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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딜루트,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

 

 

오랜만에 리디셀렉트에서 정말로 보석 같은 책을 만났다.

자고로 리디셀렉트 같은 플랫폼의 장점은 분명 내가 흥미롭게 여길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 검색력이 좋지 않거나 최근 출판계 소식 업데이트가 재깍재깍 되지 않아 만나 보지 못할 책들을 대신 모아 주어 나에게 들이밀어 주는 데 있다 하겠다.

그리고 이번에 리디셀렉트가 그 목표를 정확히 이루었다.

여성 게이머가 쓴 국내 게임판에 대한 비판과 평가라니! 정말 내가 너무나 읽고 싶어 했던 그런 종류의 책을 접하게 되어 너무 기뻤다.

 

내용도 실망스럽지 않다. 나는 여성주의에 관심이 있지만 게임은 잘 플레이하지 않는데, 저자가 나 대신 다 해 보고 이야기해 주니 얼마나 감사한가.

사실, 게임을 잘 모르는 나도 '여성용' 또는 '전연령용' 또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게임'이라고 하면 '보통', '주류' 게임과 다른 무언가로 취급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저자는 그런 현상을 이렇게 표현한다.

게임 시장이 커지면서 온갖 게임들이 쏟아지자, '여성을 위한' 또는 '여아들을 위한' 게임이라는 홍보 수식어를 내건 게임들이 은근슬쩍 판매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이것들은 어릴 때 TV에서 만화 캐릭터 신발 광고가 나올 때 곁다리로 끼워 팔던 핑크색의 '여아용' 신발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게임 시스템은 또 어찌나 조악한지 옷 갈아입기, 화장하기, 색칠 공부 같은 대충 얼기설기 끼워 맞춘 콘텐츠로 '여심 저격'을 하겠다니, 어떤 상상 속의 여자들이 그 게임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괘씸하게 느껴질 정도다.
2020년 봄에 출시된 <동물의 숲>이 엄청난 일기를 끌고 전국적으로 품귀 현상을 일으킬 때, 이 게임이 '여심을 저격'해서 성공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도대체 그 '여심'이 뭐냐고 물어보면 명확하게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경쟁적인 요소가 없고, 아기자기해 보이고 귀여운 이미지인데 인기가 있으면 '여성용 게임'으로 취급해 버리는 게으름은 게임 업계가 소년을 위한 마케팅을 해 온 이래로 변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게임의 주류 문화는 남성을 주고객으로 설정하고 '여성용 게임'을 하위 문화로 따로 분류해 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업계나 다른 게이머가 보기에 '여성 게이머'는 어떤 존재일까? 대형 게임 광고에서 말하는 '게이머'에 여성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오프라인으로 만나 함께 게임했던 수많은 여성 친구들은 이미 게임을 그만두었고, 온라인상에서 만날 수 있는 먼 곳의 여성 게이머들은 "계집애들은 여기서 어울릴 생각 하지 말고 꺼져라"(순화된 표현임)"라는 이야기를 듣고 물밑에 숨었다. 놀이터의 불균형을 눈치채고 여성들이 자신들의 공간에 모이면, 그런 공간을 또 어떻게 알아내고 굳이 찾아와 "우리의 게임판에서 나가라"며 쫓아내려 들거나,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바라볼 뿐이다.

맞다. 기본적으로 남성, 그것도 18-35세의 백인 남성이 게임의 주요 타깃으로 설정되고, 여성은 뒷전이다. 게임은 '남자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 게이머들은 뭔가의 번데기 같은 취급을 받는다.

저자도 책 내에서 그런 경험을 여럿 공유하는데, 일례로 (어릴 적에)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고 있으면 꼭 남자들이 와서 시합을 걸거나 굳이 그 바로 옆에 와서 게임을 한다. 어떤 게임을 하든,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이런 '시비'는 이어진다.

지금은 오락실이 거의 사라졌으니 이런 문화도 사라졌을까? 그럴 리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여성이 상위에 랭크되거나, 나아가 프로 게이머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날리면 외모 평가부터 시작된다. 그다음에는 실력이 뛰어나지 ㅇ낳다면 게임도 못 하는데 나왔다는 이유로, 실력이 뛰어나면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고 의심을 받는다. 때로는 자신의 게임 실력이 진짜임을 공개적으로 '인증'하라는 식으로 게이머의 자질을 시험받기도 한다. 얼마 안 되는 여성 프로 게이머가 실력을 드러내면 그에게 패배하는 남성 프로 게이머는 놀림의 대상이 된다.

여성 프로 게이머는 현역에서 활동하는 동안 온갖 괴롭힘의 대상이 되다가 은퇴하고 나서야 "그 여성 게이머는 게임을 잘했다"라며 뒤늦게 평가받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런 사건들은 확실하게 말해 준다. 오락실이 사라진 지 10년, 20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그 정신은 뿌리 깊게 이어져 아직도 현대 온라인 게임에 지리멸렬하게 눌어붙어 있다는 사실을.

여기에 성희롱은 거의 기본 바탕이나 마찬가지다. 백인 시스젠더 남성이 아닌, 여성, 비백인 인종들, 또는 성소수자들의 관점을 반영한 게임을 만들거나 그런 관점으로 비평을 하면, 살해와 강간 협박을 받기 일쑤다. 

 

그러고 보니 대학 시절, 모 야구 팀의 본거지인 지방에서 올라온 여성 학우가 있었는데, 그 지역 사람이면 으레 그러듯이 자기 고향 팀 경기를 경기장에서 직관하면서까지 열렬하게 응원을 했다.

그런데 여성이 스포츠를 좋아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다 그 여성이 다 잘생긴 선수 때문에 얼굴만 보고 좋아한다고 생각하거나, 남친이 좋아하니까 그냥 덩달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좋아하는 거라고 먼저 생각을 해 버린다.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진지한지를 그 스포츠에 대한 규칙이나 현재 응원하는 팀의 현황 등을 줄울이 읊는 것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준다고, 그게 너무 싫다고 하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게임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성 게이머에 대한 멸칭은 또 얼마나 많은지. 나는 이 책에서 그중 몇 가지를 정리해 놓은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세상에, 왜 이런 말을 만들어서까지 여성을 비하하려고 하는 거지? 너무 충격적이었다.

 

(...) 그러나 여성 유저가 자신의 성별을 밝히면 낯선 생물을 보기라도 한 듯 이목이 쏠리곤 했다. 그러고 나서 여성 게이머라면 응당 지나쳐야 할 일종의 관문을 거치게 된다.

- 여자가 이런 게임을 왜 함?
- ◎◎(여성 멤버 이름)? 걔 게임 쥐뿔도 모르는데 예쁘다고 하는 거잖아.
- A 회사 게임은 캐릭터만 내세우고 게임성은 떨어지는데 겉모습 때문에 여성 팬들이 더 많은데, B 회사 게임은 시스템이 좋아도 (캐릭터 디자인이 나빠서) 여성 팬이 없다.
- ☐☐는 애인도 군대 갔는데 이 게임 계속해? 왜?

이런 문장들은 공통적으로 밑바탕에 하나의 사상을 깔고 있다. '여자 게이머는 진짜 게이머가 아니다.'

그러니 여성 유저가 자신의 성별을 드러내면 어떤게든 엮여 보려고 껄떡대거나, 지면 여자 탓을 하거나, 목소리만 들었는데도 온갖 성추행을 입에 올리는 것이다. 여성을 자신(남성)과 같은 '진지한' 게이머로 인식한다면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는가? 

 

272쪽밖에 안 되는, (내 기준으로는) 길지는 않은 책이지만 한국 게임판이 고치려고 노력해야 할 많은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짚어 주는 정말 좋은 책이다. 

각 챕터 사이에는 기존의 남성주의적 게임관에서 벗어난, 추천할 만한 게임을 소개하는 코너도 있다.

게임 자체는 무생물이고, 성별이 없다. 그러니 성별과 무관하게 모두 즐겁게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도록 게임판 문화도 바뀌어야 한다.

이 책의 부제처럼, 그냥 게임이나 좀 하게 해 주시길. 모든 게이머들에게, 그리고 여성주의자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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