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정유리, <날것 그대로의 섭식장애>
13년이나 섭식장애를 앓아 온 저자가 내밀하게 밝히는 자신의 장애 기록. 36kg과 63kg 사이를 오가던 그는 폭식﹒제거형 신경성 식욕부진증(거식증) 진단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장애와 싸우면서 타인을 돕고 싶다는 마음에 상담을 공부하고, 실제로 자격증을 따서 청소년 상담사로 일했다.
저자는 자신이 “폭식﹒제거형의 신경성 식욕부진증이며 관해를 이미 경험한 적 있는 만성화된 환자다”라고 고백한다. 신경성 식욕부진증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핵심 증상을 보인다.
• 음식물 섭취를 지속적으로 제한하며 현저한 저체중 유발
• 체중 증가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과 체중 증가를 막기 위한 지속적인 행동(이는 저체중일 때도 마찬가지다)
• 본인의 신체와 체중에 대한 왜곡
저자는 이 세 가지를 모두 충족한다. 신경성 식욕부진증을 겪는 사람의 대부분은 대부분 5년 안에 증상이 일시적으로 혹은 완전히 나아지는 ‘관해(寬解)’를 경험한다고 한다(참고로 ’관해’는 ‘완화’의 전 용어다). 저자 역시 이 시기에 살이 쪘다. 그러나 관해는 완전히 ‘낫는’ 게 아니고, 언제든 다시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암도 재발할 수 있듯이, 관해되었던 환자도 섭식장애의 증상을 다시 보일 수 있다. 치유라는 것이 늘 일직선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으로 먹은 음식을 토해냈을 때의 경험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 사건 이전부터 이미 먹는 양을 줄여 가며 칼로리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처음으로 음식물을 토하고 나서 이런 생각을 했단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어느 날, 위산이 배를 난도질하는 고통에 자취방에서 혼자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 개통 사은품으로 받은 육개장 사발면이 눈에 들어왔다. 헐레벌떡 포장을 뜯고 생라면을 입으로 쑤셔 넣었다. 다른 컵라면에 비해 면발이 얇은 육개장 사발면이 오도독 소리를 내며 씹혔다. 그렇게 한참 생라면을 흡입하다가, 튀긴 밀가루를 먹어 버렸다는 사실에 뒤늦게 경악한 나머지 화장실에도 가지 않고 방 한가운데서 구토를 했다. 부서졌으나 아직 완전히 형태를 잃지 않은 조각난 라면들이 침과 함께 방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이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는가? 나는 더러워진 방을 걱정하지 않았다. 겨우 섭취한 음식을 토했다는 자괴감이 든 것도 아니었고, 내 위와 식도의 건강을 염려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음료 없이 생라면을 먹으면 토하기가 몹시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에 또 생라면이나 그런 종류의 딱딱하고 마른 음식을 먹게 된다면 꼭 물이랑 같이 먹어서 더 쉽게 토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조각난 라면의 뾰족한 단면들이 식도를 긁어서 너무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토한 후에는 먹은 만큼 다 토해 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집 밖으로 나가 1시간가량 뛰어다니며 열량을 소모했다.
비단 자괴감의 문제가 아니었다. 비정상적인 사고와 행동들은 내 삶에 치명적인 해를 입히고 있었다. 위염과 식도염이 생기고 머리카락과 근육이 빠져나갔다. 화장실에 왜 그렇게 오래 있는지에 대해 사람들에게 더 이상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았다. 고통스럽고 불행했다. 가까스로 살을 빼고 유지하는 와중에 들려오는 날씬해서 예뻐 보인다는 말이 나를 가장 슬프게 했다. 이미 신체적 건강과 정신사회적 기능이 심각하게 손상된 상태였으나, 먹는 것에 대한 강박과 집착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내가 제일 충격을 받았던 저자가 용기를 내서 과자 한 봉지를 다 먹었더니 그다음 날 양쪽 턱에서 묵직한 근육통이 느껴졌다고 하는 부분이다. 그만큼 씹는 근육을 사용하지 않아 약해졌던 것이다. 아니 세상에…
하지만 자신의 문제를 인지한 후에도 변화하는, 치유로 나아가는 길은 쉽지 않다. 다양한 일화가 있지만 그중에 나는 저자의 이 비유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내 오른쪽 손등에는 자주 멍이 들곤 했다. 나는 그 멍 자국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손등이라는 위치에 멍이 들기가 쉽지 않은데 늘 같은 자리에 생겨서다. 어느 날 설거지를 하면서 주방에 작게 난 창문을 열려고 했다. 습기 때문인지 창문이 한 번에 열리지 않았다. 창문을 붙잡고 힘을 주다가 창문 위 찬장에 손등을 부딪치고 말았다. ‘이놈의 창문이 또!’라고 생각한 순간, 손등에 들어 있던 멍 자국이 떠올랐다. 그 시퍼런 자국은 매번 이렇게 생겨난 거였다.
이 사소한 일을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 원인을 알게 된 후로 멍 자국이 내 손등에서 영영 사라졌기 때문이다. 여전히 창문을 한 번에 열지 못하더라도 손등을 찬장에 부딪치는 일은 없어졌다. ‘내 힘으론 창문을 한 번에 열 수 없어. 설거지를 할 때는 주방에 습도가 높아서 창문이 더욱 잘 열리지 않지. 그러니 창틀에 가한 내 힘이 빗나가서 손등을 찬장에 부딪칠 수 있어.’ 이렇게 깨닫고 나자 창문을 열 때마다 조심하게 됐다.
안다는 건 이런 거다. 무언가를 알고 나면 절대로 생각이 예전과 똑같이 흘러가지 않는다. 자신의 부정적인 행동에 불편함을 느끼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떻게든 달라지기 마련이다.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주제가 주제이다 보니, 또한 저자가 살아온 과정이 험난하다 보니 아무래도 쉽게 읽을 수 없다. 마음의 준비가 조금 필요하다. 또한 아무래도 환자(청소년 상담사이기도 하지만) 개인의 경험에 집중하다 보니 특히 젊은 여성이 섭식장애를 앓을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문화적 원인 및 영향을 고찰하고 비판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 물론 개인의 환경(대체로 가족 또는 보호자와의 관계)이 큰 영향을 끼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문화적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섭식장애 환자들을 만들어 내는 이 사회에 대한 비판과 통찰이 더 많이 담겨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 많은 학자들과 상담사들이 논문도 쓰고 대중적인 책도 펴냈기에 참고할 만한 자료가 부족했을 리는 없는데 말이다. 섭식장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근원에 있는 여성혐오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가 있나? 그래도 고통만큼이나 생각해 볼 만한 거리가 있는 책이니 이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 권할 만하다. 같은 주제의 영화 <To the Bone(투 더 본)>(2017)도 볼만하다.
'책을 읽고 나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감상/책 추천] 이빈, <자두맛 캔디> (3) | 2024.12.20 |
---|---|
[책 감상/책 추천] 박서련, <마르타의 일> (34) | 2024.12.13 |
[책 감상/책 추천] 황유미, <독립어른 연습> (43) | 2024.12.11 |
[책 감상/책 추천] 김해인, <펀치: 어떤 만화 편집자 이야기> (43) | 2024.12.09 |
[책 감상/책 추천] 곽예인, <나는 거기 없음> (47) | 2024.12.04 |
[월말 결산] 2024년 11월에 읽은 책 (50) | 2024.11.29 |
[책 감상/책 추천] e.e. 커밍스, <E. E. 커밍스 시 선집> (38) | 2024.11.25 |
[책 감상/책 추천] 백설희, 홍수민, <마법 소녀는 왜 세상을 구하지 못했을까?> (37) | 2024.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