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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조경숙, <아무튼, 후드티>

by Jaime Chung 2021.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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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조경숙, <아무튼, 후드티>

 

 

'후드티'라니? 책의 소재가 참 일상적이면서도 신기하다. 이런 경험은 작가 구달의 <아무튼, 양말> 이후 처음인 듯.

2020.01.31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구달, <아무튼, 양말>

 

[책 감상/책 추천] 구달, <아무튼, 양말>

[책 감상/책 추천] 구달, <아무튼, 양말> 오늘 리뷰를 쓸 책은, 내가 입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한 책 <일개미 자서전>의 저자 구달이 쓴 <아무튼> 시리즈의 한 편이다. 2019/10/04 - [책을 읽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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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흥미로워하며 읽어 보았는데, 후드티 하나에 이런 다양한 의미를 담을 수 있구나, 하고 놀랐다.

 

후드티의 짱팬, 그야말로 후드티가 제2의 피부라 할 수 있는 저자에게 후드티는 (이 에세이의 꼭지 개수인) 열한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1. 전투복

[<바람의 나라>를 플레이할 때] 이 사냥에 집중력을 쏟아붓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나의 현실 갑옷, 후드티였다. 후드티를 입는 것 자체보다는 후드티의 후드를 뒤집어쓰는 게 중요하다. 양 옆 시야를 차단해 집중력을 향상하는 독서실의 책상 칸막이처럼 일단 후드를 쓰고 나면 눈앞의 모니터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스스로에게 마법을 걸어 방어력을 향상시키는 내 주술사 캐릭터처럼, 나는 후드를 뒤집어쓰는 것으로 나 자신에게 집중력 향상의 마법을 걸었다. 그러면 키보드 조작이 능숙해지고 몬스터의 돌발적인 공격에도 더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통스러웠던 학창 시절, 나는 혼자임을 견디는 데 언제나 필사적이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절망에 지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그럴 때는 언제나 후드티를 입고서였다.

 

2. 부지런하게, 열심히 살아낸 하루하루의 증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옷이다. 새벽 다섯 시부터 늦으면 밤 열 시까지 이어지는 열일곱 시간 가까운 강행군이 가능하려면 옷이 불편해선 절대로 안 된다. 가슴이나 허리, 팔이나 소매, 어디 한군데라도 옷이 몸을 조이거나 거슬리면 저녁 무렵부터 이미 초주검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옷이 넉넉해야 한다. 옷에 이것저것 수납까지 되면 더 좋다. 그러니 캥거루 같은 주머니가 달린 후드티만을 극성맞게 찾게 된다.

편하다는 것 외에 후드티의 장점은 또 있다. 후드티는 내가 다니는 장소 어디에나 착 어울린다. 그뿐이랴, 내 역할에도 무리 없이 들어맞는다. 시위 현장에서 후드티는 유니폼이나 다름없다. 그건 개발자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가 후드티를 입든 원피스를 입든 아이는 항상 날 사랑해 주니까 엄마 역할을 해내는 데도 문제없다. 오히려 아이를 안는 데 미끄러지지도 않고 아이의 물건을 언제든 수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후드티는 가산점을 얻는다.

흔하디혼해 모자가 달린 것 외에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여도, 그렇기 때문에 이 옷은 무던하게 내 모든 일상을 받아 안는다. 그뿐만 아니라 후드티는 내 일상을 낱낱이 알고 있는 유일한 동료이기도 하다. 피곤한 하루가 끝나고 귀가하는 버스에 몸을 싣고 나면 기나긴 하루를 함께했던 후드티를 괜스레 만지작거린다. 

 

3. (개발자가 참석한 콘퍼런스의) 기념품

그렇지만 이런 체크무늬 셔츠조차도 후드티를 따라올 수는 없다. 그저 편하기만 한 체크무늬 셔츠와 달리 후드티에는 기념품으로서의 효용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개발자 콘퍼런스에서는 종종 후드티를 나누어주곤 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하는 게임 개발자의 이야기를 다룬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에서도 주인공 가야는 IT 회사 로고가 인쇄된 기념 후드티와 후드집업을 번갈아 입고 다닌다.

  

4. 몸을 가려 주는 마법의 망토

그런 내게 후드티는 몸을 가려 주는 마법의 망토였다. 나는 뱃살이 드러나지 않게 펑퍼짐한 옷을 입고 말린 어깨를 가리기 위해 두꺼운 후드를 찾았다. 신기하게도 후드티를 입고 나면 내 몸에 대해 아무런 부끄러움도 들지 않았다.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펑퍼짐한 원피스를 입어도 이 옷 안에 감추어 둔 살들이 빼꼼 드러날까 봐 바람이 세차게 불면 신경이 쓰였는데 후드티를 입으면 그러거나 말거나. 똑같이 펑퍼짐해도 원피스는 여리여리한 느낌을 주기 위해 가벼운 소재로 제작된 게 많다. 후드티는 바람 따위에는 끄덕없는 단단한 소재로 되어 있다. 웬만한 압력으로는 내 살을 노출시킬 수 없으니 두꺼운 후드티를 입고 나면 내 몸에 대해 의식하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나는 부단히 몸을 미워했는데 후드티는 오갈 데 없이 쏟아지는 내 미움을 잠시 멈추게 해 줬다. 모두가 내 동그란 배를 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도 후드티는 그 시야를 막아 줬다.
후드티를 입을 때 마음 편한 건 그저 배를 가려 주어서가 아니다. 후드티를 입으면 무언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해방된다. 투피스건 원피스건 후드티와 마찬가지로 사이즈를 넉넉하게 입는 건 똑같다. 그럼에도 그런 옷들을 입을 땐 이상하게 더 여성스럽고 우아한 사람처럼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그래서 시폰 소재 원피스를 입을 땐 단화라도 신고 배낭 대신 핸드백을 멘다.

후드티를 입으면 그런 건 생각할 필요가 없다. 물론 후드티로 감싼 내 몸이 건강미 넘치는 몸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래도 살이 쪘건 배만 나온 E.T. 체형이건 굳이 더 여성스러워야 한다거나 어떤 이미지에 맞추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후드티를 입은 나는 예쁘거나 멋지거나 귀엽거나 상냥하거나 똑똑하거나 잘난 싸람이 아니라 그냥 후드티를 입은 한 명의 사람이다.

 

몇 개 더 있지만 책 내용을 다 스포일러 할 수는 없으니 여기까지만. 후드티에서 이만큼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건 그만큼 후드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는 뜻일 거다. 

후드티를 피부처럼 입고 살아가는 저자에게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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