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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지비원, <왜 읽을 수 없는가>

 

 

최근 '심심한 사과의 말씀' 논란이나 '사흘' 논란으로 인해 (이 논란들을 잘 모르시는 분들은 여기를 클릭) 요즘 세대의 문해력에 대한 탄식과 비판이 많이 나왔다. 많은 이들이 '어떻게 그렇게 기본적인 단어도 모르냐', '모르는 것 자체도 모르지만 모르는 것을 배우려고 하지 않고 뻔뻔하게 왜 어려운 말을 쓰냐고 공격적으로 나오는 게 더 문제다' 같은 반응을 보였다. 다 맞는 말이고 다 공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이해시키고 싶다면 어떡해야 할까? 상대방에게 문해력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이해시켜야 한다면?

이런 질문에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지비원의 <왜 읽을 수 없는가>라는 책을 추천받게 되었다(글 하단 링크 참조). 저자는 주로 일본어 인문교양서를 만드는 편집자 겸 번역가이다. 그는 노야 시게키의 <어른을 위한 국어 수업>이라는 책을 번역하며 '어떻게 하면 상대를 이해시킬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고, 그간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에세이 형식으로 쓴 게 바로 이 책이다.

요즘 10대, 20대들 문해력이 떨어진다고 비판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이해시켜야 하는 의무가 있는 교육자들(교과서나 인문, 과학 등 전문서적의 저자들 포함)이나 현대 사회의 소식을 전하고 그에 대한 비평이 업인 기자들이 비판만 하고 손을 놓고 있을 순 없는 일 아닌가. 어떻게든 상대를 이해시키기 위해, 그들의 눈높이에서 글을 쓰고 이야기해야 한다. 저자는 '들어가며'에 이렇게 썼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진단과 해결책이 쉽게 나올 수는 없고, 전문 분야에 따라 그 해법도 다를 것이다. 나는 출판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했지만 이 문제에 대해 견해를 내놓을 만한 주제는 못 된다. 그러나 오랜 시간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이들, 특히 인문학 연구자들의 문장을 많이 다루었고, 이를 오류가 없고 되도록이면 독자층에게 가장 적합한 형태로 전달해야 하는 책임을 지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어떤 '글'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일차적으로 글쓴이와 그 글을 편집하는 사람에게 있다고 믿는다. 그 때문에 나는 '안 읽는' 독자들을 먼저 탓하고 싶지는 않다. 그 대신 글쓰기가 직업인 사람들, 자신이 쓴 글에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의 문장을 한번 돌아보고 싶다. 글이 길고 조금만 어려워도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는 현상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질책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넓고 얕은 지식'이든 뭐든, 기왕이면 머릿속을 채우는 게 채우지 않는 것보다 백배 낫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왜 전문가가 조금만 재미있게 설명한다 싶으면 시청률이 그렇게 뛰어오르는가? 왜 '넓고 얕은 지식'을 표방하는데 책이 그렇게 많이 팔리는가? 단언컨대 사람들이 웬만하면 교양을 쌓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또 자신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지식은 누구나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 한다. 쉽고 얄팍해 보이는 프로그램이나 책이 인기를 얻는 현상은 사람들의 지식욕을 이해하지 못하면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일반인들의 지식욕이 누군가 아무렇지 않게 구사하는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문장에는 접근할 길을 찾지 못하는 것뿐이다.

솔직히 어려운 글이 너무 많다. 전문 서적이야 전문가를 위해 쓰인 것이니 어려운 게 당연하지만, 전문가가 아닌 독자를 위해 쓰인 글인데도 어려운 게 많다. 글을 전혀 안 읽는, 또는 어떤 주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아, 이런 내용이구나' 하고 이해할 텍스트가 있어야 하는데, 초급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이 없다. 그러니 어떤 주제가 됐든 흥미를 가져도 조금 파 보려다가 어렵다고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뉴스 매체에 실리는 글조차 그냥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렵다. 이걸 과연 10대, 20대 젊은이들이나 노인들이 보고 한번에 이해할 수 있을까? 저자가 '뉴스'로 분류되는 글 중에서 가져온 아래 예들을 보시라(순서가 달려 있지만 각각 다른 글에서 나왔으며, 이어지는 내용은 아니다).

1. 이런 단일 토지세론보다 현대 사회에 더 묵직한 한 방을 날리는 것은 그[헨리 조지-인용자]의 정치경제학 밑바탕에 흐르는 자연정의론적 세계관이다. 그가 정치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그의 정치경제학에 있는 자유방임론적 요소를 상당 부분 포기했을 것이다.

2. 2020년대에 바우만의 사상이 던지는 함의는 그렇다면 뭘까. 바우만의 탁월성은 새로운 개념의 발굴에 있다. 특히 그는 흥미로운 개념틀을 주해 우리 시대를 날카롭게 분석해왔다. 그 대표적인 개념틀들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입법자와 해석자'다. 바우만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 개입한다. 그에 따르면, 모더니스트들은 확실성과 보편성의 기준을 세우려는 입법자로서의 입장을 취한다.

3. 슈미트주의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아예 보편성과 일관성 자체를 포기한다.

자유주의자들은 (A 이른바 '원칙이성(Grundsatzvernunft)'에 따라 사유하고 행동한다. 그들은)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보편적﹒추상적 기준을 갖고 있다. (……)

이와 달리 전체주의자들은 (B '기회이성Gelgenheitsvernunft'에 따라 사유하고 행동한다. 그들은) 보편적 기준 없이 매사 그때그때 상황의 필요에 따라 판단한다.

보자마자 '그게 뭔데 씹덕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자연정의론은 뭐고 바우만이랑 슈미트주의자는 누구인가? 이걸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가 이해할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건가? 글만 봐도 '네가 이 정도 글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너와 이야기해 주겠다'라는 오만한 태도가 엿보인다. 이런 글을 대중매체에 써 놓고서 독자들이 이해를 못한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독자인 이쪽이 화가 나는 게 당연하다. 애니 오타쿠가 애니 캐릭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늘어놓으면 '으, 사회성 없는 씹덕'이라고 비웃으면서 왜 이런 글을 전문 서적도 아니고 전문가들을 위한 논문도 아닌 '대중매체'에서 쓰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글의 저자가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글을 쓴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독자들은 이런 글을 읽지 못하는 것에 부끄러워하며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존나 가만히 있어야겠다' 해야 하나?

'나도 이해하고 싶다. 이해하고 싶으니 제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해 달라.' '심심한 사과'나 '사흘' 논란을 일으킨 그 소위 '무식한' 사람들의 심정도 사실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너무나 미세하고 또 자존심에 가려 사실 본인들도 잘 몰랐겠지만 그들도 이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다 해도 그건 너무 기본적이고 쉬운 단어인데, 그걸 심지어 찾아보지도 않고서 자기네들이 옳다고 우겼잖아?' 하며 반박하고 싶은 분들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교양'이나 '상식'처럼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도 없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뫄뫄 정도는 상식 아닌가요?' 같은 글이 올라오면 언제나 뜨거운 반응을 얻게 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예시로 든 저런 글을 쓰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헨리 조지, 바우만, 슈미트 등을 모르는 나를 무식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잘 안다'와 '모른다', '유식하다'와 '무식하다'의 차이는 언제나 자의적이니까.

솔직히 나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글쓴이들이 글을 쉽게 써야 한다는 생각에 그쳤다. 그런데 이 서평을 쓰기 위해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대중을 상대로 이해하기 쉬운, 쉽게 설명하는 글을 쓰는 것은 교육자 또는 기자 들의 의무이고 또한 그런 글을 읽을 권리가 대중에게 있다. 자기만의 감상에 벅차올라 그것을 상대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전달하는 데는 관심이 없는 씹덕을 만나면 그와의 정상적인 대화를 포기하게 되듯, 이 시대의 많은 이들도 '('심심하다', '사흘' 같은) 어려운 말을 이해할 수 없으니 너와 대화하지 않겠다'라는 결정을 내린 게 아닐까. 그들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게다가 태어날 때부터 핸드폰, 인터넷, 유튜브 같은 미디어를 접해 긴 글 읽기가 더 어렵게 느껴지겠지. 이런 상황에서 그냥 그들을 비웃고 비난만 할 게 아니다. 그들을 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책 후반에는 '어려운 글'뿐 아니라 입문서도 때때로 어려운 이유 중 하나로 전문 용어 자체가 일본에서 번역해 들여온 용어를 가져왔기 때문임을 (내가 보기에는) 다소 길게 설명한다. 예컨대, '철학(哲學)'이라는 단어는 'philosophy'라는 영어 단어를 일본인들이 번역할 때 만들어낸 단어이다. 우리는 이 단어를 그대로 가져왔으니 왜 'philosophy'가 '철학'이 되는지 알 길이 없다. 안 그래도 어려운 개념인데 번역어가 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전혀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점은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분명히 좋은 지적이다. 그렇지만 역시 개인적으로는 이 논의가 이 책에서 다루어야 할 분량 이상으로 조금 길게 느껴졌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길지 않은 (종이책 기준 180쪽) 좋은 책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교육자나 기자라면 꼭 읽어 보아야 할 책이다. 

 

➕ 이 책을 가지고 소통을 위한 읽기와 쓰기의 문제를 해찰한, 뉴스레터 '인스피아(Inspia)'의 해당 이슈는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이 책을 소개받았다. 또한 이 문제를 다룬 바로 그다음 주에 인스피아 측에서 저자 지비원을 인터뷰한 뉴스레터도 발행했으니 이것도 같이 보시면 좋을 듯.

https://stibee.com/api/v1.0/emails/share/9kCGVSU0U7UJpNqa4JgbHEVVGmZB5QI=

 

🎓읽을 수 있는 글, 읽을 수 없는 글

 

stibee.com

https://stibee.com/api/v1.0/emails/share/rbzNPrFofjXitNuX1GYIndfRv58DuNM=

 

🎓사람들은 인문학에 관심 없을까?[지비원 저자 인터뷰]

 

stib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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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남형도, <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남기자의 체헐리즘'은 많은 이들이 이미 잘 알 것이다. 브라질리언 왁싱을 직접 체험해 보고 쓴 기사가 웃기다며 인터넷 커뮤니티에 퍼진 것을 나도 보았으니까. 그 기사들이 모여서 책으로 나왔다. 안타깝게도 그 브라질리언 왁싱 기사는 이 책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왜죠!).

그래도 좋은 기사들이 많다. 내가 보기에 제일 잘 쓴 건 '사람이 버린 강아지, 사람 보고 환히 웃었다'라는 제목의 꼭지인데, 기자가 유기견 보호소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나서 쓴 거다. 나는 애완동물을 비롯해 동물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므로 이 꼭지에 등장하는 강아지들 이야기가 나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고, 그냥 그 글의 구조가 내가 생각하기에 제일 바람직했다.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주는 주제인 데다가 농림축산검역본부 통계를 빌려와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 주고 유기견 보호소 운영자의 말을 인용해 '강아지 공장'에 대한 허가와 처벌을 엄격하게 할 것, 강아지들에게 칩을 심어 주인을 추적할 수 있게 해서 동물 유기를 막을 것, 현행법과 제도를 개선할 것을 주장한다. 완벽한 구조다. 이 외에도 폐지 줍기 체험('폐지 165킬로그램 주워 1만 원 벌었다'), 환경미화원 체험('홍대의 중심에서 토사물을 쓸었다'), 시각장애인 체험('눈 감고 '벚꽃축제'에 갔다'), 소방관 체험(''35킬로그램 방화복' 입고 계단 오르니 온몸이 울었다') 등은 정말 훌륭하다. 이런 건 교과서에 실어도 좋을 듯하다.

물론 '이 기사는 도대체 왜?' 싶은 것도 있긴 하다. '62년생 김영수'라는 꼭지는 도대체 무엇을 보여 주고자 한 것인지 모르겠다. 일단 제목부터가 많은 여성들에게 의미가 깊은 작품, <82년생 김지영>을 오마쥬한 것인데, 그만큼의 사회 비평이 들어 있는 것 같지 않다. 62년생, 그러니까 현재 50대, 60대인 남성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알겠는데 (글 앞머리에 '5060 아버지 세대 네 분을 인터뷰해 그를 바탕으로 만든 소설'이라고 기자도 밝히고 있다) 딱히 새로운 점은 없다. 회사에 충성하며 일했는데 IMF가 닥쳐 명예 퇴직을 당하고, 그 후에도 자녀들을 부양하기 위해 어떻게든 열심히 일을 했다, 하는 이야기에 우리가 모르는 점이 뭐가 있지? 우리 아버지들이 힘들게 살아오신 거 알겠는데, 이걸 이렇게 써 봤자 '라떼는 말이야' 그 이상, 그 이하의 무엇도 안 되지 않나? 감상주의적으로 '우리 아버지들이 이렇게 열심히 일했어요!' 말하는 것에 어떤 효용이 있는지 모르겠다(그럼 뭐 그 시대 여성들은 열심히 일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느라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자녀들과 부드럽고 원만한 의사소통이 안 되고, 스스로 부성을 키울 수 없었던 것은 후회되지 않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이렇게 평생 열심히 일했는데 국민 연금이 자금 운용을 잘 못해서 그것만으로 여생을 지내기 어려워 또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같은 흐름이었다면 이 정부가 노인들을 잘 돌보지 못한다는 데 초점을 맞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건 적어도 꼰대의 감상주의적인 자기 연민처럼 들리지는 않을 거고, 노인 일자리 확충이라든지 노인에게 주어지는 혜택 문제를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근데 '62년생 김영수'는 그 기회를 놓쳤다. 이 꼭지에 비하면 내가 별로라고 생각했던 다른 꼭지들(예컨대 )은 차라리 선녀로 보인다.

이 글을 마무리 짓기 전 기자님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기자님, 이 책 맨 첫 꼭지가 '브래지어, 남자가 입어봤다'인데, 브라가 얼마나 답답한지 직접 체험해 보는 정신은 정말 멋집니다만, 사람들이 기자님을 쳐다본 건 '남자가 브라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브라를 입었다고 쳐다보진 않죠. 왜냐하면 여자에게 브라는 그냥 기본, 디폴트 장착 아이템이니까요. 하지만 여전히 온갖 이유를 갖다 붙이며 여자들을 쳐다본답니다. 가슴이 크다, 노출이 많다, 브라를 안 입었다, 심지어는 그냥 가슴이 거기 있으니까 등등. 브라가 비싸게 느껴지는 것은 맞지만, 브라를 입음으로써 타인의 불쾌한 시선을 100% 피할 수 있다면 차라리 기꺼이 입겠습니다. 문제는 브라가 아니라는 거죠. 또한 와이어가 달린 브라가 너무 답답하기 때문에 요즘엔 그런 브라보다 편한 브라렛이 트렌드가 아닌 그냥 하나의 옵션으로 자리잡았어요. 국내에도 브라렛을 만드는 브랜드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건 기자님이 여성이 아니라서 잘 모르실 수 있습니다. 기사 말미에 나중에 딸이 생기면 브라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고 말해 주겠다고 하셨는데 따님이 브라가 너무 불편하다고 한다면 브라렛을 권해 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물론 개인적으로는 다음 세대를 위해 성차별이 적은, 여성 혐오가 덜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선순위라고 생각합니다만.

책 표지에는 당당히 '네이버 기자 페이지 구독자 수 독보적 1위'라고 쓰여 있는데, 그건 많은 이들이 그의 기사를 읽는다는 뜻이다. 또 거기에서 한 발짝 나아가면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기레기' 말고 기자다운 기자를 보고 싶어 했는지 보여 주는 증거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저 누가 불러주거나 써주는 대로 받아적기 바쁜 기레기들 말고, 정치권 또는 가진 자들의 시각으로 국민들을 우롱하는 기레기들 말고, 진짜로 자기 발로 나서서 취재하고 자기가 쓴 글에 책임을 지는 그런 기자 말이다. 진정한 의미의 기자, 국민들이 존경심을 담아 기자라고 부를 수 있는 기자들이 많아지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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