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줄리아 월튼, <화장실 벽에 쓴 낙서>
지난주에 리뷰를 쓴 영화, <Words on Bathroom Walls(2020, 비밀이 아닌 이야기)>의 원작 소설이다.
위의 영화 리뷰에서도 간단히 말했지만, 영화와 원작 소설은 상당히 다르다.
일단 여러 가지 다른 점을 들어 보이기 전에, 전반적 전개와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다는 주의 먼저 드려야겠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는 분들은 큰 스포일러랄 게 딱히 없는 (위에 링크한) 영화 리뷰만 보시거나, 이 원작 소설을 다 읽으신 후에 이 글을 읽으시는 걸 추천한다.
영화와 원작 소설이 다른 점은 일단 애덤이 보는 환영 속 등장인물이다.
영화에서는 레베카, 보디가드, 호아킨이라는 세 인물이 등장하지만, 원작 소설에서 애덤이 보는 환영 중 처음부터 끝까지 고정으로 등장하는 건 레베카뿐이다.
이 레베카는, 나중에 애덤이 마야의 도움을 받아,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그리고 소설 속 애덤은 자신이 이탈리아계라는 점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마피아도 본다. 이 캐릭터가 영화 속 애덤이 듣고 보는 어둠과 비슷한 성격을 가졌다.
소설 후반에는 루퍼트와 바질이라는, 영국식 액센트를 가진 신사들까지 추가로 등장한다.
원작 소설에서는 이안이라는 동급생이 등장해 애덤의 적이자 일종의 악당 역할을 맡는다.
또한 드와이트라는 이름의 동급생이 애덤의 친구가 되는데, 드와이트는 나중에 애덤이 환영을 본다는 사실이 드러난 후에도 여전히 그를 똑같이, 쿨하게 대한다.
이안의 역할, 그러니까 악당 역할을 캐서린 수녀에게 일부 맡겼기 때문에 이안이 따로 필요 없어져서 이안이 영화에서 삭제된 건 이해가 된다지만, 왜 드와이트까지 없앴는지 모르겠다.
동성 친구까지 없으면 애덤이 너무 외롭잖아... 🥲
마야도 원작에서는 상당히 다르다. 원작 속 마야는 애덤이 '로봇 같다'라는 비유를 자주 할 정도로 냉철하고 이성적인 성격이다.
그리고 필리핀계라고 묘사돼 있다.
그 애는 제단으로 눈길을 돌리며 대답했어요. 드와이트가 이미 알려 줬지만 새로운 정보를 얻은 느낌이었죠. 성이 살바도르인 것도 드와이트한테 들었어요. 아마 필리핀계일 거예요. 저는 곁눈질로 마야를 봤어요. 일자로 곧게 뻗은 갈색 단발머리가 어깨에 닿을 듯 말 듯했어요.
마야와 애덤이 만난 것도 학교 수영장에서 허우적거리는 마야를 애덤이 구해 주는 데서 시작이다.
자기 집안을 부끄러워하고 애덤이 자기네 집에 자기가 없을 때 찾아왔을 때 당황했던 영화 속 애덤과 달리, 이 소설 속 마야는 자기 집안을 대놓고 언급하고, 심지어 후반에는 (영화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던) 마야네 어머니도 잠깐이지만 나온다.
마야가 좋아하는 영화도 영화에서처럼 <Never Been Kissed(1999, 25살의 키스)>가 아니라 <When Harry Met Sally(1989,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이다.
아시아인인 마야를 영화에서 흑인으로 바꾼 건 좀 아쉽다. 흑인들은 원작에서 흑인인 등장인물을 백인으로 '화이트워싱'하는 일이 잦다고 비판하는데, 아시아인들은 이렇게 지워져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한다.
<To All the Boys I've Loved Before(2018,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의 주인공 라라 진도 분명 작가처럼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설정돼 있는데, 영화 제작할 때 백인 소녀로 바꾸자는 제안이 엄청 많았다고 했다.
그러다가 저자가 강하게 주장한, '라라 진을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설정을 바꾸지 않는다'라는 조항에 동의한 딱 한 곳과 계약을 맺어 영화가 제작된 거고.
미디어에 '우리 같은' 대상이 묘사되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참 아쉽다. 영화 속 마야 역 배우가 그 역할을 잘해내기는 했지만.
영화 속 애덤은 요리를 너무 좋아해서 요리 학교에 가고 싶어 하고, 그러기 위해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내야 하는 목적이 있지만, 소설 속 애덤은 딱히 고등학교 이후에 무엇을 할지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적 여유가 없는 듯하다.
전반적으로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 때 이야기를 좀 더 극적으로 만들려고 여기저기 손댄 느낌이 난다.
소설 속 마야가 영화 속 마야보다 좀 더 적극적인데 영화에서는 애덤과 마야가 연애를 시작하는 걸 간지러움, 설렘의 절정으로 봐서 그런지 그걸 영화 끝까지 미뤄 버렸다.
사실 남녀 주인공 둘 다 십 대라 그런지 소설 속에서는 당연히 섹스 이야기까지 나오고, 둘이 첫 관계를 가졌을 때의 그 두근거림, 떨림 등도 묘사되는데 말이다.
큰 차이 하나 더. 영화에서는 애덤이 약(토자프렉스)을 먹기를 자의로 중단하고, 그게 문제를 일으키지만, 소설 속 애덤은 오히려 의사 선생님의 권고로 약을 끊게 되어서, 완전히 약 공급이 끊기기 전에 조금씩 모아 둔 걸 한번에 먹었다가 문제를 일으킨다.
그리고 위에도 언급했지만, 이안이라는 인물이 소설에는 있어서 애덤이 환영을 본다는 사실을 학교 학생들에게 만천하에 공개하고(그것도 학교 프롬에서), 나중에는 애덤에게 직접 미안하다고 사과도 한다.
일을 저지른 사람이 사과까지 한다니, 참 동화 같은 엔딩이 아닐 수 없다.
아, 가장 중요한 걸 까먹을 뻔했다. 영화에서는 왜 영화 제목이 <Word on Bathroom Walls>(<화장실 벽에 쓴 낙서>)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건 소설을 보면 알 수 있다.
성 애거사 학교의 한 화장실에 "예수님을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밑에) "호모가 되지 마세요"라는 낙서가 있는데, 그게 카톨릭 교회의 태도 또는 정신병에 대한 일반 대중의 태도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애덤은 본다.
[위의 낙서 두 줄을] 함께 읽으면 왠지 그럴싸한 조건절처럼 들리죠. 따로 보면 하나는 따뜻한 말이고 다른 하나는 혐오 발언인데 신기하게 도 글자 하나만 추가되면 이런 말이 돼요.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만 호모가 되지 마세요. 어떻게 읽느냐에 달렸죠.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기본적으로 조건 없는 수용을 뜻하지만, '호모가 되지 마세요'는 배척을 담고 있죠. 모순덩어리인 우리네 삶과 마찬가지로 부딪치는 문장인 거예요. 희망을 주는 말과 빼앗는 말.
너 자신이 되어라.
다른 건 다 괜찮은데 그것만 빼고.
그래서 제목이 <화장실 벽에 쓴 낙서>인 것이다. 이제야 이해가 되네.
영화와 소설이 다른 점을 하나하나 꼽자면 더 찾을 수도 있곘지만 일단 이 정도로 해 두겠다.
그래도 여전히 영화나 소설이나, 각각 다른 면에서 좋고 재미있고 감동도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셨으면 원작 소설도 읽어 보시는 게 나쁘지 않다. 그냥 둘 다 다른 면에서 좋을 뿐이지, 뭐가 더 낫다고 하기 어렵다. 어쨌든 비교 글은 여기서 끝~!
'책을 읽고 나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감상/책 추천] 셀레스트 해들리, <바쁨 중독> (0) | 2022.02.28 |
---|---|
[책 감상/책 추천] 김병욱, <오늘부터 개발자> (0) | 2022.02.21 |
[책 감상/책 추천] 구달, 이지수, <읽는 사이> (0) | 2022.02.16 |
[책 감상/책 추천]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보이지 않는 여자들> (0) | 2022.02.04 |
[책 감상/책 추천] 프랑수아 베고도, 세실 기야르, <나의 미녀 인생> (0) | 2022.01.05 |
[책 감상/책 추천] 문유석, <최소한의 선의> (0) | 2022.01.03 |
[책 감상/책 추천] 서귤, <판타스틱 우울백서> (0) | 2021.12.31 |
[책 감상/책 추천] 다이애나 로저스, 롭 울프, <신성한 소> (0) | 2021.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