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어맨다 몬텔, <워드슬럿>
알아 두면 쓸데없는 언어학 지식 하나. ‘slut’은 현대에 ‘성적으로 난잡한 여성’을 뜻하는 모욕이지만, 원래 이 단어는 “더럽거나, 지저분하거나, 단정하지 못한 습관 또는 외모를 가진 여자(a woman of dirty, slovenly, or untidy habits or appearance)”를 말했다. 즉, 먼지가 묻었다거나 해서 신체적으로 더러운 것을 뜻했다. 성적인 함의는 없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한 신데렐라 판본에서 신데렐라는 ‘신더슬럿(cinderslut)’, 즉 ‘재투성이인 더러운 여자애’라고 불렸다(참고). 그러다가 단어의 뜻이 바뀌어 ‘slut’은 이제는 성적으로 헤픈 여자를 가리키게 되었다(참고).
<워드슬럿>은 언어학자 어맨다 몬텔이 영어가 변화해 온 궤적을 살펴보며 그 안에 담긴 여성 혐오를 발견하는 책이다. 책 제목인 ‘워드슬럿’은 한국어로 초월 번역 하자면 ‘언어성애자’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여성에게 유독 비판적이고 모멸적인 단어들을 ‘되찾기 위해(take back)’ 성 중립적으로 사용해 보려는 노력이다.
순수하게 언어와 언어학에 관심이 있어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독자라면 ‘뭐야, 근데 여자들 얘기가 왜 이렇게 많아? 뭐야, 또 페미니스트들이야?’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게 ‘뜬금없는’ 일, 페미니스트들이 어떻게든 아주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모두 페미니즘과 연결하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거야말로 착각이다. 언어, 이 경우는 영어를 연구하다 보니 그 안에 여성 혐오가 많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그것이 잘못됐으며 고쳐 나가 보자고 말하는 게 무엇이 잘못됐다는 말인가. 영어(를 비롯한 많은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여성 혐오적 사상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언어도 그것을 반영해 바뀌었다는 건 팩트(fact) 아닌가. 정치와 논란에서 벗어나고자 이걸 일부러 못 본 척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현실을 왜곡하는 것과 다름없다. 있는 그대로를 보았을 뿐인데 영어가 여성 혐오로 찌들었다는 증거가 마구 나온다니까요? 예컨대 이 연구 결과들을 보시라.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캠퍼스(UCLA)에서 젠더화된 모욕에 대해서 비슷한 조사를 실시했는데, 여성에 대한 은어 가운데 90퍼센트가 부정적인 뜻이고 이에 반해 남성에 대한 은어는 46퍼센트만 부정적인 뜻을 담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말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어휘 중에서 남성보다 여성에 대한 모욕의 함량이 더 높다는 뜻이다. 이 연구는 여성에 대한 ‘긍정적인’ 뜻을 담은 어휘도 있는 것으로 밝혀냈지만, 이때의 긍정적이라는 의미 역시 여성을 음식에 비유하는(복숭아, 트릿, 필레와 같이) 성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70년대에 언어학자 뮤리엘 슐츠(Muriel Shulz)는 이 불쾌한 웅덩이 속으로 처음 뛰어든 연구자 중 하나였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그는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플러턴캠퍼스 언어학 교수로서 1975년 『여성의 의미론적 실추(The Semantic Derogation of Woman)』라는 상징적인 보고서를 제출한다. 이 보고서에서 슐츠는 ‘의미론적 변화’를 묘사한다. 컵케이크(cupcake)부터 컨트(cunt)에 이르기까지 젠더화된 별명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조명하면서 단어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여 준 것이다. 의미론적 변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격하(pejoration)’로, 처음에는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인 의미가 나중에는 부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 반대는 ‘격상(amelioration)’이다.
영어에서 여성 — 생애주기 어디쯤에 놓여 있든 상관없다 —을 묘사하는 거의 모든 단어는 어느 정도 음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슐츠가 썼듯이, “언어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진 현상은 소녀나 여성을 묘사하는 단어가 처음에는 중립적이거나 심지어는 긍정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다가도, 점진적으로는 부정적인 함의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 함의는 처음에는 약간 헐뜯는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악의적으로, 결국에는 성적인 모욕으로 변한다.”
여성을 헐뜯는 경향의 변화는 젠더화된 언어들 가운데 여성과 남성에게 각각으로 존재하는 쌍을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서(sir)’와 ‘마담(madam)’의 차이를 비교해 보자. 300년 전에는 두 단어 모두 격식을 갖춘 인사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마담은 조숙하거나 자만한 여자아이를 나타내다가, 정부나 성판매자를 지칭하고, 결국에는 성판매업소를 운영하는 여성을 일컫게 되었다. 이렇게 격동의 변화를 거치는 동안에 ‘서’의 의미는 처음 그대로 남아 있다.
‘마스터(master)’와 ‘미스트러스(mistress)’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 용어는 옛날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넘어왔는데, 권위를 가진 위치에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데 여성을 일컫는 용어만 기혼자와 성적으로 난잡한 관계를 맺는 여성을 의미하는 식으로, 슐츠가 말한 대로라면 ‘주기적으로 사통하는’ 뜻으로 오염되었다. 그런데 ‘마스터’는 여전히 가정이든 동물이든 (혹은 BDSM으로 이야기하자면 그의 성적 상대인 서브미시브든) 뭔가를 책임지는 남자를 뜻한다. 마스터는 또한 가라테나 요리와 같이 어려운 기술을 획득한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미스트러스셰프’라는 이름의 거칠고 즐거운 오디션 프로그램이 있던가? 그렇지 않다(있다면 꼭 볼 것이다).
이 외에도 예시가 많은데 여기에 다 옮겨 적을 수가 없어서 여기까지만 타이핑했다. 영어뿐 아니라 한국어에도 여성 혐오적 면모가 많이 묻어 있다고 나도 느끼는데,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는 모욕의 강도를 높이고 싶을 때 상대를 여성화하는 것이다. 예컨대 남고딩들끼리 서로 욕하는데 “뭐 이년아” 하는 것. 누구는 그냥 욕이라고,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데 ‘네 기분이 왜 나쁜지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난다. 남자를 여자로 부르는 것만으로도 모욕이 된다는 게 여성 혐오라는 걸 모른다고? 눈 가리고 아웅이지.
그렇지만 우리가 이런 모욕을 가만히 듣고 있을 필요는 없다. 언어는 변화하게 마련이고, 그 변화는 언어 사용자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나아가는 길을 바꿀 힘이 있다. 첫 번째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회장’을 뜻하기 위해 ‘chairman’ 대신에 ‘chairperson’을, ‘소방관’을 뜻하기 위해 ‘fireman’ 대신 ‘firefighter’라는 성 중립적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그 예이다.
두 번째, 저자가 ‘워드슬럿’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한 것처럼, 우리도 모욕적인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그 부정적 함의를 덜어내고 그 의미를 바꿀 수 있다. 이걸 ‘재전유’라고 한다.
이런 재전유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큰 의미에서 우리는 ‘비치’와 ‘호’를 비틀어 준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들에게 감사를 돌려야 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방언(AAVE)은 미국 청년들이 사용하는 은어 전반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스쿼드(squad)’, ‘플릭(fleek)’, ‘워크(woke)’ 같은 최근 용어부터 ‘블링블링’ 같은 옛날 말까지, 좋다는 뜻의 ‘배드(bad)’와 ‘24-7’이라는 문구까지도 여기 빚지고 있다. (…) 어떤 여성들이 이 언어를 쓰는 방식은 젠더화된 모욕에 대한 재전유의 끝을 보여 준다.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방언 화자들이 ‘시그니파잉(signifying)’이라는 말놀이의 명인이다. 시그니파잉은 욕을 써서 듣는 사람들을 유머러스하게 누르는 언어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 이 기술은 흑인 공동체를 넘어서게 되었다.
‘비치’를 긍정적으로 재정의하게 된 맥락은 힙합 속 여성들과 긴밀하게 관련이 있다. 1990년대 후반, 흑인 여성 아티스트들은 ‘배드 비치’를 적대적이고 못된 사람이 아니라 자신감 있고 탐나는 사람을 지칭하기 위해서(트리나의 1999년 노래 <다 배디스트 비치(Da Baddest Bitch)>와 리애나의 <배드 비치(Bad Bitch)>에게 영광을!) 사용했다. 힙합은 나와 내 여자 친구들이 2017년에 쓰기 시작한, ‘호’의 프랑스식 버전, 즉 더 시크하고 재미있는 방식대로 쓰인 ‘오(heaux)’라는 단어와도 관련 있다. ‘오’를 처음 본 건 십 대 래퍼 대니엘 브레골리(백인이지만 그가 이토록 영리하게 스펠링을 다르게 쓰는 방식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방언’의 영향이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가 그해 낸 노래 제목에서였다. ‘오’는 다소 뻔뻔하게 철자를 가지고 하는 유희이지만, 여성이 이 단어를 사용할 때는 임파워링과 재전유의 효과를 준다.
‘호’와 ‘비치’는 이런 맥락에서 은어가 아니라 연대와 해방의 신호가 된다. 이런 단어에 어쨌든 불편을 느낄 여성들이 분명 있겠지만, 자신들을 ‘비치’와 ‘호’라고 묘사하는 여성들에게는 여성성에 대한 구식 기준을 거부할 수 있는 길이 되기도 한다. 서턴은 이렇게 분석했다. “우리가 서로를 ‘호’라고 부를 때, 우리는 섹스를 할 뿐 아니라 스스로 돈을 버는 여성임을 인지할 수 있다. 서로를 ‘비치’라고 부를 때에는 남성이 만든 세상에서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을 확인한다. 저항을 통해서 재정의가 이루어진다.”
재전유를 하는 과정에서 그 단어가 부정적인 의미를 전부 잃어야 할 필요는 없다. 재전유를 향한 길은 그렇게 수월하지 않다. ‘퀴어’와 ‘다이크’는 여전히 동성애자에 대한 모욕으로 쓰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전유가 실패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의미론적인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한 의미가 천천히 다른 한 의미를 덮어 기존의 의미가 지평선 아래로 지는 점진적인 과정에 가깝다. 단어의 긍정적인 변주가 점점 더 흔해지고 점점 더 주류를 차지할수록, 다음 세대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이러한 의미를 먼저 집어 들게 된다.
이런 재전유가 가능함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예가 ‘서프러제트(suffragette)’이다. 이 단어는 ‘서프라지스트(suggragist, 투표권을 확대하려는 사람을 젠더 중립적으로 일컫는 라틴어 파생어)라는 단어를 폄하하는 말로 시작했다. ‘서프러제트’는 20세기 초 투표권을 요구하는 여성들을 폄하할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여성 해방 운동을 한 여성들 덕분에 오늘날 영어권 화자 대부분은 이 단어가 처음엔 모욕이었다는 점을 완전히 잊었다. 이제 이 단어는 모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이 정말 글자 그대로 20세기 초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를 가리키는 데 쓰일 뿐이다.
나는 언어 덕후라 다소 열을 올리며 후기를 썼는데 여러분이 이 책에 흥미를 갖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언어라는 렌즈를 통해 이 사회와 문화를 보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 주는 좋은 책이니까. 언어나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다면 권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