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바바라 스톡, <철학자, 강아지, 결혼>
백인 남자들만 ‘철학자’로 쳐주는 철학판에서 정말 드물게 언급되는 여성 철학자 중 하나인 히파르키아의 삶에 대한 그래픽 노블. 고대 희랍(=그리스)에서 더더욱 보기 드문 여성 철학자로 이름이 남아 있는 히파르키아는 집안에서 정해 준 남편 대신 ‘견유학파’라 불리는 철학자 크라테스의 철학에 매료되고 결국 그와 결혼해 그와 같이 견유학파의 삶을 산다.
크라테스를 비롯한 견유학파 철학자들은 진정한 행복과 삶은 사유 재산을 얼마나 많이 가지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얼마나 버리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크라테스도 집도 없이, 몸에 걸친 옷 한 벌만을 가지고 들판을 침대 삼아 자며 생활하고 철학을 논했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철학을 배우고 싶어 했던 히파르키아는 집에 있는 책을 읽기를 즐겼다. 그러다가 결혼해야 할 나이가 되자, 남편감을 찾으러 오라버니 메트로클레스가 있는 아테네로 가게 된다. 히파르키아는 그곳에서 집안도 좋고 부유한 남자 칼리오스를 만나 선을 본다. 그는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이기로 하지만, 결혼식이 가까워질수록 히파르키아는 크라테스의 철학을 더더욱 알고 싶어진다. 그녀는 남장을 하고 크라테스의 철학 수업(올리브 나무 밑에서 토론식으로 철학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 참여한다. 크라테스가 논하는 철학을 알게 될수록, 히파르키아는 노예를 부리며 사치스럽게 사는 삶은 옳지 않고 자신은 절대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결국 그녀는 잘나가는 청년 칼리오스와의 파혼을 선언하고 크라테스와 혼인한다.
히파르키아가 철학에 대한 타고난 열정과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결국 결혼을 포기하고 크라테스와 같이 ‘개처럼’ (글자 그대로) 살며 철학의 길을 선택한 삶을 보여 준 것은 참 좋지만, 결국 한 남자와의 결혼에서 벗어나 다른 남자와의 결혼으로 대체된 것 같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현실이 그러하더라도 이 그래픽 노벨에서 기-승-전-결에서 ‘결’이 그 파혼 선언 및 크라테스와의 혼인에 해당하다 보니 ‘결혼이 여자에게 이야기의 끝인가?’ 싶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맨 마지막 7장 ‘아타락시아(내면의 평화)’에서 저자는 아테네의 공공 모임 장소인 리케이온에 있는 한 남자의 입을 빌려 히파르키아를 “굉장히 용감한 여자야! 대담하게 자기 이상을 실천에 옮겼잖아.”라고 평하긴 한다. 현대의 모습을 묘사한 맨 마지막 1장을 제외하고 히파르키아 이야기의 맨 마지막 컷이라고 한다면 히파르키아가 크레테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여자애 하나, 남자애 하나)과 함께 들판에서 평화롭게 쉬고 있는 모습이다. 이렇게 끝나니 더 히파르키아 삶의 최고 이벤트가 원래 약혼자와 파혼하고 크라테스와 결혼한 것 같달까… 적어도 ‘히파르키아는 이후에 고대 아테네 최초의 여성 철학자로 알려졌다’라든지 뭐 그런 에필로그 같은 거 하나라도 적어 주면 좋았을 텐데. 저자가 이런저런 장면에 꽤 세세하게 주석을 달아 놓긴 했지만 그 점은 여전히 아쉽다. 히파르키아에 대한 정보가 워낙에 없어서 적어 넣거나 스토리에 끼워 넣을 업적을 찾을 수가 없었나? 망할 고대 희랍인들 같으니라고 ☹️
그림체는 다소 단순한 편이지만 나름대로 귀엽고 신경에 거슬리지는 않는다. 내가 방금 말했듯 최초의 여성 철학자인데 그 업적이 더 잘 드러나게 구성을 조금만 더 신경 썼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래도 입문자들에게는 좋을 듯. 밀리의 서재에서 이용 가능하니 참고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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