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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김지윤, <아이들의 화면 속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by Jaime Chung 2024.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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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김지윤, <아이들의 화면 속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없던 적이 없는 삶을 살아온 세대는 어떻게 화면에 ‘중독’되었는지를 밝히려는 포부를 가졌으나, 이를 적절히 설명하지 못한 책이다. 보통 내 책 리뷰는 책을 간단히 요약하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별로라고 표현하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점을 빼놓고 에둘러 말하기가 어려워서 그냥 대놓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제목은 ‘아이들의 화면 속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인데 본문 내용을 보면 ‘아이들’에게 집중돼 있지 않다. ‘아이들’이라고 하면 대체로 초등학생에서 중학생, 고등학생 나이대를 떠올리지 않나? 그런데 본문에서 드는 통계라든지, 일례라든지, 저자가 개인적으로 만나서 사담을 나눈 대상까지, 그런 나이대의 학생은 없다. 저자가 개인적 경험을 통해 언급하는 ‘아이들’은 최소 대학생이다. 30대 이상쯤 됐으면 대학생을 아이들이라고 느끼고 또 그렇게 지칭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이라고 했을 때 그 단어의 가진 본래의 의미가 바뀌는 것은 아니지요…. 제목도 제목인데 출판사가 제공하는 책 소개를 보면 저자가 초﹒중﹒고등학생의 사례를 집중해서 살펴본다는 인상을 준다. 그것만 보면 저자가 초﹒중﹒고등학교 교사나 청소년 전문 상담사 등, 청소년을 직업적으로 자주 만나는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다. 나는 일단 이 점이 실망스러웠다.

둘째, 이 책은 딱히 한국의 실정에 집중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아무리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젊은이들의 마인드를 장악하는 게 세계적 추세라고 해도, 한국인 저자가 책을 썼으면 대체로 한국 실정에 관한 것이라고 상정하는 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딱히 한국의 상황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미국이나 영국 등 저자가 빌려 온 논문과 기사, 책 등이 쓰인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건지 모호하다. 분명히 한국 ‘아이들’만의 특징이 있을 텐데, 그걸 잘 캐치해내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저자가 인용하는 통계나 사례는 한국과 해외의 것이 뒤섞여 있다. 예컨대 이런 부분이다.

게임은 단어 하나로부터 출발해 훨씬 복합적인 개념으로 발전해 있다. 일종의 게임스러움으로 공기처럼 주변에 깔려 있다. ‘보는 게임’을 예로 들 수 있다. 2021년 정보통신정책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초·중·고 학생 응답자의 48퍼센트, 19세 이상 응답자의 28퍼센트가 최근 1주 동안 유튜브에서 가장 자주 본 콘텐츠 장르로 게임을 지목했다.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스트리머가 게임을 대신 플레이하는 영상을 보는 식으로도 게임을 즐긴다. 게임을 안 해도 게임스러움을 가까이 두고 있다는 뜻이다.
마케팅 에이전시 어도니스(udonis)는 Z세대 응답자들(71퍼센트)이 대체로 게임 플레이와 시청 둘 다 즐긴다는 걸 발견했다. “게임 방송과 콘텐츠에서 더 많은 상호작용이 허용되며, 그래서 젊은 세대가 화면 너머 크리에이터에게 더 연결돼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즉, 하는 게임만큼 보는 게임이 사랑받는다. “게이머가 친구들과, 혹은 낯선 사람들과, 스트리밍을 하며 시청자 앞에서 게임을 하면서 인게이지먼트(engagement, 참여·관여도)를 강화하는 동시에 정서적 니즈를 더 충족할 수 있다”라는 딜로이트의 진단과 맞닿아 있다.



어도니스의 통계는 아마 여기에서 가져온 것 같은데, 응답자의 국적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통계 대상의 대다수가 한국인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 또한 없다. 일단 ‘어도니스’라고 검색했을 때 정식 국내 웹사이트조차 나오지 않는데, 그렇다면 국내에서 활동하는 설문 조사 업체일 리가 없으니까. 물론 이런 종류의 논픽션 책, 어떤 상황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글을 쓸 때 꼭 ‘한국인’ 학자만의 말을 빌릴 수는 없다. 어떤 분야, 어떤 것들은 출신 국가나 문화권을 막론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 학자 매슬로우(Maslow)의 ‘욕구 5단계 이론(생리적 욕구로부터 시작해 자아 실현 욕구까지, 아래 단계에 있는 욕구가 채워지면 위 단계의 욕구를 추구하게 된다는 이론)’은 미국인들뿐만이 아니고, 전 세계 모든 이들에게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는 매슬로우라는 외국 학자를 인용해도 당연히 말이 된다. 그런데 저자가 한국인이라 당연히 한국의 사정에 대해 이야기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국과 해외의 경우를 별 차이 없이 가져와 보여 주면 혼란스럽다. 해외의 경우가 한국에서도 다 들어맞는 건가? 그럴 리가. 해외와 한국은 다르다. 해외, 예컨대 미국 내에서 미국의 현주소를 철저히 분석해서 쓴 책은 한국에서도 공감을 받을 수 있다. 예컨대 내가 앤 헬렌 피터슨의 <요즘 애들>을 읽고 ‘이건 완전 내 얘기야!’라고 느꼈듯이. 그 책은 미국 밀레니얼 세대를 설명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인 내가 나에게도 적용된다고 느낄 만한 부분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한국 밀레니얼 세대를 정확하게 분석한 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구체적인 사항, 즉 경제﹒사회﹒문화﹒교육 등의 배경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 밀레니얼 세대에 관한 글을 쓰려면 한국 밀레니얼 세대를 관찰하고 분석해야 하는 게 마땅하다.

내가 이 점을 가장 크게 의심하게 된 계기는 ‘멍청이 폰’이 언급되는 지점에서였다. 일단 아래의 인용문을 보시라.

젊은 세대는 자구책을 모색하고 있다. ‘멍청이폰(dumb phone)’은 하나의 징후다. 놀랍게도 영미권 Z세대 사이에서는 스마트폰에 있을 법한 기능을 최대한 제외시킨 휴대폰이 주목받고 있다. 전화, 문자 같은 기본 기능에 충실한 휴대전화다. 글로벌 마케팅사 ‘SEM 러시’에 따르면 2018~2021년 사이 멍청이폰 구글 검색량은 89퍼센트가량 증가했다. 2000년대 주로 쓰였던 피처폰 시장이 2023년에도 280만 대씩 꾸준히 판매된다는 분석도 나온다. 아예 멍청이폰을 신제품으로 선보이는 벤처 회사가 등장할 정도다.
‘라이트폰’이라는 회사는 주의력과 시간의 희소성을 강조하면서 “우리는 삶을 되돌린다”라는 광고 카피를 차용했다.[20] 자사 제품에는 소셜미디어, 낚시성 기사, 이메일 알림, 인터넷 검색 사이트, 무한 피드를 탑재하지 않는다고도 선전한다. 문자, 팟캐스트 청취 등이 최소한의 기능만 갖춘 휴대전화를 개발한다는 기조 아래 라이트폰은 2021년 당시 전년 대비 150퍼센트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회사에 따르면 초기 고객들은 이 휴대기기를 스마트폰의 보조 도구로 사용했고, 주말만큼은 스마트폰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했다. 지금은 절반 이상의 고객이 ‘멍청이폰’을 자신의 메인폰으로 사용하고 있다.


‘멍청이 폰’이 뭔가 했더니, ‘똑똑한 전화기’라는 뜻의 ‘스마트폰’과 반대되는 개념이었다. 보통 한국인이라면 이 지점에서 대체로 학생이나 수험생들이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일부러 선택하는 ‘피처폰’을 떠올리지 않을까? 2G폰이라고도 하고 키즈폰이라고도 하는 이 피처폰을 ‘멍청이 폰’이라고 부를 수는 (물론) 있지만, 그래도 한국인 대다수가 더 잘 알고 적당하다고 느끼는 용어는 피처폰일 것이다. 게다가 심지어 ‘라이트폰’이라는 회사는 국내에 정식으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 ‘라이트폰’ 기업이 어떻게 현대인들에게 통했는지를, 스마트폰에 질린 현대인들의 태도를 대표하는 것처럼 설명하는 건, 정말이지 국내의 현실을 무시한 처사다. 우리나라에서도 피처폰은 꾸준히 수요가 있어 왔고, 그래서 여전히 공급도 되는데, 차라리 국내 피처폰의 경제 규모를 조사해서 보여 주거나 피처폰을 사용하는 한국인 젊은이를 인터뷰한 내용을 들려 주는 게 한국의 경우에 훨씬 더 잘 맞지 않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한국이나 미국이나 일본이나 프랑스나,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현대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나라마다 차이는 있다. ‘라이트폰’이 국내에는 론칭되지 않았다는 사실처럼. 그렇다면 저자는 의도적으로 한국과 해외의 구분을 흐리고 ‘세계적으로 이러한 경향이 있으니까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뭐’라고 생각해서 이런 부분을 쓴 걸까? 정말 모르겠다.

여기에 굳이 ‘문제’라고 하기엔 좀 뭣하지만 내게 살짝 거슬리는 점을 두 가지 더 꼽자면, 첫째, 굵은 글씨로 강조한 부분이 잦다는 것이다. 종이책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 태블릿 PC 상의 이북 리더 설정으로는 한 쪽에 한두 번 정도, 볼드체로 강조된 문장이나 구가 등장한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라고 알려 주려는 의도는 이해하나, 이게 너무 잦아서 ‘뭐 그렇게 강조하고 싶은 게 많은가’ 생각하게 될 정도다. 심지어 화면이 태블릿 PC보다 작은 스마트폰으로 이 책을 읽으면 거의 매쪽 굵은 글씨가 등장한다. 저자가 강조하려는 바가 많다 보니 ‘내 말을 들어!’라든지 ‘내 말이 옳아!’ 하고 강요하는 느낌까지 든다. 강조도 웬만큼 해야지 임팩트가 있지, 이건 너무 자주 나와서 불편할 정도다.

그리고 둘째, 저자가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것까지 과감히 주장한다는 느낌이 든다. 챗GPT를 위시한 AI의 발전으로 현대인들이 위기감을 느낀다는 내용의 장에서는, 그래서 ‘학교 밖에서 생존하기 위한 학습’의 방법으로 스스로 동기를 부여해 가며 답을 찾아가려는 노력을 강조한다. 그것까지는 알겠는데, 그런 맥락에서 질문이 부재하는 교육 현장을 비판한다. 엥? 그렇지만 당신은 교육 전문가가 아니잖아요? 이런 황당함은 [백지선의 <비혼이고 아이를 키웁니다>](https://blog.naver.com/eatsleepandread/223082894493) 이후 또 오랜만이었다. 본인이 IT 전문가인 건 알겠는데요, 교육은 당신의 전문 분야가 아니니까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 맙시다. 내가 개인적으로 친구들과 만나서 한국 공교육 체계가 잘못됐네 어쩌네 하고 늘어놓는 것과 책에서 공개적으로, 빼도 박도 못하게 활자로 말하는 것은 그 무게감이 다르지요. 나는 내가 전문가라고 말하지도 않았고, 불특정 다수가 볼 수 있는 공간, 즉 책에서 내 전문 범위를 넘어선 말을 확신을 가지고 한 것도 아닌데요. IT 전문가라고 해서 교육에 대해 뭐라고 충고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예컨대 의사가 건축이나 교량에 대해서 (그에 관한 전문가와 똑같은 수준으로) 논할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일 아닌가. 저자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다면 애초에 이런 부분은 쓰지도 않았을 거고, 아니면 편집자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빼자고 설득할 수도 있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남아 버린 것인지 모르겠다.

종합적으로 보면, 딱히 한국의 사정에 집중한 것 같지도 않고, 딱히 (제목에 있는, ’아이들’이라는 표현에서 상정하게 되는) 십 대들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기에 지금 우리가 받아들기에 유효한 ‘통찰’을 찾아보기 어려운 책이었다. 분명 이것저것, 이런저런 흥미로운 부분을 찾을 수는 있는데, 그게 전체적으로 어떤 명쾌한 그림을 그려 우리에게 보여 주지는 않는다. 내가 기대한 만큼의 통찰이 없으니, 책장을 덮고 나서 아쉬움만 남을 뿐이다. 완전 쓰레기라고 욕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게 정말 저자가 글의 주제와 타깃을 분명하게 정하고 분석한 후 쓴 글이 맞는지,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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