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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지비원, <왜 읽을 수 없는가>

 

 

최근 '심심한 사과의 말씀' 논란이나 '사흘' 논란으로 인해 (이 논란들을 잘 모르시는 분들은 여기를 클릭) 요즘 세대의 문해력에 대한 탄식과 비판이 많이 나왔다. 많은 이들이 '어떻게 그렇게 기본적인 단어도 모르냐', '모르는 것 자체도 모르지만 모르는 것을 배우려고 하지 않고 뻔뻔하게 왜 어려운 말을 쓰냐고 공격적으로 나오는 게 더 문제다' 같은 반응을 보였다. 다 맞는 말이고 다 공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이해시키고 싶다면 어떡해야 할까? 상대방에게 문해력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이해시켜야 한다면?

이런 질문에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지비원의 <왜 읽을 수 없는가>라는 책을 추천받게 되었다(글 하단 링크 참조). 저자는 주로 일본어 인문교양서를 만드는 편집자 겸 번역가이다. 그는 노야 시게키의 <어른을 위한 국어 수업>이라는 책을 번역하며 '어떻게 하면 상대를 이해시킬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고, 그간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에세이 형식으로 쓴 게 바로 이 책이다.

요즘 10대, 20대들 문해력이 떨어진다고 비판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이해시켜야 하는 의무가 있는 교육자들(교과서나 인문, 과학 등 전문서적의 저자들 포함)이나 현대 사회의 소식을 전하고 그에 대한 비평이 업인 기자들이 비판만 하고 손을 놓고 있을 순 없는 일 아닌가. 어떻게든 상대를 이해시키기 위해, 그들의 눈높이에서 글을 쓰고 이야기해야 한다. 저자는 '들어가며'에 이렇게 썼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진단과 해결책이 쉽게 나올 수는 없고, 전문 분야에 따라 그 해법도 다를 것이다. 나는 출판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했지만 이 문제에 대해 견해를 내놓을 만한 주제는 못 된다. 그러나 오랜 시간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이들, 특히 인문학 연구자들의 문장을 많이 다루었고, 이를 오류가 없고 되도록이면 독자층에게 가장 적합한 형태로 전달해야 하는 책임을 지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어떤 '글'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일차적으로 글쓴이와 그 글을 편집하는 사람에게 있다고 믿는다. 그 때문에 나는 '안 읽는' 독자들을 먼저 탓하고 싶지는 않다. 그 대신 글쓰기가 직업인 사람들, 자신이 쓴 글에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의 문장을 한번 돌아보고 싶다. 글이 길고 조금만 어려워도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는 현상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질책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넓고 얕은 지식'이든 뭐든, 기왕이면 머릿속을 채우는 게 채우지 않는 것보다 백배 낫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왜 전문가가 조금만 재미있게 설명한다 싶으면 시청률이 그렇게 뛰어오르는가? 왜 '넓고 얕은 지식'을 표방하는데 책이 그렇게 많이 팔리는가? 단언컨대 사람들이 웬만하면 교양을 쌓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또 자신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지식은 누구나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 한다. 쉽고 얄팍해 보이는 프로그램이나 책이 인기를 얻는 현상은 사람들의 지식욕을 이해하지 못하면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일반인들의 지식욕이 누군가 아무렇지 않게 구사하는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문장에는 접근할 길을 찾지 못하는 것뿐이다.

솔직히 어려운 글이 너무 많다. 전문 서적이야 전문가를 위해 쓰인 것이니 어려운 게 당연하지만, 전문가가 아닌 독자를 위해 쓰인 글인데도 어려운 게 많다. 글을 전혀 안 읽는, 또는 어떤 주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아, 이런 내용이구나' 하고 이해할 텍스트가 있어야 하는데, 초급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이 없다. 그러니 어떤 주제가 됐든 흥미를 가져도 조금 파 보려다가 어렵다고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뉴스 매체에 실리는 글조차 그냥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렵다. 이걸 과연 10대, 20대 젊은이들이나 노인들이 보고 한번에 이해할 수 있을까? 저자가 '뉴스'로 분류되는 글 중에서 가져온 아래 예들을 보시라(순서가 달려 있지만 각각 다른 글에서 나왔으며, 이어지는 내용은 아니다).

1. 이런 단일 토지세론보다 현대 사회에 더 묵직한 한 방을 날리는 것은 그[헨리 조지-인용자]의 정치경제학 밑바탕에 흐르는 자연정의론적 세계관이다. 그가 정치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그의 정치경제학에 있는 자유방임론적 요소를 상당 부분 포기했을 것이다.

2. 2020년대에 바우만의 사상이 던지는 함의는 그렇다면 뭘까. 바우만의 탁월성은 새로운 개념의 발굴에 있다. 특히 그는 흥미로운 개념틀을 주해 우리 시대를 날카롭게 분석해왔다. 그 대표적인 개념틀들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입법자와 해석자'다. 바우만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 개입한다. 그에 따르면, 모더니스트들은 확실성과 보편성의 기준을 세우려는 입법자로서의 입장을 취한다.

3. 슈미트주의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아예 보편성과 일관성 자체를 포기한다.

자유주의자들은 (A 이른바 '원칙이성(Grundsatzvernunft)'에 따라 사유하고 행동한다. 그들은)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보편적﹒추상적 기준을 갖고 있다. (……)

이와 달리 전체주의자들은 (B '기회이성Gelgenheitsvernunft'에 따라 사유하고 행동한다. 그들은) 보편적 기준 없이 매사 그때그때 상황의 필요에 따라 판단한다.

보자마자 '그게 뭔데 씹덕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자연정의론은 뭐고 바우만이랑 슈미트주의자는 누구인가? 이걸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가 이해할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건가? 글만 봐도 '네가 이 정도 글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너와 이야기해 주겠다'라는 오만한 태도가 엿보인다. 이런 글을 대중매체에 써 놓고서 독자들이 이해를 못한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독자인 이쪽이 화가 나는 게 당연하다. 애니 오타쿠가 애니 캐릭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늘어놓으면 '으, 사회성 없는 씹덕'이라고 비웃으면서 왜 이런 글을 전문 서적도 아니고 전문가들을 위한 논문도 아닌 '대중매체'에서 쓰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글의 저자가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글을 쓴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독자들은 이런 글을 읽지 못하는 것에 부끄러워하며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존나 가만히 있어야겠다' 해야 하나?

'나도 이해하고 싶다. 이해하고 싶으니 제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해 달라.' '심심한 사과'나 '사흘' 논란을 일으킨 그 소위 '무식한' 사람들의 심정도 사실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너무나 미세하고 또 자존심에 가려 사실 본인들도 잘 몰랐겠지만 그들도 이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다 해도 그건 너무 기본적이고 쉬운 단어인데, 그걸 심지어 찾아보지도 않고서 자기네들이 옳다고 우겼잖아?' 하며 반박하고 싶은 분들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교양'이나 '상식'처럼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도 없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뫄뫄 정도는 상식 아닌가요?' 같은 글이 올라오면 언제나 뜨거운 반응을 얻게 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예시로 든 저런 글을 쓰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헨리 조지, 바우만, 슈미트 등을 모르는 나를 무식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잘 안다'와 '모른다', '유식하다'와 '무식하다'의 차이는 언제나 자의적이니까.

솔직히 나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글쓴이들이 글을 쉽게 써야 한다는 생각에 그쳤다. 그런데 이 서평을 쓰기 위해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대중을 상대로 이해하기 쉬운, 쉽게 설명하는 글을 쓰는 것은 교육자 또는 기자 들의 의무이고 또한 그런 글을 읽을 권리가 대중에게 있다. 자기만의 감상에 벅차올라 그것을 상대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전달하는 데는 관심이 없는 씹덕을 만나면 그와의 정상적인 대화를 포기하게 되듯, 이 시대의 많은 이들도 '('심심하다', '사흘' 같은) 어려운 말을 이해할 수 없으니 너와 대화하지 않겠다'라는 결정을 내린 게 아닐까. 그들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게다가 태어날 때부터 핸드폰, 인터넷, 유튜브 같은 미디어를 접해 긴 글 읽기가 더 어렵게 느껴지겠지. 이런 상황에서 그냥 그들을 비웃고 비난만 할 게 아니다. 그들을 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책 후반에는 '어려운 글'뿐 아니라 입문서도 때때로 어려운 이유 중 하나로 전문 용어 자체가 일본에서 번역해 들여온 용어를 가져왔기 때문임을 (내가 보기에는) 다소 길게 설명한다. 예컨대, '철학(哲學)'이라는 단어는 'philosophy'라는 영어 단어를 일본인들이 번역할 때 만들어낸 단어이다. 우리는 이 단어를 그대로 가져왔으니 왜 'philosophy'가 '철학'이 되는지 알 길이 없다. 안 그래도 어려운 개념인데 번역어가 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전혀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점은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분명히 좋은 지적이다. 그렇지만 역시 개인적으로는 이 논의가 이 책에서 다루어야 할 분량 이상으로 조금 길게 느껴졌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길지 않은 (종이책 기준 180쪽) 좋은 책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교육자나 기자라면 꼭 읽어 보아야 할 책이다. 

 

➕ 이 책을 가지고 소통을 위한 읽기와 쓰기의 문제를 해찰한, 뉴스레터 '인스피아(Inspia)'의 해당 이슈는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이 책을 소개받았다. 또한 이 문제를 다룬 바로 그다음 주에 인스피아 측에서 저자 지비원을 인터뷰한 뉴스레터도 발행했으니 이것도 같이 보시면 좋을 듯.

https://stibee.com/api/v1.0/emails/share/9kCGVSU0U7UJpNqa4JgbHEVVGmZB5QI=

 

🎓읽을 수 있는 글, 읽을 수 없는 글

 

stibee.com

https://stibee.com/api/v1.0/emails/share/rbzNPrFofjXitNuX1GYIndfRv58DuNM=

 

🎓사람들은 인문학에 관심 없을까?[지비원 저자 인터뷰]

 

stib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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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박상영,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재미있고 짠하다. 분명 엄청 웃으면서 시작했는데 중반 이후부터는 마음이 찡해져서 '저런...'을 연발하며 읽었다. 분명 시작할 땐 이렇게 빵빵 터졌는데!

세상에 출근보다 더 싫은 게 존재할까? 다들 이런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서른몇 해를 살아본 결과 이보다 더 싫은 건 없었다. 채근하듯 울려대는 알람을 끄면서 하루를 시작하면 욕부터 튀어나온다. 10년 전에 라식수술을 한 뒤로는 아침마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안구건조를 느끼기 때문에, 감은 눈으로 침대 옆 협탁을 더듬어 인공누액부터 찾아 넣는다. 텔레비전 교양 프로그램에 자주 나오는 피부과 전문의의 말에 따르면 한국 남성의 대부분은 지성 피부이며 자신이 지성인 걸 모르고 있을 뿐이라고 하던데, 아침에 내 피부를 보고도 그 말이 나오는지 묻고 싶을 정도로 나는 악건성이다. 각막과 입술을 포함한 온몸이 건조하고 대부분의 건성인들이 그러하듯 종종종 참을 수 없이 간지럽다. 빙하처럼 추운 욕실로 들어가 건조한 몸에 미지근한 물을 끼얹으며 나는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낀다. 살아 있음의 거지 같음을. 새로 산 보디로션의 점도가 높아서 그런지 걸을 때마다 다리에 바지가 달라붙는 것 같은 기분으로, 나는 등 한가운데 정확히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간지러운 어떤 지점을 긁기 위해 노력하며 영하의 거리로 나선다.

이게 첫 꼭지의 세 번째 문단이다. 기가 막힌 명문이다. 그다음 문단도 만만치 않다.

우리 집에서 회사까지는 도어 투 도어 50분 내외의 시간이 소요되며 총 세 번의 환승을 거쳐야 한다. 이는 서울 시내 직장인의 평균에 매우 가깝다. 이미 만원인 채로 정류장에 멈춰 선 버스에 몸을 구겨 넣으며 나는 오늘 하루에 대한 기대를 저버린다. 내 인생에 대한 희망을 저버린 것과 같은 방식으로. 목 뒤에 닿는 모르는 사람의 입김과 어디선가 풍겨 오는 썩은 내. 나는 양치질과 샤워, 빨래를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을 사살할 수 있는 살인면허가 발급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도 쉬이 고개를 들거나 신경질이 가득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볼 엄두를 내지는 못한다. 냄새의 출처를 추적하는 또 다른 누군가와 눈이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그가 아주 높은 확률로 이 공간에서 가장 덩치가 큰 — 즉 도리 없이 뚱뚱한 — 남자인 나를 범인으로 지목할 것만 같아서다. 높은 확률로 적중하는 피해의식. 있잖아요. 당신, 날 왜 그렇게 봐? 저 매일 아침 샤워하고요, 데오도런트에 향수까지 뿌리고 다니거든요. 일주일에 한 번은 세탁기도 돌리고, 수건에서 걸레 냄새 나는 게 죽기보다 싫어서 없는 살림에 건조기까지 장만했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보실 필요 없거든요?

이렇게 다소 신경질적인 유머로 시작해(진짜 출근 시간대의 내 기분 같다) 점차 작가가 본인의 만성질환, 그러니까 만성위염과 역류성식도염, 야간 식이 증후군과 기분장애(양극성장애와 공황발작)를 털어놓는 데까지 가면 '아...' 하는 탄식이 흘러나오게 된다. 코미디언 또는 코미디 배우 중에 우울증인 이들이 많다더니, 남을 웃게 하는 이들은 속에 슬픔과 힘듦을 숨기고 사나 보다. 다니던 직장을 마침내 관두실 때에는 정말 괜찮으실지 내가 다 걱정할 정도였는데, 다행히 그 이후로 일이 잘 풀리신 듯.

어련히 열심히 잘 사시는 분께 짠하다고 연민을 보내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이 에세이를 읽으며 발견한 작가님의 모습, 그러니까 멋진 점들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한다. 작가님은 첫 소설로 등단하기 전에 동료 작가들(이미 등단하신 분들)과 스터디를 짜서 정말 간절하게 글을 쓰셨단다. 와, 대단해. 지나고 나니까 2년 반 후에 등단했다, 하고 쓸 수 있게 되는 거지 그 당시에는 미래를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으니 얼마나 막막했을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계속 글을 쓰셨다는 게 너무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작가님께 '여사친'인 작가분들이 여럿 계신 것 같은데, 글을 읽다 보면 '여자들이 친구로 잘 지낼 수 있는 좋은 남자구나' 하는 느낌이 온다. 예컨대 본인이 뚱뚱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나마 '남성'이기 때문에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보다는 그래도 상황이 낫다는 걸 인정하는 부분이나, 본인이 패스트 패션을 이용하기 때문에 환경 오염에 일조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시인하는 부분. 

그래도 비만한 '남성'인 나는 사정이 좀 나은 편이다. 살찐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멸시와 비하는 상상을 초월한다. 일단 여성인 배우나 가수가 조금이라도 살이 찌면 어김없이 살이 쪘고, (도대체 무슨 범위의 관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관리에 실패했고, 프로 의식이 모자란다는 댓글이 달리기 일쑤다. 따지고 보면 배우는 연기하는 직업이고 가수는 노래하는 게 직업의 본질인데 왜 당연히 날씬한 몸을 직업적 소양에 포함하는 것일까.
내 좁은 방에는 M 사이즈부터 XXL 사이즈까지 엄청나게 많은 티셔츠와 속옷이 발 디딜 틈 없이 자리하고 있다. 폭식과 다이어트를 반복하며 족히 100킬로그램은 찌고 빠진 몸을 감당하기 위해 마구잡이로 사들인 싼 옷들이다. 패스트패션의 풍토 속에 함부로 사서 입고 버려지는 옷들이 얼마나 큰 공해인지 이제는 상식으로 모두가 알고 있다. 나 역시도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지만,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옷 더미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는 것도,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싼 옷을 사는 습관도 멈출 수가 없다. 때때로 나는 그저 먹고 소비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만 같다. 한아가 내 방을 본다면 기함을 하며 호통을 칠 것만 같다.

이 정도의 섬세한 (그리고 인권에도 미치는) 감수성이 있으니 과연 여사친들이 있을 만하구나 싶었다. 패스트패션이 환경 오염의 큰 원인 중 하나라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해도, 이렇게 순순히 자신이 패스트패션을 통해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는 남자들은 별로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남자들에게 패션은 그저 '가오', 또는 멋내기, 자랑의 수단이라는 느낌이 더 강해서일까. 자신이 소비하는 패션을 이렇게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의식이 있기에 역시 작가는 작가구나 싶어 감탄이 나왔다.

재미와 짠함이 단짠단짠의 느낌으로 뒤섞여 있는 이 솔직한 에세이와 작가님을 만나게 되어 너무 기쁘다. 작가님의 다른 책들도 찾아봐야지. 그리고 나에게 이 책을 대출해 준 서울시 전자도서관에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아니, 왜 나 이제서야 전자 도서관의 존재를 떠올렸지? 멍청... 어쨌거나 이제는 더 많은, 더 다양한 책을 접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앞으로 올라올 서평을 기대해 주시라! 이 책도 완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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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Taylor Jenkins Reid(테일러 젠킨스 리드), <The Seven Husbands of Evelyn Hugo(에블린 휴고의 일곱 명의 남편들)>

 

 

⚠️ 이 서평은 Taylor Jenkins Reid(테일러 젠킨스 리드)의 <The Seven Husbands of Evelyn Hugo(에블린 휴고의 일곱 명의 남편들)>의 강력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제목부터 압도되는 느낌이다. <에블린 휴고의 일곱 명의 남편들>이라고? '에블린 휴고는 도대체 어떤 여자길래 결혼을 일곱 번이나 해서 남편을 일곱 명이나 둔 거야?' 싶다. 에블린 휴고는 1950년대 할리우드, 소위 '할리우드의 황금기'에 육감적인 몸매와 수많은 염문으로 할리우드를 달구었던 여배우이다. 아, 물론 이건 소설이니까 에블린은 허구의 인물이다. 그녀의 삶은 여덟 번이나 결혼을 했던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나 자신의 삶 이야기를 저널리스트를 통해 전기로 탈바꿈시킨 에바 가드너(Ava Gardner), 또는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위해 자신이 스페인 출신이라는 점을 감추었던 리타 헤이워스(Rita Hayworth)에 느슨하게 기반하고 있다고 한다. 확실히 결혼을 일곱 번 한 것과 전기 작가를 통해 자기 삶의 내밀한 면을 공개한다는 점, 그리고 '완벽한' 미국인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쿠바 출신이라는 사실을 숨겼다는 점이 닮긴 닮았다.

소설과 주인공인 에블린 휴고에 대해 조금 더 깊게 보자면, 진짜 저자가 어떻게 이렇게 촘촘하게 이야기를 짰는지 놀라울 정도다. 전체적인 구조는 액자 구조이다. 이제 은퇴한 지 한참 됐지만 여전히 사생활에 대해 잘 알려진 게 없는, 79세의 대배우 에블린 휴고가 한 잡지 기자인 모니크 그랜트(Monique Grant)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모니크는 처음에는 자신이 에블린이 소장한 드레스를 내놓은 경매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에블린을 만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모니크와 에블린은 모종의 관계가 있고 (이건 소설 끝에 밝혀진다) 그래서 에블린이 자기 전기를 쓰게 만들 전기 작가로 일부러 모니크를 선택한 것이다. 전기 제목은 이름하여 <에블린 휴고의 일곱 명의 남편들>. 에블린은 자기가 소녀였던 시절부터 어떻게 몸뚱아리 하나만 가지고 할리우드에서 육감적 몸매의 여배우로 이름을 날리며, 일곱 번이나 결혼했는지 그 역사를 다 밝힌다. 요약하면 이렇게 될 테지만 그 '역사' 자체가 진짜 흥미진진하다. 반전과 예상 못 한 전개가 책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정말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다 만들어냈을까 감탄하게 되고, 에블린의 시점에서 과거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잠시 모니크의 시점이자 현재로 돌아오게 되면 진짜 맛있는 사탕을 먹다가 빼앗긴 것처럼 그렇게 감질날 수가 없다. 얼른 이야기를 이어서 더 듣고 싶다. 그 정도로 에블린의 삶 이야기가 정말 기가 막히게 드라마틱하다.

아니, 생각을 해 보시라. 1950년대 할리우드의 대스타가, 성공을 위해 자신의 몸을 이용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꺼리지 않는 이 당당한 여성이 바이섹슈얼일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녀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은 첫 남편 돈 애들러와 이혼하고 난 후인데, 그 전까지는 그저 친구였던 실리아 세인트 제임스에게 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실리아도 '그런' 여자, 그러니까 레즈비언이었던 것이다! 비록 실리아는 진성 레즈비언이고 에블린은 바이섹슈얼이라는 점이 두 사람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되긴 하지만, 오히려 그렇다는 설정이기에 더 이 소설이 의미있다고 본다. 레즈비언/게이와 바이섹슈얼 사이의 갈등(전자가 후자에게 '박쥐'라고 비난한다든가 하는)은 실제로도 존재하는 것이고, 그냥 레즈비언이나 게이만 보여 주는 게 아니라 바이섹슈얼까지 등장한다는 게 진짜 LGBTQ+ 스펙트럼을 더 넓게 묘사할 수 있으니까. 게이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에블린의 절친이자 나중에 에블린과 (위장) 결혼을 해서 넷째 남편이 되는 해리 캐머론은 게이다. 에블린은 그와 (시험관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통적인 방식으로, 무슨 말인지 아시죠?) 딸 코너를 낳는데, 이 딸 이야기가 또 진짜 눈물샘을 자극한다. 나는 에블린이 실리아랑 정말 어렵게 서로의 마음을 헤어져서 실제로는 결혼한 것과 다름없이 같이 사는데도 그 사실을 공개하지 못하고 숨겨야 하는 부분이라거나, 실리아가 자신과 얽혀 있다는 게 대중에게 알려져서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해 에블린이 벌이는 많은 일 같은 에블린과 실리아 사이의 애틋한 사랑보다는 코너 얘기에서 더 감동을 많이 받았다. 뭔가 감동 포인트가 남과는 다른 것 같은데 어쨌거나 그래도 에블린과 실리아 사이의, 당시 현실 때문에 차마 당당하게 드러낼 수 없었던 사랑도 정말 절절하긴 하다. 아니, 하나뿐인 소중한 딸이 어릴 적에 아빠(=해리)의 죽음으로 방황하다가 마음 잡아 기행을 그만두고 공부도 다시 착실하게 하며 예쁘게 잘 컸는데, 유방암에 걸려 39세에 자기 엄마보다 일찍 죽는다니? 게다가 유방암은 유전이라 에블린은 자신에게도 유방암이 발생할 거라는 걸 알게 되는데, 에블린에게 성공을 가져다준 그 가슴이 에블린의 죽음도 가져오게 된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에블린의 남편 이야기는 요약만 해도 엄청 길어질 것 같아서 굳이 따로 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각각의 남편은 별명이 있고, 그와 함께한 시기가 소설상 하나의 '장(章)'으로 구분된다. 예컨대 에블린이 할리우드로 가서 배우가 되어야겠다 결심하고 계획적으로 유혹해 결혼한 첫 남편인 어니 디아즈는 '불쌍한 어니 디아즈(Poor Ernie Diaz)'라는 장에서 소개되고, 멋져 보였고 정말 최고의 스타였지만 가정 폭력을 휘두른 두 번째 남편 돈 애들러는 '망할 돈 애들러(Goddamn Don Adler)'라는 장에서 자세히 다루어진다. 일곱 명의 남편 모두 이런 별명 또는 각 장의 부제목을 통해 일종의 캐릭터성을 부여한다고 해야 할까. 책 제목이 <에블린 휴고의 일곱 명의 남편들>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남편들' 각각보다는 "뭐야, 어떤 여자이길래 남편이 일곱이나 돼?"라는 반응이 제일 먼저 나올 거고, 그러면 그 남편들을 거느린 에블린 휴고에게 더 관심이 가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책 말미에 모니크는 전기의 제목이 '남편들'이 들어가는 점, 그래서 자신의 커리어나 그녀 자신보다 남편들을 더 내세우는 점이 마음에 안 들지 않느냐고 묻는데, 에블린은 이렇게 답한다.

"아니. 그들은 그냥 내 남편들일 뿐이니까. 나야말로 에블린 휴고지. 그리고 어쨌든간에, 사람들이 진실을 알게 되면, 내 아내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질걸("No," she told me. "Because they are just husbands. I am Evelyn Hugo. And anyway, I think once people know the truth, they will be much more interested in my wife.")."

아하! 앞에서 말한 '남편을 일곱이나 거느린 여자(=아내)'라는 사실 자체가 이미 흥미로운데 알고 보니 그 여자에게 또 아내가 있다? 이거야말로 진짜 상상도 못한 정체 아닌가! 이렇게 해서 제목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더 정확해지려면 책 제목은 <에블린 휴고의 일곱 명의 남편들과 한 명의 아내>가 되어야겠지만 보통 결혼은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하는 것으로 여겨지니까 이 책 제목을 읽는 독자는 당연히 '아내'는 에블린 휴고 한 명일 거라고 추측하게 된다. 그래서 결혼이라고 할 때 동성들의 결혼(동성 결혼 또는 시민 결합)이 인정되지 않듯, 실제로 에블린이 평생 열렬히 사랑했던 실리아, 즉 에블린의 진짜 아내의 존재는 지워진다. 와, 이런 점까지 다 고려해서 이야기를 짜고 책 제목을 지었을 작가 생각을 하니 진짜 감탄이 다 나온다. 덕분에 이게 꽤 긴 책인데도 내내 '미쳤다 미쳤어' 하면서 읽었다.

아마 인류가 석기를 만들어 쓰던 시대부터 LGBTQ+ 같은 성소수자들은 언제나 존재했을 것이다. 그들이 당당하게 존재를 인정받게 된 것은 그에 비하면 아주 극히 최근, 짧디짧은 시간이고. 그래서 있는 그대로 인정받을 수 없었던 사람들의 모습을, 사회적으로 그들을 인정하기에는 너무 편협했던 시절, 1950년대를 바탕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99% 다 허구이지만, 실제로 일어났던 스톤월 항쟁(Stonewall Riots, 1969년 6월 28일에 일어난, 이후 동성애자 커뮤니티로 하여금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는 항쟁을 일으키는 데 발단이 된 사건)이나 레이건(Reagan) 당시 대통령 이야기(여담이지만, 레이건 대통령은 토니 쿠시너의 희곡 <엔젤스 인 아메리카>에도 언급되는데 레이건이 어떻게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짓밟았는지 하는 내용이다. 성소수자라면 레이건을 좋아할 수 없으리라), 에이즈로 사망한 록 허드슨(Rock Hudson) 등은 예외적으로 언급된다. 에블린도 스톤월 항쟁 이후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싶어 하지만 해리가 이를 저지하고, 결국 아직은 때가 이르다는 결론을 내리고 대신 동성애자들을 위한 단체에 큰 액수를 후원한다. 언젠가는 자신도 그들처럼 당당하게 자신이 누구인지 밝힐 수 있는 시대가 오기를 바라면서.

이 소설은 영어권 북튜브나 북톡(각각 책을 다루는 유튜브와 틱톡)에서도 꽤 인기였는데, 그래서인지 최근(2022년 3월)에 넷플릭스가 이 소설의 판권을 사서 영화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공개했다. 사실 나는 이 소식을 듣기도 전에 책을 읽으면서 '이거 영상화하면 딱이겠는데? 영화는 2시간 남짓의 러닝타임으로는 조금 부족할 거 같고, 드라마로 만들면 두어 시즌은 뚝딱 나오겠군' 생각했다. 일단 원작 소설이 잘 팔렸으니 영화가 개봉할 때 팬들이 궁금해서라도 한 번쯤 볼 거고, 원작 소설의 이야기가 아주 촘촘하게 잘 쓰여 있어서 각색하기도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다만 분량 문제는 팬들도 우려하는 점이긴 하다. 이야기가 워낙 많으니 2시간 분량의 영화에 다 욱여넣을 수 있으려나?). 원작 소설을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화려운 여배우의 비밀이 밝혀지는 이야기'라는 점과 'LGBTQ+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점을 내세우면 쉽게 흥미를 가질 듯하고. 영화가 공개될 즈음엔 내가 쓴 이 글도 다시 발굴되어 읽히려나? 그러면 좋겠다. 일단 이 책이 한국에서 정발되는 일부터 먼저 바라야 할 듯하지만. 그래도 아직 번역도 안 된 이 두꺼운 소설을 읽는 경험이 어땠는지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엄청 뿌듯하고 재밌었다고 대답해 주겠다. 400쪽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고! 완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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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다키자와 슈이치, <아니, 이 쓰레기는 뭐지?>

 

 

좋은 책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지난 며칠간 내가 떠올려 본 질문이다. 이 질문을 시작한 것은, 일본의 코미디언이자 청소부 일을 하는 다키자와 슈이치가 쓴 <아니, 이 쓰레기는 뭐지?>라는 에세이를 읽으면서였다. 저자는 코미디언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수입이 충분하지 않아 생계를 위해 쓰레기 청소부 일을 시작한다. 그것이 6년 전. 베테랑 청소부가 된 그는 이제 그간의 경험을 소개해 주는데, 이 책은 단순히 '이러이러한 놀라운 에피소드가 있었답니다' 수준에서 끝나지 않고 타인에게 어떤 생각할 거리나 배울 것을 주며, 또한 사회적인 면에 대한 나름대로의 비평을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나름대로의 '좋은 책'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이렇다. 청소부인 저자는 여러 군데를 다녀보았기 때문에 부자 동네와 그렇지 않은 동네의 차이를 통찰할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쓴다.

이런 예를 통찰하는 가운데 내 나름대로 몇 가지 생각이 들었다. 맨 처음으로 든 생각은 사소한 의존이 커다란 소비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부자 지역에서는 생수통으로 쓰이는 대형 특수 페트병이 자주 나왔다는 사실 말이다. 부자들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 득이 된다는 소비 방식을 알고 있다. 확실히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500밀리미터 페트병을 매번 사는 것보다 대형 용량으로 물을 사 마시는 편이 단연 이득이다. 이제 좀 짐작이 가는지?

물을 사러 편의점에 들렀을 때 500밀리리터보다 2리터들이가 가격 면에서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을 것이다. 500밀리리터 콜라를 열다섯 병이나 쟁여놓고 마시려면 어느 정도 비용이 든다. 계산해보면 웬만한 금액이 들어가는 소비에 해당한다.

담배, 술, 비타민 음료도 마찬가지다. 소소한 사치를 부리며 자기 자신에게 상을 주는 마음으로 그런 것을 사는 것을 그다지 대단한 쇼핑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1년 치로 환산하면 상당한 금액이다. 부자 동네에서 이런 쓰레기가 적게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다. 건강을 지향한다는 명분 아래 자신에게 투자할 여유가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대형 쓰레기에 건강 용품이 나온다는 것은 당연히 건강에 신경을 쓴다는 경향을 말해준다. 또한 부촌이 아닌 동네에 비해 담배꽁초 쓰레기가 적은 것, 부모의 원수를 때려잡듯 술을 마시지 않는 것도 비슷한 경향의 반영이다. 승마 운동 기구가 나오는 것도 운동을 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고, 미용 관련 쓰레기도 자기 투자라는 측면에 속할 것이다.

술, 담배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건강을 생각해서인지 부유한 지역에서는 감자 칩 봉지나 초콜릿 상자도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때때로 부촌이 아닌 지역에서는 커다란 쓰레기봉투가 찢어질 때 감자 칩 봉지가 튀어나올 만큼 감자 칩을 많이 먹는 사람이 있다.

나는 이 부분을 읽고 린다 티라도의 <핸드 투 마우스>가 떠올랐다. 실제로 가난을 경험한 저자가 쓴 이 에세이에는 이런 부분이 나온다.

발이 아프고 등은 쑤시는데 잠도 자고 싶고 샤워도 하고 싶다면, 오븐에 들러붙은 기름 찌꺼기를 닦는 것은 내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의 목록에 오르지도 못한다. (...) 나를 힘들게 하는 또 하나는 균형 잡힌 식사다. (...) 슬프게도 건강한 음식은 나를 위로해주지 못했다. 그 점에서는 브라우니 한판이 더 나았다. (...) 가난한 사람들이 합당한 이유 없이 자기파괴적으로 보이는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건, 건설적인 방법은 모두 돈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헬스클럽에 가입할 수 없다. 내 속내를 공짜로 들어줄 정신과 의사는 없다. 

이 인용문은 테이 존데이(Tay Zonday)라는 유튜버가 트위터에 쓴 이 트윗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지금 당장 치약 칫솔을 살 돈이 없는가? 그럼 내년에는 임플란트 비용을 청구받을 것이다. 지금 당장 새 매트리스를 살 돈이 없는가? 그럼 내년에는 척추 수술을 받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 그 혹을 검사 받을 비용이 없는가? 그럼 내년에는 3기 암 치료비를 내게 될 것이다. 가난에는 이자가 붙는다."

가난하면 기본적인 건강에 투자할 돈조차 없다는 사실을 저자는 쓰레기에서 통찰했다는 게 놀랍다. 

이뿐만 아니라 저자는 쓰레기장에서 시민의식까지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사할 때 부동산에서 부동산에서 몇몇 매물을 소개받고 실제로 이사 갈 집을 방문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럴 때 그 동네 쓰레기장을 둘러보기를 권한다. 깨끗하게 쓰레기장을 사용하는 곳이라면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제대로 규칙을 지키며 생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청소부는 보통 쓰레기를 수거하는 날 다른 종류의 쓰레기가 나와 있으면 쓰레기차에 싣지 않고 그냥 놓아둔다. 쓰레기가 남아 있거나 깡통과 병만 놓여 있다는 것은 수거할 수 없는 쓰레기를 내놓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 규칙을 지키지 않고 쓰레기를 내놓은 것이다. 그것은 단지 쓰레기 배출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얘기에 그치지 않는다. 하나의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다른 규칙도 어길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

그래서 쓰레기장은 그곳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하나의 척도가 된다. 관리인이 관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쓰레기장을 깨끗하게 사용한다는 것은 서로 규칙을 잘 지키게끔 하는 '눈'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사 갈 곳 근처를 걸어 다녀보았는데 주변의 쓰레기장에 깨끗한 상태라면, 아마도 각 쓰레기장마다 집단적으로 쓰레기 당번제를 정해놓고 담당자가 책임지고 정리하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쓰레기봉투에 타는 쓰레기와 타지 않는 쓰레기를 마구 섞어 넣어버리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담당자의 얼굴을 떠올리고 '저 집 사람은 쓰레기 분리수거도 제대로 못하느냐'는 비난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쓰레기를 잘 분리하여 배출할 것이다.

쓰레기 당번을 둘러싸고 대화가 이루어지면 자연스레 어느 집에 누가 사는지도 알게 되고, 이웃 사이에 인사를 주고받는다. 이런 동네는 이웃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는 추천하기 어렵다.

그런데 오늘날 어린이를 표적 삼아 벌어지는 범행의 원인은 대부분 지역 커뮤니티의 관계성 상실이라는 인식이 벌써 오래 전부터 자리 잡고 있다. 이런 곳이라면 이웃 사람들이 서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저 아이는 뉘 집 아이라든지, 오늘도 씩씩하게 잘 뛰어놀고 있다든지, 굳이 말을 걸지 않아도 지켜보는 '눈'이 있기 마련이다. 가족 단위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동네를 추천한다.

(...) 앞에서 말한 내용을 트위터에 올렸을 때 이런 반응이 나왔다.

"나는 부동산 중개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이사 오기 전에 가까운 편의점의 쓰레기통을 보라고 권합니다. 쓰레기통이 가정집 쓰레기로 가득 채워져 있는 곳은 그리 예절을 잘 지키는 지역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렇고맗고, 맞는 얘기야. 역시 그랬구나. 선배님이셔!' 하고 격렬하게 동의했다. '부동산 업계에서도 그랬구나!' 하고 괜히 감동하는 동시에 내 생각이 맞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자기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은 쓰레기를 내놓는 일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한국와 일본의 쓰레기 처리법이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도 이 방법을 통해 그 동네 주민의 시민의식을 살펴보는 것은 전 세계 어디에서든 가능할 듯하다. 이사하실 분들에게 진짜 좋은 꿀팁인 듯. 이사 갈 곳이 아파트 단지라면 경비원님께 아파트 입주자들이 쓰레기를 잘 분리해 버리는지, 재활용 날마다 애로 사항은 없으신지 슬쩍 여쭤보는 것도 한 방법이겠다. 그건 그렇고, 정말 통찰을 하려는 의지와 통찰할 수 있는 혜안만 있다면 그 대상이 무엇인지는 정말 문제가 안 되는 것 같다. 쓰레기를 통해서도 통찰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또한 저자는 쓰레기를 통해 통찰뿐 아니라 일본 사회에 대한 비평까지 한다. 쓰레기가 너무 많다고 말이다. 단순히 쓰레기 청소부의 일은 이러이러한 것입니다, 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직업을 가진 사회인으로서 사회에 바라는 바를, 어떻게 보면 가볍게 읽고 넘길 수도 있는 에세이에 썼다는 점이 감탄스러웠다. 그가 코미디언이라는 일뿐 아니라 청소부라는 일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다.

쓰레기의 양이 줄면 우리 일이 편해지니까 그렇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정상이기 때문입니다. 무시무시하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조사 결과를 보면 인정할지 모르겠습니다. 한 사람이 1년 동안 내놓는 쓰레기의 양은 일본이 단연코 세계 제일입니다.
미국은 그렇게 해도 될지 모르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은 좁은 나라입니. 유감스럽게도 고양이의 이마지요. 농담이 아닙니다. 일본은 새로운 매립지를 마련하는 일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정말로 고양이 이마만 합니다.

개중에는 매립지를 늘리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느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도쿄에 관해서만 말하면 더 이상 매립지를 늘리면 도쿄만이 무역항으로 기능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도쿄만뿐 아니라 제가 조사해본 바로는 다른 지방도 매립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재활용에 힘쓰자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알고 나서 쓰레기를 회수하고 있으면 소름이 돋을 만큼 두렵습니다. 매일매일 미친 듯이 나오는 쓰레기를 본다면 무서워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겁니다. (...)

청소부 선배는 확실한 숫자를 들려주었습니다. 도쿄의 매립지는 앞으로 50년밖에 쓸 수 없다고 합니다. 매립지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들었다고 운전기사가 말해주었습니다.

매립지는 20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쓰여 있는 어느 지방의 홈페이지를 봤습니다. 도쿄의 매립지보다도 수명이 짧습니다.

또한 그는 기가 막히게 스웨덴의 예까지 들어서 '일본 사회가 이렇게 변화해야 한다'라는 것을 보여 주는데, 정말 이런 전개는 가벼운 에세이(이 책의맨 첫 번째 장은 한 컷 그림과 그에 딸린 짧은 글, 그러니까 일종의 그림 일기 같은 포맷이다)에는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기에 좋은 쪽으로 놀라웠다.

쓰레기의 메이저리그 선수 격인 스웨덴에서는 전국적으로 쓰레기 문제와 씨름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쓰레기 부족 상태에 빠졌다고 합니다. 뭐라고? 쓰레기 부족 상태라고? 일본인으로서는 이해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스웨덴에서는 쓰레기를 에너지로 변환시키기 때문에 원료가 되는 쓰레기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왠지 오금이 저릴 것 같습니다. 더구나 이웃 나라의 쓰레기를 수입한다고 하니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 듯합니다. 

그리고 원래 쓰레기가 적습니다. 스웨덴에는 상품을 만드는 기업이 쓰레기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법률이 있기 때문입니다. 재활용, 폐기에 관한 비용을 기업이 전부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쓸데없는 쓰레기가 나오지 않도록 기업 자체가 노력하고, 판매 단계에 들어가면 쓰레기가 될 만한 것을 제거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나오는 쓰레기조차 극단적으로 재활용해서 쓰레기가 나오지 않도록 해온 결과가 바로 놀라 쓰러질 만한 숫자를 내놓은 것입니다. 매립지에 파묻은 쓰레기의 양은 배출 쓰레기의 1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는 경악할 만한 수치입니다.

스웨덴의 뒤를 따라가려고 덴마크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 쓰고 버린 접시나 숟가락에 과세를 30퍼센트 부과하기 때문에 소비가 별로 없습니다. 불필요한 쓰레기를 내놓지 않으려고 국가가 솔선수범하여 노력하는 모습에 일본인으로서 그저 감탄스럽기만 합니다.

나도 혹시나 싶어서 '쓰레기 스웨덴'이란 키워드로 검색해 보니 정말로 스웨덴의 쓰레기 매립률이 2013년에 0.7%까지 낮추었다는 기사가 보였다(출처는 여기). 스웨덴에서 환경학과 지속가능성을 공부하신 분이 쓴, 스웨덴의 쓰레기 재활용법에 대한 글도 읽었다(여기). 여하튼, 스웨덴의 예를 들며 일본 사회가 지혜롭게 쓰레기 처리 문제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이 참 멋졌다. 단순히 개인의 경험을 묘사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배움이나 어떤 바람직한 감정을 제공하고, 또한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해서까지 한마디 덧붙이는 것, 그것이 좋은 책의 역할이자 기능 아닐까?

물론 이 책도 완벽하지는 않다. 쓰레기를 보고서 그 쓰레기를 버린 사람을 프로파일링하는데 남성보다 여성에 대해 더 가혹하다는 느낌이다. 말로는 가정적이라고 하지만 쓰레기를 제대로 분류해 버리지 않던 한 화려한 여성 이야기를 하면서 "멋쟁이 여성은 청소를 잘 못한다고 보면 대체로 틀리지 않다"라는 말을 떠올린다. 곧바로 "뭐, 그렇다고 한들 상관은 없다. 모든 사람이 다 거기에 들어맞지는 않을 테니까."라고 덧붙이는데, 그럴 거면 애초에 그런 말은 왜 꺼낸 건지? 그 바로 앞 꼭지에서는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생활에 충실한지는 알 수 없지만, 쓰레기 배출에는 건성이고 허랑한 여자라고 생각하면서 타지 않는 쓰레기는 딱 분리해서 지정 박스에 두고 왔다."라고 썼으면서 말이다. 어떤 아줌마가 수거할 수 없는 쓰레기를 내놓아 '현재는 타는 쓰레기를 수거하는 중이라 깡통은 가져갈 수 없다'라고 거절했더니 그때부터 완전히 그렘린처럼 돌변해 1년 반이나 매번 쓰레기차를 따라다니면서 청소부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는 오싹한 에피소드도 그렇고. 그보다는 왜 가정집 또는 주거 지역의 쓰레기를 수거할 때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남성보다 여성의 모습을 더 자주 볼 수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게 좋지 않았을까? (그거야 쓰레기 버리기 같은 집안일은 여성의 일이라는 의식이 아직도 팽배하니까 그렇지!)

세상에 완벽한 책이라는 게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아닐 거다. 하지만 그래도 이 책은 여전히 좋다. 아쉬운 점 몇 가지만 보완했으면 흠잡을 데 없었겠지만, 그래도 좋은 책이란 어떤 것인지 하는 물음에 나름대로의 답을 줄 수 있을 정도는 되니까. 리디셀렉트에 올라와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라. 그건 그렇고, 이제 나도 쓰레기 줄이기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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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제나 매카시, <우아하게 나이들 줄 알았더니>

 

 

중년 여성의 솔직한 에세이. 이렇게 간단히 책 소개를 하면서 벌써부터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데 실패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책 겉표지에도 쓰여 있듯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는' 중년 여성의 이야기에 '와, 재미있겠다!' 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렇다면 다시 시작해 보자. '진짜 재미있고 공감되는 에세이' 정도면 어떨까. 그러면 좀 더 관심을 끌 수 있을까?

아무래도 내 말솜씨로는 안 될 거 같으니 그냥 저자의 말 중 내가 생각하기에 제일 웃긴 부분을 몇 군데 보여 드리겠다. 여러분들의 관심을 끄는 데는 그게 더 나을 것 같다.

살면서 그만큼 공포에 얼어붙었던 적이 없다. 점잖은 눈썹이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서 3센티미터나 벗어난 지점에 불한당 같은 검은 눈썹이 마구 자라 있었고 코의 모공은 푹 파인 더러운 동굴처럼 보였다. 지우개 크기만 한 바싹 마른 각질이 얼굴 전체를 뒤덮고 있었고 코 주변에는 지하철 노선도처럼 가느다란 실핏줄이 터져 있었다. 게다가 열다섯 살짜리 남자애나 부러워할 빌어먹을 콧수염도 있었다. 어떻게 전에는 이걸 몰랐지? 나는 함께 쇼핑을 하던 막내딸을 붙들고 아이의 완벽하고 촉촉한 얼굴을 거울 앞에 디밀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열두 배 확대한 아이의 얼굴은 원래보다 훨씬 더 촉촉하고 완벽해 보였다. 그때 나는 이 악마의 거울에 흠을 찾아내서 부각하는 재주가 있기를 바랐던 것 같은데, 결국 이 거울은 그저 자기를 들여다보는 사람의 원래 모습을 더 자세히 보여줄 뿐임을 깨달았다. 나의 경우 그 원래 모습이란 관리가 시급히 필요한 중년 여성이었다. - 1. 우아하게 나이 드는 법과 그 밖에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것들
나이에 맞게 옷 입는 비법이 딱 하나 있는데, 내가 한 단어로 요약해드리겠다. 바로 스팽스Spanx다. 스팽스가 뭔지 모른다면 이 책을 잠시 덮고 두 손을 동그랗게 말아 입에 댄 후 다음과 같이 큰소리로 외쳐주시길 바란다. "누가 제발 동굴 입구를 막고 있는 이 엄청나게 커다란 바위를 치워주지 않겠어요? 제가 기어 나가서 처음으로 밀레니엄을 맞이할 수 있게요!" 여러분이 동굴에서 도와줄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내가 스팽스가 뭔지 알려주겠다. 스팽스는 마술 같은 가공 원단으로 만든 엄청나게 매끈한 초고기능 천 쪼가리로, 보기 싫은 바늘땀이나 살을 파고드는 고통스러운 코르셋 없이 살을 깔끔하게 빨아들인다. 그렇다, 스팽스는 거들이다. 하지만 이건 우리 할머니들이 입던 그런 거들이 아니다.(겉포장만 바꾼 테이프도 아니다. 내 맹세한다.) 스팽스의 대표 문구는 '더 가볍고 날씬해지는 비결'이지만 나는 날씬해지고 싶어서 스팽스를 입는 것도 아니다. 날 미워해도 괜찮다. 하지만 나는 정말 말라 보이려고 스팽스를 입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피부가 덜 처져 보이고 싶은 마음이 큰데, 내 몸을 감싸고 있는 표피가 장기를 붙드는 데 필요한 양 이상으로 많은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팽스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면 누가 나한테 스프레이를 뿌려서 모든 것을 밀어 넣고 고정하는 수축포장 코팅을 입힌 것 같다. 그것도 테이프 없이. - 6. 미니스커트와 아줌마 청바지에 대하여

(수면 전문가들이 제안하는 몇 가지 방법에 대해)

낮잠을 너무 많이 자지 말 것. 하하하하하하. 아니, 내가 네 살인 줄 아나? 내가 마지막으로 낮잠을 잔 것은 5년 전으로, 지독한 장염에 걸려 화장실 바닥에서 밤을 홀딱 샌 다음 날이었다. 하지만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이런 좋은 지식은 의대에서 배우셨나요? - 13. 얼마나 피곤한지 설명하는 것도 지친다
물론 경제적 타격 문제를 빼고 외도 반대를 논할 순 없다. 내가 지금 이 순간 바람을 피울지 말지 고민하고 있다고 해보자. 그리고 논의를 위해 내 금지된 사랑의 대상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자나 은퇴한 마취과 의사, 또는 워런 버핏이 아니라고 치자. 말인즉슨 내가 호텔방과 비행기 티켓, 섹시한 란제리, 개인 트레이닝, 로맨틱한 저녁식사, 콘돔, 곧 필요해질 휘핑크림 비용의 절반을 지불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돈은 전부 현금으로 내야 할 텐데, 그래야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이 찾거나 추적할 행적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밀회를 한 달에 딱 두 번만 가져도 1천 달러는 쉽게 넘을 것이며, 내가 들키지 않고 현금을 그만큼 모을 가능성은 첼시 핸들러*가 수녀가 될 확률만큼 낮다.
* Chelsea Handler. 미국의 배우이자 코미디언. 진행자로 최근 가슴해방운동을 벌이며 상반신 노출 사진을 여러 차례 공개했다. — 옮긴이
내 깜찍한 연하남이 말도 안 되는 부자라서 우리 만남의 비용을 전부 댄다고 해도 나는 분명히 새 란제리 몇 벌을 갖고 싶을 것이고 가끔씩 태닝 스프레이도 사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소파 쿠션 밑에 숨겨놓은 잔돈 몇 푼으로는 살 수 없는 것들이다. 늘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니 무척이나 당혹스럽다. "음, 무함마드 알리-알제브라? 나한테 50달러만 빌려줄 수 있어? 고무줄이 탄탄한 팬티 좀 몇 장 사려고. 이 은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보답할게. (윙크 윙크)" - 17. 내가 절대 바람피우지 않을 여러 이유들

 

이렇게 내가 생각하기에 제일 재미있는 부분을 보여 드렸는데도 이 책에 별 흥미를 못 느끼신다면, 그것도 괜찮다. 사람들은 흔히 상대로 하여금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게 만들 때 '안 하면 네 손해'라고 하지만, 여러분이 이 책을 안 읽는다고 큰 손해를 볼 리는 없으니까. 아마 단돈 1원의 손해도 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여자들 책이고 나는 여자가 아니니까' 또는 '나는 여자들(또는 아줌마들) 얘기엔 관심 없어' 라는 생각에 전 세계 인구의 절반과 그들이 대표하는 것을 '별거 아닌 것',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일축해 버린다면 그게 더 크나큰 손해일 거다.

'이(2)항 대립(binary opposition)'이라는 개념이 있다. '언어 또는 사유에서 두 개의 이론적인 대립을 엄격하게 정의하고 하나에 다른 하나를 대립하게 하는 체계'를 말하는데(출처: 위키 백과), 남자-여자, 0-1, 빛-어둠, 위-아래 등이 그 예다. 이 개념들은 서로가 있기에 각자가 존재할 수 있다. 높은 것은 낮은 것이 있어야 높은지 알 수 있으며, 차가움은 따뜻함이 있어야 비교가 가능하다. 원칙적으로 이 개념들은 둘 다 동등하고, 어떤 것이 그 상대보다 더 낫지 않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우월하다고 여긴다. 남자가 여자보다, 아름다움이 추한 것보다, 진지한 게 가벼운 것보다 더 낫다고.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기에열등한 것들을 다 하나로 묶어 버린다. '여자들은 진지한 얘기는 할 줄 몰라. 시시하고 가벼운 사변이나 하지 진지한/정치적인/사회적인 글은 쓸 줄 모른다니까' 하는 식으로. 그 말은 그 자체로도 틀린 말이지만 (진지한 글을 쓰는 여성 작가가 없다고? 실례지만 눈이 없는 게 아니신지) 삶의 절반을 그런 식으로 묵살해 버린다면 그런 태도가 삶에 더 유해할 것이다. 영화로 치자면 드라마도 가치가 있고 코미디도 가치가 있다. 정치적인 것도 가치가 있고 개인적인 것도 가치가 있다(어쩌면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비롯해 삶을 단순한 이항 대립으로 나누고 그쪽에서 자신이 좋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면만 취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애초에 무엇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지조차 다시 한 번 살펴볼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한번 거들떠보는 것은 어떠신지! 생각지도 못한 재미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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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아마에비 리코, <종이봉투 씨는 사랑을 하고 있다 01>

 

 

⚠️ 아래 서평은 아마에비 리코의 <종우봉투 씨는 사랑을 하고 있다 01>의 스포일러를 살짝 포함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당히 만화적인 발상의 만화이다. 위 겉표지로도 알 수 있듯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종이봉투를 쓴 남자(왼쪽)와 그가 좋아하는 여자(오른쪽) '우미'이다. '종이봉투 씨'라 불리는 남자는 여주인공 우미를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나 큰 데다 부끄러움을 잘 타기 때문에 종이봉투를 쓰고 우미에게 고백한다. 우미는 종이봉투 씨와 친구부터 되기로 하고, 점차 그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그에 대한 호감을 키워 나간다. 줄거리는 간단하지만 사실 이토록 만화적인 발상이 있을 수 있을까 싶다.

말인즉슨, 자기 이름이나 얼굴도 밝히지 않은 남자가 좋다고 나에게 호감을 표하는데 그것을 차분하게, 기쁜 마음으로 '그렇구나' 하고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여자가 도대체 얼마나 되겠느냐 하는 거다. 길거리에 지나가는 여자 한 스무 명쯤에게 물어본다면 아마 스무 명 전부 '기꺼이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라는 반응을 보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정도나 표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그 상대를 무섭다고 여기지 않을까? (굳이 여기에 가정 폭력이나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 통계를 가져와야만 이 여성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아니, 만약에 그래야 한다면 남녀의 기본적 신체적 차이와 힘 차이도 이해하지 못하고 젠더 감수성이 없는 사람일 테니 말해 봤자 입만 아플 것이다.)

저자도 그런 점을 의식은 하는지 종이봉투 씨가 다짜고짜 우미에게 반지를 들이밀며 나타나는 첫 등장에 이미 우미의 친구가 그를 '변태'라고 부르며 난리법석을 벌인다(사실 종이봉투 씨는 '좋아한다'라는 말의 첫 음절밖에 꺼내지 못했는데). 상황이 어찌저찌 마무리된 후에 우미는 그를 신고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아마 그냥 부끄럼을 사람일 테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미의 친구는 우미에게 최근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 예컨대 누가 쳐다보는 것 같은 시선이 느껴진다거나 물건이 없어지는 일들이 다 그의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공평하게 그를 변론하자면, 그건 그가 저지른 짓은 아니었고 어떤 스토커의 짓이었다) 우미는 "시선은 내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라며 그 이상한 일들을 대단치 않게 여기려 한다. 우미의 친구는 우미에게 "우미! 너는! 길 위의 꿈꾸는 뮤지션이나 개성 넘치는 패션 감각을 가진 사람처럼 이른바 사회적 소수자라는 말을 듣는 애들까지 순~순히 받아들여 주는 굉장~히 멋진 성격의 소유자인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진짜 나쁜 사람에게 걸려서 휘둘리지 않게끔 위기감을 가지라고!"라며 조언한다. 친구가 우미의 성격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잘 보시라. '이른바 사회적 소수자라는 말을 듣는 애들까지 순순히 받아들여 주는 굉장히 멋진 성격의 소유자'?

하지만 좀 독특하게, 개성 넘치게 옷을 입는 사람이나 '홍대병'처럼 튀고 싶어 하는 사람을 차별이나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친구나 지인이 되는 것과 '진짜 나쁜 사람에게 걸려서 휘둘'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전자는 기껏해야 짜증이나 오글거림, 대리 수치를 유발할 뿐이고 정말 심해 봤자 네이트판에 글을 쓰는 것 또는 그럴 만한 글감을 얻는 것 이외에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후자는 직접적으로 본인의 안전에 위협이 된다. 신체적으로 폭력을 당하거나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친구가 우미에게 가지라고 하는 "위기감"은 다시 말해 현실 감각을 가지라는 뜻이다. 모든 사람을 다 착하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친절을 오해하고 자신에게 흑심을 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이는 동시에 어느 정도까지만, 적절한 선에서 행해져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여자의 경우 그렇다는 얘기다. 남자들은 불특정 다수의 여성에게 호감을 사더라도 신체적으로 안전이 위협받을 가능성은 적으니까).

도대체가, 자기 얼굴도, 이름도, 어디에서 나를 만났는지, 어떻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말해 주지 않는 사람과 어떻게 연인 관계는 둘째치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특히 본인이 여자라면, 직관적인 느낌이자 처음으로 가져야 할 생각은 '아, 이거 좀 위험한데?'일 수밖에 없지 않나. 나를 너무너무 좋아하는데 수줍어서 얼굴조차 드러내지 못하겠다는 것은, 뭐 인기 있는 유튜버와 그 팬의 관계처럼 준사회적(parasocial)한 관계 아닌가? 다시 말해, 나(=팬)는 그 유튜버의 존재를 아는데 그 유튜버는 나의 존재를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그 유튜버의 영상을 많이 봐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등을 안다. 그래서 그를 마치 가족이나 친구, 또는 실제로 오래 알아 온 사람처럼 친근감을 느낀다. 실제로는 그 유튜버를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게 준사회적 관계다. 우미와 종이봉투 씨의 관계는 준사회적 관계에 불과하다. 우미가 종이봉투 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예컨대 우미와 종이봉투 씨가 온라인 상에서 만났다고 치자. 그러면 우미가 종이봉투 씨의 정체에 대해 잘 모르는 것도 이해가 된다. 내가 온라인 게시판이나 채팅방에서 닉네임을 연예인 이름으로 쓴다고 해서 내가 진짜 그 연예인일 리가 없지 않은가(일부러구체적인 연예인 이름은 예시로 들지 않았는데, 원한다면 아무 한국/해외 연예인 이름으로 대체해도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똑같다). 어쨌거나 적어도 그런 상황이라면 우미가 상대를 잘 모른다 해도 그건 완벽하게 말이 되는 설정이다. 하지만 대놓고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의 정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사기꾼이 누구를 속이려고 들면 이름이나 사는 곳, 소속(학교나 회사 등)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그런 기본적인 것들을 알아야 적어도 상대가 나에게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인간 대 인간으로 관계를 시작해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걸 정말 눈곱만큼도 모르는데 어떻게 우미처럼 '일단 친구부터 되자'는 식으로 차분하고 젠틀하게 상대를 받아들일 수가 있나? 우미는 (조금 점잖게, 순한 맛으로 표현해서) 얼빠진 녀석임에 틀림없다. 보통 사람들이 자라면서 보거나, 듣거나, 경험한 바를 통해 낯선 상대에 대한 경계심을 갖는 건 너무나 정상적이고 자기 보존을 위한 당연한 행동이다. 특히 요즘 한국처럼 여성 혐오와 여성을 상대로 하는 범죄가 판을 치는 사회에 사는 여성이라면 더더욱.

읽어도 읽어도 우미가 '얼빠진 녀석'이라는 것 외에는 정말 이 이야기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만약에 두 사람이 생존이 그 무엇보다도 시급한 상황(예컨대 전쟁)에 처해 있다면, 그래서 상대를 알아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면, '생존을 위해 협력하겠다'라는 합의만 하고 서로를 잘 모르는 상황에서 둘이 협력해 어떤 공동의 목표(적에게 들키지 않고 도망가기, 식량 구하기, 적을 처치하기 등)를 향해 나아가는 것도 말이 안 되지는 않는다. 당장 내가 정글 한복판에 떨어져서 살아남아야 하는 처지라면 잘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힘을 합쳐 살아갈 방법을 궁리하는 게 조금이나마 생존 가능성을 높여 줄 테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그런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난 우미가 어떻게 그렇게 경계심 없이 종이봉투 씨를 받아들이고 '친구부터 되자' 같은 하는 소리를 할 수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 이 만화책의 이야기 진행에 따르면, 우미의 친구가 종이봉투 씨의 짓이라고 오해했던 일들은 어떤 스토커의 짓으로 밝혀지고, 마침(이 아니라 당연히 우미 주변을 따라다니던) 그걸 목격한 종이봉투 씨가 우미에게 몹쓸 짓을 하려는 스토커로부터 우미를 구해 줘서 우미는 그를 완전히 괜찮은 사람, 좋은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우미 친구 말대로 "만약 내가 우미를 노리는 남자 범죄자라면, 똑같은 종이봉투를 쓰고서 댁 흉내를 내며 우미에게 다가갈 거야. 그럼 얼굴도 안 들킬 테고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겠지. 그래서 댁이 얼쩡거리는 건 위험해." 스토커를 처치해 주었을지언정 아직 우미에게 자신의 정체에 대해 하나도 정보를 밝힌 게 없는데 어떻게 그를 믿으란 말인가? 그가 수퍼히어로라서 정체를 밝히면 안 되는 것도 아닌데. 하다못해 이름을 "-----(삐)" 처리 하고 우미만 알아들었다 친 후에 '그래도 별명으로 종이봉투 씨라고 부를게요' 뭐 이러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다. 우미는 종이봉투 씨에 대해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다는 것 외에 개인적으로 아는 게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사람과 어떻게 건강한 인간관계를 맺는단 말인가.

알라딘의 책 분류 방법에 따르면 이 책은 '순정만화'이고 '레이디스 코믹'인데, 내 생각엔 '호러'나 '스릴러'쯤이 더 정확한 것 같다. 자신에 대해 하나도 밝히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자신의 호감,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한다고 해서, 상대의 마음을 받아낼 수 있을까? 상대가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나의 마음을 알아주고 나에게 호감을 느낄 수가 있지?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긴 하지만, 건강한 인간관계를 맺으려고 할 때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부끄럽다면 솔직히 부끄럽다고 인정하되 솔직하게 자신을 보여 주어야 상대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보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부끄럽다고 얼굴을 가리는 게, 자기 정체를 숨기는 게 상대의 마음을 얻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뜻이다.

만약 이 만화의 분류를 '호러'나 '스릴러'로 바꿀 수 없다면, 적어도 '순정만화'나 '레이디스 코믹'이라는 딱지는 떼고 오히려 남성향 만화라고 분류하는 게 더 적절할 거 같다. '내가 상대를 이만큼 좋아하는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다가가 표현하면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라며 몸통박치기를 하는 건 너무나 연애를 잘 모르는 남성들이 할 법한 생각이지 않은가. 종이봉투를 쓰고 다가가면 대체로 여자들은 '어머, 저 사람 부끄러움이 많은가 봐'가 아니라 '뭐야, 무서워'라고 생각한답니다. 혹시나 오해할까 봐 덧붙이자면, 종이봉투 아래의 숨겨진 얼굴이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 그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얼굴이 잘생겼다고 해서 그런 게 용납되는 게 아니니까.

종이봉투 씨는 내내 우미를 좋아하는 이유로 우미가 "예전부터 다정해서"라는 점을 꼽는데, 아니 그 다정한 걸 네가 어떻게 아냐고요. 어떨 때 다정한지 네가 어디서 봤어? 근데 너는 왜 너를 안 밝혀? 그리고 "예전부터"라니, 그 말인즉슨 우미를 안 지 꽤 됐다는 얘기인데 이건 그냥 보통 여자로 하여금 소름이 오소소 돋게 하기에 충분하다. 꽤 오랫동안 나 몰래 나를 관찰해 왔다? 우미의 물건을 훔쳐가고 우미에게 몹쓸 짓을 하려던 스토커랑 종이봉투 씨가 진짜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 만화는 현실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놓아야, 그렇게 해야지만 '순정만화'로, '로맨스(또는 로맨틱 코미디)'로 보인다. 아니, 차라리 엘프가 나오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동차가 나오면 '이게 상상의 산물이구나' 하고 직관적으로 바로 알아차릴 수나 있지, 이건 현대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서도 이렇게나 젠더 감수성이 바닥을 쳐야만 할 수 있는 상상을 현실과의 경계가 흐릿하게 그려 버리니 독자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의식적으로, 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깜빡 속기 쉽다. 자신의 정체를 조금도 밝히지 않고도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상상, 또는 자신의 존재가 상대에게 얼마나 위협이 될 수 있는지 의식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상상, 상대를 좋아해도 상대의 상황이나 마음을 고려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상상 등등. 이 책을 읽으려면 독자 여러분들의 비판적이고 의식적인 독서가 반드시 필요하다. 현실은 상상과 다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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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오리 집사, <오리 집에 왜 왔니>

 

 

어떤 책들은 트위터에서 시작된다. 트위터에서 취미처럼 끄적이던 글 또는 만화가 세간의 눈을 끌어 정식으로 연재될 플랫폼을 찾거나 출간되는 일이 종종 있다. 이 책도 그중 하나다. 작년인가 트위터에서 오리를 키우는 만화를 본 기억이 있는데 그게 어느새 책으로 나왔더라. 와,이게 소셜 미디어의 순기능인가. 취미에서 정식으로 발표되(고 돈도 받)는 작업물이 되다니, 이건 마치 내 꿈!? 

어쨌거나 깜찍한 그림체의 이 그림 에세이는 저자가 우연히 길가에서 다친 오리 새끼를 구조한 후 키워 나가는 이야기이다. 이때 저자의 후배도 같이 오리 새끼를 한 마리 구조해서 처음엔 두 마리였는데 후배의 오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고, 저자의 오리 '오린이'만 남았다. 어린 오리라서 '오린이'인데, 어릴 때는 개나리처럼 노란색이지만 성조가 되어서는 털이 하얗게 변했다. 책 표지에 있는 하얀 오리가 바로 이때의 오린이이다.

나는 사실 이 책을 보기 전에 추리 소설을 읽고 있었는데 (그 책도 다 읽으면 여기에 후기를 쓸 일이 있겠지) 어째서인지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뭔가 머리를 식히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책이 없을까 리디셀렉트를 살펴보았고, 최근 업데이트에서 이걸 발견했는데 얼마나 반갑던지.

나는 이런 책을, 내가 좋아하는 북튜버 말마따나, 입가심용 책(palate cleanser)이라고 부른다. 가볍고, 귀엽고, 재미있고, 크게 머리 쓸 일이 없어서 기나긴 하루의 끄트머리에도 부담 없다. 게다가 이 책은 짧은 데다가 만화로 되어 있으니 길어야 한두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다. 이처럼 이상적인 입가심용 책이 또 있을까? ㅎㅎ 귀여운 오리를 보며 힐링 할 수 있는데!

저자의 본가가 강원도에 있는 데다가 그곳엔 마당도 있어서 오리를 위한 우리까지 지어 줄 수 있었으니 정말 오린이가 주인을 참 잘 만났다. 저자의 동생,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저자의 옆집 친구까지 다 오린이를 사랑하고 아껴 주니 보는 나까지 다 흐뭇하다. 애초에 오리라는 동물이 대개 가축용으로 길러지고 애완동물로는 보기 힘든데, 그래서 더 이 책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이 책이 아니라면 오리가 사회적인 동물이라 혼자 있으면 불안해한다는 사실을 어디서 배울 수 있겠는가. 맹세코 난 몰랐다. 어미나 동족을 찾으려고 하는 불안해하는 오리를 달래 주기 위해 거울, 손과 얼굴이 달린 큰 인형, 연기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또 어떻고?

오린이 하나만으로도 너무너무 귀여운데 옆집 친구가 기르는 시바견 '푸들'(다시 말하지만 종은 시바견이다)과 나중에 오린이에게 오리 문화를 가르치기 위해 모셔온 '오리 선생님'까지 등장해서 귀여움이 곱절이 된다. 귀여운 거 ✖️ 귀여운 거 🟰 더 귀여운 거! 귀여움이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내 호주인 친구에게도 이 책을 보여 주니 아주 귀엽단다. 특히 오린이의 'X'자 항문을 좋아했다. 얘 아직 항문기인가...

책이 길지 않은데 (종이책 기준 236쪽) 책 후반쯤 되면 오린이의 사계절도 나오고 오린이가 가족이 된 지 1년이 지났다는 말도 나와서 혹시나 하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는데, 다행히오린이는 저자와 저자의 가족, 그리고 친구와 잘 살고 있다는 것으로 끝이 난다. 휴. 해피 엔딩이라서 이렇게 다행일 수가. 다행히 기쁜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이 책을 추천할 수 있게 됐다. 표지의 오린이를 보시라. 그리고 믿으시라, 이 귀여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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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Nicola Yoon, <The Sun Is Also a Star>

 

 

요즘 내가 좋아하는 북튜버가 추천해 준 책들 위주로 읽다 보니 아직 국내에 정식 번역 출간되지 않은 책들을 많이 읽게 되었다. 오늘 소개할 책도 그중 하나다. 니콜라 윤(Nicola Yoon)의 <The Sun Is Also a Star(태양도 별이다)>. 진짜 괜찮은 청소년 소설인데 안타깝게도 아직 국내에 소개는 안 되었다. 이 저자의 첫 소설 <Everything, Everything(에브리씽 에브리씽>은 번역됭어 나오긴 했는데, 2017년에 출간되어 현재는 절판되었다. 안타깝구먼... 그런데 <에브리씽 에브리씽>도 영화화되었다는데 저자의 두 번째 소설인 이 작품도 영화로 나왔다(2019년, 라이 루소-영(Ry Russo-Young) 감독). 와, 대박이네. 책 두 권을 연달아 영화화시키다니...

잡소리는 이쯤 하고. 책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자면 자메이카계 미국인 10대 소녀 나타샤(Natasha)와 한국계 미국인 (이민 2세대) 10대 소년 대니얼(Daniel Jae Ho)가 만나는데,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뿐이다. 나타샤와 그 가족이 미국에 '여행 비자'로 와서 눌러앉아 버린, 불법 체류자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몰래, 어떻게 들키지 않고 지냈는데 나타샤의 아버지 새뮤얼(Samuel)이 음주 운전을 했다가 경찰에게 들켜 탄로가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이 시작되는 날, 나타샤는 그날 밤 10시에 강제 출국 당할 예정이고, 그걸 막기 위해 백방 뛰어다니며 방법을 간구하려 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만난 게 대니얼. 나타샤는 과학을 좋아하고 데이터 과학자가 되고 싶어 할 정도로 아주 이성적이고 논리적인데, 반대로 대니얼은 시인이 되고 싶어 할 정도로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술적이다. 대니얼은 나타샤에게 자기에게 시간을 주면 그녀가 자신과 사랑에 빠지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고, 나타샤는 '그런 게 통할 리도 없고 어차피 나는 오늘 밤 지나면 미국에서 떠나갈 사람이니 그래 봤자인데...'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쨌거나 사랑이나 마법처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믿지 않는 나타샤는 그런 방법 따위는 없다고, 그런 게 통할 리 없다고 믿으며 자기가 직접 그 실험 대상이 되어 주기로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오늘 하루뿐인 것이다. 

물론, 눈치가 빠르신 분들은 이미 감 잡으셨겠지만 둘의 다른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다른 문화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둘은 서로에게 점차 끌리고 (사실 대니얼은 이미 나타샤가 예뻐서 호감을 갖고 있긴 했다) 사랑에 빠지게 된다. 엥, 너무 빠른 거 아니냐고요? 그래야 소설이 이어지죠^^; 혹자는 나타샤와 대니얼의 다른 성격도 너무 극단적인 예시 아니냐 ('어떻게 사랑 따위도 안 믿는 과학 신봉자일 수가 있어?'처럼)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애들은 10대입니다. 내가 보기에 그때에는 그렇게 좀 극단적인 성향을 보일 수도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10대 아니고 어른들도 자기 성격이 이렇다 하고 콘셉트를 딱 잡아 버리면 거기에서 더 벗어나기 어려운 게 사실이고. 그래서 난 둘의 정반대로 다른 성격,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은 그러려니 하고 인정할 수 있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저자에 대해 검색해 보니 저자 본인이 자메이카와 미국 뉴욕에서 자랐단다. 그리고 코넬 대학에서 전자 공학을 전공했다니 아마 나타샤의 '과학자적'인 면모는 아마 조금은 자신에게서 떼어 온 듯. 그리고 성은 한국인 '윤' 씨의 그 '윤'이 맞는데, 남편분이 한국계 미국인이시라고. 남편분 성함이 '데이비드 윤(David Yoon)'이어서 결혼 후 성을 바꾸었기 때문에 '니콜라 윤'이 된 것이다. 나는 저자 본인이 한국계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구나. 

저자가 한국계인지 아닌지가 왜 궁금했냐면,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대니얼이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본인이, 또는 가까운 이가 한국계이면 좀 더 한국 문화에 대해 잘 알 테니까 말이다. 아마 남편분을 통해 잘 배우시고 또 조사도 철저히 하신 거 같다. 책에는 노래방이나 젓가락, 순두부찌개 같은 한국적인 소재도 나오지만, 무엇보다 대니얼이 이민 2세대로서 느끼는 부담감과 이민 1세대인 대니얼의 부모님이 느끼는 감정이 잘 묘사돼 있다. 대니얼의 부모님은 흑인들을 위한 헤어 케어 제품을 파는 가게를 하는데, 흑인들의 머리를 펴는 약품 릴랙서(relaxer)나 가발 같은 걸 파는 곳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한국계 이민자들이 그런 가게를 많이 한다고. 그런 데에는 다 배경이 있는데, 이건 나중에 내가 다른 글에서 소개하겠다.

여담이지만, 나는 이 책을 이북으로 읽는 동시에 오디오북으로도 들었는데 나타샤, 대니얼, 그리고 새뮤얼 이렇게 세 명의 인물을 담당하는 내레이터가 각각 한 명씩 총 세 명이 낭독을 하는 버전이었다. 나타샤 역의 낭독자는 아무리 들어도 '10대 소녀'로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는데 (죄송), 대니얼 역의 낭독자는 (성으로 보아 아마도 한국계인 듯하고) 한국어 발음이 괜찮았다. "대체 무슨 일이야?"라는 한국어 대사가 있었는데 그걸 잘 발음하시는 거 보니 한국계 맞으신 듯. 그리고 새뮤얼 역의 낭독자는... 'Dae Hyun'이라는 (대니얼의 아버지 이름을) '대휸'이라고 발음하셨다. '대휸' 아니고 '대현'이요! 참고로 대니얼의 어머니 이름은 'Min Soo'인데 이건 전형적인 여자 이름은 아니라서 조금 엥? 싶었다. 그래도 뭐, 전반적으로 한국 문화를 잘 표현했다.

나타샤와 대니얼에게 주어진 시간이 딱 하루뿐이다 보니 나타샤와 대니얼의 시각이 번갈아가며 묘사되고, 그렇게 극이 진행되어 가며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의 시각도 제시된다. 예컨대 나타샤의 아버지의 관점이라든가, 대니얼의 아버지의 관점, 또는 나타샤가 강제 출국을 어떻게든 늦추거나 막아 보려고 이민국에 가서 만나게 되는 경비원의 관점 등등. 나타샤의 어머니가 자주 하는 말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데는 이유가 있다'라는 말인데, 극 후반에 나타샤는 이 말을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의 관점을 돌아가며 보여 주는 게 시간의 진행을 늦추는 (하루밖에 시간이 없으니 한 명이 모든 일을 다 서술하면 진행이 엄청 빨라질 것 아닌가) 효과가 있어서, 하루라는 짧은 시간을 좀 더 길게 늘려 보이는 데 도움을 준다. 24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을 가지고 소설을 이어나가기 위해 필요한 장치였다고 본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다양한 인물의 관점을 보게 되니까 참 모든 이들이 연결되어 있구나 (위아더월드!) 싶었다. 어떤 사건에 관여한 모든 이들이 나중에 다른 사건에서도 만나게 되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뒤로 갈수록 확인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진짜 기가 막히게 표현을 잘했다 싶어서 하이라이트를 해 둔 곳이 많은데 이걸 이 글에서 다 소개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현재 한 편에 한 인용문씩 골라서 번역하고 (국내 정식 번역본이 없다 보니까 소개를 하려면 내가 직접 번역을 해야 할 듯) 어떤 의미에서 이 인용문이 마음에 와 닿았는지 소개하는 글을 쓰려고 계획 중이긴 한데, 내가 하이라이트한 모든 인용문을 다 소개할 수 있을지, 내가 과연 이걸 쓰기는 할지도 잘 모르겠다. 아마 쓰게 되면 스포일러는 불가피하겠지만 이 진짜 기가 막힌 책을 소개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책의 영화 버전을 조금 봤는데 (내가 좋아하는 북튜버가 리액션 하는 영상으로 좀 띄엄띄엄 봤다) 진짜 대니얼 역할 배우 말도 안 되게 잘생겼더라 ㅋㅋㅋㅋ 와... 어디서 저런 배우를 데려왔지? 원작 소설 자체가 인종적, 문화적 다양성(diversity)을 포함한 책이라 당연히 흑인, 아시아인 배우들을 데려와야 하는 게 맞는데 이렇게 잘생긴 배우가 있었다는 게 놀랍다. 그렇다. 재능 있는 소수 인종 배우가 없는 게 아니라, 그런 배우들을 출연시킬 기회, 역할 자체가 적은 것이다. 이 영화도 조만간 보고 리뷰 써야지.

마지막으로 이 책 맨 앞에 인용되어 있는 칼 세이건(Carl Sagan)의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 중 한 구절이 이 책의 주제를 얼마나 잘 드러내는지 이야기하고 싶어서 손이 드릉드릉 한다. 물론 이것만 보시면 '무슨 의미에서 그렇다는 건데, 이 씹덕아?' 하시겠지만, 책을 다 읽고 나시면 저와 같은 심정이실 거예요. 흑흑. 인용문은 이거다. "It does no harm to the romance of the sunset to know a little about it(일몰에 대해 조금 안다고 해도 그것이 그 낭만을 조금도 해치지 않는다)." 번역은 내가 한 거라 정식 번역본과는 다를 수 있는데, 대략 그런 내용이다. 나타샤는 과학, 이성만을 믿고 사랑이나 마법 따위는 전혀 믿지 않으려 하는데, 우리가 사랑의 마법 같은 힘을 믿거나 경험한다고 해도 우리가 비이성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행복한 존재가 되겠지. 아니, 조금 비이성적이 된다 한들 어떤가. 사랑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국내에 정식 번역 발간이 되지 않았다는 게 너무 아쉽다. 조만간 국내에 출간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일단 재미있지, 주제 좋지, 건전하지, 한국인과 한국 문화도 나오지, 게다가 영화로도 제작됐으니 띠지에 광고할 문구도 쉽게 쓸 수 있다. 청소년에게 추천할 만한 소설로 딱인데! 안목 있는 출판사의 지혜로운 선택을 기다립니다! 딱히 어려운 영어로 쓰인 것도 아니니까 영어 공부용으로도 나쁘지 않을 듯? 일단 여러분들 츄라이 츄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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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Kate Stayman-London, <One to Watch>

 

 

저번에 쓴 <Someone Who Will Love You in All Your Damaged Glory>에 이어, 국내에 아직 정식 발간되지 않은 원서에 대한 리뷰이다.

2022.07.25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Raphael Bob-waksberg(라파엘 밥-왁스버그),

번역도 안 된 책에 대한 리뷰가 얼마나 관심을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진짜 대박인 책이라 소개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책의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의 주인공인 베아트리스 슈마커(Beatrice Schumacher), 애칭 비(Bea)는 플러스 사이즈 패션 블로거이다.

대학 시절 프랑스에서 한 학기 교환학생을 다녀온 이후, 패션에 푹 빠져 틈틈이 패션 블로그를 운영해 왔고, 최근 웬만큼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대학 시절부터 친구이자 짝사랑해 온 상대인 레이 모레티(Ray Moretti)라는 친구가 있는데, 이 남자는 뻔뻔하게도 약혼한 여자 친구가 있는 주제에 오랜만에 비가 사는 도시(LA)에 방문차 왔다가 그녀와 하룻밤을 지내고 연락을 끊는다.

사귀지도 않았는데 끝난 것인가, 상심하며 하루하루 살던 , 어느 날 비는 절친 마린(Marin)과 <메인 스퀴즈(Main Squeeze)>를 보며 깔깔 떠들고 이러쿵저러쿵 비판도 하다가 저녁을 보낸다.

<메인 스퀴즈>가 뭐냐면, 말하자면 <베첼러(Bachelor)> 같은 쇼다. 한 명의 남자가 여러 명(첫 화엔 대개 스무 명 정도)의 여성과 만나 한 화에 몇 명씩 떨어뜨리고, 마지막 화에서는 단 한 명과 약혼을 해야 하는 그런 리얼리티 데이팅 쇼.

그런데 다음 날 깨어나 보니 비가 잠들기 전 폭풍같이 써서 포스팅한 <메인 스퀴즈>에 대한 비판, 그러니까 어쩜 그 쇼에 나오는 여성들은 다 그렇게 찍어낸 듯 똑같이 날씬하고 불가능할 정도로 꾸며진 모습인지, 그 쇼에선 다양성이란 게 멸종했는지를 꼬집는 글이 엄청 리트윗되고 바이럴하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 이 갑작스레 밀려온 미친듯한 (그녀의 글에 대한) 관심 사이에서, <메인 스퀴즈> 쇼의 프로듀서 로렌(Lauren)은 비에게 다음 시즌 <메인 스퀴즈>의 주인공이 되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는데...!

 

한 줄로 간단히 요약하자면, <베첼러> 같은 쇼에 나가게 된 플러스 사이즈 패션 블로거 얘기다.

리얼리티 데이팅 쇼를 소재로 썼기에 진짜 리얼리티 쇼 같은 반전과 충격적인 전개가 진짜 일품이다. 

나에게 이 책을 소개해 준 북튜버도 이 책이 'juicy(흥미진진한)'하다고 표현했는데, 정말 이건 친구랑 같이 읽으면 (buddy-read) 딱 좋을 책이다.

예상 못한 전개, 주인공의 선택에 TV 쇼 보듯 이러쿵저러쿵 떠들 거리가 정말 많다.

왜 올해 초에도 <솔로지옥>이 엄청 인기였지 않나. 왜 누구는 누구를 선택했을까, 나라면 A 말고 B를 고를 텐데 하는 얘기 등을 하면서.

진짜 그런 쇼를 보면 사람들과 이야기할 거리가 넘쳐나듯, 이 책도 마찬가지다. 와, 작가님 리얼리티 쇼 좀 보신 듯?

 

오디블 버전 커버

주인공이 플러스 사이즈인 여성이라 '뚱뚱한' 여성이 사회에서 어떤 눈길을 받고, 어떤 말을 듣는지가 정말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어서 어쩌면 그 점에 대해 미리 경고할 (trigger warning)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쓰인 부분뿐 아니라 문자를 주고받은 내역, 이메일 내용, 팟캐스트를 받아 적은 기록 등 여러 가지 스타일도 포함한다.

<메인 스퀴즈>의 진행 내용에 대한 (가상의) 트윗을 보여 주는 부분에서는 특히 인터넷에서 비만 혐오자들이 혐오를 극명하게 표현하는지를 정말 있는 그대로 옮겼다. 나는 읽기만 했는데도 상처받았잖아... ㅜㅜ

그렇지만 그건 또 작가가 이 부분을 그만큼 실감 났게 잘 썼다는 뜻이기도 하다. 단순히 악플을 보여 줌으로써 선정적으로 관심을 받으려 드는 게 아니고, 소설 속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과 관련이 있으니까 다소 힘겹더라도 끝까지 읽어 주시길. 장담컨대 이 소설은 해피 엔딩이다(끝까지 다 읽어 본 제 말을 믿으시라!).

 

스포일러가 될까 봐 자세히 말은 못하지만, 와, 진짜 에피소드가 하나하나 풀릴수록 흥미가 두 배, 세 배가 된다.

진짜 리얼리티 쇼 보는 느낌이라 이걸 오디오북으로 들으면서 걷다가 나도 모르게 "와, ㅈㄹ 났다" 하고 육성으로 내뱉은 적도 있다. 그만큼 충격적인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는 거!

이런 내용의 리얼리티 쇼 있으면 매화 공개될 때마다 온라인 커뮤니티 터졌을 듯. 

솔직히 이 책 내용 가지고 영화나 드라마 만들어도 꽤 잘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K-드라마로 만들어도 잘될 듯?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이 책이 거의 안 알려졌으니까 책 내용을 거의 그대로 가져와도 (물론 리메이크 계약을 정식으로 해서) 만들어도 아주 센세이셔널하게 재밌을 거고, 잘될 거 같다.

일단 대체적으로 로맨스 소설이지만 '뚱뚱한' 여성과 다양성(여러 가지 의미로)에 대한 메시지도 담고 있으니 그것도 플러스.

 

오디블(Audible)에서 오디오북으로도 들을 수 있다. 이 책 자체가 대박 재밌으니까 오디오북으로든 이북으로든 종이책으로든 꼭 읽어 보시라!

와, 진짜 이거 다 읽은 분이랑 같이 책 얘기하고 싶어서 손이 드릉드릉ㅋㅋㅋㅋ 나름대로 메시지도 있고 재미도 있는 이 책을 정말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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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Raphael Bob-waksberg(라파엘 밥-왁스버그), <Someone Who Will Love You in All Your Damaged Glory>

 

 

넷플릭스 시리즈 <보잭 홀스맨(BoJack Horseman)>의 제작자인 라파엘 밥-왁스버그(Raphael Bob-waksberg)가 쓴 단편소설들 모음집.

나는 <보잭 홀스맨>은 안 봐서 모르지만, 내가 이 책에 대해 알게 된 북튜버 말로는 그의 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도 좋아할 거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이 책이 마음에 들었으니 <보잭 홀스맨>도 한번 찾아볼까 생각 중.

 

책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국내에 번역되어 정식 발간되지도 않은 책에 대해 리뷰를 써 봤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질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은 동시대(contemporary) 픽션을 잘 읽지 않는 내 마음에 꼭 들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관계, 그러니까 남녀 사이의 연애, 사랑을 주제로 하는 이야기들이 많다. 두엇 정도 가족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대체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그리고 굉장히 다양한 스타일이 사용됐다. 터부!(Taboo!) 게임 스타일로 쓰인 단편소설도 있고, <Lies We Told Each Otther (a partial list)>는 '우리가 서로에게 했던 거짓말' 목록 형태로 쓰였는데 신기하게 그걸 읽다 보면 이야기가 있고 흐름이 보인다.

<Missed Connection — m4w>는 크레이그리스트(Craigslist)의 'missed connection' 섹션(두 사람이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이어지지 못했을 때 그 사람을 찾는 글. 우리나라식으로 예를 들자면 대학교 커뮤니티나 대나무숲에서 '모월 모일 어디에서 무슨 색 옷 입으셨던 남자/여자분 찾습니다' 같은 글이라고 보면 된다)에 올라온 포스트 형태로 쓰였다.

<Lunch with the Person Who Dumped You>는 당신을 찾던 구 애인과 점심을 같이 하게 되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을 여러 가지 써 놓았는데, 약간 게임북(분기점에서 독자가 선택지를 골라 그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는 책. 나 어릴 적엔 학습 만화에 이런 형태가 많았다) 느낌도 든다.

이렇게 다양한 스타일을 시도하다니 참 신선하고 재밌었다.

 

이 신선한 스타일 시도 중에서 내 마음에 제일 든 단편을 딱 한 편만 고르자면, 스타일 면에서는 보통 소설과 다름이 없는 것들이다.

<A Most Blessed and Auspicious Occasion>. 제목의 '가장 축복되고 상서로운 행사'는 결혼식을 말하는데, 제목처럼 결혼식을 준비하는 커플의 이야기다.

한 커플이 소박하게 결혼식을 준비하려는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그랬듯이) 주변 사람들이 자꾸 참견을 해댄다. 그래서 작고 소박하게 하려던 결혼식은 점점 산으로 가게 된다.

이렇게 간단하게 줄거리만 놓고 보면 평범한데 이 이야기의 최고 매력은 세계관이 너무너무 흥미롭다는 거다. 대놓고 드러나지는 않지만 등장인물들의 대화에서 세계가 그려지는데, 보아하니 이곳은 결혼식에서 'Stone God(돌의 신)'을 위해 염소를 제물로 바치는 관습이 있다.

또 남주(새신랑)가 웨딩 플래너에게 하는 "Yeah, and you don't even need a master's in social work(맞아요, 그러는 데 사회 복지학 석사도 필요 없죠)."라는 대사를 보면 이 세계에는 석사 과정도 있고 사회 복지학도 학문으로 정립된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주(새신부)가 결혼 허가를 받으려면 대사제(Grand Priest)와 같이 자야(lie)한다고 말하는데, 이건 중세의 '초야권'을 연상시킨다.

남주의 동생은 염소를 도살하는 법을 배우는 수업(goat-slaughtering class)에서 자기 친구들이 어쩌고 하는 걸로 봐서는 그런 것도 있다.

그런데 또 신기하게 남주가 '결혼식 전문 촬영가(videographer)'를 고용할 일은 없다고 말하는 걸로 봐서는 비디오라는 문물도 있는 듯하다.

이렇게 고대, 중세, 현대가 뒤섞인 것 같은 세계관이라니! 너무너무 흥미롭고 재밌어서 이 단편소설이 끝나지 않기를 바랄 정도였다.

배경은 이렇게 약간 판타지스러운데 이야기는 또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그 조합이 너무 좋았다.

채석장에서 일하는 남주는 결혼식 비용을 대려고 특근을 기대한다. 그런데 채석장에서 사고로 다친 동료가 늘어나자, 관리자는 안전 문제로 특근에 따르는 특근 수당을 줄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새신부(여주)는 'Promise Egg'(이곳의 관습. 금, 은, 구리 등등 다양한 소재로 만든 알인데 이게 사랑의 징표로 여겨지는 듯하다)를 좋은 걸로 하고 싶어 한다.

애초에 소박한 결혼식을 원하던 둘이라 아내가 사치스러워서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는 남주는 어떻게든 자기 아내가 될 여자에게 좋은 걸 해 주고 싶다. 하지만 돈이 없는걸! 그래서 부자인 아내의 아버지, 그러니까 장인어른에게 찾아가 고개를 굽히고 조금 도와주십사 부탁한다.

장인어른은 'Promise Egg는 사랑의 징표인데 그걸 싸구려로 하면 내 딸이 뭐가 되나!' 하며 돈을 준다. 사랑하는 여자를 풍족하게 뒷바라지해 주고 싶은데 그게 안 되어 장인어른께 굽실굽실해야 하는 자신이 못난 거 같아 슬퍼하는 게 너무 짠하고 귀여웠다.

게다가 나는 이 책을 오디오북으로도 들었는데 (오디오북으로 들으며 특히 마음에 드는 부분은 이북으로 찾아보는 식으로) 귀로 들으니 더 그 내용이 와닿아서 더 짠했다.

 

내가 들은 오디오북 버전 표지는 이거였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오디오북으로 책을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인데 너무너무 좋더라.

낭독자가 대사, 상황에 맞게 연기하듯 톤을 바꿔 가며 낭독을 하니까 귀에 쏙쏙 들어오고 더 재미있다. 사실 위에서 이야기한 <A Most Blessed and Auspicious Occasion>이 오디블(Audible)에서 이 책 샘플로 제공되는데, 북튜버에게 책을 추천받고 호기심이 생겨 이 책을 찾아보다 오디블에 들어가 이걸 듣게 되었고, 너무너무 재밌어서 오디블에 가입까지 해서 나머지를 다 들은 것이다.

참고로 <브루클린 나인나인(Brooklyn Nine-Nine)>의 로자 디아즈(Rosa Diaz) 역으로 잘 알려진 스테파니 비트리즈(Stephanie Beatriz)와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Orange Is the New Black)>의 브룩 소소(Brook Soso) 역의 키미코 글렌(Kimiko Glenn)도 내레이터로 참여했다. 

친근한 목소리로 듣는 책이라니! 그래서 더 즐거웠던 것 같다.

 

위에서 말했듯이, 아직 정발도 안 된 책에 대한 리뷰가 얼마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좋은 책을 읽었으니 나누고 싶은 건 인지상정. 그래서 써 봤다. 이 리뷰가 단 한 명이라도 이 좋은 책에 관심을 가지게 도와준다면 나야 바랄 게 없을 것이다.

번역본이 없어도 괜찮다, 원서도 읽을 수 있으니 좋은 책을 찾는다는 분께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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