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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조너선 갓셜, <스토리텔링 애니멀>

by Jaime Chung 2018.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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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조너선 갓셜, <스토리텔링 애니멀>

 

 

부제는 '인간은 왜 그토록 이야기에 빠져드는가'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건, 이 책을 전에 얀 마텔<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를 읽고 문학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얀 마텔은 자국(캐나다)의 수상 스티븐 하퍼에게 2007년 4월부터 2011년 2월까지 2주에 한 번씩 책을 추천하는 편지를 보내며 독서를 권유했다.

총 101통의 편지에서 그는 100권이 넘는(어떤 편지에선 2권 이상을 추천하기도 했다) 독서 목록을 제안했다.

얀 마텔이라는 작가의 안목을 믿기에 나는 그 책들이 정말 다 한번 읽어 봐도 나쁘지 않을 책이라고 생각한다(몇 권은 정말 좋은 책이라고 나도 보증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내 관심은, '정말로 문학이 정치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라는 문제였다.

정치라는 건 옳고 그름을 따지고, 국민들의 관심사와 안녕, 복지를 위해 노력한다 하더라도 늘 그것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문제가 끼어들게 마련이다.

외교적인 어려움도 있을 수 있고, 정치 판 내에서 정치인들끼리의 친교도 나랏일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런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외부의 문제가 계속 끼어드는 상황에서 정치인들에게 문학을 읽히는 게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정치인이 아니라 평범한 일반인이 나도 문학을 읽고 전공으로 공부하기까지 했지만, 그래서 내가 그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나는 문학적 지식을 얻었을 뿐이지, 그 이전과 딱히 달라진 건 없는 것 같다. 내가 책을 읽기 전보다 더 착하고, 더 공감을 잘하고, 더 이해심이 많고, 전반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었나?

내게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면 그건 내가 직접적으로 현실에서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하면서 얻은 경험 때문이지, 문학 때문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왜 책을, 문학을 읽는 것일까? 그런 의문에 왜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하는지를 연구한 조너선 갓셜의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우리는 책을 읽는 것은 수동적인 일이라고, 동시에 글쓰기란 그림 그리기 비슷한 거라고 여긴다.

작가가 그림 그리듯 자세하게 어떤 일을 묘사하면 독자는 그걸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독서는 능동적인 일이고, 작가들은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을 독자에게 떠넘긴다.

작가가, 예를 들어, '강렬한 눈빛과 칼날 같은 광대뼈를 소유한 잘생긴' 등장인물을 제시하면, 독자는 이 빈약한 단서를 가지고 그 인물을 그려 낸다(검은 눈동자일까, 파란 눈동자일까? 불그스레한 볼일까, 창백한 볼일까? 등등).

저자가 표현하듯, "작가가 하는 일은 채색이 아니라 소묘다. (...) 색깔, 명암, 질감 등 장면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정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다." 

단어를 늘어놓는 것은 작가이지만, 그 단어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독자, 즉 독자의 상상력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야기'라고 말할 때 이는 단순히 문학(픽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로 앤 오더(Law and Order)> 같은 드라마나 영화는 물론이고 '리얼리티 쇼(놀랍게도 작가가 있다)', TV 광고, 스포츠 중계, 언론 보도 등도 모두 포함한다.

"세제 광고는 단지 '말'로만 때가 잘 빠진다고 하지 않는다. 기진맥진한 엄마, 말썽꾸러기 아이들, 그리고 세탁실의 승리라는 이야기를 통해 '보여 준다.'"

텔레비전 스포츠 중계를 시청하는 여성이 늘어나는 이유도 비슷하다. "방송사들이 스포츠를 '인간관계 드라마'로 포장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러면 "여성 팬들이 '등장인물, 줄거리, 라이벌 구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 같은 <그레이 아나토미(Grey's Anatomy)>의 매력을 내셔널 풋볼 리그에서도 느낀다'."

그리고 "최고의 이야기 중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친구와 나누는 살아가는 이야기뿐 아니라 '나는 이러이러한 일을 해낸 사람이다' 또는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이야기 말이다.

또한 많은 이야기의 근원은 종교이다. 무신론적으로 들리겠지만, 종교란 원래 '왜 이러한 자연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부터 생겨난 것이다.

종교는 이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을 하나로 통합해 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맺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야기를 즐길까? 이야기를 즐기도록 자연이 우리를 설계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연습의 유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픽션은 인간의 문제를 시뮬레이션 하는 데 특화된 아주 오래된 가상 현실 기술"이라는 것이다.

픽션, 이야기의 핵심은 '말썽(어려움)'이고 "희극적이든 비극적이든 낭만적이든 모든 이야기는 주인공이 소원을 이루려고 애쓰며 대개는 그 과정에서 대가를 치르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픽션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꾸준히 몰두하다 보면 현실에서 문제에 대처하는 능력도 향상된다고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해 저자는 한 연구 결과를 인용한다.

"이것을 알아보는 방법은 과학뿐이다. 키스 오틀리, 레이먼드 마, 그리고 동료 심리학자들이 첫발을 뗐다. 한 실험에서는 픽션을 즐겨 읽는 사람이 논픽션을 즐겨 읽는 사람보다 사회성이 뛰어나다는 결과가 나왔다(사회적 능력과 공감 능력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사회성이 원래 뛰어난 사람이 자연스럽게 픽션에 끌린 것은 아니라고 밝혀졌다. 성별, 나이, 지능 지수 등 개인별 특성을 고려한 두 번째 실험에서도 픽션을 즐겨 읽는 사람들이 논픽션을 즐겨 읽는 사람보다 사회적 능력이 뛰어났다. 오틀리 말마따나 사회적 능력의 차이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은 사람들이 무엇을 즐겨 읽느냐"이다.

그런데 이 결과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책벌레와 집에 틀어박혀 텔레비전만 보는 내성적 인간형을 생각해 보면 픽션이 사회적 능력을 향상시키기보다는 오히려 퇴보시킨다고 예상할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사람들은 이야기에서 '거의' 모든 것을 상상하려 들지만, "상상력의 유연성은 도덕적 영역까지 연장되지는 않는다."

픽션은 전체적으로 볼 때 매우 도덕주의적이다. 물론, 악인이 등장하고 악행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픽션은 "사실상 언제나 잘못에 대해 판결을 내리는 입장에 서며 우리는 신이 나서 판결에 동참한다."

우리는 때로 사탄(밀턴(John Milton의 <실낙원(Paradise Lost)>에 등장하는 매력적인 인물처럼)이나 나보코프(Nabokov)의 <롤리타(Lolita)>의 아동 성추행범 험버트 험버트처럼 악한 주인공을 응원하지만, 그들의 잔인하고 이기적인 행동을 인정하고 납득할 것을 요구받지는 않는다.

최근에는 <덱스터(Dexter)>나 <브레이킹 배드(Breaking Bad)>처럼 경계에 선 주인공이 많이 등장하지만, 일반적인 경향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저자의 말을 내 식대로 풀어서 말하자면, '덱스터'는 살인마이긴 해도 '나쁜 놈'들만 골라서 죽이는 살인마이고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도 악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다.

따라서, 이는 악인을 찬앙하는 것이 아니라 "유서 깊은 도덕극을 살짝 비틀었을" 뿐이다.

언론인 스티븐 존슨은 이렇게 말하고 저자도 동의한다. "주류 영화, 지상파 방송, 비디오 게임, 장르 소설 등 가장 인기 있는 유형의 이야기들이 여전히 시적 정의(poetic justice, 선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 결말, 즉 인과응보)를 토대로 삼고 있다." 즉, "정직하고 모범적인 주인공이 승리"하는 이야기가 절대 다수라는 것이다.

 

이러한 패턴은 어디서 왔을까? "윌리엄 플레시는 이것이 인간 본성의 일부인 도덕적 충동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야기의 도덕성이 도덕적 충동을 반영할 뿐 아니라 '강화'한다고 생각한다."

"아펠의 연구에서 드라마와 코미디를 즐겨 보는 사람들은 뉴스와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는 사람에 비해 '세상은 정의롭다'고 믿는 비율이 높았다. 아펠은 픽션이 시적 정의라는 주제를 끊임없이 우리 뇌에 주입함으로써 세상이 번잔적으로 정의롭다는 과도한 낙관을 심는 데 일말의 책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결론 내린다. 그럼에도 우리가 인과응보의 교훈을 가슴에 새긴다는 사실은 인간 사회를 이끄는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시적 정의를 구현하고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그런 사고를 습득하고 강화한다는 저자의 설명은 흥미로웠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까지 큰 사고 안 치고 무난하게 준법 시민으로 없이 살아온 것도 다 픽션 덕분이 아닐까.

나는 그냥 내가 소심하고 집안 밥상머리 교육을 잘 받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읽은 책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정치인들에게, 또는 흉악범들에게 문학을 읽힘으로써 '정의'를 가르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얀 마텔의 제안이 그렇게 실효성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미국에서 죄수자들에게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희곡을 가르치며 교화하는 한 교수에 관한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이 책 제목은 로라 베이츠의 <감옥에서 만난 자유, 셰익스피어>이고 부제는 '독방에 갇힌 무기수와 영문학 교수의 10년간의 셰익스피어 수업'이다).

셰익스피어가 '꽃 한 송이보다 그 힘이 크지 않은 미(美)가 어떻게 그 파괴적힘 힘을 견뎌 내리?' 하고 노래했던 구절도 떠올랐고(이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65번 3~4행 "How with this rager shall beauty hold a plea,/Whose action is no stronger than a flower?"이다).

문학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강력한 듯하다.

자,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정치인들과 범죄자들에게 책을 읽히느냐 하는 것인데, 다니엘 페낙(Daniel Pennac)이 <소설처럼>에서 말했듯이, "'읽다'라는 동사는 명령형으로 쓸 수가 없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다니엘 페낙 말대로, "물론, 시도는 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효과는? 전혀 없다."

이러니 얀 마텔이 아무리 좋은 책을 추천해 줘도 무슨 소용이랴. 그들이 자발적으로 책을 한 권이라도 읽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그들이 책을 읽든 읽지 않든, 나는 꾸준히 책을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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