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레이철 호킨스, <기척>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현대적 스릴러로 다시 쓴(re-writing) 작품. 한국판 제목은 <기척>이고 원제는 <The Wife Upstairs>이다. 한국판 제목도 다른 누군가의 존재를 암시하긴 하지만, 원제가 좀 더 직접적으로 그게 누구인지를 밝힌다. 여자 주인공이 제인이라고 불리는 것(이름이 제인이라는 뜻이 아니다. 읽다 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게 된다)이나 남자 주인공 이름이 에디인 것, 이 사건들의 배경이 되는 부자 동네 이름이 손필드인 것, 이렇게 세 가지만 봐도 <제인 에어>를 아는 독자들은 저자가 어디에서 이들을 데려왔는지 알아차릴 것이다.
이 작품 속 ‘제인’은 브론테의 <제인 에어>처럼 도덕적 원칙이 강하지 않다. 오히려 기회주의자다. 제인은 텍사스 주 피닉스에서 앨라배마 주로 도망쳐 왔고, 손필드에서 개를 산책시켜 주는 일을 하다가 우연히 에디라는 남자를 만난다. 제인은 에디가 돈 많은 남자임을 첫눈에 알아보고 은근히 그를 유혹한다. 에디도 그녀를 마음에 들어하는데, 문제가 있다면 에디의 전부인 베(원문을 찾아보니 ‘Bea’라고 돼 있는데 왜 ‘베’라고 표기한 건지 모르겠다. 발음은 ‘비’에 가까운데)가 베의 절친인 블랜치와 함께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제인은 곧 에디의 집에서 같이 살게 되지만, 사라진 베의 대체품 같다는 느낌을 받고 그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다. 제인은 소문이 곧 화폐나 마찬가지인 이 동네에서 자신은 베를 능가하는 여자임을 보여 주고 싶어 하고, 에디에게 청혼을 받았을 때는 곧 자신이 ‘제인 로체스터 부인’이 될 거라는 생각애 황홀해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제인은 에디가 베의 실종에 연루되었을 거라는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어느 날 위층에서 무언가 쿵쿵 올리는 소리를 듣게 되는데… 이 정도가 소설 절반 정도의 줄거리이다.
원작을 아는 독자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대충 예상이 되겠지만, 이쯤 해 두겠다. 위에서 나는 이 소설이 ‘현대적 스릴러’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 에디의 전부인 베는 <제인 에어> 속, 무기력하게 로체스터에 의해 억지로 감금된 버사가 아니다. 뭐, 베의 원래 이름이 버사인 건 이 소설에서도 맞지만, ‘무기력’하지 않다는 뜻이다. 저자는 버사/베에게 블랜치 잉그러햄(<제인 에어> 속 제인이 자신의 외모를 비교했던 사교계 미녀, 그 잉그러햄)이라는 친구를 붙여 주었는데, 두 여자의 애증 관계에서 많은 갈등이 일어난다. 이게 이 소설의 영리한 점이라 하겠다.
반전까지 밝히지는 않겠지만 전반적으로 잘 쓴 <제인 에어> 리메이크라 하겠다. 심리 스릴러가 되고 주인공들의 성격이 새롭게 설정된 덕에 <제인 에어> 속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생각할 때 곧 떠오르는 페미니즘의 상징이랄지 의미랄지, 또한 백인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같은 점은 딱히 드러나지 않지만. 하지만 애초에 원작이 있어서 계속 비교될 작품을 만드는 용기와 그걸 꽤 괜찮게 만들었다는 점은 높이 사고 싶다. <제인 에어>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제인 에어>를 기가 막히게 재해석한,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도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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