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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주노 디아즈,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by Jaime Chung 2018.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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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주노 디아즈,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책 감상 포스트를 쓸 때 대개 본문 앞에 간단히 시놉시스를 몇 줄이라도 적곤 하는데,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다.

나는 이 책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는 상태에서 읽기 시작했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이야기 전개가 임팩트 있게 다가왔던 것 같다.

그래도 간단히 소개를 하자면, 이건 오스카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오스카는 한마디로 오타쿠다. 인기 TV 시리즈 <빅 뱅 이론(The Big Bang Theory)>의 너드(nerd) 집단을 떠올려 보시라.

그리고 걔네들을 다 합친 것만큼의 덕력을 가진, 뚱뚱한 오타쿠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인기는 당연히 없을 것 같은 외모에, 여자에게 다가가 <독수리 오형제> 대사로 작업을 거는 그런 오타쿠를.

아, 깜박 잊고 말을 안 했는데, 이 오타쿠는 심지어 도미니카 출신 흑인이다.

그러니 그가 도미니카계 미국인으로 얼마나 많은 친구들, 그리고 여자 친구와 행복하게 살았는지 상상이 가겠지. 물론 이 말은 반어법이다.

이 책(그중에서도 SF와 판타지 장르 소설)을 사랑하고 글쓰기에 목을 매며, 자신에게 조금이나마 상냥하게 대해 주는, 아니 차가운 눈길만 던지는 여자에게도 곧 사랑에 빠져 버리는, 그런 거구의 오타쿠가 오스카이다.

그런 오타쿠 자식이 할 이야기는 뻔하다고?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래서인지 더욱 공감하고 감정을 이입하며 읽을 수 있었다.

 

이야기는 일단 오스카에게서 시작해 그의 누나 롤라, 그리고 그의 어머니 벨리에게로 넘어간다.

이 세 인물들에게 각각 한 챕터씩을 할당한 후에야 이 소설의 화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오스카와 무슨 관계인지가 밝혀진다(이것을 깨달아 가는 것도 즐거움이니 스포일러는 하지 않겠다).

제목은 '오스카'의 삶이지만 그를 알기 위해 화자는 그의 가족과 그의 조부(그의 어머니의 아버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역시 이야기의 한 축을 담당하는 '트루히요의 저주'를 생생히 묘사하게 위함이다.

라파엘 트루히요는 1930년부터 1961년에 암살당할 때까지 도미니카의 대통령이었던 독재자이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읽으며 저자의 각주(번역본에는 미주로 처리되어 있다)를 따라가면서 배우면 되므로 나처럼 도미니카의 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책을 읽기 시작해도 책 내용 이해에는 아무 문제 없다.

그냥 트루히요는 박정희와 전두환을 합쳐 놓은 것 같은 도미니카의 독재자이다, 하는 정도만 알고 시작해도 충분하다.

 

사실 나는 지금 일부러 이 소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데, 왜냐하면 여러분이 나처럼 정말 배경지식이나 선입견 없이 그냥 이 책을 읽기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이걸 읽으면서 너무나 가슴이 찡해서 잠시 책을 내려놓고 숨을 돌리지 않으면 거기에 너무 몰입해 나도 너무 슬퍼져 버릴 것 같기에 책을 읽다가도 중간중간 멈춰야 했다.

이건 그런 책이다.

 

내가 오스카에게 그토록 이입을 잘한 건, 내가 중학생 때 오스카 같은 아이가 같은 반에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사실 이런 애는 중학교 아니라 어디에도 있다).

우리 잠시 솔직해져 보자. 오타쿠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인식이 썩 좋지는 않은 게 사실이다.

남에게 직접적 피해를 주지 않더라도, 어딘가 비사교적 모습이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그건 그들이 대개 내성적이고 수줍어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나는 그들이나 현실에서 그들을 만났을 때 일단 예의를 갖춰 대할지언정 그다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게 아니다.

나는 둘 다 너무나 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양 측이 왜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는지 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우리가 현실에서는 별로 친구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사람이라도, 우리가 (소설이나 영화 등을 통해) 그들의 속사정을 알게 되면 얼마나 그들에게 공감하게 되는지, 측은지심을 가지게 되는지, 그것이 놀랍다는 거다.

<빅 뱅 이론>도 그렇지 않나. 정말 인기 없는 너드들의 이야기인데 그게 재미있고, 사람들이 거기에 공감하게 되니까 인기 있는 드라마가 된 거지.

어쩌면 공감 능력을 키우는 방법 중의 하나는 이렇게 자기와는 다른 타인의 이야기를 배우는 것 아닐까.

타인의 이야기를 더욱 많이 알게 되면, 우리는 타인과 더욱 공감하고 타인을 더욱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책 맨 끝에 이 책을 번역하신 권상미님의 역자 후기가 실려 있는데, 내가 본 역자 후기 중에서 가장 '그 자리에 있을 가치가 있는' 후기였다.

다른 책들에 붙은 후기는 대개 그냥 그 앞의 이야기(픽션이든 논픽션이든)를 간단히 요약해 놓고는 이러이러한 의미가 있다거나 이러이러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별로 신빙성도 없는 말을 조금 늘어놓은 다음에 '그래서 저는 이러저러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내지는 '그래서 저는 이러저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운운한 후 출판사와 번역자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는 끝이다.

난 이런 역자 후기는 그냥 책 페이지 수 늘리려고 넣은 거 같아서 도대체 존재 의미를 모르겠다(모르긴 몰라도 전체 쪽 수를 맞추려고 넣은 경우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역자분은 영어 번역과 (작가가 'nerdery'라고 칭한) 온갖 SF나 판타지 소설, 애니메이션, 만화 등의 레퍼런스에 대한 주석 작업뿐 아니라 스페인어 번역과(원서에는 그냥 스페인어만 있고 번역이 따로 제공되지 않는다), 크리올어 번역까지 지인의 지인을 통해 정말 어렵게 다 해내셨더라.

그 얘기를 다소 담담하게 역자 후기에 쓰셨는데, 이런 분 번역이라면 믿고 볼 수 있겠다 싶었다.

이분이 번역하신 주노 디아즈의 데뷔작 <드라운>도 읽어 볼 생각이다. 물론 일단 이 책에서 좀 회복할 사이를 두고.

마치 배우들이 한 배역에 몰입해서 연기를 하느라 촬영 작업이 다 끝난 후에도 거기서 벗어나기 힘들어하는 경우처럼, 이 책도 그렇게 긴 여운을 남긴다.

 

다른 책 리뷰들처럼 이야기 요약도 없고 이렇다 할 배경지식 또는 작가에 대한 정보도 없지만, 그래도 이 글을 읽은 분들 중 한 분이라도 이 책에 흥미를 가지고 이 책을 읽게 되셨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이 놀라운 책을 처음으로 읽는 즐거움, 짜릿함을 한번 느껴 보시길 바란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나중에 이 책이 얼마나 끝내 주는지 같이 덕스럽게 수다를 떨어 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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