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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권김현영, <여자들의 사회>

by Jaime Chung 2022.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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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8월 말에 ‘스트릿 맨 파이터(스맨파)’ 제작 발표회에서 CP는 ‘스트릿 우먼 파이터(스우파)’와의 차이를 이렇게 표현했다(출처).

“여자 댄서들과 남자 댄서들의 서바이벌이 다르다. 여자 댄서들의 서바이벌에는 질투, 욕심이 있었다면 남자 댄서들은 의리와 자존심이 자주 보였다.”

이게 2022년에 공적인 자리에서 할 말인지. 여자들이 같은 여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으면서 그저 단순히 ‘여자들은 이럴 거야’ 하고 공상(소위 ‘뇌피셜’)으로 프레임을 짜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나오는 거다. 자존심하고 의리 좋아하네. 그놈의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헛소리는 하도 써먹어서 닳아 없어지지 않았나? 이치는 여자들을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에게 필요한 게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영화, 소설, 드라마, 예능, 웹툰 등 다양한 미디어에 그려진 여성의 모습과 여성들끼리의 관계를 탐구한다. 나는 해외에 있는 터라 한국 TV를 못 본 지 오래되어서 직접 본 것이 별로 없어 깊이 이해하기는 어려웠다(다행히 비슷한 주제로 쓰인 이자연의 <어제 그거 봤어?>에서 읽어 본 터라 대략 어떤 내용인지 아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언급되는 미디어를 접한 이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듯하다.

‘여적여’라는 프레임이 말이 되려면, 이 프레임의 가장 큰 전제, 즉 ‘여자들은 남자의 인정 또는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라는 문장이 참이어야 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모든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인정받거나 관심을 받는 데 목숨을 거는 건 아니다. 남자들은 마치 여성의 삶에서 자기네들이 엄청 대단한 존재인 줄 아는데, 이런 근자감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남성인 일부 교사들을 제외하고) 남자들이 없는 여중이나 여고, 여대 등에서 여자들이 얼마나 재미있게 우정을 쌓으며 지내는지 알면 질투 나서 눈물 질질 짤 것들이. 당신네들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말씀. 버지니아 울프는 이걸 (나와 달리) 우아하게 이렇게 표현했다.

버지니아 울프도 <자기만의 방>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제인 오스틴의 시대까지 소설에 등장한 모든 위대한 여성들은 남성에 의해서만 그 존재가 드러날 뿐 아니라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만 형태를 갖는다고 하니 참 이상했습니다. 남성과의 관계란 여성의 삶에서 극히 작은 한 부분인데 말입니다.”라고.

권김현영, <여자들의 사회>

개인적으로 내게 있어 이 책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재미있는 웹툰 <하루만 네가 되고 싶어>를 건졌다는 것. 웹툰도 분명 대중을 위한 미디어지만, ‘대중 문화’를 위한 연구를 할 때 대개 웹툰까지는 범위를 벌리지 않다 보니 굳이 웹툰을 소재로 했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로웠다. 읽다 보니 처음에는 ‘메데이아 벨리아르’나 ‘프시케 폴리’처럼 희랍(그리스)식 + 프랑스식/영어식이 짬뽕된 이름에 잠시 어지러웠으나, 읽다 보니 점점 빠져들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메데이아는 그 이름처럼 강하고 똑똑하지만 독하고 억세다고 여겨지는 여성이고 프시케는 착하고 사랑스럽지만 약한 여성이다. 이 둘의 몸이 바뀌어 서로의 사정을 이해하게 되고, 둘을 불행하게 만든 소시오패스 새끼인 황자 이아로스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은 ‘여적여’라는 이제는 낡아빠지기까지 한 프레임을 통쾌하게 날려 버린다. 확실히 저자가 왜 이 웹툰을 가지고 여성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했는지 이해가 간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몸이 바뀌는’ 이야기는 대개 남자와 여자 인물을 가지고 전개되는데 이건 여성과 여성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렇다면 이야기도 완전히 다르게 풀어나가야 한다. 흥미롭지 않은가! 메데이아와 프시케가 서로가 처한 입장을 알게 되고 서로가 가진 능력을 알게 되면서 성장해 나가는 게 정말 재미있다. 이거 아직 못 보신 분들 츄라이 츄라이! 네이버 시리즈와 네이버 웹툰에 있습니다! (아래 링크들 중 위의 것이 시리즈, 아래 것이 웹툰입니다. 편하신 대로 눌러서 보세요!)

https://series.naver.com/comic/detail.series?productNo=4724672

 

하루만 네가 되고 싶어

'완벽한 인생이었다, 그 애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제국의 악명 높은 공녀 메데이아와 그녀가 바라는 모든 것을 가져간 프시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치밀한 궁...

series.naver.com

이 점이 정말 감탄스러웠는데, <하루만 네가 되고 싶어>의 작가는 몸 바꾸기와 진짜 주인공 찾기라는 로판 특유의 서사 장치를 이용해, 여성의 적은 여자라는 프레임 자체를 클리셰로 활용하면서 상호 구원을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보여 준다. 서로 흉내 내다가 프쉬케는 메데이아 아버지의 가정 폭력과 아동 학대에 분노하고, 메데이아는 프쉬케의 연인으로 나오는 이아로스의 기만을 눈치챈다. 자신이 직접 분노해야 하지만, 분노의 대상에 대한 애정 때문에 머뭇거리던 두 사람은 서로 뒤바뀐 처지에서의 상황을 확인한 다음에야 비로소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마주하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자신을 묶어둔 것들과 결별한다. 서로에게만은 부끄러워지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권김현영, <여자들의 사회>

여자들의 이야기를 공감되게, 그리고 의미 있게 다룬 작품들을 접하고 싶다면 이 책을 참고하시라.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자연의 <어제 그거 봤어?>도 미디어에 묘사되는 여성의 관계를 살펴보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다.

➕ 책을 한 권만 더 추천하자면, 원도 작가의 <아무튼, 언니>도 여성과 여성이 맺는 관계, 그중 ‘언니’들에 대한 에세이이다. 따뜻하고 감동적이니까 여성과의 관계에 대해 여성 저자가 쓰고, 완전 100% 자매애가 넘치는, 그래서 여성 혐오가 단 1g도 없는 글을 읽고 싶다면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아래는 내가 이 책을 읽고 썼던 서평.

https://readingwritingandrevolution.tistory.com/1504

 

[책 감상/책 추천] 원도, <아무튼, 언니>

[책 감상/책 추천] 원도, 오랜만에 내가 좋아하는 시리즈의 신권을 읽었다. 이 책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 세상 모든 언니들에 대한 애정과 존경, 공감이 담뿍 담겼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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