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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추천]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체체파리의 비법> - 1 (책 감상)

by Jaime Chung 2018.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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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추천]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체체파리의 비법> - 1 (책 감상)

* 이 글에서는 책에 대한 감상만을 이야기합니다. 책의 편집상 오류 정리는 다음 포스팅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readingwritingandrevolution.tistory.com/25 *

 

여자가 SF를 쓸 수 있을까?

우스워 보이는 이 질문은 코니 윌리스나 어슐라 르 귄 같은 작가 이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답은 너무나 명백하다.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여자도 당연히 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일을 하더라도 남자가 더 많은 인정을 받고 더 '잘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 음, 일단 SF에에 대해 말하자면, 남자가 우주라든지 과학에 대해 더 잘 아니까.

정말 그럴까?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경우를 보자. 그는 데뷔하자마자 SF계의 주목을 받았고 발표한 SF 소설들은 뛰어나다는 찬사를 받았다.

알고 보니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앨리스 셸든의 필명이었고, 그녀는 사실 공군 장교와 CIA 정보 분석관 출신이었다. 어린 시절엔 아프리카와 인도를 여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끝내주는 SF 소설들을 썼다. 얼마나 잘 썼느냐면, 그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나눈 작가들조차 '그'가 '그녀'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믿을 수 없다", "팁트리 주니어가 여자라면 내 손을 지진다!"고 반응할 정도였다.

띠용. 정말 띠용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거다.

 

단편 "체체파리의 비법"은 듀나의 추천 글(저자의 정체와 고정관념에 대해 썩 잘 쓴 글)에 이어 이 단편집을 시작하기에 딱 맞는 선택이었다.

이 세상 여성들을 모두 없애면 천사들이 나타나 그다음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 줄 것이라 믿으며 대량으로 여성을 살해하는 광신도들이 이 세상 이곳저곳에 등장한다. 앨런 박사는 자신의 아내 앤만큼은 보호하려 노력하지만, 그 자신조차 이 광기에 '감염'되었음을 깨닫는다.

제목(원제는 The Screwfly Solution)의 '체체파리'는 원래 '나사파리'가 맞지만, 예전 번역본의 제목을 기억하는 독자들을 위해 체체파리로 옮겼다고 한다.

나사파리나 체체파리, 검정파리, 뭐든 큰 차이는 없겠지만(독자가 파리 구제법에 아주 능통해 파리 이름만 듣고도 이 이야기가 어떻게진행될지 예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면) 그래도 'solution'은 '비법'보다는 '해결법[해결책]'으로 옮기는 게 더 낫지 않나 싶다.

'구제법' 또는 '퇴치법'이라고 하면 이 글의 주제가 더 뚜렷하게 드러나겠지만 그러면 반전의 재미가 덜할 수도 있으니 거기까진 안 간다 치자. 그래도 여전히 '비법'은 좀 어색하다.

 

"접속된 소녀"도 좋았다. 좀비 같은 소녀 P. 버크는, 과학 기술로 만들어진 살덩어리이지만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소녀 '델피'를 뇌파를 통해 조종하는 일을 맡게 된다. '델피'는 일종의 PPL이 떡칠된 TV 쇼에 출연하고 큰 인기를 얻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한 남자('폴')와 사랑에 빠진다.

반전은 말하지 않겠지만 이 말만은 하겠다. P. 버크가 <더버빌가의 테스(Tess of D'Urbervilles)>를 읽었다면 그런 헛된 희망은 가지지 않았을 것을... 쯧쯧. 불쌍하긴 하다.

 

"보이지 않는 여자들"이나 후에 "비애"에서도 잠시 언급되듯, 남자는 여자의 임신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일 뿐이며, 그 아이를 키우는 데 굳이 남자가 필요 없다는 듯 남자를 떠나는(떠나 보내는) 여성의 모습은 그녀들의 강인함을 강조하는 듯하다.

나는 아이를 원해 본 적도 없고 아이를 좋아하지도 않기에 왜 이 여자들이 그렇게 임신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자가 남자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은 팩트니까. 그녀들의 선택을 존중한다.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는 아쉽다. 지구에 모종의 이유로 살아남은 몇백 명의 인간(대개 여성)을 복제해 인구 수를 늘린다는 아이디어, 주디들은 어떻고 코니들은 어떻고 하는 공통점을 가졌으면서도 개별적인 특성을 가진 개개인의 모임이라는 아이디어는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나도 내 조상의 복제 인간이며 나와 똑같은 복제 인간 '자매'가 있다면 나 자신의 불완전함을 보충해 주는 것 같은 기분이라 좋을 것 같다.

그렇지만 '뛰어난 수컷'이 되지 못한 좌절감에 이 우주에 남은 여자들이 다 자기 것인 양(극 중에는 이보다 더 심한 단어가 쓰였다) 취급하는 남자들의 모습은 아주 역겨웠다. 그깟 고깃덩어리 하나 더 달린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미친, 생각하니 또 열 받네. 그렇지만 읽다가 너무 혈압이 올랐다. 어쨌든 그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였다는 의미이다.

 

이 외에도 "아인 박사의 마지막 비행"이나 "덧없는 존재감", 그리고 "비애" 등 총 7편의 작품이 실렸고 뒤에는 작품 해설 및 옮긴이의 글도 붙어 있다.

전반적으로 페미니스트적인 SF라고 할 만한 면모들이 많이 보인다. 흥미로웠다.

여성주의적 글을 읽고 싶은 분들, 아니면 그냥 재밌고 놀라운 상상력을 맛보고 싶은 분들 모두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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