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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코니 윌리스, <빨간 구두 꺼져! 나는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었다고!>

by Jaime Chung 2018.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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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코니 윌리스, <빨간 구두 꺼져! 나는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었다고!>

코니 윌리스(Connie Willis)가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쓴 단편 소설 모음집이다. 원제도 <A Lot Like Christmas>.

7월, 한 해의 중반에 다소 계절감 없이 이 책을 집어든 것은, 딱히 내가 크리스마스를 좋아해서가 아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크리스마스를 좋아한 적도 없고, 지금도 크리스마스는 그저 서양인들의 축제, 그러니까 '그들만의 리그'라고 여길 뿐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건, 첫째, 코니 윌리스를 한번 읽어 보고 싶었으며 둘째, 좋은 이야기는 주제에 상관없이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셋째, 이 책(과 그다음 책)이 리디 셀렉트에 있었기 때문이다.

(리디 셀렉트는 리디북스에서 한 달에 일정한 금액만 내면 ebook을 10권 읽을 수 있는 서비스인데, 이 10권은 교체가 가능하므로 실질적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의 권 수는 무제한이라고 할 수 있다).

간단한 이유이지 않은가.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가족, 사랑과 자비를 위한 것' 운운하는 크리스마스 예찬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무관심 반, 냉소 반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기적>은 고전 영화 <멋진 인생(It's A Wonderful Life)>과 <34번가의 기적(Miracle on 34th Street)>의 플롯을 따라간다. 이 두 영화가 대략 어떤 스토리인지 잘 알아야 정확히 이 이야기의 어느 부분이 어떤 영화의 어디에 상응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잘 몰라도 이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으니 상관없다. 그리고 그거 몰라도 보통 영화의 문법을 아는 현대인이라면 주인공이 누구와 이어질지는 너무 뻔하지 않은가.

<빨간 구두 꺼져! 나는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었다고!>는 인공 지능이 어디까지 인간을 따라오고 위협할 수 있는지에 관한, 크리스마스적인 고찰 같다.

이번 단편에서도 <이브의 모든 것(All About Eve)>이라는 영화가 모티프가 되는데, 이번엔 영화가 한 편뿐인 데다가 그 스토리도 단순해서 따라가기 쉽다.

결말은 아마 인간이 왜, 또는 어떤 면에서 인공 지능보다 나은가를 보여 주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우리 여관에는 방이 없어요>에서는 크리스마스의 예배를 리허설하는 도중에 마리아와 요셉처럼(!) 보이는 한 부부가 길을 묻는다.

그것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어로. 성가대의 일원인 샤론은 노숙자들이 도둑질을 할 수도 있으니 교회에 들일 수 없고, 대신 노숙자 쉼터에 연결해 보내 주라는 목사의 말이 진정 예수의 가르침과는 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들 몰래 보일러실에 들이고 먹을 것을 가져다주려 한다. 이 불쌍한 부부를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도와주려는 샤론은 007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하는 스릴러 액션(?)을 감행하는데...

<모두가 땅에 앉아 있었는데>는 이 책에서 제일 내 마음에 든 단편이다. 테드 창(Ted Chiang)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The Story of Your Life)>를 기억하시는지?

2018/06/19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추천]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그것과 비슷한 배경 설정이다. 지구에 외계인이 내려왔고, 이에 그들과 의사소통 방법을 파악하기 위해 언어학자를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이 소집된다.

주인공 멕은 이 외계인(총 여섯 명이다)을 데리고 쇼핑몰에 갔다가 그곳에서 한 합창단이 부르는 노래에 이들이 반응해 자리에 '앉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 합창단을 이끄는 지휘자와 함께, 정확히 무엇이 이 행동을 유발한 것인지를 밝혀내려 한다. 찾아내지 않으면 우주 전쟁이 시작될 수도 있기에.

더 이상의 말을 하면 스포일러가 될 테니 길게 말은 않겠지만 나중에 다 읽고 나면 "아, 그래서 앞에 그 얘기를 꺼낸 거구나!" 하며 무릎을 탁 칠 것이다.

'조금만 생각하면 나도 유추할 수 있었는데!' 싶겠지만 나는 내가 그럴 수 없으리란 걸 안다. 그래서 재미가 있는 거고.

<코펠리우스 장난감 가게>는 이 중에 제일 짧다. 온갖 장난감이 가득한 코펠리우스 박사의 가게에서 아이를 잃어버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

아이들을 잘 대해 주라는 약간의 경고가 담긴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불공평하다.

<장식하세닷컴>은 '웨딩 플래너'처럼 크리스마스도 전문 플래너가 모든 준비를 대신해 준다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우주 정거장에 있는 사람과 영상 통화를 하고, 자기 부상 열차를 타고 다니는 근미래가 배경인데, 거기에도 젊은 남녀를 이어 주고 싶어 하는, 오지랖 넓은 부인은 있나 보다.

한 크리스마스 플래너가 고객의 집에 상담을 해 주러 갔는데 그 부인은 마침 거기에 있던 청년(부인의 조카)과 그녀를 이어 주려 한다.

어찌어찌 그의 차를 타고 다음 고객에 집에 방문한 그녀는 그의 도움을 받아 까다로운 고객의 요구를 처리한다.

그렇지만 그가 그녀의 진짜 조카가 아니라면? 그녀가 크리스마스 플래너를 고용한 데는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거라면?

그래도 그녀는 크리스마스의 정신을 발휘해 그 고객의 집을 장식해 주어야 할까?

 

여기까지가 <A Lot Like Christmas>의 절반이고, 나머지 절반은 같은 아작 출판사의 <고양이 발 살인 사건>에 수록되어 있다.

(나는 <고양이 발 살인 사건>도 읽었다. 조만간 이에 대해서도 리뷰를 쓸 예정이다.) 

 

책을 펴자마자, 본문(<기적>)이 시작한 지 두 번째 페이지에서 "크리스마스까지 나흘밖에 남았어."라는 오타("크리스마스까지 나흘밖에 안 남았어." 또는 "크리스마스까지 나흘 남았어." 둘 중 하나가 되어야겠지)를 발견한 것 치고는 놀랍게도 이 외에 오류는 두 개밖에 찾지 못했다(이 외에 더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빨간 구두 꺼져! 나는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었다고!>에서 "혹은 대사를 잃어버릴 일이 전혀 없을 텐데."에서 대사는 '잃어버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 '잊어버릴'로 고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모두가 땅에 앉아 있었는데>에서는 '모스맨' 박사가 갑자기 '모스맥' 박사로 오타가 난 곳이 한 군데 있다.

단순한 맞춤법 오류 같은 건 이제 세세히 따질 의욕도 없어서 그냥 읽으면서 눈에 보이는 오타만 하이라이트해 뒀더니 저 세 군데였다.

이 책을 읽으시는 분들, 또는 읽으셨던 분들 참고하시라.

 

크리스마스를 좋아하지 않는 나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으니, '그린치'도 이 책은 좋아하지 않을까.

주제에 상관없이 좋은 이야기를 읽고 싶으신 분들이라면 한번 읽어 보시라.

(다만 이걸 읽고 내 인류애가 회복되었다거나 크리스마스를 좋아하게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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