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원작 소설' 태그의 글 목록 :: 먹고, 자고, 읽고 '영화 원작 소설' 태그의 글 목록 :: 먹고, 자고, 읽고

[책 감상/책 추천] 베키 앨버탤리, <첫사랑은 블루>

 

 

우리의 주인공 사이먼 스파이어는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절친 닉과 레아도 있고, 남매(앨리스 누나와 여동생 노라)끼리 사이도 좋다.

그에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게이라는 것 정도? 아직 아무에게도 커밍아웃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학교 텀블러 사이트에서 자신이 게이라고 밝힌 한 익명의 남학생이 쓴 글을 읽고 그에게 동질감을 느껴 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한다.

상대는 '블루'라는 닉네임을 쓰는데, 사이먼과 그는 잘 통한다.

사이먼은 '블루'에게 학교 얘기, 친구 얘기, 공연(사이먼은 연극부원이다) 얘기 등등을 하면서 점점 더 그와 친해지고, 그는 얼굴도, 본명도 모르는 이 소년에게 점점 빠져 버리고 마는데...

 

라는 것이 간단한 줄거리이다. 학교의 누가 '블루'인지 찾아내는 게 큰 줄거리랄까.

주인공이 게이 소년이다 보니까 당연히 그의 성 정체성을 이용해 협박을 하는 악역도 있다.

마틴 애디슨이라는 동급생이 사이먼의 비밀 이메일(블루에게 보낸 이메일)을 우연히 보게 되고, 그래서 이 비밀이 널리 퍼지는 게 싫으면 애비(최근에 사이먼과 친해진 예쁜 흑인 여자애)와 자기가 잘되게 도와 달라고 협박한다.

(스포일러 아니냐고? 아니다. 소설 시작하자마자 사이먼이 마틴에게 이메일을 들키기 때문이다. 글자 그대로 책 펴자마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책은 아시는 분들은 아실 영화, <러브, 사이먼(Love, Simon, 2018)>의 원작 소설이다. 난 영화는 아직 안 봤는데,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고 싶어서 그랬다.

이 소설의 원제는 <사이먼 대 호모 사피엔스 어젠다(Simon vs. the Homo Sapiens Agenda)>인데, 미국에서 첫 출간됐을 때 많은 공감과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저자 베키 앨버탤리가 임상 심리학자로서 많은 청소년들을 상담해 보았기에 생생한 게이 소년의 목소리를 잘 담아서 글을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아, 원제가 무슨 뜻이냐면, 중반에 사이먼과 블루가 '왜 게이들만 커밍아웃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이성애자들도 자신이 이성애자라는 걸 밝히는 어색하고 괴로운 시간을 겪어 봐야 해'라는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에서 언급되는 표현이다.

게이들뿐 아니라 이성애자들도 커밍아웃을 겪어 봐야 한다는 주장을 블루는 '호모섹슈얼 어젠다'라고 부르는데, 사이먼이 '인간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라는 의미에서 '호모 사피엔스 어젠다'라고 정정해 준다.

(영화 버전에서도 '이성애자들도 커밍아웃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력이 유머스럽게 잘 표현된 것을 트레일러에서 보았다. 보신 분들은 무슨 말인지 아실 듯. "저 남자가 좋아요"라고 흑인 소녀가 커밍아웃을 하니 그 어머니가 "아이고 세상에, 예수님, 절 도와주세요!"라며 신음하는 장면ㅋㅋㅋ)

 

사이먼의 1인칭 시점 서술과 사이먼과 블루가 주고받은 이메일을 몇 통 보여 주는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막 엄청 빵빵 터지는 말투나 장면은 없지만 과연 블루가 누굴까 추측하는 재미가 있어서 재밌게 잘 읽었다.

십 대 게이 소년은 되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십 대 첫사랑의 풋풋한 귀여움이 느껴져서 좋았다. 청소년 학급 문고 같은 데에 추천해도 괜찮을 것 같다.

[책 감상/책 추천] 이언 매큐언, <칠드런 액트>

 

 

<속죄(Atonement)>, <체실 비치에서(On Chesil Beach)> 등으로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이언 매큐언(Ian McEwan)의 소설이다.

이 책 역시 엠마 톰슨(Emma Thompson)과 스탠리 투치(Stanley Tucci)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어 곧 개봉한다고 한다.

이 영화가 엠마 톰슨 연기 인생 중 최고라는 말을 들은 데다가 원작 소설의 줄거리가 흥미로워서 곧바로 찾아서 읽게 되었다.

이 소설도 영화용 각본 작업을 이언 매큐언 본인이 했던데, 저번 <체실 비치에서>처럼 이상하게 손대지 않았기를 바란다.

(이에 대해서는 영화 포스트를 참고하시라.

2018/08/22 - [영화를 보고 나서] - [영화 감상/영화 추천] On Chesil Beach(체실 비치에서, 2017) - 섹스 없는 사랑, 가능할까?)

 

본격적으로 책 이야기를 해 보자. 책 제목인 <칠드런 액트(The Children Act)>는, "아동의 양육과 관련한 사안을 판결할 때 (...) 법정은 아동의 복지를 무엇보다 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아동법' 조항에서 따온 것이다.

주인공인 피오나 메이는 59세의 고등법원 판사이다. 그녀는 한평생 사법부에 헌신했고 그 덕분에 현재의 자리에 올랐다.

본문 속 표현처럼 "동료 판사들 사이에서도 피오나 메이는 찬탄의 대상"이었고, 일이 바쁘긴 하지만 워커홀릭 기질이 있는 그녀는 기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 일을 해 왔다.

그러나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35년간 같이해 온 남편 잭에게 갑작스러운 이야기를 듣는다. 어떤 젊은 여자를 알게 되었는데, 그녀와 한번 만나 보고 싶다는 것.

다시 말해, 35년간 바람도 피우지 않고 같이 살아 왔으니 이제 한 번쯤은 살짝 눈을 돌려 봐도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피오나는 남편의 제안에 충격을 받고, 일에 더욱더 파묻혀 이 무너져내리는 결혼 생활을 무시하려, 최소한 잠시나마 잊어버리려 애쓴다.

판결문을 고쳐 쓰고, 나중에 인용될 수 있는 완벽한 정의를 내리려 노력한다.

그녀는 자신이 맡은 한 유대인 부부의 사건에서 아동의 안녕을 최우선으로 하는 판결을 내린다.

그 재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이번에도 역시나 종교와 관련된 사건을 맡게 된다. 여호와의 증인인 부모가 자녀의 치료 과정에서 필요한 수혈을 거부했고, 이에 병원 측에서 수혈을 허락해 달라고 급히 재판을 요청한 것이다.

재판일, 그녀는 양측 의견을 듣고 나서는 '본인(환자인 17세 소년 아담 헨리)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본 후 결정을 내리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 만남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지 못한 채 병원으로 향하는데...

 

남편의 '한 번만 다른 여자를 만나게 해 달라'는 요청에 피오나와 남편의 관계가 틀어지고(사실 두 사람이 관계를 가진 지도 오래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열린 관계(open relationship)'를 갖자고 제안해 올 줄은 몰랐던 것이 사실이다), 그 충격으로 더욱더 일에 매진하게 된 피오나가 '과연 재판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회의를 가지게 되는 과정이 무척 안타까우면서 아주 공감이 된다.

아동의 안녕을 최우선으로 하는 판결을 내리는 것이 그녀의 일이지만, 샴 쌍둥이 중 한쪽을 살리기 위해 다른 한쪽을 죽이는 것이 정말 공정한 일인가, 이것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법을 전공하지 않은 나 같은 사람도 피오나가 느끼는 곤혹감, 회의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애초에 이런 문제에는 딱 떨어지는 답이 없어서가 아닐까.

 

한동안 피오나는 그 재판의 후유증으로 망연자실한 상태에서 별 관심도 감정도 없이 업무를 해나가며 아무에게도 속을 털어놓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의 몸에 지나치게 예민해졌고, 자신의 몸이나 잭의 몸을 더는 역겨움 없이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이런 일을 어떻게 이야기한단 말인가? 하고많은 재판 중 이 한 건이, 그 슬픔이, 오장육부를 다루는 세세한 정보들과 요란한 대중의 관심이, 법관으로 이 정도 경력에 이른 사람을 이렇게 내밀하게 뒤흔들었다고 어떻게 그에게 이야기한단 말인가. 그건 전혀 그럴듯해 보이지 않았다. 피오나의 일부는 한동안 불쌍한 매슈와 함께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 아이를 이 세상에서 처치해버린 사람, 서른네 장의 우아한 글로 설파하여 그 아이의 존재를 지워버린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머리가 붓고 심장이 수축하지 않는 매슈는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음을 논외로 하더라도. 피오나는 비이성적인 면에서 대주교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내면의 이런 위축을 인과응보라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그 감정이 사라지고 나서도 상흔은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칠 주 하루가 지난 다음에도.

피오나는 차라리 몸이 없다면, 육체의 구속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떠돌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피오나가 극도의 정신적 피로감을 느끼는 부분을 읽다 보니, 당사자들끼리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남에게 '해결해 주시오' 하고 내미는 것 자체가 이기적인 행위로도 보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결정을 대신 떠맡은 사람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더라도 분명 둘을 다 만족시킬 수 있는 해결법을 제시할 수는 없는데, 그걸 알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무거운 책임과 권한을 양도하는 것일까. 아무리 지식과 이성을 최고로 갈고닦은, 무사공평한 판사라 하더라도 그는 신이 아니라 인간인데.

판사들은 최고의 권한 및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 그들조차도 무력감을 느낄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짠해졌다. 이전에는 판사들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이야기하고 싶은 포인트는 종교와 법이 엮일 때 판결의 어려움이다. 판사는 법의 측면에서 그 어떤 종교적 색채도 나타내어서는 안 된다.

소위 '사이비'라고 여겨지는 종교라고 하더라도 법이 예컨대 '이 사람은 사이비 종교를 믿으니까 아이를 맡아 키우기에 적당하지 않다'라는 식으로 종교에 대해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인이 법과 얽히는 경우는 생기게 마련이다. 피오나가 맡게 되는 사건들의 당사자처럼.

세속적인 것을 피하는 유대교인이 자신의 딸을 남녀를 분리해 교육시킬 뿐 아니라 유행에 따른 옷차림, 텔레비전, 인터넷 등을 금지하는 학교에 보내고 싶어 한다면 어떡할 것인가?

어머니의 뜻대로, 딸들이 열여섯 살이 넘어도 학교에 다니고, 아이들이 원한다면 대학에도 진학하며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의 주장대로, 딸들이 종교적 가르침에 따라 '영적인 삶을 조롱하고 대중문화가 소녀와 여자를 폄하하는 바깥세상'에 비해 '정체성이 분명하고 세대를 거듭하며 삶의 방식이 증명된' 환경에서 자라게 할 것인가?

여호와의 증인 사건은 또 어떤가. 종교의 가르침을 따라 수혈을 금지할 것인가, 아니면 환자를 살리기 위해 수혈을 허락할 것인가?

이렇게 쉬이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는 거의 철학의 영역이 아닌가 싶은데, 이걸 판사들은 현실에서 마주해야 한다니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이언 매큐언은 이 책을 쓰기 전, 법조계를 조사하기 위해 법조인들과 교류하며 많은 분량의 판결문을 읽었다고 한다.

그는 <체실 비치에서>와 <암스테르담(Amsterdam)>에서 주인공을 각각 현악 사중주단 리더와 교향곡 작곡가로 그리기도 했는데, 이번 소설에도 피오나가 말러(Mahler)를 연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에서도 아마 클래식 곡들이 여러 곡 흘러나오지 않을까 싶다. 영화가 조만간 개봉한다고 하니 보고 나서 다시 영화 감상을 또 쓰겠지만 일단은 이 원작 소설도 좋았다.

법적 또는 철학적인 고민을 해 본 적이 별로 없는데 이 책 덕분에 조금이나마 맛을 보게 되었다.

[책 감상/책 추천] 제니 한,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한국계 미국인 소녀 라라 진 커비는 아버지와 언니 마고, 동생 키티와 함께 살고 있다.

마고 언니의 남자 친구인 조시 오빠는 원래 라라 진과도 친구였고, 라라 진은 남몰래 그를 좋아했다.

그러나 마고 언니와 조시 오빠가 사귀기 시작하자 자신의 슬픔은 감추고 둘을 축하해 줬다.

라라 진은 조시 오빠를 향한 마음을 담은 편지를 쓰고, 다른 네 명의 남자애들에게 쓴 편지들과 마찬가지로 몰래 숨겨 둔다.

그러다가 새 학기가 시작하자 마고 언니는 스코틀랜드에 있는 대학을 가기 위해 집을 떠난다.

착하고 똑똑하고 야무진 언니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노력하던 라라 진.

어느 날 학교에 갔더니 옛날엔 친구였고 또 자기가 좋아하기도 했던 피터 카진스키가 자기가 쓴 연애편지를 받았단다.

차라리 기절하고 싶다! 어찌어찌 모면하고 집에 왔는데 그 연애편지들을 받은 게 피터가 아님을 알게 된다. 조시 오빠도 편지를 받은 것이다!

라라 진은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넷플릭스(Netflix)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To All the Boys I've Loved Before, 2018)>의 원작 소설이다.

한국계 미국인인 제니 한 작가가 이 소설을 출간하자마자 많은 러브콜을 받았는데, 여주인공을 백인으로 바꾸자는 조건이었다고 한다.

작가는 그 제안은 모두 거절하고, 결국 나중에 '라라 진은 한국계 미국인 그대로 갑시다'라고 제안한 넷플릭스와 계약을 맺었다.

영화에서는 라라 진네 가족의 한국스러움이 좀 덜 묘사되는데, 소설에서는 조금 더 잘 드러난다.

소설에서는 보쌈이라든지 한국식 요거트(아마 영화에 나온 것처럼 '요구르트'를 말하는 듯) 등 한국적 문화가 곳곳에 등장한다.

'한국에 계신 할머니에게 지금 추석이니까 안부 전화 드려라' 하는 부분도 나온다. 정말 한국의 문화를 아는 사람이 썼구나 싶어서 뿌듯하다.

왜냐하면 미디어 속 제대로 된 묘사(representation)는 중요하니까.

(미디어의 소수 인종 묘사에 대해서는 아래 포스트에서도 다소 길게 이야기한 적 있다:

2018/08/31 - [영화를 보고 나서] - [영화 감상/영화 추천] Crazy Rich Asians(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 2018) - 제인 오스틴풍의 화려한 동양식 로맨틱 코미디)

 

아주 디테일하게 스포일러를 하지는 않겠지만 이 정도는 밝히겠다.

영화랑 소설이 조금 다른데, 영화에 나온 이야기가 거진 다 소설에 뿌리를 두고 있기는 하다.

그리고 영화는 완전히 끝맺음이 된 작품이라는 느낌이라는 반면에(크레디트 올라갈 때 후속작과 이어지는 장면이 잠깐 나오긴 하지만), 소설은 '아, 이거 다음 편으로 이어지겠는데?'라는 느낌이다.

소설 읽으면서 '이거 한 20쪽 남았는데 어떻게 마무리를 하려고 그래?' 싶었는데, 음, 그래, 다음 편에서 하시려고요...

 

라라 진이라는 캐릭터의 사랑스러움은 솔직히 영화에서 배우의 외적 아름다움과 합쳐져서 더 잘 드러나는 거 같다.

소설 속 라라 진이 진상이라거나 못났다는 뜻은 절대 아닌데, 원래 '사랑스러움'이라는 개념은 추상적인 것인데 영화처럼 외적인, 구체적인 어떤 형상을 보여 주는 게 더 효과적으로 느낌이 잘 다가오는 거 같다.

글만 읽고서는, 어떤 비주얼적인 걸 봤을 때만큼 확 '사랑스럽다!' 하는 느낌을 받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나는 영화를 먼저 본 후에 책을 읽었기 때문에 이야기 전개며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다 안 상태이기 때문에 좀 더 쉽고 편하게 느껴지는 것도 원인 중 하나겠지.

이게 어떻게 될지 다 아니까 캐릭터며 스토리가 좀 빤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그렇지만 지루하지는 않다.

오히려 둘이 연애를 할 때 'ㅎㅎㅎ아이고 그러셨어요? 아이고 귀여워라, 좋을 때다~' 이런 식으로 보게 된다고 해야 하나.

 

라라 진이 언니와, 그리고 동생과 맺는 자매애가 '나도 저런 여자 형제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렇지만 자매가 있는 사람이 있으면 느낌이 다를 수도 있겠지.

아, 연애편지를 누가 왜 부쳤는지는 영화와 소설 버전의 설명이 다르다(둘 다 보신 분들은 무슨 말인지 아실 듯).

지금 생각해 보면 영화 쪽이 자매애를 부각시키는 장면을 조금 더 넣은 거 같다.

 

번역은 썩 괜찮다. 다만 교정 및 교열 상태가 심각할 정도로 나쁘다.

'바 쁜'이나 '피자먹는', '걱정마.'처럼 딱 봐도 말도 안 되게 틀린 것들이 버젓이 등장하며, '다음날'은 왜 그리 좋아하는지.

'다음날'이라는 말이 있긴 한데, 이는 '정하여지지 아니한 미래의 어떤 날'을 가리키는 말로, '다음날에 만나면 식사나 하죠.'처럼 추상적인 미래를 가리키는 것이다.

어떤 날의 바로 다음 날을 가리키는 경우에는 '다음 날'로 띄어 써야 한다. 즉, 앞에 나온 이야기의 배경이 일요일이었고 그다음인 월요일을 가리키는 거라면 '다음 날'로 써야 하는 게 맞는다.

또한 '-지 못하다'의 형태에서 '못하다'는 붙여서 쓰는데(예를 들어 '오지 못했다'처럼) 이것도 틀린다. 읽는 내내 틀린 맞춤법을 빨간색 하이라이트로(eBook으로 읽어서 하이라이트 하기도 쉽고 또 내 책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니까) 했는데 수십 개가 나왔다.

세어 보지는 않았는데 세면 백 개 정도 나올까 두려워서 못 세어 봤다.

어쨌거나 가장 쉬운 맞춤법도 틀리고 나중엔 사람 이름도 틀린다.  커비 가족 막내딸 '키티'의 본명을 앞에서는 '캐서린'이라고 (두 번이나) 하더니 뒤에서는 '캐더린'이란다.

캐서린이든 캐더린이든 하나만 하시죠...

이 정도로 교정 및 교열이 잘못된 책을 보느라 내 눈이 정말 수고했다는 기분이다.

 

어쨌거나 제니 한의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다음 책 제목은 <P.S. I Still Love You>, 마지막 3편은 <Always and Forever, Lara Jean>이다.

아직 2편과 3편은 번역되어 나오지 않았다. 후속작들이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는 이상 아마 안 나올 것 간은 느낌...

다른 책들도 번역되어 나오면 좋겠다. 끝.

[책 감상/책 추천] 다시 벨, <부탁 하나만 들어줘>

 

 

스테파니는 엄마 블로그를 운영하는 젊은 '맘'이다. 그녀의 아들 마일스는 같은 학교 니키와 친하다.

어느 날 그녀는 방과 후 마일스를 데리러 갔다가 니키의 어머니인 에밀리를 만난다.

비가 오는데 우산이 없어서 마일스가 차까지 뛰어가는 1분의 짧은 시간이라도 비를 맞으면 어떡하나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에밀리가 튼튼하고 깜찍하게 생긴 우산을 건네준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두 어머니들은 친구가 된다. 에밀리는 니키와 마일스가 노는 동안 스테파니와 여러 가지 '비밀' 이야기도 주고받으며 친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에밀리는 자기가 오늘 일이 있으니 부탁을 하나 들어 달라며, 자기 대신 니키를 학교에서 데려와 줄 수 있느냐 묻는다.

스테파니는 기꺼이 그렇게 한다. 그런데 당장 그날 저녁부터 그녀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

에밀리가 실종되었다 생각한 스테파니는 에밀리의 남편 숀에게도 연락하지만 그는 냉랭하고 이 일에 별로 신경 쓰지도 않는 것 같다.

일단 경찰에게 신고를 하고 난 후에도 스테파니는 고민하면서도 점차 숀에게 끌리는 걸 멈출 수 없고, 친구의 남편에게 감정을 품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는데...

 

얼마 전에 리뷰한 폴 페이그(Paul Feig) 감독의 영화 <A Simple Favor(심플 페이버, 2018)>의 원작 소설이다.

(영화 리뷰는 여기: 2018/09/17 - [영화를 보고 나서] - [영화 감상/영화 추천] A Simple Favor(어 심플 페이버, 2018) - 패셔너블한 미스터리, 그녀는 누구인가?)

영화와 비교하자면, 나는 거의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원작의 손을 들어 주겠다.

아래는 스포일러가 난무할 예정임을 알려드리니 스포일러를 피하시려면 바로 아래에 있는 포스터부터 맨 아래에 있는 원작 소설 겉표지가 나올 때까지 스크롤을 내리시면 된다.

 

<A Simple Favor(심플 페이버, 2018)> 포스터

 

영화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하면, 에밀리(영화에서는 블레이크 라이블리 분)가 이런 거대 사기극을 벌인 이유를 조금 다르게 제시한다는 점이다.

영화에서는 에밀리가 그냥 보험금을 받아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계획, 그리고 뭔가 짜릿한 일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에밀리로 하여금 자신의 '사고'를 꾸민 것처럼 나온다.

그렇지만 소설에서는 에밀리가 이 두 이유 외에도 자신의 아들 니키를 너무나 사랑해서, '이렇게 죽도록 일만 하다가는 돈도 많이 못 버는데 애가 자라는 것도 못 보고 늙어 죽겠다' 싶은 생각에 이 일을 저지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에밀리가 아들을 어찌나 끔찍하게 사랑하는지가 소설 전반에 언급되는데, 영화에서는 입도 건 에밀리가 아들을 되게 싫어하고 인생의 짐짝처럼 여기는 것처럼 그려져서 나도 소설을 읽으면서 놀랐다.

이렇게까지 니키를 사랑해서 니키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그런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에밀리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영화와 소설의 두 번째 차이점은 에밀리의 과거이다. 영화에서 에밀리는 한밤중에 쌍둥이 동생과 함께 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애초에 자신의 쌍둥이 동생이 자신과 DNA가 같다는 점을 이용해 그녀와 같이 수영하는 척하면서 그녀가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머리를 꾹 눌러 죽인다.

소설에서는, 쌍둥이 동생이 마약과 술에 중독되었다는 설정은 같지만, 방화를 저지른 화려한 전적은 없다. 에밀리가 그녀를 직접 죽이지도 않는다.

다만 그녀가 자살에 대해 이야기할 때 '네가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라는 식으로 말하고, 그녀가 약을 하고 취한 정신에 수영하러 가야겠다고 할 때 딱히 말리지 않는다.

에밀리가 잠깐 자고 일어나니 그 애는 이미 익사한 상태였다. 소설 속 에밀리는 손에 피를 묻힐 필요도 없었다.

 

세 번째 차이점은 상당히 크다. 영화 버전에서는 에밀리가 자신이 지금까지 저지른 짓을 실수로 다 불어 버리고, 숀과 에밀리를 죽이려고 한 장면이 스테파니(영화에서는 안나 켄드릭 분)의 '비밀 카메라'로 생중계되고, 에밀리는 결국 경찰에 붙잡혀 죗값을 치른다(에필로그에 에밀리가 교도소 생활에 잘 적응했다는 언급이 나온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조금 더 현실적이다. 보험사 직원 프래거가 진실을 캐고 다니자 에밀리는 스테파니를 끌어들여 그를 살해한다.

정확히는 그에게 피하 주사를 놓아 숨통을 끊은 뒤, 스테파니의 도움을 받아 그가 탄 차를 절벽 아래로 밀어 떨어뜨린다.

스테파니가 공범이 되면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불지 못할 테니까.

절벽에서 떨어져 불에 탄 차에서 에밀리의 결혼반지(에밀리가 시어머니에게서 훔친 것)가 나오자 경찰이 이를 수상히 여기고 에밀리에게 찾아오는데, 에밀리는 오히려 스테파니가 자기 전남편과 결혼하기로 했는데 전남편이 그 반지를 스테파니에게 주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실수를 오히려 스테파니에게 덤터기를 씌울 기회로 전환시킨 것이다.

경찰이 에밀리에게 스테파니의 연락처를 받아 가고, 에밀리는 이제 니키를 데리고 사라져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결말은 나름대로 재미있었고 스펙터클했으나 더욱 현실적인 것은 후자, 소설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스테파니처럼 남을 잘 믿고 누구하고든 친구가 되려고 전전긍긍하며, 자식을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는 '맘'은 남을 이용해 먹고, 정보를 철저히 단속하고, 이런 일에서 '비로소 살아 있다고' 느끼는 사람의 먹잇감이 되면 되었지, 절대 친구가 될 수는 없으며 단죄를 할 수도 없다.

물론, 위에서 말한 그런 일들을 '할 수 없다'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도 경찰이 에밀리 같은 소시오패스 같은 범죄자를 다 잡아서 감옥에 처넣으면 좋겠다. 하지만 '해야 한다'는 말이 곧 '(그런 일이) 늘 일어난다'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큰 세 가지 차이점으로 인해 영화와 소설 사이에 사소한 차이들도 야기된다.

예를 들어서 스테파니가 에밀리의 과거를 캐는 방법. 영화에서는 스테파니가 청소를 도와주는 도우미인 척 변장을 하고 에밀리의 옛날 집에 들어갔지만, 소설에서는 스테파니가 그냥 에밀리의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찾아가도 되겠느냐 묻고 허락을 받고 들어간다.

영화에서는 에밀리가 첫 등장할 때 세련된 검은 장우산을 쓰고 나타나지만, 소설에서는 에밀리가 스테파니에게 건네준 우산은 투명 바탕에 노란 오리가 그려진, 아주 귀여운 우산이다. 와, 갭 차이 쩔어.

또한 영화에서는 스테파니가 직접 에밀리의 직장을 찾아가 에밀리의 상사 데니스를 대면하고 거의 그와 싸울 뻔할 때까지 가는데, 소설에서는 그런 장면이 없다.

다만 소설에서는 에밀리가 직장에서 맡은 일이 '기밀 처리'(예를 들어 데니스가 실은 중독 문제로 재활원에 가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휴양지에서 화려하게 놀았다고 믿게 만드는 일)였다는 점이 잘 드러나서, '아, 원래 이렇게 정보를 숨기고 비밀을 만들어 내는 일을 잘했기에 이 '사기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영화에서도 그 점을 알려 줬다면 에밀리가 왜 그렇게 거짓말을 잘하는지, 어떻게 에밀리가 스테파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를 피해자로 점 찍어 놓고 자기 아들을 돌봐줄 보모 정도로 생각했는지를 보여 줄 수 있었을 텐데, 그 점이 다소 아쉽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스테파니가 자기가 배다른 남동생과 잤다는 비밀을 다소 초기에 밝혀 버리지만, 소설에서는 첫 부분이 스테파니만의 시점으로 쭉 진행되기에 스테파니가 가진 비밀의 긴장감이 조금 더 잘 유지되는 편이다.

 

 

(이제부터는 스포일러가 없으니 마음 놓고 읽으시라!)

영화를 보고 나서 '왜 에밀리가 이렇게 행동했는지 잘 모르겠다' 또는 '스토리텔링이 조금 아쉽다' 하는 분들은 원작 소설을 읽어 보시라.

분명 둘은 다른 부분이 있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소설을 읽으면 '아!' 하고 조금 더 이해가 될 것이다.

참고로 파트 1은 스테파니의 시점, 파트 2는 에밀리의 시점, 파트 3는 숀의 시점 위주로 진행된다. 각각 다른 인물의 이야기를 듣고 사건을 재구성해 보시라.

아, 번역은 그냥저냥 나쁘지 않지만, 묘하게도 등장인물들이 전부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하는 '반존대'를 쓴다.

예를 들어 '아뇨, 말하기 싫어요. 그냥 생각하면 슬퍼. 모두가 불쌍해요. 특히 니키가." 이런 식이다.

부부(에밀리-숀) 사이도 그렇고 친구(에밀리-스테파니) 사이도 그렇고, 심지어 스테파니랑 숀도 다 이런 식으로 말한다.

이건 번역가의 말투인 거 같은데, 이 정도는 편집자나 교정 및 교열자가 조금 더 신경을 써서 적당히 바꿔 줘야 하지 않았나 싶다.

한두 명이면 몰라도 전부 다 같은 말투로 말한다는 건, 그건 그냥 글 쓰는 사람이 게으르다는 뜻이니까.

어쨌거나 그래도 영화를 보셨다면 원작 소설도 한번 읽어 보시라.

[책 감상/책 추천] 길리언 플린, <나를 찾아줘>

 

 

닉 던(Nick Dunne)과 에이미 엘리엇(Amy Elliott)은 결혼한 지 5년 된 부부이다.

그들은 원래 뉴욕에서 만나 결혼했으나 닉의 어머니가 병에 걸리고 난 후 미주리 주로 이사 왔다.

그러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닉은 일자리도 잃게 된다.

에이미는 여태껏 부모님이 자신을 모델로 한 어린이용 도서 <어메이징 에이미>로 번 돈을 저금한 그녀 명의의 신탁 기금에 의존해 살아 왔지만, 어느 날 부모님은 자신들도 생활이 어려우니 돈을 빌릴 수 있겠느냐 묻는다.

그래서 돈을 빌려 드리고 나니 생활은 더욱 어려워진다. 닉은 에이미의 남은 돈으로 작은 바를 하나 사서 쌍둥이 여동생 마고(Margo Dunne)와 같이 운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제일 견디기 힘든 것은 날이 갈수록 부부 간의 사랑이 식은 듯하다는 사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결혼 5주년 기념일에 에이미가 실종되는데, 남겨진 모든 정황은 범인이 남편 닉임을 암시한다.

과연 닉은 정말로 아내를 해친 것일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범인은 누구이고 닉은 어떻게 이 누명에서 벗어날 것인가?

 

데이빗 핀처(David Fincher) 감독의 <나를 찾아줘(Gone Girl)> 원작 소설이다.

2014년경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히트해서 제목과 대략의 스토리는 알고 있었는데 4년이 지난 후에야 실제로 보게 됐다.

나는 일단 책부터 먼저 읽고 그다음에 영화를 봤다. 내 평은 (이럴 때의 내 평가가 거의 늘 그렇듯) 책이 영화보다 훨씬 좋다.

물론, 영화도 잘 만들어졌고 이야기 진행의 속도로만 보면 책보다 빨라서 아주 스릴 있다.

그렇지만 책은 닉의 시점과 에이미의 시점을 번갈아 보여 주기 때문에, 영화에 비해 독자들이 에이미의 입장에 조금 더 공감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영화는 책보다 좀 더 닉의 편으로 기울어져서, 관객이 닉에 더 공감하고 그를 동정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책을 읽고 나면 '이 부부는 참 서로 환장의 커플이네' 싶을 정도로 누가 더 잘못했다고 따지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상황이 괴로울지라도 그런 거짓이 피부처럼 자신의 일부분이 되어서 벗어날 수 없다는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그리고 책에서는 토미 오하라나 힐러리 핸디를 만나 에이미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를, 어쩌다가 에이미가 그렇게 사이코패스 같아졌는지를 깨닫게 되는 과정이 나온다.

이것 때문에 영화보다 사건 진행 속도는 느려지게 되지만 에이미가 어떤 인물인지, 에이미의 심리 상태가 어떤지를 보여 주는 데 중요한 부분이라서 나는 오히려 영화에서 이걸 쳐낸 게 아쉽다.

에이미는 어릴 적부터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고,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 사람을 덫에 걸리게 만들어 복수하는데, 이것이 나날이 발전해 결국 '실종'에 이르게 된 것이다.

작가 길리언 플린 본인이 영화 각본을 썼던데, 책에 나오는 데시 콜링스의 어머니를 영화에선 아예 삭제한 것이나, '막장 부부' 전문 변호사 태너 볼트의 부인이 아니라 태너 볼트가 직접 닉에게 미디어에서 그럴듯한, '회개하는 남편' 연기를 코칭해 주는 것으로 설정하는 정도는 나쁘지 않다. 이 정도 각색이야 극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영화에서는 좀 더 닉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이는 것 같다. '어쩌다가 미친 여자에게 걸렸다'는 느낌?

하지만 닉도 어린 여대생이랑 바람을 피우지 않았는가. 마고에게조차 그 사실을 숨겼고. 아니, 내 생각에는 에이미가 이런 짓을 저지른 건 애초에 닉이 에이미에 대한 사랑이 식었던 게 가장 큰 '원인' 아닐까 한다.

에이미는 닉이 원하는 여자, '쿨한 여자'인 척했고, 닉도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노력하기를 그만뒀던 것이다.

에이미는 남편들을 이리저리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아내들을 비웃으며 자신은 절대 닉을 '춤추는 원숭이'로 만들지 않겠다고 닉에게 말했다. 그러면 닉도 적당히 에이미, 그러니까 아내에게 맞춰 줘야 했는데(왜냐하면 에이미는 그런 말을 함으로써 자기는 절대로 닉에게 불평할 수 없는 처지가 된 셈이니까, 닉이 눈치를 잘 봐서 불평할 일이 없게 행동해야 했다는 거다), 닉은 그걸 안 한 거다.

말이 너무 꼬였나? 다시 한 번 설명해 보겠다.

예를 들어, 결혼 기념일에 에이미가 여자 친구들이랑 놀고 있는데 다른 여자들은 다 자기 남편이 퇴근 후 자기를 데리러 오게 한다.

그런데 닉은 자기 회사 동료들이 해고당했고, 자기도 언제 해고당할지 모르니 그 동료들을 위로해야 한다며 그들과 술을 마시러 가서 에이미를 데리러 오지 않는다.

아주 늦게 집에 들어와서 에이미가 '오늘 이런 일이 있었다' 하면 자기도 힘들다며 짜증을 낼 뿐이다.

상황이 이해가 되시는지? 애초에 에이미는 '쿨한 여자', '바가지 안 긁는 아내'가 되려고 노력했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이 이러이렇게 해 줬으면 좋겠어' 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권리를 아예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다.

닉은 에이미가 '쿨한 여자'라는 생각에 '말하지 않아도 알아차릴' 생각은 꿈에도 안 한 거고. 한 쪽은 말을 안 하고 다른 한 쪽은 배려를 안 한 셈. 누가 더 잘못했다고 따지기 어려운 문제다.

 

내가 결혼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닉과 에이미가 어떤 문제를 겪는지는 알 것 같다.

나는 많은 부부/연인 관계의 문제가 솔직하게 원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애인은 독심술사가 아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야 상대방이 그걸 받아들이든 말든 할 것 아닌가.

입을 닫고서 남이 먼저 알아차려 주기를 바라고, 남이 몰라 주면 꽁해 있으며 예민하게 구는 것, 나는 이게 관계를 시들게 하고 자신을 괴롭게 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면서 행복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내가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까 봐, 내가 상대방에 부담을 줄까 봐, 내가 너무 드세다고 생각할까 봐 등등, 우리가 진심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들은 많다.

특히 여자들은 이런 걱정을 많이 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줄인다.

난 특히 에이미가 일기장에 쓴, '쿨한 여자' 얘기가 와 닿았다.

"그날 밤, 브루클린의 파티에서 나는 당시 유행하던 여자, 닉이 원하는 여자를 연기하고 있었다. '쿨한 여자'. 남자들은 언제나 이것을 최고의 찬사처럼 말한다. (...) 무엇보다 쿨한 여자는 섹시해야 하니까. 섹시하고 이해심 많은 여자. 쿨한 여자는 절대로 화를 내지 않는다. 화가 나도 사랑스럽게 웃으며 자신의 남자다 뭐든 멋대로 하게 내버려 둔다. 마음대로 해, 날 무시해도 괜찮아, 나는 쿨한 여자니까.

남자들은 정말로 이런 여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들은 속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수없니 많은 여자들이 기꺼이 그런 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쿨한 여자'에 분노했다. 나는 남자들 ― 친구들, 동료들, 낯선 사람들 ― 이 그 끔찍하고 가식적인 여자들에게 열광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그들을 앉혀 놓고 차분하게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만나고 있는 건 여자가 아니다, 당신이 만나고 있는 건 그런 여자등이 실제로 존재하며, 자기한테 키스해 줄 거라고 믿고 싶어 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찌질한 남자들이 각본을 쓴 영화를 지나치게 많이 본 여자다. (...)"


이걸 영화 비평가 네이선 라빈(Nathan Rabin)이 '매닉 픽시 드림 걸(Manic Pixie Dream Girl)'이라고 이름 붙인 캐릭터 유형과 비교해 보라.

이는 각본가들이 생각에만 몰두하는 젊은 남자 캐릭터에게 삶을 있는 그대로 껴안으라고 가르치기 위해 끼워 넣는, 오직 그 남자 주인공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여자 등장인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주이 드샤넬(Zooey Deschanel)이 자주 맡는 캐릭터, 특히 영화 <Yes Man(예스맨, 2008)>에서 연기한 앨리슨(Allison) 같은 캐릭터처럼.

아니면 <Harold and Maude(해롤드와 모드, 1971)>의 모드라거나. 죽음에 천착하는 소년을 위해 자신이 원할 때 죽음을 선택하는 할머니 말이다.

여자들은 자주 이런 캐릭터 유형에 자신을 욱여넣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미디어에서 그려내는 이런 유형의 인물을 너무나 자주 보고, 그것이 실존하는 유형의 인간이라 믿으며, 또 그래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영화 또는 TV 드라마 각본가들에 의해 디자인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지도 못하고 말이다.

'유니콘(unicorn)'이나 '용'이라는 상상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을 자주 사용하다 보면 마치 그것이 실제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지 않는가. 같은 현상이다.

나는 여자니까, 혹은 남자니까, 말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말을 해야 내가 뭘 원하는지 상대방이 알 수 있고, 그래야 맞춰 줄 수 있다. 좋은 인간 관계는 서로 솔직한 관계다.

 

약간 연애 심리학적인 얘기가 됐는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행복하게 유지되는 인간 관계의 비결은 진심을 솔직하게 전하는 방법뿐이라는 점이다.

에이미와 닉이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면 이런 무서운 스릴러 극은 없었겠지. 최악의 경우라도 그냥 원만하게 합의 이혼 하는 수준에 그쳤을 것이다.

에이미가 한 짓이 100% 이해가 된다거나 합당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영화가 에이미의 입장을 조금 더 보여 줬으면 닉과 에이미 둘 다 이 사건에 책임이 있고, 둘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더 잘 드러났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책을 읽고서 작가가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영화는 그런 면에서 조금 전달이 잘되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영화를 보고 닉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면, 또는 (약간 사이코패스 기질이 있는) 여자에게 한이 맺히면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알고 싶다면 이 소설을 추천한다.

[책 감상/책 추천] 웬들린 밴 드라닌, <플립> - 소녀와 소년, 첫사랑, 자존감, 동화 같은 복수?

 

 

열세 살 브라이스의 소원은 앞집 소녀 줄리아나가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그가 이사 온 날부터 그의 파란 눈에 반해서 자그마치 6년을 그를 쫓아다녔다.

물론 브라이스도 그냥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다. 반에서 제일 예쁜 셸리에게 데이트를 신청해 자신은 줄리에게 관심이 없음을 보이려고 해 보았으나 이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줄리는 셸리와 싸웠고, 이제 브라이스는 혹을 하나 떼어내려다가 하나만 더 붙인 셈이 되었다.

중학생이 되었던 어떤 날, 줄리는 언덕에 자리 잡은 플라타너스 나무를 사람들이 잘라 버리지 못하도록 맨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에게도 나무 위로 올라오라고 했지만, 그녀처럼 열성적으로 나무를 지키려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줄리의 아버지가 호출되어 줄리를 어르고 달래어 내려오게 한 뒤에야 나무를 베어 낼 수 있었다.

나무를 지키려던 줄리의 노력은 동네 신문 기사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도통 말이 없으신 브라이스의 할아버지도 신문에서 그 기사를 읽고는 브라이스에게 줄리는 어떤 아이냐고 물으신다.

브라이스가 보기에 줄리는 그냥 귀찮은 여자애, 종잡을 수 여자애일 뿐인데.

그렇지만 왜 나무가 베인 후 그 애가 학교에 나오지 않은 게 신경이 쓰이고, 그 애가 나온 신문 기사를 간직하고 싶은 것일까? 이 이상한 느낌은 도대체 뭘까?

 

롭 라이너(Rob Reiner) 감독의 영화 <Flipped(플립, 2010)>의 원작 소설이다.

난 이 영화를 1, 2년 전에 본 걸로 기억한다. 그땐 그냥 소년과 소녀의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라고, 애들이 참 귀엽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이 원작 소설을 읽으니, 전과는 감회가 다르다. 으레 이런 글에 쓰는 표현으로 '감회가 색다르다'라고 하는 게 아니라, 진짜 감상이 예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내가 영화를 보고 1, 2년 사이에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해서 그런가,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다.

위에도 줄거리를 썼지만, 이건 브라이스가 줄리가 자신을 좋아하는 건 알지만 그녀의 가치, 매력은 알지 못하다가 모종의 사건을 통해 줄리네 집안에 대해 알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동안 줄리는 역시 모종의 사건을 통해 자신이 브라이스를 외모만 보고 좋아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사실 그는 (줄리 말마따나) '겁쟁이에 고자질쟁이'임을 알게 된다.

브라이스는 뒤늦게 줄리를 좋아하게 되지만, 자신을 좋아하던 그 애의 마음이 벌써 식어 버린 건 아닌지 조마조마하다.

결국 브라이스는 자신이 잘못한 여러 가지 일에 대해 사과하고, 줄리도 이제부터는 사람을 외모만이 아닌 내면도, 있는 그대로를 보겠다고 다짐한다.

익숙하게 들리지 않는가? 우리 모두 한 번쯤 누군가를 짝사랑하고, '아, 저 사람도 나처럼 이렇게 사랑에 마음 아파 했으면!' 하고 바란 적이 있을 것이다.

최고의 복수 아닌가, 나는 그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데 그는 나와 사랑에 빠져서 나에게 못되게 군(나를 사랑하지 않는 상태에서 한 일은 날 도와준 일이라고 해도 내 마음을 받아주지는 않았으므로 결국 못되게 군 것이나 마찬가지다) 걸 후회하게 된다면!

이건 그런 인지상정을, 어린아이의 시점에서 풀어 낸 것 같다.

물론 극 중 줄리가 일부러 브라이스에게 그런 마음을 먹는 건 아니고, 실제로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그런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냥 어쩌다 보니, 둘의 상황이 '역전'될 뿐이다(이것과 책/영화의 제목에 대해 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데, 이따 하겠다).

 

하지만 살면서 어디 그런 일이 흔하던가? 내가 간이며 쓸개며 다 빼 줄 것처럼 잘해 줘도 나에게 쌀쌀하게 구는 사람은 계속 그냥 그렇게 나를 대한다(아니면 살짝 태도를 바꿔서 겉으로는 미소를, 속으로는 나를 더 이용해 먹을 생각만 할 뿐).

결국엔 내가 지쳐서 나가떨어지고, 그게 끝이다. '나의 가치를 몰라 주던 사람이 내가 떠나고 나니 안 될 것 같아서 나에게 애걸하며 돌아오라고 하더라' 이런 일은 없다는 뜻이다.

내가 너무 비관적인 거 아니냐고? 날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날 그렇게 '호구' 취급하지는 않는 사람도 있지 않겠느냐고?

맞는 말이다.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내 마음에 같은 감정으로 보답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날 '어장 관리'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름대로 돌려서라도 '네 마음을 받아 줄 수 없다'라고 표현을 하거나, 적당히 선을 긋겠지.

그럼 나는 울더라도 그 사람의 뜻을 존중해서 마음을 접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야기하는 이 책은 그런 얘기가 아니다.

브라이스는 줄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또 그녀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적절히 그녀를 단념시켜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브라이스는 줄리가 직접 키운 닭이 낳은 계란을 받아서 그걸 그냥 쓰레기통에 몰래 버린다. 2주간 매주.

'네 닭장이 더러우니 계란에도 살모넬라 균이 있을지 몰라 먹을 수 없다'라는 말을 줄리에게 못 해서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내 마음이 아프지 않게 적당히 거절할' 사람으로 볼 수 있겠는가?

(애초에 셸리를 끌어들어 줄리를 떼어내려 한 것도 비겁한 일이었음을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비관적인' 시나리오만 읊었던 것이다. 브라이스는 애초에 좋은 사람이 아니다.

줄리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저 얼빠여서 브라이스의 반반한 얼굴을 보자마자 반했다는 것밖에 없다.

 

그래서 이 소설은 줄리가 자신의 자존감을 찾아 나가는 내용으로 읽힌다.

줄리는 집이 가난해도, 데이비드 삼촌(아빠의 동생)이 지적 장애가 있어도 그걸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

앞뜰을 가꿀 경제적 여유가 없는 아빠를 대신해 브라이스네 할아버지와 같이 앞뜰의 잔가지를 정리하고 잔디를 심는다.

줄리는 생기가 넘치고, 똑똑하며, 모든 일에 열심인 좋은 아이다. 브라이스 같은 덜떨어진 모질이에게는 과분한 애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나는 브라이스가 여성 혐오자, 또는 최소한 공감 능력 없는 애처럼 보이더라.

브라이스의 누나 리네타가 고스(goth) 스타일로 차려입고 화장한 걸 '너구리 같다'고 표현한 거야, 뭐 원래 남매는 서로 '예쁘다'라거나 '잘생겼다'라고 생각 안 하는 관계니까(그게 정상이지) 넘어갈 수 있다.

대신 브라이스의 엄마 팻시가 브라이스의 할아버지 쳇을 통해 줄리의 삼촌이 지적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을 보자.

이는 유전적인 문제가 아니고, 줄리네 삼촌이 태어날 때 탯줄이 목을 졸라 후천적으로 생긴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팻시는 감정적으로 격해져서 브라이스의 아버지 릭과 싸운다.

엄빠가 싸울 때 할아버지는 브라이스에게 "네 엄마가 왜 저리 예민하게 구는지 아느냐?" 하고 묻는다.

"그…… 글쎄요." 나는 건성으로  웃으며 말했다.

"여자라서요?"

알고 보니 브라이스도 태어날 때 목에 탯줄이 감겼던 것이다. 다행히 목을 조를 정도는 아니어서 괜찮았지만.

자신의 아들이 줄리네 삼촌과 비슷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기에 팻시는 지적 장애가 유전일 거네 어쩌네 하는 남편 릭에게 유달리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다.

그런데 브라이스 본인은 자기도 그렇게 될 수 있었는데 아무 생각 없이 엄마가 여자라 히스테리를 부리는 건 줄 알고 있었다.

이 장면에서 진짜 브라이스에게 뺨을 한번 갈겨 주고 싶었다. 모르겠으면 그냥 '모르겠는데요.' 해도 될 것을 가지고, 뭐? '여자라서요?'

아주 같잖다, 진짜. 어린 게 벌써부터 어머니를 비롯한 여자 보기를 우습게 알지.

나는 솔직히 작가가 의식적으로 브라이스를 여성 혐오자로 설정한 건 아니지만, 그 나이 또래의 남자애들을 있는 그대로 잘 묘사하다 보니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본다.

책 후반이 되면 '바구니 소년'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걸 설명하는 브라이스의 태도도 아주 가관이다.

바구니 소년이란 일종의 '노예팅'으로, 스무 명의 소년이 점심거리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강당에 오르고 이 소년과 점심을 먹을 기회는 경매에 부쳐진다.

여학생들이(아니면 게이 남학생들도? 책 내에는 이에 관한 언급은 없지만) 내는 이 돈은 학교 후원금으로, 학교 시설을 개선하는 데 쓰인다.

브라이스는 바구니 소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여자애들은 바구니를 보고 값을 부른 것 같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슨 고기가 좋은지 골라 먹는 정육점이나 마찬가지였다.

와, 정말? 좋겠다, 너는 바구니 소년 행사 때만 '정육점 고기' 취급을 받으면 되잖아. 여자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생 그런 취급을 받고 성적으로 대상화된단다.

브라이스가 아직 어려서 왜 이런 행사를 싫어하는지 유창하게 설명하진 못하지만, 아마 우리가 마이크를 들이대고 이유를 묻는다면, '쪽팔리니까요.'라고 대답할 게 틀림없다.

뭐가 쪽팔리냐고? 남자애가 여자애들처럼, 상황에 대한 통제력 없이 남의 처분을 기다려야만 하는 처지에 처하는 게 쪽팔리다는 거지.

남자가 '선택'해야 하는데 여기선 그렇지 못하고 선택'당하니까'.

내가 왜 브라이스를 여성 혐오자, 또는 최소한 공감 능력이 전무한 녀석이라고 했는지 이해가 되시는가?

'제니'라는, 키가 180cm가 넘는 여자애에 대한 묘사는 굳이 꺼낼 필요도 없다. 이것만 봐도 어린 게 벌써부터 여자를 우습게 본다는 점이 이렇게나 명확하니까.

 

많은 이들이 영화를 보고서 '아, 쟤네 왜 첫 뽀뽀 안 해!' 하고 안타까운 소리를 내뱉었을 것 같다.

사실 나도 그랬다. 그때 난 브라이스가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애인 줄 몰랐으니까.

그렇지만 이번에는 이 책을 읽으면서 데이빗 헨리 황(David Henry Hwang)의 희곡 <M. Butterfly(M. 버터플라이)> 중 한 구절이 떠올랐다.

"I have a vision. Of the Orient. That, deep within its almond eyes, there are still women. Women willing to sacrifice themselves for the love of a man. Even a man whose love is completely without worth.

(나는 이러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동양의 환상. 그 깊은 아몬드 모양 눈 안에는 여전히 그런 여자들이 있다고. 한 남자의 사랑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여자들이. 심지어 그 남자의 사랑이 전혀 가치 없는 것이라 해도.)

정말이지, 브라이스 같은 자의 사랑을 왜, 무엇하러 원하겠는가? 하지만 자존감이 없으면 그까짓 가치 없는 사랑도 구걸하게 된다.

물론 이건 인격이 완전히 성숙하지 못한 아이들의 이야기이므로, 정말 얘들을 여성 혐오자라든가 공감 능력이 없다고 부를 순 없다.

나중에 브라이스가 줄리에게 자기가 한 일에 대해 미안하다고 사과하기도 하고(그렇지만 여자를 우습게 본 것에 대해서는 아니다).

사람들은 '여자가 더 많이 좋아하면 안 된다'라든가, '여자가 고백을 먼저 하면 그 커플은 오래 못 간다'고들 하는데, 난 그런 말을 주워섬길 생각은 아니다.

난 남녀 사이의 골을 깊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 남자라면 이래야 한다, 여자라면 저래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상대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남에게 그따위 취급을 받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그렇게 상대를 신발 매트처럼 밟고 다니는 게 아니다. '헌신'한다고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도 아니다.

마지막에 줄리가 자신이 얼빠였음을 깨닫고 사람 안의 내면을 보기로, 이제는 브라이스와도 '진짜 대화'를 나누며 정말로 그를 알아가겠다고 다짐해서 나도 가슴을 쓸어내리고 책을 덮을 수 있었다.

줄리처럼 사랑스러운 소녀는 물론이요, 이 세상 그 누구도 정당하지 못한 대접을 받으면서도 그 사람의 사랑을 갈구해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래야 하는 사람은 없다.

브라이스에게 '푹 빠져' 있던(flipped) 줄리가 성장해 브라이스와 상황이 '뒤바뀌(flipped)'어 다행이다.

맘 같아서는 브라이스도 줄리에게 좀 더 목 매고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지 더 철저히 깨닫기를 바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 경험으로 인한 욕망이 투영된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브라이스나 줄리나 동등한 주체가 되어 대화를 나누고 좋은 친구가 되기를 바란다. 이 책이 끝난 후 뒷이야기를 내가 쓸 수 있다면 그렇게 쓸 것이다.

짝사랑해 본 사람들, 자존감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도 나를 사랑하기를, 그래서 나처럼 똑같이 아파 보기를' 하고 바란 적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책 감상/책 추천] 매트 헤이그, <시간을 멈추는 법>

 

주인공 톰 해저드는 1581년에 태어나 현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의 장수의 비밀은? 뱀파이어도 아니고 엘프도 아니고 애너제리아(Anageria)라는 병 때문이다. 조로증이 빨리 늙는 병이라면, 이건 아주 천천히 늙는 병이다.

그는 500년 가까이 살면서 딱 한 여자만을 사랑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과 행복하게 살았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늙지 않는 그의 정체를 괴이하게 여긴 사람들이 그의 어머니를 마녀로 여겨 죽이고 그 자신도 달아나야 했기에 아내와 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행복을 뒤로 하고 그들의 곁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아내는 결국 죽었고, 딸과는 멀리 헤어지게 되며 혼자 지내게 된 톰. 그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서로를 돕는 협회 '소사이어티'에 가입하고 그 우두머리인 헨드릭의 명령에 따라 다른 회원들을 구하고 8년마다 사는 곳과 자신의 '신분'을 바꾸며 살아왔다.

그는 과거의 기억으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지만 그 추억은 지울 수가 없다.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딸과의 재회뿐.

그러던 어느 날, '사랑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그에게 마음을 설레게 하는 낯선 여자가 나타나는데... 그는 과연 그리운 딸을 다시 만나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까?

 

띠지에 적힌,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 영화 제작 확정!"이라는 말만 듣고도 이 책을 사신(또는 사실) 분들이 많을 줄로 안다.

왜냐하면 나도 그랬으니까^^... <셜록(Sherlock)> 시즌 1부터 그의 팬이었던 나는 이 광고 문구와 간단한 시놉시스(약 500년쯤 산 남자)만으로도 이 책을 읽고 싶게 되었다.

그래서 바로 사서 읽었는데 내 솔직한 감상을 밝히자면, '이걸 영화로 만들려면 각색 작업을 꽤 잘해야 할 것 같다.'고 요약할 수 있겠다.

톰의 어머니가 마녀로 몰리는 시간대, 톰이 첫사랑이자 아내를 만난 시간대, 아내와 딸을 떠난 시간대, 그리고 그 이후부터 이 소설이 시작되는 현대 전까지 이곳저곳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 주는 시간대가 계속 왔다 갔다 한다.

글에서야 이렇게 저렇게 시간대와 장소를 바꾸는 게 어렵지 않고 조금 헷갈려도 앞으로 되돌아가 이해가 될 때까지 다시 읽으면 되니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잦은 플래시백은 관객을 혼란스럽게 하고 자칫하다간 이야기의 흐름도 끊어 먹기 쉽다.

그러니 이걸 영화로 만들려면 플래시백의 횟수를 줄이기 위해 아마 이 소설의 (시간상으로) 초반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베네딕트를 닮았으면서 아주 어려 보이지는 않는(애너제리아는 아주 천천히 늙으니까) 아역/청년 역 배우를 찾는 것도 중요할 듯싶다.

 

이야기의 (순서상) 재배치뿐 아니라 캐릭터 다듬는 일에도 손을 좀 봐야 할 것 같다.

특히 후반부의 결말은 사실 이 소설 내에 이렇다 할 악역이 없어서 그런지 좀 억지스러웠다. 스포일러가 될까 봐 자세히 말은 못하지만 끝까지 읽으시면 내 말에 공감하시리라 본다.

결말을 좀 더 그럴듯하게 바꿔야 할 필요도 있고, 무엇보다 마지막에 '나는 더 이상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내가 곧 미래니까.' 하는 식으로 주절주절 늘어 놓는 것도 영화에서는 지양했으면 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제일 싫어하는 게 그거다. 마치 모든 이야기에는 교훈이 있어야 한다는 듯, 그것도 주인공의 입을 빌려서 교훈을 늫어놓는 것.

솔직히 상식적으로 이 책 제목과 시놉시스, 아니 그래 조금 더 나아가서 소설 초반만 간단히 읽어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니 지금을 소중히 여기자.'풍의 이야기일 것이 감이 오지 않는가.

독자는 다 안다. 그러니까 굳이 그렇게 직접적인 언어로 말을 안 해도 된다. 이야기가 재미있으면 독자들은 다 이해한다.

오해는 마시라. 나는 이런 게 감상적이라고 싫어하는 게 아니고, '오글거린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독자들에게 교훈을 주려는 듯 가르치려 드는 게 싫은 거다. 무슨 우화나 동화도 아니고 꼭 끝에 그렇게 설교처럼 덧붙여야 하나 싶다.

미래나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를 사는 게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나? 다들 안다. 아는데 실천하기가 어려우니까 쩔쩔매는 것뿐이지.

그건 다들 아는데, 그런 메세지를 어떻게 하면 재미있고, 가능하다면 감동적이게 전할까 하는 게 문제인 거다.

이 소설에서 끝에 굳이 그런 교훈적인 말을 덧붙인 건, 말하자면 이력서나 자기소개서에 고아원에서 자원봉사를 한 경험을 잔뜩 쓰고서 끝에 '고아들이 너무 불쌍했고 가족의 소중함을 배웠다' 이렇게 쓰는 거랑 다름이 없다.

사이코패스가 아니고서야 도대체 누가 가족의 소중함을 누가 모르냔 말이다!

그거 말고 그 경험에서만 얻을 수 있는 아주 독특한 깨달음, 예를 들어 애가 울 때에는 섣불리 달래려하기보다 장난감으로 관심을 끄는 게 더 효과적이다, 뭐 이런 구체적인 걸 써야지.

이 소설에서도 너무나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말로 작품의 끝을 맺은 게 너무 아쉽다. 그 점이 '갑작스러운 악역(어떻게 보면 너무나 예상 가능하기도 했지만)'이나 '허무한 결말'보다 더 이 책의 가능성을 깎아 먹은 것 같다.

영화 각본을 만드는 각색 작업을 누가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 책의 가능성을 정말 최대한 살려서, 이 이야기에서 부족했던 점을 갈고닦아 잘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은 그냥 도서관이나 친구 등에게서 빌려서 읽고 나중에 영화가 개봉하면 타이인(Tie-in, 파생 상품)으로 영화 포스터(+베네딕트 얼굴)르 커버로 한 원서 문고판이 나올 테니 차라리 그걸 샀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때쯤 되면 아마 국내에서도 띠지에라도 베네딕트 얼굴을 조그맣게라도 인쇄해서 붙여 팔겠지. 차라리 그걸 사는 게 덕질 굿즈로는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다. 그래도 eBook으로 사서 읽은 거라 공간 차지는 안 하니 긍정적.

[책 감상/추천]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나는 본격 SF 소설을 읽으면 처음엔 부담스러움을 느낀다.

대개 SF에는 우주, 로켓, 로봇 등이 등장하는데 나는 이런 것들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작품 내에서 설명을 해 줘도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내가 모르는 분야(예를 들어 우주선 내부)의 장면을 묘사하면 그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릴 수 없기 때문에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서 곤혹스럽다.

뒤로 가면서 이야기 자체의 매력에 빠져 소설 읽는 게 익숙하고 즐거워지긴 해도, 내가 잘 모르고 솔직히 크게 관심도 없는 분야를 마주하면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그저 빨리 등장인물들과 줄거리를 파악하려고 애쓸 뿐이다.

그런데 테드 창의 단편을 모은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그런 당혹감이 들지 않았다.

보통 SF라고 하면 떠올리는 그런 것들(위에서 말한 우주, 로켓, 로봇 등)과는 조금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SF라고 할까, 나는 이 책이 다소 판타지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이해하기에 너무 어려웠던 몇 편('이해', '영으로 나누면', '인류 과학의 진화')을 제외하면 모두 다 재미있었고 기발함에 감탄했다.

단편들 중 인상 깊었던 몇 편을 소개하자면,

 

첫 번째, '네 인생의 이야기'. 영화 <컨택트(Arrival, 2016)>의 원작 소설이다. 사실 이거 때문에 읽기 시작한 건데 나는 아직 안 봤다.

어느 날 갑자기 지구에 도착한 외계인(발이 일곱 개라 '헵타포드'라고 부른다)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소집된 언어학자가 그들의 언어를 배우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미래에 태어날 자신의 딸에게 말을 거는 내러티브가 교차하는 소설이다.

화자가 '세월의 책'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하며(간단히 말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을, 그러나 젊은 나이에 죽게 될 딸에게 말을 거는 상황을 어떻게 하나로 엮어 낼 생각을 했는지가 놀랍다.

개인적으로는 작품 내에 딱히 이렇다 할 갈등 상황이 없는데 어떻게 영화화했는지가 궁금하다.

그리고 미래에 화자의 딸에게 일어날 일을 안다는 점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보고 싶다.

 

두 번째, '지옥은 신의 부재'. 천사(그리고 때때로 악마)가 이 인간계에 종종 강림하고 그 출현이 산사태나 지진처럼 집계된다는 설정의 이야기이다.

천사가 나타나면 거의 매번 피해자가 나오는데, 부상을 당하거나 죽고 천상의 광휘에 눈이 타 아예 애초에 눈이 없었던 사람처럼 사라지게 된다.

이런 피해에도 불구하고 천사를 보게 되면 기적이 일어나 병이 낫기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정보를 공유해 천사를 쫓아다니기도 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타고나기를 다리가 없는 한 남자이다. 그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던 아내가 죽은 후 그는 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를 향한 사랑이 너무 커서 어떻게든 그녀를 사후에라도 다시 만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천국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사그라져 버린 신에 대한 믿음을 되돌릴 수가 없다.

그런 그가 천사를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천사를 따라다니게 되는 이야기이다. 결말이 충격적이다.

책 말미에 수록된 창작 노트에서 저자는 이 단편이 <욥기>에서 불만스러웠던 점을 보충한 이야기라고 썼다.

 

세 번째는 맨 마지막에 실린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이다.

실제 다큐멘터리 인터뷰 내용을 글로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형식도 신선하고, '타인과 본인의 외모를 평가하는 미적 감각'을 차단하는 간단한 시술('칼리아그노시아', 줄여서 '칼리'라고 부른다)을 한 대학교 학생들에게 강제해야 하느냐에 대한 찬반 논의가 그 '인터뷰'의 내용이다. 

인터뷰 대상 중 한 명인 타메라는 이 시술이 의무인 고등학교 출신으로, 대학에 진학해 '칼리'를 끈다. 즉, 다시 타인을 보고 못생겼는지 잘생겼는지/예쁜지 판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룸메이트 아이나는 타메라의 고교 시절 남자 친구 사진을 보며, "걔 같은 애가 널 만났다고?" 하며 놀란다. 사실 타메라는 예쁘고 개럿(구 남친 이름)은 못생겼던 것.

타메라는 개럿의 외모가 아니라 그의 성격이나 자기와 잘 맞는 점이 마음에 들어서 사귀었던 것인데, 그녀의 말을 듣고는 '미(美)'가 권력이 될 수도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어렴풋이 인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개럿이 자신처럼 '칼리'를 꺼서 자신과 남의 외모를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아차리고 조금은 자신에게 더 잘해 주기를, 매달려 주기를 바라며 그와 다시 사귈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한다.

이 단편은 '미'가 가지는 특권과 그걸 가진 사람의 심리를 잘 꼬집어서 무척 감탄했다. 과연 이 멋진 단편집을 끝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막힌 엔딩이다.

이 외에도 바벨 탑의 끝까지 올라가 보는 이야기 '바빌론의 탑'과 작명을 통해 일종의 전자동 로봇을 만들어 내고 나아가 인간의 대를 이어나가는 연구에 관한 이야기 '일흔두 글자'도 아주 흥미롭다.

 

전반적으로 책이 번역도 괜찮고, 오탈자도 크게 눈에 거슬리는 부분 없이 교정교열도 잘되어 있다.

 

SF나 판타지 소설의 매력 중 하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접하게 된다는 점이 아닐까.

우리와는 정반대의 세계를 접하게 되면 처음에는 낯설고 당황스럽지만 그 안에서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개선할 수 있는(아니면 최소한 우리가 대리 만족을 할 수 있는) 방향을 보게 되니까 말이다. 거기에서 재미라면 재미, 통찰이라면 통찰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어쨌든 출간 예정이라는 테드 창의 또 다른 단편집이 기대된다. 얼른 나왔으면!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