꾸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개개인성'을 믿는가? 대체적으로 우리는 개인을 평가할 때 평균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나를 중요하게 보지 않는가.

예컨대 자신의 아이가 또래 평균과 비교해 얼마나 성장이 느린지를 걱정하고, 우리도 동년배들이 흔히 따르는 코스(대학 졸업-취업-결혼-출산 등) 또는 동년배들 평균(적인 스펙 또는 연봉)을 따라가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이 '평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최고점과 최저점을 포함해 머릿수대로 나눈, 우리의 개념속에서만 존재하는 한 점일 뿐이지 실존하는 무엇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평균'에 맞는 사람이라는 건 없으니까.

조종석 설계를 위해 조종사들 신체 사이즈의 '평균치'를 구했으나 실제로 그 평균치에 들어가는 조종사는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을 깨달은 미국 공군의 사례가 그를 잘 보여 준다. 아래 인용문을 보시라.

대니얼스가 결과값을 산출해내기 전에 공군 내 동료 연구가들 사이에는 조종사들 대다수가 대부분의 치수에서 평균치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하는 분위기가 퍼져 있었다. 하긴 측정 대상으로 선발된 조종사들은 이미 외관상 평균 체격에 해당하는 이들이었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이를테면 키가 6피트 7인치(약 2미터)인 사람은 애초에 대상으로 뽑히지도 못했다는 얘기다]. 공군 내 연구가들은 상당수 조종사들이 10개 항목 전체에서 평균 범위에 들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 값을 일람표로 작성해 보니 대니얼스조차도 깜짝 놀랄 만한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다. 0명이었던 것이다.

조종사 4,063명 가운데 10개 전 항목에서 평균치에 해당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어떤 조종사는 팔 길이가 평균치보다 길지만 다리 길이는 평균치보다 짧은가 하면 또 어떤 조종사는 가슴둘레가 평균치보다 넓은 편이지만 엉덩이 둘레는 좁은 편으로 나타나는 식이었다. 대니얼스가 더 놀라워했던 의외의 결과는 따로 있었다. 10개 항목 가운데 임의로 3개 항목만을 골라서

심지어 이렇게 치수화하기 쉽고 평균을 내기 쉬운 신체, 즉 물리적인 면에서 이런 결과가 나왔을진대, 두뇌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다른 모든 활동은 어떻겠는가?

어떤 이는 성적이라는 확실한 지표가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성적이라는 게 개인의 교육 수준을 그대로 반영하는가? 글쎄.

 

꼭 교사가 아니더라도, 학교를 다닌 경험을 통해 세상에는 다양한 공부 스타일이 있다는 걸 안다.

어떤 사람은 암기에 능하고, 어떤 사람은 토론형 수업을 선호한다. 어떤 사람은 깜지(=빽빽이)를 쓰고, 어떤 사람은 소리 내어 말해 보면서 어떤 개념을 이해하고 외운다.

그런데 현재 많은 국가의 교과 과정은 그런 다양성을 포용하기가 어렵다. 일정한 분량을 정해진 시간 내에 가르쳐야 하다 보니 몇몇 학생들이 어떤 부분을 어려워하더라도 조금 더 시간을 할애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거나 하는 식으로 맞추어 주기가 힘들다는 거다.

이건 애초에 교육의 목표가 '평범하고, 경제 활동(즉 노동)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보통 인간'을 길러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왜? 윗사람들 보기에 어차피 교수든 과학자든 예술가든, 어떤 방향으로든 두각을 나타내는 인재는 소수이고 절대 다수는 그냥 그렇고 그런, 평범한 '직장인', '노동자'가 될 운명이니까.

이들 교육적 테일러주의자들이 내세운 교육의 새로운 임무는 많은 학생들이 테일러화된 새로운 경제에 나가 활동할 만한 적성을 갖춰 주는 일이었다 이들은 평균적 근로자들로 이뤄진 시스템이 천재들로 이뤄진 시스템보다 효율적이라는 테일러식 원칙에 따르면서, 학교는 특출한 재능을 길러 주려 애쓸 것이 아니라 평균적 학생을 위한 표준 교육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한 예가 존. D. 록펠러가 기금을 대주어 설립된 이른바 일반 교육 위원회(General Education Board)로서 다음은 이 위원회가 1912년에 테일러주의식의 자체적 학교 비전을 담아 발표한 논평의 일부 내용이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나 이들의 자녀들은 학자와 과학자로 만들 생각이 없다. 우리는 작가, 연설자, 시인, 문인을 키우려는 것이 아니다. 뛰어난 예술가, 화가, 음악가가 될 만한 인재를 발굴하려는 것도 아니다. (중략) 이미 차고도 넘치는 변호사, 의사, 목사, 정치인을 키우려는 것도 아니다. (중략) 우리가 내세우는 과업은 아주 단순 명료할 뿐 아니라 아주 훌륭하기도 하다. (중략)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모아 작은 공동체를 꾸려서 그 아이들에게 부모 세대가 불완전하게 수행 중인 일들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도록 가르치려 한다."

미국에만 해당하는 내용으로 보이는가? 한국 공교육을 12년 이상 받으신 분이라면 우리나라 교육 제도가 개인의 특성을 찾고 이를 북돋워 주자는 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이미 느끼셨을 터다.

1920년에 이르렀을 무렵 미국의 대다수 학교들은 테일러주의의 교육 비전에 따라 조직돼 있었다. 각각의 학생을 평균적 학생으로 다루며 학생들 저마다의 배경, 자질, 관심사는 무시한 채로 모든 학생들에게 표준화된 동일 교육을 시킨다는 방향으로 목표를 잡았다. 1924년에 미국의 언론인 헨리 루이스 멩켄은 당시의 교육 시스템을 이렇게 요약했다. "공교육의 목표는 계몽화가 아니다. 현재의 공교육은 가능한 한 많은 개개인들을 똑같은 안전 수준으로 강등시키고 표준화된 시민을 길러내고 훈련시키면서 반대 의견과 독창성을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이는 미국뿐만이 아니라 (중략) 세계 전역에서의 공교육이 내세우고 있는 목표다."

 

즉, 이 책 내용을 다시 한 문단으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내가 평균이라는 이런 측정 방식이 거의 언제나 틀리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개개인을 이해하는 문제에 관한 한 평균은 결과적으로 부정확하고 현혹적일 가능성이 높다면? 조종석 설계와 '노르마' 조각상처럼 이런 평균의 이상이 잘못된 허상일 뿐이라면?

이 책의 주요 전제는 언뜻 보기엔 단순하다. 즉, 평균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ㅅ다는 것이다. 당신은 평균적인 사람이 아니다. 당신의 아이도, 동료도, 학생도, 배우자도 평균적인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은 기분을 띄워 주려고 꺼낸 빈말도 아니요, 겉멋만 부린 빈 구호도 아니다.무시하려야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실질적 귀결들이 뒷받침하고 있는 그런 과학적 사실이다. 혹시 몰라 밝혀 두자면, 이 책에는 개리슨 케일러(Garrison Keilor) 진행의 <프레리 홈 컴패니언(Prairie Home Companion, '워비곤 호수'라는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이 말의 소식을 전하는 식으로 진행된 미국의 라디오 프로그램. 이 마을은 '여자들은 모두 강인하고,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으며, 아이들은 모두 평균 이상인' 허구의 세계다 - 옮긴이)처럼 '모든 아이들이 평균 이상'인 워비곤 호수 같은 의심쩍은 이야기로 세상 사람들을 홀리려는 의도는 없다. 단순한 통계학적 이치를 내세워 평균적인 사람들도 일부 있지 않겠느냐고 주장하는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책을 통해 그 자명해 보이는 가정마저도 필히 폐기해야 할 정도의 심각한 결함이 있는 이유를 납득하게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자, 이제 그러면 어떡할 것인가? 책의 중반 이후부터는 그렇다면 각 개인의 특성(저자는 '들쭉날쭉성'이라고 부른다)을 살리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글 앞머리에서 언급했듯이 저자는 ADHD 장애를 가진 중퇴생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대학 수업을 듣고 성적을 받고 대학원까지 진학했을까?

방법은 자신에게 적절한 방법을 찾는 것이다. 예컨대 대학 수업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교수 한 명이 모든 걸 설명하고 학생들은 이를 듣는 강의형, 또는 교수는 거의 진행자의 역할 정도만 하고 학생들이 토론을 하며 이끌어나가는 수업 등.

저자는 전자 같은 형태의 수업은 지루해했지만, 자신이 관심을 갖는 대상에는 초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가능한 한 후자의 수업을 골라 들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성향상 길고 지루한 수학 수업을 낙제하리라는 걸 알았고, 대신 대학에서 필수로 들어야 하는 수학 보충 강의를 대체할 수 있는 수학 시험을 스스로 공부해 치른다.

자신의 학습 속도에 맞춰 자신의 방식으로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택했기에 저자는 이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 모든 수학 강의를 건너뛸 수 있었다.

 

요지는, 모든 개인은 다르므로 자신의 특성,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지, 부족한 점을 어떻게 다른 것으로 보완할 수 있을지는 자신만이 알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파악하고 더 많이 알아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평균'의 환상에서 빠져나와 자신에게 최고로 어울리는 길 또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모든 이들이 '평균'이라는 환상에 가려진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자신을 이해하고 더욱 채워 가며 온전하고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라도 꼭 읽어 보면 좋겠다. 학생이나 교사라면 더더욱.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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