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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박서련,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by Jaime Chung 2024.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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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박서련,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박서련 작가의 단편소설 모음집. 이전에 이 작가의 <마법소녀 은퇴합니다>를 재미있게 읽었더랬다. 그래서 이 책도 펼쳐 봤는데, 와우… 각 단편소설의 소재가 아주 자극적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초등학생 아들보다 게임을 잘하는 엄마

아이의 반에 당신이 사는 아파트보다 좋은 집에 사는 아이는 없다. 당신의 남편보다 좋은 차를 타는 아버지는 없다. 당신 어머니는 당신이 자라면서 겪어야 했던 일들에 책임 있게 나서 준 적이 없었고, 아버지의 경우는 굳이 떠올리고 싶지도 않지만 쥐어짜려야 쥐어짜 낼 기억조차 없다. 따라서 당신이 아이를 위해 하는 모든 일은, 어쩌면 아이를 위하는 그 이상으로 당신 자신을 위하는 길이기도 했다. 열두 살짜리 아이를 키우는 지금 여기의 당신이 아니라, 타인에게서는 보상받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당신을 위한 것. 당신은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의식하며 아이를 사랑한다. 그렇기에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면서, 동시에, 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게임이라니. 그런 건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해?

  • 미키마우스 클럽: ‘백치미’로 알려진 여자 아이돌의 스캔들

나의 곁에는 너 말고도 세 명의 소녀가 더 앉아 있다. 역시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나는 그 애들이 짓고 있을 침통하고 비굴한 표정을 알 수 있다. 어린 나이에 맛본 어설픈 성공 탓에 웃자라 버렸으되, 갓 스물 남짓한 나이에 걸맞게 순진하고 멍청하기도 한 아이들. 그 애들은 잘못한 것도 없이 벌을 서는 기분일 것이다. 아이들이 그런 생각을 품었을 때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나는 잘 알고 있다.

아이들은 사전에 지시받은 차례대로 회견문을 낭독한다. 울음 섞인 목소리가 점점 내 쪽으로 번져 온다. 회견문은 특별히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소녀들의 감수성과 진정성을 고려하여 어렵지 않은 어휘를 골라 작성한 것이다. 너희는 그 글을 소리 내어 윤독하고서야 이 사태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기 시작한 듯하다. 데뷔 3년 차 전도유망한 현역 걸그룹의 전격 활동 중단. 우습게도 너희는 오늘로 보다 큰 명성을 얻게 될 것이다. 회사는 이미 멤버들의 개별 활동 계획까지 마련해 놓은 상태다.

  • 보: 목사 아내의 레즈비언 커밍 아웃

남편은 울어서 가라앉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보혜 다리 위에 손을 모아 올렸다. 말릴 새도 없이 하나님 아버지, 하고 남편은 말문을 열었다. 보혜는 또 다른 일기를 떠올렸다. 애초에 기도라는 것은, 듣는 사람이 있는 기도라는 것은, 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연극적인 방식으로 자기 할 말을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보혜는 썼다. 고등학교 때였다. 어머니가 볼일이 있는데 같이 가 주었으면 한대서 따라간 곳은 같은 반 아이의 집이었다. 어머니를 부른 사람은 교회 꽃꽂이 봉사를 도맡는 최 집사라는 여자였고, 그 애는 최 집사의 딸이었다.

  • 곤륜을 지나: 시모와 여행을 가게 된 며느리
  • 기미: 치매를 앓는 어머니를 돌보는 한 여인
  • 그 소설: 낙태를 소재로 글을 쓴 작가

마치 고등학생 때 낙태 한 번쯤은 다 해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섹스를 안 해 봐서였다. 한 번 하고 나니 여자애들이 왜 임신 낙태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생리가 하루만 늦어져도 씨발 임신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씨발 임신인가?라는 생각을 하고 나면 조용히 수술을 받을 수 있는 병원 정보가 급해졌고 수중에 그럴 돈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졌고 돈이 있거나 없거나 거의 매번 엄마 생각이 났다. 며칠 그렇게 패닉 상태로 지내다 지쳐 자포자기에 이를 즈음이면 생리가 시작되었고 그러면 아 신이시여 존나 감사합니다 섹스 같은 거 다시는 안 할게요라고 백 번도 넘게 맹세했다. 그런 맹세를 백 번 넘게 한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이전의 맹세를 백 번 넘게 어겼기 때문이다.

그게 나쁜가.

애초에 스무 살 무렵 첫 섹스를 해 본 건 남자애들도 나도 다른 여자애들도 매한가지인데 같은 경험을 남자애들은 모험담처럼 쓰고 여자애들은 임신과 낙태에 대한 공포 소설로 쓸 수밖에 없다는 게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드디어 섹스해 봤다 너무 신난다 광고하는 듯한 소설을 써 온 남자애들은 절대 낙태 소설을 써 온 여자애들만큼 망신을 당하지도 않았다.

  • A Queen Sized Hole: 가난한 작가

 

모든 소설이 도파민이 팍팍 터지는 것은 아니지만, 소재가 아주 자극적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아니, 작가님 이러시면 정말… 감사합니다 ☺️ 나는 특히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미키마우스 클럽>, <보>, <그 소설>, <A Queen Sized Hole>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는데, 이 단편집의 단점을 찾자면 결말이 아쉽다는 점이다. 결말의 호불호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한 끝맺음이 되지 않고 작가도 어떻게 끝을 내야 할지 몰라서 애매하게 끝내 버린 것 같다. 예를 들어서 부부가 싸운 얘기라고 한다면, 화해를 하든 이혼을 하든 딱 확정적으로 이러이러한 일이 났고 그걸로 끝이에요! 하면 좋겠는데, 이도 저도 아니고 애매하게 중간에 끊긴 느낌? 그래서 나중에 뭐가 어떻게 됐다는 건지 모르겠다. 암시만 하는데 그래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건데요? 마무리를 조금만 명확하게 해 주었으면… 그래도 한번 읽어 볼 만한 재미가 있다. 박서련 작가 입문용으로 추천하기는 뭣하지만, 이미 박서련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괜찮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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