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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라일라 리, <난 그저 미치도록 내가 좋을 뿐>

by Jaime Chung 2022.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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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라일라 리, <난 그저 미치도록 내가 좋을 뿐>

 

 

일전에 유튜브에서 케이팝의 인기와 그 영향을 분석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때 자료 화면으로 뒤에 깔린 어느 걸그룹의 뮤직 비디오를 보게 됐는데, 노랫소리도 그대로 들렸다.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날씬하고 예쁜 한 걸그룹 멤버가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가 좋아'라는 내용의 가사를 부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너는 이미 엄청 날씬하고, 매일매일 전문가에게 메이크업도 받고, 옷도 스타일리스트가 골라 준 대로 입잖아. 완벽하게 관리받은 외모를 가지고 있으니 당연히 지금의 너를 사랑하기 쉽겠지!' 맹세컨대 그 멤버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자존감 뿜뿜하는' 노래를 부르는 당사자가 그렇게나 완벽하게 관리된 외모를 갖추고 있다면, 그런 맥락에서는 그 노래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기만적으로 들리거나, 최소한 원래 의도보다는 미약해진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똑같은 노래를 비만인 사람이 부른다고 하면 맥락도, 메시지도 달라지지 않을까?

하지만 여러분이 이미 알다시피 연예계에서, 특히 아이돌 판에서 마른 몸 이외에 다른 몸은 보기 어렵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 남녀를 불문하고 많은 아이돌들이 화면에 잘 보이기 위해 다이어트를 한다. 비만인 아이돌은 말 자체가 아이러니일 것이다. 미디어에서 볼 수 있는 연예인이라면 거의 다 날씬하다 보니 (특히 여자라면 더더욱), 청소년들은 그만큼 더 날씬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이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오픈서베이에서 제공하는 <Z세대 트렌드 리포트 2022>를 보게 됐는데, 한국은 '자기 몸 긍정주의(body positivity)'에 대한 관심이 전무하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아래 그래프 맨 오른쪽 항목을 보시라.

출처: 오픈 서베이(https://blog.opensurvey.co.kr/trendreport/gen-z-2022/)

 

자기 몸 긍정주의란 한마디로 '내 몸을 사랑하자'라는 메시지라 할 수 있다. 자기 몸 긍정주의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낮은 상황에서, 플러스 사이즈(다시 말해 '뚱뚱한', 또는 비만인)인 청소년이 케이팝 스타가 되는 꿈을 꿀 수 있을까? 글쎄, 자신감이 엄청나지 않고서야 불가능하지 않을까(자신감 얘기는 조금 이따 다시 하겠다)? '케이팝계에서 플러스 사이즈 아이돌을 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다 보면, 이 말이 떠오른다.

아니, 아니, 우리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음, 왜 아니냐고? 그거야 이 쇼는 판타지(fantasy; 환상)이니까(No. No, I don’t think we should. Well, why not? Because the show is a fantasy.).

2018년에 란제리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Victoria's Secret)의 당시 최고 마케팅 경영자(Chief Marketing Officer) 에드 라젝(Ed Razek)이 '왜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 쇼에는 플러스사이즈나 트랜스젠더 여성을 캐스팅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한 말이다(출처). 빼빼 마른 '사이즈 0'의 모델들 말고 좀 더 현실 여성에 가까운 몸매를 가진 여성들을 보고 싶다, 다시 말해 현실을 반영해 달라는 요구에 '빅토리아 시크릿 쇼는 환상을 보여 주기 때문에 안 된다'라는 뻔뻔한 말을 하다니. 마른 여성들, 마른 몸매만이 '환상', 즉 바람직한 기준, 이상(理想)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무엇이 바람직한지 제멋대로 재단하려는 태도가 아주 재수 없다. 빅토리아 시크릿이 이렇게 '덜' 포용적이고, 다양성을 추구하지 않는 태도로, 다시 말해 '마른 여자들만 우리 옷을 입을 수 있다!'라는 식으로 장사를 해 왔으니 다른 란제리 브랜드에 비해 뒤처져 수익이며 대중적 인식이 폭망한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최근 들어서야 조금 태도를 바꿔 '다양한' 몸을 포용하려는 노력을 보이고는 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런 쪽에서 이미 앞서 나간 브랜드가 한둘이 아니라는 말씀. 이 얘기는 이쯤 해 두자.

어릴 적에 미국으로 이민 간 한국계 미국인 작가 라일라 리는 청소년 소설 <난 그저 미치도록 내가 좋을 뿐>에서 케이팝 스타가 되는 것이 꿈인 플러스 사이즈 소녀의 이야기를 그렸다. 신하늘, 영어 이름은 스카이 신. 스카이는 어릴 적부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지만 '뚱뚱하기' 때문에 스카이의 엄마는 스카이가 가수가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스카이의 아빠와 좋은 친구들이 스카이의 편을 들어 주고 언제나 지지해 준다. 스카이는 <너는 나의 샤이닝 스타>라는 경연 프로그램에 도전해 결국 우승을 거머쥐기까지 엄마와의 갈등도 있고 온라인 악플 문제도 겪지만 중간중간에 (LA 한인 타운에서 이미 연예인이나 다름없는) 헨리 조와의 로맨스도 즐긴다.

스카이가 '퀸 스카이(Queen Skye)'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인기를 모는 것은, 물론 노래와 춤 실력이 탄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당당하게 드러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뚱뚱한 몸을 가진 많은 소녀와 여자들이 스카이의 편이 된다. 참 가슴 따뜻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는 이런 의문이 든다. '왜 뚱뚱한 사람들, 특히 여자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말을 듣는 걸까?' 물론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게 싫어하고 혐오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학력이 좋지 않든, 가난하든, 외모가 좋든 안 좋든, 자기 사랑은 중요하고 또 모든 이들이 하면 좋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완벽한' 몸매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긴장을 놓치면 살이 찔까 두려워 계속 꾸준히 '관리'를 하지 않나. 그런 사람들도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어려운데 (왜냐하면 삐끗해서 몸매가 망가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늘 존재하니까) 굳이 뚱뚱한 사람들, 이미 벌써 뚱뚱하다는 이유만으로 가족, 친지, 친구, 주위 사람들,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과 구박, 비난을 듣는 이들에게 '네 몸을 사랑해, 자신감을 가져'라고 말하는 게 정말 그들을 위한 일이냐는 말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넌 왜 당당하지 못해? 널 사랑하지 못하는 거야?'라고 하는 건 그들에게 이중의 고난을 씌우는 게 아닌가 싶다. 중요한 건 뚱뚱하든 날씬하든 스스로를 사랑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남의 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쓸데없는 참견을 하지 않는 예의를 지키는 게 문제지. 와타나베 나오미(일본의 가수, 예능인, 코미디언)나 리조(Lizzo)처럼 당당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첫째, 뚱뚱하다고 그들을 비난하는 일이 용납되는 것은 아니며, 둘째, 그런 비난을 들었을 때 아프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은 뚱뚱한 사람들에게 당당하라고, 다시 말해 '내가 네 몸매를 가지고 놀리고 비웃고 욕해도 너는 쿨하게 넘어가'라고 강요하는 것 좀 그만하고 자기 입이나 좀 관리했으면 좋겠다.

소설 자체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페이스가 엄청 빠르다. <너는 나의 샤이닝 스타>의 한 단계 한 단계가 훅훅 진행된다. 심지어 마지막 최종 우승자를 가리는 장면까지 정말 빠르게 진행되어서, "드디어 결과 발표 시간이다. 참가자들 모두 무대 뒤로 모여 댄스와 보컬 파트로 나누어 섰다. 나는 헨리와 이마니와 눈빛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응원했다." 이렇게 말한 후 바로 다음 문단에서 결과가 발표된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열심히 연습했던 기억, 이 도전이 본인과 다른 플러스 사이즈인 여자(애)들에게 가지는 의미 등을 떠올려 보며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같은 회상을 하는 시간 따위 없다. 이렇게까지 긴장감 없이 바로 결과를 공개해도 되는 건가 싶다. 아니, 물론 청소년 소설이고 이런 소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우리 모두 다 아니까 결과는 이미 스카이가 이 경연에 참가하는 장면에서 예측 가능하긴 하지만, 작가님, 이렇게까지 긴장감 없이 진행해도 되는 건가요? 사실 내가 지금 이 부분을 언급하면서 결과를 밝히지 않으려고 하는 게 더 바보같이 느껴진다. 어차피 위에서 결과를 다 스포일러 했는데! 그렇습니다, "헨리의 예상이 맞았다. 내가 다른 참가자들보다 100점이나 앞서 <넌 나의 샤이닝 스타> 보컬 파트에서 우승했다. 그리고 댄스 파트 우승은 예상대로 이마니가 차지했다." 스카이가 압도적인 점수 차로 우승이랍니다! 이거 예상하지 못하신 분?

어떻게 보면 이런 결과가 더 의외일 수 있다. 플러스 사이즈인 여자애가 케이팝 스타가 된다고? 플러스 사이즈는 둘째치고, 그냥 보통 몸매를 가진 아이돌 찾아보기도 쉽지 않은 이 판국에? 그래서 스카이가 우승을 한다는 결말 자체가 일종의 '환상', 꿈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우리가 위에서 '환상' 이야기 한 거 기억하시나요?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이 이야기로 돌아왔네요!). 사실 그런 꿈은 당연히 꿔 볼 수도 있고, 또 실제로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렇게 미디어에서 먼저 그런 '꿈'을 보여 주는 것도 중요하다. 1960년대 미국 TV에서 <스타 트렉(Star Trek)>이 방영될 때 흑인 여성 통신 장교인 '우후라(Uhura)' 캐릭터가 그 당시 흑인 여성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듯이. 소수자가 '될 수 있는' 모습을 미디어에서 보는 것은 그들에게 희망을 준다. 스카이가 우승한 것도 비슷한 의미 아닐까. 하지만 작가 자신도 '우승은 했지만 케이팝 스타가 된다고 단언하는 것은 너무 앞서갔나?' 싶어서 일단 '우승 특권으로 (스카이의 학기가 끝나는) 다음해 6월에 한국에서 트레이닝을 받게 된다'라는 조건을 단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속편을 염두에 둔 영리한 결정일지도? 만약 속편에서 스카이가 진짜 케이팝 '스타'가 될 수 있는지 살펴본다면 <넌 나의 샤이닝 스타> 심사위원 중 한 명인 장보라에 대해서도 좀 더 다루어주면 좋겠다. 장보라는 스카이가 뚱뚱하다는 이유만으로 심사 첫 단계부터 그녀를 못마땅하게 본다. 다른 두 심사위원들이 '합격'을 줄 때 자기 혼자 '불합격'을 주기도 하고. 은퇴했지만 전성기 시절 잘나갔던 걸그룹 멤버였다는 설정을 살려서 왜 장보라가 스카이를 그토록 못마땅하게 여겼는지 조금 확실하게 보여 주면 좋겠다. 예컨대 자기는 걸그룹 시절 식이장애가 있어서 먹고 싶은 걸 제대로 먹은 적이 없는데 스카이 같은 사람을 보면 먹고 싶은 걸 다 먹어서 그런 거라고 꼬아서 보고 미워한 거라든지. 뭔가 이유가 밝혀지고 장보라가 스카이에게 사과해서 둘의 관계가 개선되면 좋겠다. 난 사실 그걸 기대했는데 그런 이야기는 안 나와서 아쉬웠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스카이의 엄마는 본인도 어릴 적에 뚱뚱했었고 그걸로 사람들의 눈총, 차별을 많이 받았기에 자기 딸이 뚱뚱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당연히 스카이는 이런 엄마와 갈등을 겪는데, 후에 스카이가 우승하자 엄마가 다소 누그러진 태도로 축하하는 말을 건넨다. 그렇지만 둘이 완전히 화해하거나, 스카이가 '그래도 엄마는 나를 사랑해!'라는 믿음을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한다. 어떻게 보면 다소 기운 빠지는, 불완전한 '타협' 정도로 느껴지고, 어떻게 보면 현실적인 결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몇십 년을 살아오신 분의 생각을 바꾸는 게 더 어려울 테니, 직접적으로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게 되는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거 아닌가 싶고.

케이팝이라는 소재를 쓴 데다가 플러스 사이즈인 소녀가 주인공이기까지 하니 (이는 다시 말해 당연히 십 대의 풋풋한 연애도 딸려 온다는 뜻이다) 트렌디한 십 대용 영화로 만들기에 제격 아닌가. 그래서 이미 2020년 1월에 HBO 맥스가 이 소설을 영화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출처; 참고로 이 소설의 영어 제목은 <I'll Be the One>이다). 그런데 HBO 맥스는 2019년 6월에 이미 (역시 청소년 소설인) <언프레그넌트(UNpregnant)>를 영화화겠다고 발표했고 실제로 완성된 영화가 2020년 9월에 공개된 점을 고려하면, <난 그저 미치도록 내가 좋을 뿐>은 영화화가 왜 이리 오래 걸리는지 모르겠다. 영화화하겠다는 기사 외에 얼만큼 진행이 되었는지, 언제 공개될 건지 왜 아직도 업데이트가 없는지 궁금하다. 설마 엎어진 건 아니겠지? 얼른 영화로 보고 싶은데!

요약하자면, 부족한 점은 있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재미있고 청소년이 읽기에 좋은 소설이다. 속편도 나오고 이 책이나 영화가 크게 흥하면 좋겠다. 몸매에 상관없이 재능 있는 사람이 그 재능을 빛내는 꿈을 꾸고 실제로 이룰 수 있도록.

 

➕ 사족: 말이 나온 김에 언급하자면, <언프레그넌트> 영화는 내가 평을 쓴 적이 있다. 완전 추천!

2022.05.30 - [영화를 보고 나서] - [영화 감상/영화 추천] Unpregnant(2020, 언프레그넌트) - 엿 먹어라, 미주리 주 입법 기관!

 

[영화 감상/영화 추천] Unpregnant(2020, 언프레그넌트) - 엿 먹어라, 미주리 주 입법 기관!

[영화 감상/영화 추천] Unpregnant(2020, 언프레그넌트) - 엿 먹어라, 미주리 주 입법 기관! 감독: 레이첼 리 골든버그(Rachel Lee Goldenberg) 영화는 미주리 주의 한 고등학교 여자 화장실에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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