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트렌트 돌턴, <우주를 삼킨 소년>
동명의 넷플릭스 시리즈 <Boy Swallows Universe(우주를 삼킨 소년)>의 기반이 되는 원작 소설. 호주 소설가 트렌트 돌턴이 썼다. 한마디로 평을 내리자면, 호주 교외 지역에까지 마수를 뻗치는 마약 문제라는 현실과 마법적인 환상을 적절히 잘 버무린 한 소년의 성장기다.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우리의 주인공 일라이 벨은 형 거스와 함께 엄마 프랭키를 끔찍이 사랑한다. 문제는 엄마를 마약에 빠지게 한 장본인이자 그 마약 중독에서 빠져나오게 한 새아빠 라일이 몰래 마약 공급책 일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라이는 라일이 인공 수족의 제작자이자 다라 (퀸즐랜드 주 브리즈번 교외에 있는 동네 이름) 지역의 마약 딜러 ‘큰손’ 타이터스 브로즈 밑에서 일하는 걸 관두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라일은 그저 ‘모든 게 다 좋아질 거고, 상황이 나빴다는 걸 잊을 정도로 좋아질 거다’라는 말을 반복할 뿐이다. 사실 그는 베트남산 마약을 공급받아 일부를 삥땅 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타이터스 브로즈는 자신의 행동 대장인 이반 크롤을 라일에게 보내고, 평온하고 즐겁던 이 가족의 저녁 식사는 금세 악몽으로 변하고 마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제목이 ‘우주를 삼킨 소년’이라고 해서 글자 그대로 일라이가 우주를 삼킬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고요…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는 비유다.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게 마련인데 삶은 이 둘 다를 전부 삼키고 불꽃놀이처럼 이를 뱉어내는 거라고(출처).
형은 밤마다 우리 방 창문으로 하늘을 빤히 올려다보며, 달이 우리 집 위를 지나가는 길을 뒤쫓았다. 형은 달빛의 각도를 알았다. 가끔은 한밤중에 창밖으로 몰래 빠져나가 잠옷 차림으로 호스를 집 앞 도랑까지 질질 끌고 가서는 몇 시간이고 거기 앉아 소리 없이 거리를 물로 가득 채우곤 했다. 각도만 잘 맞추면, 거대한 물웅덩이에 은빛 보름달이 가득 비쳤다. 어느 추운 밤에 나는 “달 웅덩이”라고 선언하듯 말했다. 그러자 형은 환하게 웃으면서 오른팔로 내 두 어깨를 감싸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 크리민스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오페라 「돈 조반니」가 끝날 때 모차르트도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을까. 형은 무릎을 꿇고 오른손 검지로 달 웅덩이에다 완벽한 흘림체로 세 단어를 썼다.
‘소년, 우주를 삼키다.’
세세한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방법, 표정을 읽는 방법, 비언어적인 단서에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뽑아내는 방법, 바로 눈앞에 있는 말 없는 모든 것에서, 말없이 내게 이런저런 것을 알려주는 모든 것에서 감정 표현과 대화와 이야기를 캐내는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은 형이었다. 항상 귀 기울일 필요는 없다는 걸, 그냥 보기만 해도 충분하다는 걸 가르쳐준 사람도 형이었다.
일라이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은 무엇인지, 차이가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고민하는데, 그건 아무래도 일라이의 ‘베이비시터’가 슬림 할리데이라는 사실에서도 기반하는 듯하다. 슬림은 택시 운전사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24년간 복역했는데, 그는 자신이 그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여러 번 탈옥을 시도했고, 그래서 ‘보고 로드 교도소의 후디니’라는 별명도 얻게 된다. 일라이는 슬림에게 진짜로 그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여러 번 묻는다. 슬림은 삶이란 그렇게 좋고 나쁜 것,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딱딱 가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일라이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 한다.
“내 생각에 할아버지는 착한 사람 같아요.” 내가 말한다. “할아버지가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할아버지는 입에서 담배를 빼고는 식탁 맞은편에서 내 쪽으로 몸을 구부린다.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사악하다.
“인간은 네가 생각지도 못한 짓까지 저지를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잊지 마.”
일라이는 슬림의 제안으로 보고 로드 교도소에 수감된 알렉스 버뮤데스라는 자에게 편지를 보내며 그의 펜팔이 되어 준다. 일라이가 그에게 쓰는 편지는 모든 것을 자세하게 관찰하고 복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갈고닦는 자리이자, 슬림이 가르쳐 주려고 했던, ‘삶은 그렇게 칼로 나누듯 딱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다’라는 점을 일라이 스스로 이해해 가는 과정이다.
(…) 제일 위에 있는 담배에 목적지인 방의 주인 이름 ‘배너건’을 흘려 써서. 용감한 바퀴벌레는 가는 길에 감방을 만나면 무조건 그 문 밑으로 기어들어가요. 그러면 의리 있는 죄수들은 벽을 따라가는 위대한 여정으로 바퀴벌레를 꼭 다시 내보내죠. 나는 이런 생각이 자꾸 드는 거예요. 그들이 바퀴벌레를 얼마나 살살 만졌을까. 다들 살인범에 강도에 사기꾼이잖아요. 그렇게 순할 때도 있었을 거예요. 시간이 넘쳐나니까요.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인데요, 알렉스. 세상의 모든 문제, 세상의 모든 범죄는 누군가의 아빠로부터 시작됐을지도 몰라요. 강도, 강간, 테러, 아벨을 해치는 카인, 잭 더 리퍼, 전부 다 아빠들이 원인이잖아요. 엄마들일 수도 있지만, 세상의 모든 엿 같은 엄마는 그 전에 엿 같은 아빠의 딸이었으니까요. 말해주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아저씨의 아빠는 어땠는지 듣고 싶어요. 좋은 사람이었나요? 점잖은 사람이었어요? 아저씨 곁에 있어줬어요? 우리 아빠한테 전화해보라는 충고 고마워요. 아저씨 말이 맞아요. 무슨 일이든 양쪽 얘기를 다 들어봐야겠죠.
내가 거스라는 캐릭터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래 책과 드라마를 비교하는 부분에서 언급하겠지만), 거스가 단순히 말이 없거나 드라마 버전에서 거스를 연기한 배우가 귀여워서만은 아니다. 거스는, 자신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그래서 이전에 살았던 삶의 실수랄지 부족했던 점 등을 부분적으로 기억할 수가 있다. 물론 어떤 일이 일어날지 대략 안다고 해도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날 때까지는 그게 무슨 뜻인지 본인도 모른다. 일종의 전조(foreshadow)인데 이게 어떻게 들어맞는지는 끝까지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형은 문장 다섯 개를 다 쓰고 나자 펜의 깃에 잉크를 묻히는 것처럼 검지 끝을 핥은 다음, 눈에 보이지 않는 펜을 떠밀어 눈에 보이지 않는 글을 끼적거리게 만드는 신비로운 힘에 다시 접속한다. 슬림 할아버지는 두 팔을 운전대에 얹고, 형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담배를 길게 한 모금 빤다.
“지금 뭐라고 쓰는 거야?” 할아버지가 묻는다.
형은 우리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형만의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글자들을 써나간다. 어쩌면 형의 머릿속에는 괘선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형에게는 하늘에 쭉 뻗어 있는 검은 줄이 보이는지도 모른다. 형이 쓰는 글이 내게는 거울 문자와 같다. 형을 제대로 된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거나, 형이 쓴 글자가 머릿속이나 마음의 거울로 회전시킬 수 있을 만큼 선명하다면 나는 그 글을 읽을 수 있다.
“이번에는 똑같은 문장을 계속 쓰는데요.”
“뭐라는데?”
형의 어깨 위에 떠 있는 태양. 하얗게 작열하는 신. 내 이마를 가리키는 손. 틀림없다.
“너의 마지막은 죽은 솔새.”
형이 얼어붙는다. 나를 빤히 쳐다본다. 형은 나를 닮았지만, 나보다 낫다. 더 강하고, 더 아름답고, 얼굴 전체가 매끄럽다. 달 웅덩이 속의 얼굴처럼 매끄럽다.
나는 다시 한번 말한다. “너의 마지막은 죽은 솔새.”
형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젓고, 미친 사람 보듯 나를 쳐다본다. 상상에 빠진 사람이 나인 것처럼. ‘넌 항상 상상에 빠져 있잖아, 엘리.’
“난 가끔 오줌 지릴 만큼 형이 무서운데.”
“말 좀 곱게 해.”
말 좀 곱게 하라고? 말을 곱게?
몰래 헤로인이나 파는 주제에, 우리가 무슨 본 트랩 가족•이라도 되는 양 우리끼리 만들어낸 망상에 젖어 있을 때, 정말 열받는다.
-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모델이 된 오스트리아 가족.
“잘못했어요.”
“왜 형이 무서워?” 엄마가 묻는다.
“그게, 형이 하는 말 때문에요, 마술 지팡이 휘두르듯이 손가락으로 허공에 쓰는 말. 가끔은 그냥 헛소린데, 가끔은 2년 후나 한 달 후에 그 말이 딱 들어맞는 거예요. 그렇게 될 거라는 걸 몰랐을 때 쓴 말인데.”
“예를 들면?”
“케이틀린 스파이스요.”
“케이틀린 스파이스? 케이틀린 스파이스가 누군데?”
“내 말이 그거예요.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오래전에 슬림 할아버지랑 랜드크루저를 타고 놀다가 형이 허공에다가 짧게 뭘 쓰는 걸 봤어요. 그 이름을 계속 쓰고 있더라고요. 케이틀린 스파이스. 케이틀린 스파이스. 케이틀린 스파이스. 그러다가 지난주에 《사우스웨스트 스타》에 크게 실린 ‘퀸즐랜드주의 그때 그 사건’이라는 기사를 읽었어요. 슬림 할아버지에 대한 내용이었어요. 보고 로드의 후디니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전부 다 써놨더라고요. 정말 재미있었는데, 기사 맨 밑의 오른쪽 구석에 그 기사를 쓴 여자 이름이 보이는 거예요.”
“케이틀린 스파이스구나.”
“어떻게 알았어요?”
“네가 그쪽으로 분위기를 몰고 갔잖아.”
엄마는 흰색 서랍장 위에 놓여 있는 액세서리 상자로 다가간다. “오거스트가 지방 신문에서 그 여자 기사를 읽었을 거야. 속으로 이름을 불러보고 그 소리가 마음에 들었나 보지. 걔는 원래 그래, 어떤 이름이나 단어에 꽂히면 속으로 몇 번이고 곱씹거든. 입 밖으로 안 낸다고 해서 말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야.”
책과 드라마를 비교해 보자면, 둘 다 좋다. 물론 드라마가 책을 완전하게 100% 따라가진 않고, 같은 사건이라도 등장하는 순서가 조금 다르기도 하고, 드라마는 책에서는 거의 비중이 없던 인물에게 조금 더 스크린 타임을 주기도 한다. 세부 사항도 조금 다르다. 예를 들어 책에서는 일라이의 검지 손가락이 잘리는데, 드라마에서는 (그래도 얘가 타이핑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하니까) 약지 손가락이 잘리는 걸로 바뀌었다. 또한 책에서는 프랭키가 교도소에 수감된 이후 거스와 일라이가 친부 로버트 벨과 살게 되면서 새로운 학교로 전학 가는데, 드라마에서는 내내 같은 학교에 다니는 걸로 나온다. 그리고 책이 조금 더 ‘환상적’이라고 할까, 마법적인 요소가 있는데 드라마는 그걸 조금 쳐냈다는 느낌이다. 누가 죽고, 누가 살고 하는 중요한 결말은 똑같은데 개인적으로 드라마가 엔딩을 (책보다) 조금 더 감상적으로 만들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좋다.
드라마 얘기를 조금 더 해 보자면, 드라마에는 호주산 ‘핫 가이’인 트래비스 핌멜이 라일 역으로 등장한다. <멘탈리스트>에서 봤던 사이먼 베이커가 거스와 일라이의 친부 로버트 벨을 연기했는데, 나는 이걸 다 볼 때까지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헐, 그 사이먼 베이커였구나! 총 7편 중에서 5편을 차지하는 ‘어린 시절’ 일라이를 연기하는 배우는 필릭스 캐머론인데 꽤 연기를 잘하더라. 내 최애는 단연코 일라이의 형 거스 역의 리 ‘타이거’ 핼리. 배우도 귀여운데 거스라는 캐릭터를 잘 살렸다. 셸리(거스가 좋아하는 여자애. 근육위축증을 앓고 있다)랑 꽁냥꽁냥하는 거 개귀여움ㅋㅋㅋㅋㅋ
번역에 관해 말하자면, 전반적으로 괜찮은데 이 말은 꼭 하고 넘어가야겠다. 주인공인 소년의 이름은 ‘엘리’ 벨이 아니라 ‘일라이’ 벨이다. 영어로 쓰면 ‘Eli’. 남자애 이름은 ‘엘리’일 수가 없는데, 번역가가 이를 몰랐을 리는 없고, 그냥 이름을 스펠링 그대로 읽어서 표기해야 한다는 출판사 표기법이라도 있는 걸까? 하지만 그런 식으로 치면 ‘Michael’이란 이름은 ‘마이클’이 아니라 ‘미카엘’로 표기해야 하는데 그런 문제는 또 없었단 말이지… 또한 위에서 언급했듯, 타이터스 브로즈가 부리는 악역의 이름은 이름은 ‘이반(영어로는 ’아이반’이라고 읽는다) 크롤인데 이걸 번역본에서는 ‘이완’이라고 써 놨다. 스펠링만 봐도 ‘Ivan’인데요… 이 두 가지가 제일 거슬리는 오역이다. 이름을 왜 이렇게 틀리게 썼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동적이고 재미있는 소설이라 추천하고 싶다. 넷플릭스에서 만든 미니시리즈도 동시에 추천한다. 둘 다 같이 즐겨도 좋겠다. 번역본에서 사람 이름 틀린 것만 고쳐서 다시 찍어 줬으면… 주인공 이름은 엘리가 아니고 일라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