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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지비원, <왜 읽을 수 없는가>

 

 

최근 '심심한 사과의 말씀' 논란이나 '사흘' 논란으로 인해 (이 논란들을 잘 모르시는 분들은 여기를 클릭) 요즘 세대의 문해력에 대한 탄식과 비판이 많이 나왔다. 많은 이들이 '어떻게 그렇게 기본적인 단어도 모르냐', '모르는 것 자체도 모르지만 모르는 것을 배우려고 하지 않고 뻔뻔하게 왜 어려운 말을 쓰냐고 공격적으로 나오는 게 더 문제다' 같은 반응을 보였다. 다 맞는 말이고 다 공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이해시키고 싶다면 어떡해야 할까? 상대방에게 문해력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이해시켜야 한다면?

이런 질문에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지비원의 <왜 읽을 수 없는가>라는 책을 추천받게 되었다(글 하단 링크 참조). 저자는 주로 일본어 인문교양서를 만드는 편집자 겸 번역가이다. 그는 노야 시게키의 <어른을 위한 국어 수업>이라는 책을 번역하며 '어떻게 하면 상대를 이해시킬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고, 그간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에세이 형식으로 쓴 게 바로 이 책이다.

요즘 10대, 20대들 문해력이 떨어진다고 비판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이해시켜야 하는 의무가 있는 교육자들(교과서나 인문, 과학 등 전문서적의 저자들 포함)이나 현대 사회의 소식을 전하고 그에 대한 비평이 업인 기자들이 비판만 하고 손을 놓고 있을 순 없는 일 아닌가. 어떻게든 상대를 이해시키기 위해, 그들의 눈높이에서 글을 쓰고 이야기해야 한다. 저자는 '들어가며'에 이렇게 썼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진단과 해결책이 쉽게 나올 수는 없고, 전문 분야에 따라 그 해법도 다를 것이다. 나는 출판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했지만 이 문제에 대해 견해를 내놓을 만한 주제는 못 된다. 그러나 오랜 시간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이들, 특히 인문학 연구자들의 문장을 많이 다루었고, 이를 오류가 없고 되도록이면 독자층에게 가장 적합한 형태로 전달해야 하는 책임을 지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어떤 '글'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일차적으로 글쓴이와 그 글을 편집하는 사람에게 있다고 믿는다. 그 때문에 나는 '안 읽는' 독자들을 먼저 탓하고 싶지는 않다. 그 대신 글쓰기가 직업인 사람들, 자신이 쓴 글에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의 문장을 한번 돌아보고 싶다. 글이 길고 조금만 어려워도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는 현상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질책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넓고 얕은 지식'이든 뭐든, 기왕이면 머릿속을 채우는 게 채우지 않는 것보다 백배 낫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왜 전문가가 조금만 재미있게 설명한다 싶으면 시청률이 그렇게 뛰어오르는가? 왜 '넓고 얕은 지식'을 표방하는데 책이 그렇게 많이 팔리는가? 단언컨대 사람들이 웬만하면 교양을 쌓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또 자신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지식은 누구나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 한다. 쉽고 얄팍해 보이는 프로그램이나 책이 인기를 얻는 현상은 사람들의 지식욕을 이해하지 못하면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일반인들의 지식욕이 누군가 아무렇지 않게 구사하는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문장에는 접근할 길을 찾지 못하는 것뿐이다.

솔직히 어려운 글이 너무 많다. 전문 서적이야 전문가를 위해 쓰인 것이니 어려운 게 당연하지만, 전문가가 아닌 독자를 위해 쓰인 글인데도 어려운 게 많다. 글을 전혀 안 읽는, 또는 어떤 주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아, 이런 내용이구나' 하고 이해할 텍스트가 있어야 하는데, 초급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이 없다. 그러니 어떤 주제가 됐든 흥미를 가져도 조금 파 보려다가 어렵다고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뉴스 매체에 실리는 글조차 그냥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렵다. 이걸 과연 10대, 20대 젊은이들이나 노인들이 보고 한번에 이해할 수 있을까? 저자가 '뉴스'로 분류되는 글 중에서 가져온 아래 예들을 보시라(순서가 달려 있지만 각각 다른 글에서 나왔으며, 이어지는 내용은 아니다).

1. 이런 단일 토지세론보다 현대 사회에 더 묵직한 한 방을 날리는 것은 그[헨리 조지-인용자]의 정치경제학 밑바탕에 흐르는 자연정의론적 세계관이다. 그가 정치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그의 정치경제학에 있는 자유방임론적 요소를 상당 부분 포기했을 것이다.

2. 2020년대에 바우만의 사상이 던지는 함의는 그렇다면 뭘까. 바우만의 탁월성은 새로운 개념의 발굴에 있다. 특히 그는 흥미로운 개념틀을 주해 우리 시대를 날카롭게 분석해왔다. 그 대표적인 개념틀들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입법자와 해석자'다. 바우만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 개입한다. 그에 따르면, 모더니스트들은 확실성과 보편성의 기준을 세우려는 입법자로서의 입장을 취한다.

3. 슈미트주의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아예 보편성과 일관성 자체를 포기한다.

자유주의자들은 (A 이른바 '원칙이성(Grundsatzvernunft)'에 따라 사유하고 행동한다. 그들은)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보편적﹒추상적 기준을 갖고 있다. (……)

이와 달리 전체주의자들은 (B '기회이성Gelgenheitsvernunft'에 따라 사유하고 행동한다. 그들은) 보편적 기준 없이 매사 그때그때 상황의 필요에 따라 판단한다.

보자마자 '그게 뭔데 씹덕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자연정의론은 뭐고 바우만이랑 슈미트주의자는 누구인가? 이걸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가 이해할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건가? 글만 봐도 '네가 이 정도 글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너와 이야기해 주겠다'라는 오만한 태도가 엿보인다. 이런 글을 대중매체에 써 놓고서 독자들이 이해를 못한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독자인 이쪽이 화가 나는 게 당연하다. 애니 오타쿠가 애니 캐릭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늘어놓으면 '으, 사회성 없는 씹덕'이라고 비웃으면서 왜 이런 글을 전문 서적도 아니고 전문가들을 위한 논문도 아닌 '대중매체'에서 쓰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글의 저자가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글을 쓴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독자들은 이런 글을 읽지 못하는 것에 부끄러워하며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존나 가만히 있어야겠다' 해야 하나?

'나도 이해하고 싶다. 이해하고 싶으니 제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해 달라.' '심심한 사과'나 '사흘' 논란을 일으킨 그 소위 '무식한' 사람들의 심정도 사실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너무나 미세하고 또 자존심에 가려 사실 본인들도 잘 몰랐겠지만 그들도 이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다 해도 그건 너무 기본적이고 쉬운 단어인데, 그걸 심지어 찾아보지도 않고서 자기네들이 옳다고 우겼잖아?' 하며 반박하고 싶은 분들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교양'이나 '상식'처럼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도 없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뫄뫄 정도는 상식 아닌가요?' 같은 글이 올라오면 언제나 뜨거운 반응을 얻게 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예시로 든 저런 글을 쓰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헨리 조지, 바우만, 슈미트 등을 모르는 나를 무식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잘 안다'와 '모른다', '유식하다'와 '무식하다'의 차이는 언제나 자의적이니까.

솔직히 나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글쓴이들이 글을 쉽게 써야 한다는 생각에 그쳤다. 그런데 이 서평을 쓰기 위해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대중을 상대로 이해하기 쉬운, 쉽게 설명하는 글을 쓰는 것은 교육자 또는 기자 들의 의무이고 또한 그런 글을 읽을 권리가 대중에게 있다. 자기만의 감상에 벅차올라 그것을 상대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전달하는 데는 관심이 없는 씹덕을 만나면 그와의 정상적인 대화를 포기하게 되듯, 이 시대의 많은 이들도 '('심심하다', '사흘' 같은) 어려운 말을 이해할 수 없으니 너와 대화하지 않겠다'라는 결정을 내린 게 아닐까. 그들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게다가 태어날 때부터 핸드폰, 인터넷, 유튜브 같은 미디어를 접해 긴 글 읽기가 더 어렵게 느껴지겠지. 이런 상황에서 그냥 그들을 비웃고 비난만 할 게 아니다. 그들을 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책 후반에는 '어려운 글'뿐 아니라 입문서도 때때로 어려운 이유 중 하나로 전문 용어 자체가 일본에서 번역해 들여온 용어를 가져왔기 때문임을 (내가 보기에는) 다소 길게 설명한다. 예컨대, '철학(哲學)'이라는 단어는 'philosophy'라는 영어 단어를 일본인들이 번역할 때 만들어낸 단어이다. 우리는 이 단어를 그대로 가져왔으니 왜 'philosophy'가 '철학'이 되는지 알 길이 없다. 안 그래도 어려운 개념인데 번역어가 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전혀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점은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분명히 좋은 지적이다. 그렇지만 역시 개인적으로는 이 논의가 이 책에서 다루어야 할 분량 이상으로 조금 길게 느껴졌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길지 않은 (종이책 기준 180쪽) 좋은 책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교육자나 기자라면 꼭 읽어 보아야 할 책이다. 

 

➕ 이 책을 가지고 소통을 위한 읽기와 쓰기의 문제를 해찰한, 뉴스레터 '인스피아(Inspia)'의 해당 이슈는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이 책을 소개받았다. 또한 이 문제를 다룬 바로 그다음 주에 인스피아 측에서 저자 지비원을 인터뷰한 뉴스레터도 발행했으니 이것도 같이 보시면 좋을 듯.

https://stibee.com/api/v1.0/emails/share/9kCGVSU0U7UJpNqa4JgbHEVVGmZB5QI=

 

🎓읽을 수 있는 글, 읽을 수 없는 글

 

stibee.com

https://stibee.com/api/v1.0/emails/share/rbzNPrFofjXitNuX1GYIndfRv58DuNM=

 

🎓사람들은 인문학에 관심 없을까?[지비원 저자 인터뷰]

 

stib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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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문유석, <최소한의 선의>

 

 

문유석 전(前) 판사/현 작가가 생각하는 '법' 또는 '법치주의'를 쉽게 풀어 쓴 책이다.

저자는 '법'을 "사람들 사이의 넘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선()'인 동시에, 사람들이 서로에게 베풀어야 할 '최소한의 선(善)'이기도 하다"라고 해석한다.

 

살면서 일상에서 법에 대해 깊이 생각할 일은 ('이건 불공평해!'라고 생각할 때 이외에) 별로 없을 텐데, 이 책은 그런 기회를 제공해 준다.

그리고 의외로, 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감동적이고 찡한 순간들도 있다. 예컨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현실에 대한 회의를 잠시 접어두고 우선 헌법에서는 인간 존엄성의 근거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 보자. 헌법 교과서에 나오는 설명은 거의 비슷하다. '인격성 내지 인격 주체성' '인격의 내용을 이루는 윤리적 가치' '인간의 인격과 평가' '독자적 인격체로서 그의 인격을 근거로 지니는 고유한 가치' 등이다. 무슨 소리인지 와닿는 것이 있나? 짜증이 나더라도 인격자답게 참기 바란다. 교과서라는 게 원래 그런 법이다. 좀더 풀어 설명하면, 인간은 이성에 바탕을 준 자율적이고 윤리적인 인격의 주체이기 때문에 존엄하다는 얘기다. 이성﹒자율성﹒윤리성이 핵심 키워드라고 볼 수 있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이해되지만 여전히 의문이 들기는 한다. 무슨 성인군자만 존엄한 인간이라는 소리야? 도덕 교과서 같은 고리타분한 얘기인 것 같은데? 

(...)

헌법에서 말하는 인간의 존엄성은 앞의 헌법재판소 결정에도 나오듯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평소 늘 도덕적이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만을 골라서 존엄하다는 것이 아니다. 신이 부여한 특성이든 진화의 결과이든, 모든 인간에게는 최소한의 이성과 양심에 따른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존엄하다는 것이고, 그러한 능력이 있음에도 법을 어긴 사람에게는 벌을 부과한다는 것이다. 따랏서 인간의 존엄성은 보편적 인권의 근거가 된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기에 그의 인종﹒성별﹒종교﹒지능﹒재산 등과 관계없이, 또한 그가 선한지 악한지, 성인군자인지 범죄자인지에 관계없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고존엄'이라는 말은 코미디다. 존엄이란 비교급이나 최상급을 허용하지 않는다. 더 존엄하고 최고로 존엄한 존재가 있다는 것은 그 외의 모두는 존엄하지 않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마치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에 나오는,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는 말처럼.

 

그리고 나는 저자가 '자유'라는 개념에 대해 논의하는 부분에서 날카로운 매의 눈으로 지적하는 것도 속 시원하고 좋았다.

원래 자유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권리 또는 그런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타자에 의한 간섭, 구속만 없으면 자기가 알아서 이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의 사람들은 '간섭의 부재'를 강조하는 것이고,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누릴 수 없는 입장의 사람들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물적 조건의 분배'를 강조할 수밖에 없다. 결국 자유의 개념이 다른 것이 아니라, 자유를 위해 강조되어야 하는 수단이 다를 뿐이다. 이렇게 보면 '적극적 자유'라는 개념은 특별할 것이 없다. 전통적인 의미의 자유 개념으로 충분하다. '모두가 자유를 누리려면 간섭의 배제만으로는 부족하고 국가의 개입도 필요하며 생존권(사회권)과 참정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라고 정리하면 족하지 않을까.

(...)

원래 '진정한'이라는 수식어가 앞에 붙는 물건치고 변질되지 않는 것은 없기 마련이다. '자유'같이 보편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오리지널 브랜드가 있는데, 여기에 불만이 있고 다른 것을 강조하고 싶은 이들이 흔히 취하는 전략이 네이밍이다. 기존의 인기 있는 개념을 끌어다 쓰고 그 앞에 '진정한' 또는 '새로운'을 붙이는 것이다. '자유'에는 수식어가 필요 없다. 자유는 때로 편협하고 배타적이고 이기적이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은 평등, 존엄성, 공존 등 다른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보완해야지 자유를 재정의하는 것은 곤란하다. 자유란 백지 같아서 다른 것을 덧칠하면 어느새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매력 중 하나는 역시 재미있다는 것이다. 문유석 작가의 글을 읽어 보았다면 이미 알겠지만, 어려운 주제도 쉽게, 재미있게 풀어서 이야기하는 재주가 있는 분이니까.

예컨대, 이 책 첫머리에 저자는 책 제목으로 생각해 본 후보들의 목록을 공개한다.

다음은 책의 제목으로 생각해봤던 후보들의 긴 리스트다.

나를 지키는 법
이 험한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법
법블레스유
법은 도대체 왜?
공정하기라도 했으면
공정함이란 무엇일까
각자도생 사회에서 살아남기
생존을 위한 공존

…심지어 '알쓸신법'도 생각해봤고,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 교도소 구내 음악으로 늘 나오던 노래에 영감을 받은 '법은 어렵지 않아요'도 있었으며, 이왕 이리 된 거 갈 데까지 가보자는 맘으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법을 공부할 용기를 낼 권리의 온도'도 잠시 생각해 보았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법을 공부할 용기를 낼 권리의 온도'라니, 잘나간 책들 제목은 다 짬뽕하시려 했군요! 여기에서 난 무장해제가 되었고, 당장 이 책을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유머 감각을 좋아하고 법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볼 시간을 갖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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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박진영, <여전히 휘둘리는 당신에게>

 

 

이 책은 2013년 출간된 <눈치 보는 나, 착각하는 너>의 내용을 수정 및 보완한 전면개정판이다.

내가 이전에 리뷰를 쓴 적이 있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라서 리디셀렉트에서 다운 받아 봤다.

2019/12/09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박진영, <나는 나를 돌봅니다>

 

[책 감상/책 추천] 박진영, <나는 나를 돌봅니다>

[책 감상/책 추천] 박진영, <나는 나를 돌봅니다> 책표지에 "십 대를 위한 자기 자비 연습"이라고 쓰여 있는데, 나는 이 책이 내가 좋아하는 박진영 님(<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이 쓴 책

eatsleepandread.xyz

 

이 책의 매력은 마치 '겁먹지 마세요(Don't Panic)'라는 문구가 책 전체에 워터마크로 쓰여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거다.

무슨 말인가 하면, 저자가 사회적 동물인 우리 인간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든 결론은 '원래 사람들은 다 그렇답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안심하세요.'라는 느낌으로 끝난다는 거다.

심리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 굉장히 다정한 위로를 받는 기분이라고 할까.

 

'시작하며'에 저자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혼자서는 한순간도 잘 버티지 못하며, 사랑받고 싶어 하는 동시에 상처 받을까 두려워서 스스로 고립되기도 하고, 외로우면서 솔직하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타인으로부터 이해받고 싶다고 하면서도, 정작 나는 나와 다른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거부하고 배척하기도 한다. 무리 안에 있으면 구성원들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며 치사량에 가까운 술을 받아 마시는 등, 혼자라면 하지 않았을 비이성적인 행동도 서슴없이 저지른다. (...)

이 책 <여전히 휘둘리는 당신에게>의 첫 번째 목적은 하드코어한 사회적 동물이 우리 인간의 이상하고 신기한 속성을 이해하고, 나도 잘 모르던 나와 너의 모습을 아는 것이다. 두 번째 목적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외부의 환경이나 상황이 변해도 흔들리지 않는 '나다운 모습'을 설계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관을 바탕으로 저자는 '여전히 휘둘리는' 우리에게 위로를 건넨다.

 

나는 이러한 저자의 태도가 가장 잘 드러낸 게 '마치며'에 있는 이 세 문단들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앞으로는 관계나 사회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뭐 이런 걸로 힘들어 하냐'고 생각하며 나 자신을 미워하거나, 내가 느끼는 외로움을 부정하고 회피하거나, 또는 인간관계 자체에 회의적이 태도를 갖기보다는 사회적 생존을 도와주는 내 마음 장치들이 지금 나의 상태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지 가만히 들어 보도록 하자.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누구나 상처받기 쉬운 쿠크다스이며 소심하고 멍청한 실수를 저지른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나 또한 그런 평범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모든 인간이 외롭고 두렵고 상처받는다면 내가 그런 경험을 하는 것 또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한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냐며 호들갑을 떨 일이 아닌 것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아서 자존감이 떨어졌다면 이 또한 모두가 이따금씩 겪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자존감은 그저 나의 관계적 상태를 보여 주는 계기판일 뿐이라는 점도 기억하자. 본문에서 언급했지만 계기판을 보고 좌절한다고 해서 연료가 다시 차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자동차 연료가 떨어지면 크게 충격받지 않고 주유소에 가듯, 인간관계 상태가 좋지 않다(연료 수치가 낮다)면 누구에게, 어떤 부분에서 받아들여지고 싶은지 생각해 보고, 내 주변에 정말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어 보자(연료를 어디서 구할지 생각해 보고 채운다는 의미다). 이렇게 담담하게 나아갈 수 있으면 된다.

아, 얼마나 다정한지!

본문에도 이런 저자의 배려가 잘 드러나 있다. 몇 개만 보여 드리자면,

우리 뇌는 '사회적 뇌'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인간과 관련된 정보를 알아내는 데 매우 발달되어 있어 사람의 시선이나 얼궆 표정 등의 정보를 무의식적으로 매우 민감하게 알아차린다는 점 또한 기억하자. 사람들의 '시선'을 알아채는 데 특화된 영역, 얼굴을 기억하고 알아보는 데 특화된 영역, 심지어 사람들의 행동이나 감정 상태를 보고 내 행동과 감정인 것처럼 복사해서 표상하는 뉴런들도 존재한다. 남이 내 눈을 슬쩍 피한다든가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든가 하는 아주 작은 정보만으로도 쉽게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다. 앞으로 사소한 일에 소외감을 느끼는 일이 생기면,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하고 자신을 탓하지 말자. 우리는 애초에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어졌다.
결국 우리는 하드코어한 사회적 동물인 탓에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소외되기도, 소외시키기도 매우 쉬운 존재다. 우리는 누구나 사회적 충격에 쉽게 부서지고 마는 '쿠크다스'들이다. 주변의 누군가가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면 세심한 위로와 따듯함을 보여야 하는 이유다. 물론 여기에 나도 해당된다. 내가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끼고 있을 때 이렇게 소심해서 얻다 써먹냐고 욕하지 말고, '내가 지금 상심이 크구나. 외롭구나. 사랑이 필요하구나'라고 (나라도) 내 마음을 이해해 줘야 하는 것이다.
앞의 공놀이 실험에는 뒷이야기가 있다. 공놀이에서 소외당해서 의기소침해진 사람에게 복수에 나설 기회를 준다. 예컨대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게임을 하게 하는데, 이긴 사람이 진 사람에게 벌칙을 줄 수 있다. 그러면 이전에 소외당했던 사람들은 소외당하지 않았던 사람들에 비해, 기회가 생기면 매운 걸 싫어한다는 사람의 음식에 핫소스를 들이붓거나 자신이 게임에서 이겼을 때 진 사람에게 심한 벌칙을 준다. 어디서 뺨 맞고 어디서 화풀이한다고, 소외당한 분노를 애꿏은 낯선 이에게 푸는 것이다. 이런 행동이 지속되면 비뚤어지고 사람들로부터 다시 거부당할 확률이 점점 더 높아지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하지만 앞서 타이레놀 실험에서 등장한 심리학자 디월은 이렇게 다수가 외면하는 상황에서 단 한 명이라도 공을 던져 주거나 나랑 같이 일하자고 하는 등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면 공격성이 높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한 명에게만 받아들여져도 두 명, 세 명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낮은' 공격성이 나타났다. 여러 사람일 필요도 없이,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받아들여 주는 사람이 존재하는지의 여부가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단 한 명,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 주고 아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살아갈 수 있는 게 인간이라고들 한다. 꼭 인간일 필요도 없고 강아지, 고양이에 의지하며 삶을 지탱해 가는 독거노인들의 이야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작은 따스함의 존재가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따듯한 시선을 가진 작가의 책을 어떻게 편안한 마음으로 읽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인간관게에 휘둘려서 괴롭거나 그런 나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신 분이라면 강력히 추천한다. 이 책을 통해 위로도 받으시고 마음도 치유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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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매기 앤드루스, 재니스 로마스, <100가지 물건으로 다시 쓰는 여성 세계사>

 

 

책 제목이 내용을 너무 잘 요약해 줘서 따로 설명이 필요 없다.  그러니 개중에 내가 제일 인상 깊었던 물건만 몇 가지 소개하겠다.

 

07 | 위생용품 - 생리대

생리대의 발명은 수백만 여성들에게 있어 월경에서 비롯되는 어려움과 잠재적인 곤란함을 완전히 해결해 놓았다. 최초의 생리대는 1988년에 영국의 사우스올(Southall's)사가 생산했다. 미국에서는 1896년에 리스터(Lister's)사가 처음으로 일회용 생리대를 생산했다. 그러나 이 두 제품 모두 대부분의 여성들에게는 너무 비쌌다. 유럽과 미국의 여성들 대다수가 일상적으로 생리대를 사용할 수 있게 되기까지 수십 년이 걸릴 터였다.

(...)

생리대와 탐폰의 역사는 여성의 삶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상징한다. 생리대 발명 이전에 여성들은 생리 기간 동안에 여행을 가거나 운동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일쑤였다. 생리는 뭔가 부끄러워해야만 하는 것처럼 여겨졌으며 입에 담는 법이 없었다. 종종 '저주'라는 단어로 표현되기도 했다. 지금은 많은 나라에서 생리대와 탐폰을 공공연하게 광고하고 있으며 여성들은 생리현상을 일회용품으로 위생적이고 편리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여성이 삶의 모든 면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데 크나큰 장애물이었던 것은 이제 사소한 불편함 정도로 바뀌어 버렸다. 여성은 더 자유로워졌다. 단순히 신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어색함, 수치심, 편견으로부터의 자유였다.

생리대 또는 탐폰이 편한 거야 만인이 인정하는 사실이니 (실제로 천 생리대나 문컵을 사용하는 사람일지라도 이 점은 인정할 거다) 여성 세계사를 바꾼 물건으로 생리대가 꼽히는 거야 놀랍지 않다.

다만 인류의 절반인 여성의 삶을 편하게 하는 이런 물건이 내 생각보다 늦게 발명된 게 놀랍다. 세상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이게 연구나 발명이 필요한 문제라는 문제 의식이 부족했던 듯하다. 세상에... 그 전까지는 도대체 천 생리대 같은 걸로 어떻게 견뎠던 걸까.

 

29 | 출산에서의 의료적 개입 - 산과겸자

1588년경 이발사인 피터 챔벌린(Peter Chamberlen)은 산모와 아기의 생명을 모두 구하는 혁신적인 장치인 겸자를 발명했다. 구멍 난 커다란 숟가락같이 생긴 이 겸자로 태아의 머리를 감싸고 고정시키면 두개골을 보호할 수 있었다. 이 혁신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챔벌린과 그의 형제는 영국 궁정의 여성들의 분만에 참여했고 유럽 전역으로 활동 반경을 넓혀 엄청난 대가를 받았다. 이윤에 이끌린 그들은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며 삼대째 겸자의 비밀을 지켰다. 그들은 산모에게 눈가리개를 하고 수행원을 내쫓은 뒤 금속 장치 소리를 가리기 위해 막대기를 두드리고 종을 울렸다.

겸자의 발명은 의사들이 출산을 통제할 수 있는 길을 닦은 중요한 요소였다. 1721년 벨기에의 이발사인 장 팔핀(Jean Palfyne)은 직접 개발한 겸자를 파리의 과학학술원에 제시하면서 산도에 맞는 곡선을 추가하여 개량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영국의 외과의사 윌리엄 스멜리(William Smellie)와 프랑스의 앙드레 르베(Andre Levet)를 포함한 의사들이 이 디자인을 다듬었다. 부유한 가정이 이발사나 의사를 고용하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고 결국 남자가 출산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18세기 동안 유럽에 겸자가 널리 보급되었을 때에는 남성들만이 합법적으로 이 '수술'을 진행할 수 있었다. 수술은 높은 수수료를 요구했고, 의사들은 산파들이 더럽고 무능하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남성 우월적 분위기 속에서 분만실의 여성이 자신의 주된 역할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웠다.

겸자가 출산 과정에서 그렇게 큰 도움이 되는 도구인 줄 몰랐다. 그리고 16세기 당시에 이발사면 지금의 의사가 하는 일을 했던 사람들인데 의료 윤리라든가, 산모들이나 산모의 가족에 대한 배려 같은 건 전혀 없이 산모에게 눈가리개를 시켰다고?

18세기의 이발사나 의사들도 환멸 난다. 자신의 성이 아기를 낳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거기에 끼어들려고 하는 거지? 아니 물론 남성도 산부인과 의사가 될 수 있고 출산을 도울 수 있지만, 자신의 이득을 위해 산파들을 비난하고 남성 우월적 분위기를 조장할 것까지는 또 뭐란 말인가...

 

30 | 고단함의 해방 - 재봉틀

최초의 재봉틀은 1790년 영국의 토머스 세인트(Thomas Saint)가 발명한 이래 50년 동안 개량되고 개선되었다. 상업용으로 처음 고안된 재봉틀은 의류제조업에 혁명을 일으키며 기성복을 탄생시켰다. 1850년대에 미국과 서유럽에서 가정용 재봉틀이 도입되자 여성의 가내 바느질 형태 역시 변화를 맞이했다.

미국의 발명가 헬렌 블랜차드(Helen Blanchard)는 1870년대와 1880년대에 재봉틀을 여러모로 개량하며 특허를 얻었다. 지그재그형으로 바느질을 하고 단춧구멍을 만들 수 있는 최초의 재봉틀과 편직물을 바느질하는 동시에 다듬을 수 있는 오버시밍(over-seaming) 재봉틀이 그것이다. 최초의 전기 재봉틀은 1889년에 싱어(Singer)사가 만들었다. 가정용 재봉틀의 효율성이 향상되면서 영국의 한 잡지는 '세계 역사에서 재봉틀은 지금까지 어떤 발명품보다 여성을 육체노동의 고단함에서 가장 많이 해방시켜 주었다'고 단언했다. 간단한 드레스 한 벌 만드는 데 10시간이 걸렸다면 이제 한 시간 만에 만들 수 있었고, 남성용 셔츠를 만드는 시간은 14시간에서 1시간 15분으로 줄어들었다.

(...)

재봉틀을 가지면 적은 노력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이 의류 배급을 시작하고 '수선해서 오래 입기'에 관심이 집중되며 그 필요성은 한층 높아졌다. 제한된 쿠폰 수당에서 재료를 사서 직접 옷을 만들거나 더 나은 삶을 위해 재봉사를 고용함으로써 더 나은 가치를 얻을 수 있었다. 많은 여성들은 전쟁 때문에 바느질을 배웠다고 생각했다. 어떤 주부는 자신의 일감이 이전에는 단추, 어깨 끈, 그리고 다른 일상적인 수리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당시 재봉틀 공장이 전쟁물자를 생산하게 되면서 중고 제품에는 웃돈이 붙어 거래되었다. 그녀의 남편이 그녀에게 재봉틀을 구해준 후 그녀는 수선에 대한 책을 샀는데 그것은 그녀의 바느질 기술에 있어서 완전한 혁명을 의미했다. "정말 보물이었어요. 그걸로 커튼, 아이들 코트, 심지어 탑코트와 내 드레스까지 만들었죠."

재봉틀이 여성을 육체노동의 고단함에서 가장 많이 해방시켜 주었다고? 놀랍다.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어서...

아무래도 나는 '재봉틀'이라고 하면 공장에서 미싱을 돌리는 공순이들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세대라 그런 것 같다.

요즘에는 취미로 옷 만들기나 옷 리폼 등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취미'의 영역이지 여성들이 기본적으로 하는 가사노동에 속하지 않으니까.

기껏해야 단추 달기나 구멍 메우기, 간단한 옷 수선 정도가 전부지, 그 이상은 세탁소에 맡기거나 아예 새옷을 사지 않나.

하지만 기성복이 대량 생산 되기 전에는 분명 온 가족 옷을 다 여성이 만들어 입혔겠지. 그 점을 고려한다면 재봉틀은 획기적인 발명품이 맞다.

 

32 | 진화론의 기초 - 플레시오사우루스 화석]

플레시오사우루스(Plesiosaurus)는 메리 애닝(Mary Anning)이 화석 발굴가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발견한 수백 개의 화석 중 하나에 불과하다. 1799년에 라임 레지스(Lyme Regis)에서 태어난 메리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리처드(Richard)의 지도를 받으며 주변 절벽에서 화석을 찾는 안목을 개발했다.

메리는 학교 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지만 지질학, 고생물학, 해부학을 독학했다. 유명한 과학자들이 메리의 작은 오두막을 방문하거나 그와 서신을 주고받았고, 그에게서 화석을 사서 그의 발견물을 기록했다. 메리의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엔 화석 판매로 생계를 꾸렸지만 그의 예상치 못한 죽음 이후에 메리의 어머니와 오빠는 무일푼이었고 살아남기 위해 교구 구제에 의존했다. 메리는 본격적으로 화석 발굴을 시작했다. 그의 오빠 조셉도 화석을 수집했고 1810년에 메리가 처음으로 발견한 중대한 화석 이크티오사우루스(Ichtyosaurus)의 발굴에 동참했다. 절벽 면에서 화석을 발굴한 메리는 고작 열두 살이었다. 그 후 조셉은 화석 발굴에 거의 참여하지 않고 대신 훨씬 더 안정적인 가구 덮개 교체 일을 했다.

(...)

메리의 화석 발견은 지구 과거의 과학적 재건에 중요한 발전이었으며, 1859년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종의 기원>에서 제시한 진화론의 기초를 제공했다. 메리는 결코 부유하지 않았고 여성이었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과학자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보통 공룡에 대한 지식이 가장 많을 때가 5살 때, 또는 그 나이의 아이가 있을 때라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 '5살 아이'는 내게 언제나 놀이터에서 더러워지기를 두려워 않는 말썽꾸러기 남자아이의 이미지였다.

그런데 그 공룡 화석의 권위자이자 고생물학의 개척자 중 한 명이 여성이라고? 아니, 어째서 내가 여태껏 이런 얘기를 못 들어 봤던 거지? 사기 당한 기분이다.

공룡이라 함은 '당연히' 남성적인 느낌, 남자애들이나 좋아하는 것이라는 이미지였는데. 에잇, 공룡 따위에게 성별이 어디 있다고! 

내 편협한 사고도 유감이지만 '공룡을 좋아하는 건 대개 남자애들'이라는 이미지를 은근히 주입한 사회도 잘못했네!(책임 전가...)

정말 세상 만사는 배우고 볼 일이다. 알게 되니 세상을 보는 시선이 이전과는 같지 않구나.

 

냉장고나 라디오처럼 이젠 너무나 익숙해서 '이거 없이 도대체 어떻게 살았지?' 싶은 물건도 자주 언급된다.

나도 라디오에 관한 부분을 인용하려고 했는데 그럼 너무 길어질 거 같아 간단히만 요약하자면, 라디오는 전 세계를 집 안 거실로 들여온 도구다. 여성들의 사회 참여도 도왔고.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알고 보면 놀라운 이야기들이 많아서 정말 흥미롭게 잘 읽었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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