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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 감상/영화 추천] <The Dig(더 디그)>(2021)

by Jaime Chung 2023.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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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영화 추천] <The Dig(더 디그)>(2021)

 

 

⚠️ 아래 영화 후기는 <The Dig(더 디그)>(2021)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938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 태풍 전야의 시기의 영국. 영국 동부의 서폭(Suffolk) 지역에 사는 과부 이디스 프리티 부인(캐리 멀리건 분)은 입스위치 박물관에서 일하는 발굴업자 바질 브라운(랄프 파인즈 분)을 고용한다. 자신의 소유지인 서튼 후(Sutton Hoo)라는 언덕에 무언가 고고학적인 유물이 묻혀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프리티 부인과 바질 사이에 잠시 협상이 오고 간 후, 바질은 프리티 부인이 붙여 준 일꾼 둘을 데리고 발굴 작업을 시작한다. 애초에 바질은 그곳에 바이킹(8-11세기)의 유물이 있지 않을까 짐작했는데, 파다 보니까 심상치 않다. 아마 바이킹 시대보다 더 이전의 것이 나올 거라는 예감이 든다. 그리고 정말로 그곳에서 앵글로색슨(5세기)의 유물이 발견되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존 프레스턴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유물을 발굴하는 여자가 나온다는 점에서 올해 초에 본 <The Lost King(더 로스트 킹)>(2021)과 비슷했다. 물론 시대도 다르고 발견하는 유물도 다르지만. 이 영화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캐리 멀리건을 좋아해서 영화를 봤는데, 마음에 드는 점과 별로인 점을 똑같이 두 가지씩 찾을 수 있었다.

일단 별로인 점부터 이야기해 보자. 영화 초반은 이디스 프리티와 바질 브라운이 앵글로색슨족이 묻은 배(船)를 발견하는 과정인데 미묘하게 이디스와 바질 사이에 ‘썸’ 같은 기류가 돈다. 배우 본체 나이를 따지자면 현재 2023년 기준 캐리 멀리건이 38세고 랄프 파인즈가 60세인데요? 극 중 캐릭터의 나이가 분명히 나오지는 않지만 대체로 배우 본체들 나이와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인 인물의 실제 나이를 보면 이디스 프리티가 1883년생, 바질 브라운이 1888년생이니 오히려 이디스가 5살 연상이다. 굳이 영화로 만들 때 둘의 나잇대를 이렇게 설정해 놓고 둘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있는 것처럼 그리는 건 도대체 무슨 생각이죠? 나이 차이도 나이 차이인데 외모 더치 페이 좀 합시다 ☹️ 60대 남자, 심지어 부인도 있는 (좋게 표현해서) 평범한 남자랑 30대 후반-40대 초반의 (상대적으로) 젊고 부유하고 예쁜 여자를 이으려고 하지 마시라고요!!

그리고 두 번째는 별로라기보다는 아쉬운 점에 가까운데, 영화 중후반에 등장하는 페기(릴리 제임스 분)와 로리 로맥스(자니 플린 분)의 사랑 이야기는 통속적인 로맨스처럼 보인다. 페기는 고지식하다 못해 자신의 아내인 페기조차 거리를 두는 남편 스튜어트 피곳(벤 채플린 분)에게 소박 아닌 소박을 맞으며 살고 있다(영화를 보는 내가 저 남편 놈은 게이인가 의심했을 정도로). 예컨대 페기가 목욕하는 장면을 남편이 봤는데 그는 마치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것처럼 깜짝 놀라며 오히려 페기를 꾸짖는다. 그래서 남편을 사랑하지만 따뜻한, 다정한 손길을 받지 못하는 페기는 발굴 작업을 간간히 도우며 사진을 촬영하는 이디스의 사촌 로리에게 서서히 끌린다. 로리 역시 페기에게 눈길이 간다. 하지만 선을 넘지는 않고 그저 떨리는 마음을 숨기려고 애쓰며 지내는데 이디스와 바질, 그리고 영국 박물관(’대영’ 박물관이라고 하기 싫어서 이렇게 표기하겠다) 관련자들의 발굴 작업이 거의 끝날 때쯤, 로리는 영국 공군(RAF; Royal Air Force)에 입대가 허가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렇게 영영 헤어질 뻔했으나 로리가 입대를 위해 떠나기 전, 페기는 결국 남편과 헤어지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자신을 여자로, 욕망을 가진 대상으로 바라봐 주지 않는 남편을 포기하고, 한 명의 여자로서 자신을 사랑해 주는 로리와 남지 않은 시간을 보내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사랑을 억제해 오다가 드디어 족쇄를 풀고 사랑하는 이와 입을 맞추며 사랑을 나누는 순간을 포착한 것은 참 낭만적이고 가슴 떨리게 아름다우나, 페기와 로리의 사랑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딱히 큰 관련이 있는 것 같지 않다. 아무래도 고대 유물을 발견하는 게 이 영화의 소재이고 가장 큰 사건인데 곁가지로 딸린 이 커플 이야기도 그거랑 조금은 관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페기가 이 발굴 작업에 참여한 고고학자의 아내이긴 하지만, 그래서 로리와의 사랑 이야기가 딱히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 내가 작가였다면 (원작 소설 작가나 이 영화의 각본가였다면) 곁가지 이야기조차 전체적인 이야기와 연결되게 만들어냈을 것 같다. 유물 발굴이라는 게, 최소 몇백 년 전 사람들이 남긴 것을 찾아낸다는 점에서 독자/관객으로 하여금 ‘과연 진정한 불멸성이란 무엇인가’, ‘기껏해야 백 년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후대에,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또는 어떻게 해야 이름을 남길 수 있는가)’ 같은 질문을 하게 만들지 않나. 그러니까 나는 극 중에 예술가, 그것도 무명 예술가를 등장시켜 ‘아무도 나를 기억해 주지 않는다면 지금 내가 예술을 한다는 게 의미가 있는 것일까?’ 같은 고뇌를 하게 만들겠다. ‘세월이 지난 후에도 접할 수 있는’ 인쇄된 매체를 이용하는 작가나 시인보다는 순간적이고 예술이 행해지는 바로 그 순간 그 공간에 존재해야 하는 제약이 딸린 무용가나 배우 등을 등장시키는 편이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 것 같다. 이 무명 예술가가 자기보다 훨씬 더 잘 나가고 인기도 많은 기성 예술가를 부러워하고 자신의 처지를 그들과 비교하는 장면도 넣으면 좋지 않을까. 인간이라면 어떤 의미로든 불멸성을 꿈꾸는 게 인지상정인데 진정으로 ‘불멸’이라는 게 무엇일까, 박물관에서 전시할 수 있는 어떤 실질적인 물체를 남기는 것이 불멸성인가, 아니면 인간 삶의 찰나성을 받아들이고 순간순간을 충실히 살아 한 점의 후회도 없는 것인가, 가족을 꾸려 자신의 DNA를 남기는 것인가. 대략 이렇게만 봐도 유물 발굴이라는 주제와 관련된 코멘트를 할 구석이 많은데 왜 굳이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를 집어넣어 그 기회를 포기했을까? 정말 너무 아쉽다. 어차피 페기와 로리의 사랑 이야기도 허구인 걸로 봐서 (애초에 로리라는 캐릭터 자체가 허구다. 발굴 당시의 사진은 머시 랙(Mercie Lack)과 바버라 왜그스태프(Barbara Wagstaff)라는 사람들이 찍었다) 허구의 이야기면 뭐든 끼워넣을 수 있었을 텐데, 그렇다면 주제와 좀 더 연관 있는 이야기를 넣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가 꽤 몰입할 만큼 흥미롭다는 점은 인정한다. 원래 아는 그 맛이 끌리는 법이거든요. 이디스와 바질 브라운의 발굴 이야기도 소소하게 재미있고. 이디스가 아들 로버트(아치 반스 분)가 역사적 유물인 앵글로색슨 족의 배에서 하룻밤 야영을 하며 우주 여행을 하는 상상 장면은 아주 아름답고 가슴이 따뜻해진다. 사실 캐리 멀리건 때문에 보기 시작한 건데 2시간에 가까운 러닝 타임이 딱히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잘 만들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언급한 아쉬운 점 때문에 7.1점이라는 높은 별점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분명 잘 만들긴 했는데 7점대를 줄 정도로 엄청 뛰어나냐 묻는다면 조금 아쉽다는 느낌. <더 로스트 킹>만큼은 아니더라도 영화가 이 유물, 또는 그 유물을 남긴 시대의 사람(들)과 좀 더 이입하는 면모를 보여 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래도 꽤 잘 만든 영화라는 점은 변함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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