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조성익, <혼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주거 실험>
새해에는 조금 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어 보고자 이 책을 골랐다. 셰어하우스 ‘맹그로브’를 설계한 건축가가 쓴 <혼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주거 실험>은 ‘맹그로브’를 설계하며 어떻게 하면 1인 가구가 셰어하우스 내의 커뮤니티와 어울려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한 내용을 담았다.
첫 꼭지인 ‘혼자의 시대, 함께의 집’은 이렇게 시작한다.
2년 전 여름, 사무실로 설계를 의뢰하는 이메일이 왔다. 의뢰인은 1인 가구를 위한 공유주택을 계획하고 있으며 프로젝트의 이름은 ‘맹그로브’라고 했다.
’맹그로브 프로젝트’는 1인 가구를 위한 대안 주거를 만드는 시도입니다. 우리가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목적은 가격에 비해 질이 낮은 1인 주거에 대안을 제시하려는 것도 있지만, 그들이 함께 모여 사는 경험을 통해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1인 거주자를 위한 공유주택을 지으려고 하는데, 살다보면 좀 더 괜찮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집으로 설계해보자는 것이었다. (…)
그런데 맹그로브 측에서 보낸 이메일은 신중한 목소리로 건축가에게 하고자 하는 일의 최종 목적지만을 간결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단정히 정돈된 이메일 내용 중에서 건축가인 내 마음을 끈 것은 다음의 구절이었다.
우리는 미래의 삶을 계획할 때, 그리고 나와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서투른 점이 많습니다. 어떤 방법이 있는지 혼란스럽고 어렵기만 합니다. 비슷한 고민과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동아리를 만드는 것처럼, 비슷한 생애 주기에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면서 공통의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래서 저자는 ‘따로, 또 같이’ 살 수 있는 셰어하우스를 설계하고, 자신의 사무실 내 디자이너 현수에게 ‘거주 후 평가(post occupancy evaluation)’를 의뢰한다. 거주 후 평가란, 말하자면 새집을 살아 보고 자신의 경험을 말해 주는 ‘베타 테스터’라 할 수 있다. 건축가가 상상한 모습이 과연 실제 거주에서 일어나는지 아닌지 평가해야 하니까. 이 책은 거의 ‘베타 테스터’ 현수 씨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이러이러한 것을 의도해 이렇게 설계했는데 현수 씨가 살아 보니 실제로 그렇더라, 또는 이런 점이 아쉽더라 하는 식으로.
현수 씨가 직접 입주해 생활해 보고 저자가 받은 ‘피드백’은 대체로 이랬다.
살면서 확인해보니 설계 단계에서 우리가 계획했던 것 중에는 뜻대로 된 것도 있었고 아닌 것도 있었다.
예를 들어, 주방 근처에서는 사람들이 쉽게 친해지고 이웃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우연한 만남을 기대했던 복도에서는 다들 어색해하며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현수는 복도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면 잠깐 문 앞에 서서 이웃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밖으로 나간다고 헀다.
이들이 만나고 이웃이 되는 문제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독립 정신으로 무장한 1인 가구들은 자신의 삶이 조금이라도 타인과의 관계로 인해 침범당할까 봐 늘 불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저자가 찾은 대안은 “짧지만 잦은 스침을 만들자.”는 것이다.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지할 정도의 거리감을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했다. 교류하고 대화를 유도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쑥스러움을 완화하고 만남의 부담을 덜어주는 집을 만드는 일도 못지않게 중요해 보였다. 깊은 관계를 맺기도 전에 지레 포기하지 않도록, 계단에서 지나치거나 주방에서 요리를 하다가 짧게 눈인사를 하며 스치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솔직히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그걸 도대체 어떻게 할 건데요?’라고 생각했는데 저자는 꽤 그럴듯하게 이 문제를 해결한다. 예컨대,
- 텔레비전 대신 소파와 의자가 가운데를 보도록 배치하고, 가운데에 커다란 테이블을 둬서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 거리를 확보한다. → 상대방의 시선에 부담을 느끼지 않으면서 각자 자기 일(스마트폰을 보거나 노트북으로 일을 하는 등)을 할 수 있다. 그러면서 반대쪽에 앉은 타인의 얼굴을 흘끔 보다가 잠깐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 ‘싱글 모드’와 ‘멀티 모드’ 두 가지가 가능한 식당 → 혼밥을 하고 싶을 땐 싱글 모드 식당에서, 누군가와 얘기를 하거나 같이 요리를 하고 싶을 때는 ‘멀티 모드’ 식상에서 타인과 같이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다.
- 실내에 들어올 때 신발장을 거치도록 설계된 우회로 → 신발이나 가방을 가지러 가는 척하면서 우회로로 이웃을 피할 수 있다.
특히 이 ‘우회로’ 아이디어가 내가 보기엔 제일 좋은 아이디어 같다. 저자 말대로 아무리 ‘짧고 잦은 스침’을 설계 단계에서 의도했더라도 누군가에겐 그게 스트레스를 주는 요인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과 마주칠 필요 없이 눈에 안 띄고 살짝 돌아가는’ 우회로를 만든 것에서 정말 사는 사람을 배려했구나 느꼈다. 사실 모든 학문 또는 분야가 그렇지만 집 또는 사무실 같은 공간은 사람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한번 지으면 바꾸기 어렵고 큰돈이 들어가는 일이니 건축은 그 사용자를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그러려면 사용자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하고 관찰을 해야 하는데,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일 듯. 나는 못 하겠네…
요즘은 1인 가구가 많은 데다가 건축에 대해 교양 수준으로 쉽게 알려 주기까지 하니 이 책을 권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건, ‘베타 테스터’가 남성인 현수 씨 한 명뿐이라는 것. 여성 테스터도 한 명은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여기에는 내 나름대로 두 가지 이유를 댈 수 있다. 첫 번째, 남자들은 다른 이들과 생활할 때 ‘안전’에 위협을 느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여자들은 반드시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맹그로브 숭인’의 3층은 여성 전용으로 오직 여성 입주자들만 출입하고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이 계속 자기 방에만 머물 수는 없게 마련이다.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내 ‘안전’에 위협이 되는 사람을 방 밖으로 나가면 계속 마주칠 수 있을 텐데, 설계 면 이외에 건물 관리 면에서도 여성 입주자들이 안심할 수 있는 체계가 잡혀 있기를 바랄 수밖에.
두 번째, 이건 좀 더 인테리어와 관련된 이유인데, 여성의 체구와 남성의 체구는 다르다. 저자가 책 후반에 빌트인 수납장과 가구 이야기를 해서 나도 여기까지 생각이 닿았다. 대략 172cm인 사람과 159cm인 사람(각각 2022년 기준 한국 남성과 여성의 평균 키; 출처)의 눈높이와 손이 닿는 높이는 다를 수밖에 없다. 가구와 인테리어는 남성 기준으로 짜인 걸까? 키 작은 사람용, 키 큰 사람용, 이렇게 두 가지 버전의 방이 제공될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이런 두 가지 이유 때문에라도 여성 테스터가 한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아무래도 건축 일이 거칠고 힘들다 보니 남자들이 많은 업계이긴 하지만 찾아보면 분명 여성 건축인이 있을 것이다. ‘알쓸신잡3’에 출연한 김진애 도시계획학 박사도 여성 아닌가. 여성을 위해 설계를 한다면 (’디폴트’로 여겨지는 남성을 위한 설계와) 무엇이 다를까? 갑자기 너무 궁금해졌다. 여성 건축인들에 대한, 또는 그들이 쓴 책이 있나 찾아본 결과, 한 권이 내 레이더에 잡혔다. 데스피나 스트라티가코스가 쓴 <우리는 여성, 건축가입니다>. 곧바로 내 TBR(To Be Read; 읽을 책 목록)에 추가했다. 교양을 넓히기 위해 건축공학에 관한 책을 찾아 읽다가 이렇게 또 더 넓게 가지를 뻗쳐 나갈 기회를 얻게 되니 참 좋다 😁 혹시 여성 건축인과 관련된 책을 더 추천해 주실 수 있으시면 댓글로 부탁드려요!
➕ 바로 위에 남성이 ‘디폴트’로 여겨진다는 표현을 했는데 어떤 데이터든 성별을 구분해 모으는 것은 중요하다. 안 그러면 남성들의 데이터는 ‘과대대표’되고 여성들의 데이터는 ‘과소대표’되어, 결국에는 그 데이터의 정확성이 떨어지고 만다. 이 점을 정확하게 짚어낸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의 <보이지 않는 여자들>을 저자에게 추천하고 싶다.
2022.02.04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보이지 않는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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