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양다솔,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내가 사랑한 <아무튼, 친구>의 양다솔 작가의 에세이. 작가 소개에 “다음 달부터 뭘 해서 먹고살지 전혀 계획이 없는데 당장 밥을 엄청 잘 차려 먹는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에세이를 잘 요약하는 문장이라 할 수 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독특하다는 이미지인데, 나는 이 작가님이 제일 독특하신 것 같다. 실제로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글만 읽어도 느껴지는 포스가 그렇달까. 미성년자이던 시절에는 절에서 사셨고, 아버님은 출가하기 위해 가족을 떠나셨으며, 어딜 가든 꼭 풀메이크업과 풀드레스업을 해서 할 일 없는 부잣집 따님으로 오해를 받는다는 점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그는 이 책의 첫 꼭지이자 책의 제목과 같은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에서 ‘어떻게 그렇게 멋지게 사십니까!’라는 (SNS로 온)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저는 현재 직업도 없습니다! 당장 다음 달부터, 먹고살 돈이 없습니다! 글을 쓰는 일이 행복한 적은…… 별로 없습니다! 삶에 글을 쓸 기회가 종종 있는 것은 정말 황송하고 감사합니다만, 그걸로 먹고살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아요. 저에게는 그런 야망도 용기도 계획도 없습니다. 미래도 없고 성공에 대한 확신도 없습니다.
다만 저는 바보입니다. 어디서부터 뭘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글을 연재하는 것이고 그래서 하는 것뿐입니다. 절벽 끝에 서 있길래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놀지 않는 삶은 너무 공허하고 심심하지 않습니까.
일자리가 없어도 이렇게 안분지족하게 산다면 진짜로 마음이 가난해지지 않을 것이다. 아래에 인용한 부분은 너무나 평화롭고 고요해서 너무너무 부러울 정도다. 아니, 세상에, 이렇게 살 수가 있다고요….
일상은 비슷하게 계속되었다. 한동안은 책만 읽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는 족족 집어 와서 쌓아놓고 야금야금 읽었다. 그러다 배고프면 맛있는 걸 해 먹었다. 고양이들과 뒹굴뒹굴하고,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영화를 보고, 뜨개질을 하고, 한강을 달리고, 등산을 했다. 일을 안 한다는, 돈을 안 번다는, 직장이 없다는, 미래가 없다는 사실 말고 모든 것이 평안했다. 마치 절벽 위에 텐트를 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슬아슬하고 평화롭고 아찔하고 몹시 아름다웠다. 절벽에서 보이는 절경처럼. 봄이 되자 세상은 꽃피었다. 이렇게 꽃이 많았나 싶어 매일같이 꽃을 보러 산보를 다녔다. 도시락을 싸서 들판에 돗자리를 깔고앉아 한참 책을 읽었다. 빌라 앞에 있는 손바닥만 한 땅뙈기에 푸성귀를 심었다. 싹을 틔워보려고 씨앗도 샀다. 상추며 깻잎이며 쑥갓이나 겨자채며 바질도 심었다. 비 소식이 잦아서 물을 주지 않아도 알아서 쑥쑥 자랐다. 잘 자란 잎을 마당에서 바로 따와서 씻어다가 현미밥에 생양파와 두부, 된장을 곁들여 쌈 싸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연하고 신선하고 아삭거리는 맛이 꼭 잘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들게 했다. 비건 지향인으로 산 지 2년이 넘었지만 야채에 밥을 싸 먹을 때면 세상에 내가 먹을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 냉동고에 꽝꽝 얼려둔 두유를 절구로 매우 쳐서 잘게 부쉈다. 거기에 팥 두둑이 덜고 시럽 조금과 콩가루를 아낌없이 부었다. 팥빙수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여름의 별미다. 두유로 만들어도 매우 맛있는데 아무도 그렇게 만들어 팔지 않아 직접 해 먹어야 한다. 얼얼하고 달큰하고 고소한 빙수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그릇 위로 숟가락이 정신없이 오갔다. 참 내, 벌써 몇 달째야.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여전히 뭘 해야 할지 전혀 생각이 안 나네. 나는 생각했지만, 당장 앞에서 팥빙수가 녹아가고 있었다. 아무도 해치지 않는 팥빙수. 함께 나눠 먹는 팥빙수. 절벽에서 보이는 풍경은 오늘도 아름답고, 나는 시간이 갈수록 정말 이상하게도, 전혀 가난해지지 않는다.
저자는 또한 ‘동북구연’이라는 스탠드업 코미디 그룹에서 활동하고 있다는데, 이걸 보면 진짜 스탠드업 코미디도 잘하겠다 싶다.
평소 나는 친구들이 모이면 이야기를 몇 십 분이고 늘어놓아 좌중을 휘어잡고 희로애락의 널을 뛰게 하는 데 선수였다. 기분이 꿀꿀한 날 전화로 주구장창 징징거리면 한참을 말없이 듣던 친구가 “하소연의 기승전결과 강약 조절이 일품으로, 그대로 무대에 올리면 되겠다”고 말하곤 했다. 자연스럽게 말하는 일에 종종 연루되었다. 각종 행사의 사회라든가, 팟캐스트의 게스트, 프로그램의 깜짝 패널, 네 시간 동안 2부로 나뉘어 진행되는 엄청난 결혼식의 호스트까지. 심지어 한 친구는 “행사를 하나 하는데, 네가 나와서 한 10분만 아무거나 떠들어라”라면서 반강제로 나를 백 명의 관객 앞에 데뷔시키기도 했다. 그것이 완벽한 스탠드업 코미디 쇼였음을 나중에 알았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입만 안 열면 완벽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이제는 말하라고 내게 무대까지 준다는 사실이 조금 웃겼다. 더구나 내 삶이 풀리는 꼬락서니로 보아 이것도 재주라고 부르며 살아남으려면 친구의 제안이 발단이 될 수도 있을 듯했다.
아래 인용문은 그저 순수하게 웃겨서 가져와 봤다. 이런 문장은 대체 어떻게 쓰는 걸까?
언젠가 한 정치인이 이부망천이라고 했다. 이혼하면 부천 가고 망하면 인천 간다는 뜻이란다. 그게 망언이라는 것은 뒤늦게 알았다. 원래 있는 말인 줄 알았다. 뭐랄까, 막 떠들다가 나왔다고 하기엔 너무 입에 착 붙는 워딩이었다. 당시에 인천에서 20년을 살고 갓 부천으로 이사를 왔던 나는, 그러니까 태어날 때부터 망했고 이제 막 이혼을 한 상태였다. 내 지금 현주소는 공교롭게도 서울이다. 그러니까 내 인생은 바닥에서부터 시작해 가파른 상승세다. 내가 주식이라면 워런 버핏이라도 몰빵할 것이다. 그 정치인이 날 보거든 감복하여 또 사자성어를 뱉을지도 모른다.
오랜 친구인 이슬아 작가에 관한 꼭지 ‘친구 발견’에서는 친구에 대해 이렇게 쓸 배짱(?)이 있는 사람이 또 우리 다솔 작가님이다. 아니, 이래도 두 분의 우정 괜찮은 건가…
옛날 얘기를 자꾸 해서 뭐 하겠냐만은, 걔는 정말 못생겼었다. 그 시절 내 유일한 낙은 일주일에 한 번 글방이라는 글쓰기 모임에 가는 거였다. 딱히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엔 선생님도, 친구도 없었다. 서로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그가 써 온 글을 읽고 단지 그 글에 대한 얘기만 하면 됐다. 10대에 그 정도 거리를 두고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곳은 흔하지 않았다.
거기서 걔를 만났다. 첫눈에 한 생각은 이거였다. ‘정말 찐빵같이 생겼군.’ 그러고는 단호히 시선을 거두었다. 그 시절엔 내 못생김만도 감당하기가 벅찼기 때문이다. 단지 걔는 읽는 사람이 다 부끄러워질 정도로 적나라한 섹스 이야기를 자꾸만 글로 써왔다. 그리고 매번 딱 붙는 바지나 짧은 원피스 같은 걸 입었기 때문에 그냥 비슷한 진영에서 있는 힘껏 싸우는 사람에 대한 전우애 같은 걸 느끼거나 가끔 애쓴다 싶은 마음이 들긴 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 글을 보고 어디가 좋고 어디가 바뀌면 좋겠다고 얌전히 말해줬다. 내가 보기엔 그냥 남사스러웠다. 그러나 야한 걸 남사스럽다고 하면 촌스러워지는 곳이어서 되도록 티 내지 않고 있었다. 간혹 조금 심한 비평을 들은 날이면 걔는 그 자리에서 입을 막고 억억 우는 것 같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작은 눈과 둥근 코, 얇은 입, 각진 턱에 주근깨가 도드라지는 얼굴과 두터운 허벅지, 뭔가 측은한 어깨의 그 아이는 겨울이면 신경 쓰일 정도로 가볍게 입고 나타났다. 한파경보 같은 게 울리고 누군가의 집에서는 보일러가 터지는 날에 짧은 치마와 얇은 트렌치코트에 검정 스타킹 차림으로 나타났다. 그러고는 뭐가 춥냐고 그랬다. 밥맛이었다.
저자가 어머니와 한 달 살기를 했던 일이나 아버지에 대한 글은 진지하게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웃음과 감동을 한 번에 잡을 수 있는 이런 에세이를 읽지 않을 이유가 없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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