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김겨울 외 21인, <싫어하는 음식: 아니요, 그건 빼주세요>
나이가 들수록 세상살이에 관해 하나둘씩 더 배우게 된다. 그중 하나는, 어차피 세상에서 내가 온전히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는 것. 부모자식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요, 누구와 사랑에 빠지는 것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누가 나를 좋아해 주는 것은 더더욱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다. 최선을 다한 일이 의지와 다르게 굴러가 잘 안 되거나 아예 망하기도 한다.
그런 세상에서 내가 웬만큼 내 의지대로 고를 수 있는 것은 식사 메뉴 정도다. 그러니까 내가 싫어하는 것은 먹지 않겠다는 게 그렇게 큰 욕심이나 사치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오늘 소개할 <싫어하는 음식: 아니요, 그건 빼주세요>의 저자 22인도 이 점에 동의해서 각자 ‘(자신이) 싫어하는 음식’이라는 주제로 한 편씩 글을 써서 이 ‘만우절 특집편’을 낸 것이 아닐까. 이 저자들은 이전에 ‘띵’ 시리즈에 참여했거나 참여할 예정인 이들로, 좋아하는 음식은 분명히 따로 있지만 이번 특집편에서는 싫어하는 음식에 대한 자신들의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단순히 식감이나 맛이 자신의 취향이 아니어서 싫어하는 경우도 있고, 이전의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또는 자신의 체질과 맞지 않아 싫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경우야 어떻든, 남에게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는 것만 아니라면 호불호를 밝히는 것 자체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또 건강한 행위다. 상대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아는 것도 상대에 대해 아는 것이고, 이런 것을 고백하는 일도 친밀한 행위가 될 수 있다. 이걸 한은형 작가가 ‘잠시 메타버스에서 만나’라는 꼭지에서 ‘메타버스’란 개념을 빌려 너무나 신선하게 잘 표현했는데 너무 기가 막힌 발상이라 여기에 소개하고 싶다(참고로 아래 인용문에서 언급되는 H씨는 작가의 부친이다).
이런 의견을 장황하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는 말이다. 앞에서 짐작하셨겠지만, 내가 그런 말을 한다고 해도 어떤 지지도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친하지 않을뿐더러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공감을 해주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음식이든 무엇이든 ‘호’와 ‘불호’에 대해 말해본 적이 없다. 좋다면 그냥 그걸 계속했고, 좋지 않으면 슬며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뿐이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누군가에게 ‘호’와 ‘불호’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그 단순한 행위가 나를 이렇게 기쁘게 하는지 몰랐다. 그저 좋다고, 그저 싫다고 말할 뿐인데.
좋아하는 건 좋아한다고 말하기. 싫어하는 건 싫어한다고 말하기. 감정이 격해졌을 때는 “너무 좋아.”라거나 “너무 싫어.”라고 말하기. 이게 이렇게 좋을 줄이야. 어떤 대상에 대해 “너무 좋아.”라거나 “너무 싫어.”라고 말하는 나는, 내게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내가 그런 ‘호’와 ‘불호’의 감정을 내보여도 될 믿음직한 사람이고, 마음을 터놓아도 되는 친밀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니까. ‘기꺼이’ 말이다. “너무 좋아.”라거나 “너무 싫어.”라고 말할 때의 내가 그런 것처럼. 그래서 나는 그들을 좋아한다. 약간 고개를 흔들며 얼굴을 찡그리고 발음하는 ‘너어어어무’를 좋아한다.
나는 H씨처럼 내가 절대미각을 갖췄다거나 맛에 관한 한 최고 존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는 너, 나는 나. 너의 상식은 너의 상식, 나의 상식은 나의 상식. 우리는 각각의 세계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가계(家戒)에서 태어나, 다른 모어(母語)를 배웠고, 다른 음식을 먹었고, 다른 책을 읽었다. 그런데 같을 리가? 그래서 나의 현실은 너의 현실과 다르고, 우리는 서로의 현실을 살 수 없다. 나는 우리 사이의 이 거리, 그 아득함이 좋다. 우리는 각자의 세계, 각자의 메타버스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팽이버섯이 싫다고 하는 순간, 잠시 차원이 왜곡되며 너와 나의 세계가 합쳐진다. 아주 잠깐이지만 말이다.
팽이버섯 때문에 가까워진 사람도 있다. 어느 날 Q는 대단히 중요한 걸 고백하기라도 하듯 말했다. 자기도 팽이버섯이 싫었다고, 꽤나 싫었는데 나를 만나고 나서 팽이버섯을 싫어하는 자신을 인식했다고 했다. 까탈스러운 사람이 되기 싫어서 건져내지 않고 먹었는데, 이제 나한테 묻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나? 정말 그런지 아니면 친교의 행위로 그러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도 팽이버섯이 너무 싫다고 하고, 나는 우리의 이 지독한 원한에 웃음마저 난다.
요즘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기준으로 일종의 ‘파’를 갈라 싸우는 (척하는) 것도 일종의 놀이가 된 듯하다. 예컨대 ‘민초’파와 ‘반(反)민초’파, ‘찍먹’파와 ‘부먹’파, ‘딱복’파와 ‘물복’파 등등. 하현 작가는 파인애플을 잘라 파는 일을 했던 경험을 담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라는 꼭지에서 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온라인에서는 매일 이런 놀이가 반복되고 있다. 민초단과 반민초단은 상대편에게 수시로 시비를 걸며 내부 결속을 다지고, 쌀떡파와 밀떡파는 박쥐처럼 양쪽을 오가는 중립파를 비교적 관대하게 포용하며 점잖은 싸움을 한다. 여름이면 이 구역의 싸움닭 딱복파와 물복파가 서로를 물어뜯으며 살벌한 전쟁을 벌이고, 겨울이 찾아오면 밤고구마파와 호박고구마파가 바통을 이어받아 뭉근한 세력 다툼을 한다.
그것에 대한 호불호 자체가 하나의 밈으로 자리잡은 음식들. 각자의 취향에 소속감을 느끼며 편을 갈라 티격태격 다투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들과 엎치락뒤치락하며 싸움 흉내를 내는 새끼 고양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저 귀여운 장난 같은 이 가짜 싸움은 고양이의 성격을 형성하는 사회화 과정 중 하나다. 무는 척만 하려다가 진짜 물기도 하고 물리기도 하며 고양이들은 선을 넘지 않는 법을 배운다. 어디까지가 장난이고 어디부터가 공격인지, 그 선을 아는 것은 인간 세계에서도 동물 세계에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민초단과 반민초단의 싸움은 놀이라고 할 수 있지만, 찍먹파와 부먹파의 싸움은 자칫 강요나 따돌림이 될 수도 있다. 한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나는 강경 찍먹파다!) 딱복파와 물복파의 싸움은 조금 격해져도 재미있지만, 평양냉면파와 함흥냉면파의 싸움은 크게 번질 새도 없이 경고를 받는다. 둘 사이에 오랫동안 쌓여온 어떤 위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와이안 피자는? 글쎄, 잘 모르겠다. 온라인에서는 싫어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큰 것 같지만 현실에서는 딱히 그렇지도 않으니 아직은 놀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까.
뭐든 농담을 다큐로 받지 말고, 너무 몰입해서 진짜 상대를 죽일 것처럼 달려들지만 않으면 이런 놀이도 재밌으니까. 뭐. 그래도 나 역시 하와이안 피자는… 굳이 시켜 먹지는 않는 편이다. 있으면 그냥 먹지만 (사실 내 미각이 예민하지 않아서 파인애플 토핑이 올라와 있어도 그 맛을 잘 감지하지 못한다) ‘굳이 시켜서 먹을 필요가 있나?’라는 느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제 나는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집에 흐르는 밀도 높은 고요를 세상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6.5평짜리 작은 방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혼자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하와이안 피자 토론이 벌어진다면 기꺼이 달려가 그 놀이에 동참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게 하와이안 피자를 좋아하는 건… 맨몸으로 하늘을 날거나 돌로 금을 만드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22명이나 되는 작가가 참여했으면 글의 맛이라고 할까, 스타일이 다 달라서 좀 정신이 없다거나 내 취향인 글을 찾기 어렵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나는 의외로 이 특집편의 글이 다 꽤 괜찮다고 느꼈다. 어느 한 부분에만 하이라이트를 칠 정도로 좋은 글이 몰려 있지도 않았고, 여기에도 공감이 되고 저기에도 공감이 되어서 전반적으로 다 좋았다. 가짓수는 많지만 먹을 것 없는 그런 밥상이 아니라, 차린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은 정성스러운 한상차림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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