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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머리사 멜처, <디스 이즈 빅>

by Jaime Chung 2024.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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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머리사 멜처, <디스 이즈 빅>

 

 

‘웨이트워처스(Weight Watchers)’의 설립자 진 니데치의 전기와 저자 머리사 멜처 본인의 다이어트 경험이 교차하는 논픽션. 저자 역시 비만인 여성으로서, 다이어트를 수도 없이 시도해 봐 왔다고 한다. 어느 날, 진 니데치의 삶에 흥미를 느끼고,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진에게서 자신과 닮은 점을 발견한다. 비록 진은 30여 킬로그램을 감량하고 유지했으며, 그 경험을 바탕으로 ‘웨이트워처스’라는 감량 프로그램 회사의 얼굴이자 진행자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는 점은 저자와 무척 달랐지만 말이다. 저자는 그녀의 삶에 대한 책을 쓰기로 결심하고, 그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웨이트워처스를 1년간 시도해 보기로 한다.

그런데 〈뉴욕타임스〉 홈페이지에서 진 니데치가 활짝 미소 짓고 있다. 큼직한 올빼미 안경을 쓰고 금발을 한껏 부풀린 이 여인이, 애초부터 먹을 생각도 없었을 케이크 한 조각을 손에 든 채. 맨 처음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날 비참하게 만든 얼굴을 드디어 보는군. 이 여자가 그 모든 걸 시작한 악마이자, 충분히 신경만 쓰면 체중 감량 정도야 떼놓은 당상처럼 보이게 만든 장본인이란 말이지? 나는 나의 끝없는 다이어트 시도와 그 모든 강박과 좌절을 분풀이할 대상을 반드시 찾겠다는 일념으로 진의 부고를 읽어 내려갔다. 그녀의 인생 이야기는 대충 어떤 식일지 안 봐도 뻔하다고 생각했다. 날씬한 여자가 뚱뚱한 사람들의 인생에 끼어들어 그들이 칼로리 계산이나 무지방 냉동식품 같은 데서 한시도 헤어나지 못하게 옭아매고 정작 자신은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는, 대략 그런 줄거리의 이런저런 변주일 것이 뻔했다.
하지만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진 니데치에게서 악당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나를 보았다. 몸무게를 고민하며 평생을 보낸 여자가 거기 있었다. 진은 통통한 아이였다가 뚱뚱한 성인으로 자랐고, 단것을 향한 강렬한 욕망과 씨름했으며, 친구들과 고급스러운 케이크를 한 조각씩 야금야금 즐기기보다는 몰래 욕실에 틀어박혀 제일 좋아하는 슈퍼마켓 과자를 상자째 흡입하던 사람이었다. 진과 나는 둘 다 키가 170센티미터이고, 유대인이고, 금발이며(진은 염색으로, 나는 날 때부터), 브루클린 주민이다(진은 날 때부터, 나는 나의 선택으로). 진이 살을 빼기 전의 옛날 사진을 보면 나하고 너무 닮아서 이모나 사촌이라 우겨도 될 정도였다. 그녀는 마치 시간을 거슬러 1961년의 뉴욕으로 나를 옮겨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진이 살을 빼면서 스스로는 물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정도로 인생을 완전히 바꾸기 시작한 그때, 그녀는 나와 같은 나이였다. 진이 바닥을 쳤던 순간은 임신했느냐는 오해를 받았을 때였다. 내가 임신했을 거라고 넘겨짚은 사람도 족히 수십 명은 된다.
(…)
게다가 진은 인간적으로 보였다. 진은 사랑, 나이, 일, 가족 그리고 세상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놓고 평생 씨름한 여성이었다. 진 니데치 인생의 축약판을 다 읽고 나자 나는 새로 발견한 적의 죽음을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잠시나마 그녀와의 유대감을 느꼈다.

 

저자는 진의 삶과 자신의 삶을 한 챕터씩 번갈아가며 회고하고, 웨이트워처스 모임에 참여하며 자신과 비슷하게, 살을 빼기 위해 이 모임에 참여한 이들과 어떻게 교류했고, 자신의 친구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자신의 몸 때문에 데이트와 사랑 면에서 얼마나 자신이 없는지를 털어놓는다.

앱이나 온라인상에서 나더러 “굴곡이 멋지시다”거나 “엉덩이가 풍만하시겠다” 같은 말로 운을 떼며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하는(누가 기사도는 죽었다고 했을까!) 메시지는 꾸준히 무시해왔다. 누군가가 꿈에 그리는 그런 비만녀가 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다. 페티시즘처럼 느껴질 뿐 아니라 진정한 나 또는 내가 보는 내 모습과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어느새 나는 내 신체 유형이 아닌 나 자신으로 보이고 싶다는 마음으로 되돌아간다. 머리가 배배 꼬일 것 같다. 나는 대상화되고 싶다. 하지만 올바른 방식으로 되고 싶다. 비참한 역설이다.

“네가 살 빠진 걸 아무도 못 알아보는 거 같다고 그랬잖아. 난 알아볼 수 있어.” 제니퍼가 말했다.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제니퍼와 나는 드라마 〈베벌리힐스의 아이들〉 이야기나 같이 좋아하던 연예인 추억담처럼 항상 밝고 유쾌한 수다만 떠는 사이였다. 우리는 함께 즐거운 시간을 많이 보냈지만 서로의 감정에 대해서는 여간해선 말하지 않았다.
“너도 보기 좋아.” 내가 말했다. 제니퍼가 얼마나 감량했는지는 정확히 몰라도 목이 꽤 가늘어진 것은 내 눈에도 확연히 보였다. 내가 친구에게 그런 칭찬을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꺼려진다. 우리는 안 해본 애정 표현을 하느라 몸이 배배 꼬이는 시트콤 속 아버지들 같았다. 20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했지만 서로에게 이 정도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힘들다니, 차라리 참담하다고 해야 할까.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여자는 내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손을 흔들다가 러닝머신 위에서 자빠지는 모습도 보았다. 그녀 앞에서 용변을 본 횟수도 셀 수 없다. 우리는 함께 대륙 세 개를 여행했다. 그럼에도 체중은 여전히 우리 둘에게 너무나 난해한 어떤 것이어서 농담 속에 묻어버리거나 눈동자를 굴리게 되고, 굳이 서로 신경 쓰지 않아도 각자 알아서 잘하는 척한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우리는 천천히 서로를 열어가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 물론, 저자는 현대 ‘웰니스(wellness)’ 문화에 대한 비평도 잊지 않는다. 뚱뚱한 사람들은 살을 빼야 한다는 말을 듣지만, 동시에 현대 웰니스 문화에서는 자기 몸을 사랑하라는 압박도 받는다. 자기 몸이 너무 예뻐 죽겠다는 듯 사랑하지 못하면, 그것조차 실패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 중립주의(body neutrality)’는 자기 몸 긍정주의보다 덜 어렵거나 더 성취 가능한가? 저자는 체중 감량 캠프에 참가해 신체 중립주의에 대한 강의를 듣고 나서 이렇게 썼다.

정작 문제는 이것이다. 사람이 자기 몸에 중립적이거나 중립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내가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보는 순간, 이미 그것은 중립적이지 않다. 사실 캠프를 가는 것도 대단히 예외적이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티 트리아농(그녀가 가장 사랑했다는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 별궁)에서 시골처녀 연기를 하는 것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등록비를 내고 일상에서 물러나 한 달간(이보다 더 길어질 때도 있고 캠프를 여러 번 오는 고객도 있다) 자기 시간을 낼 여력이 있는 이 부유한 여성들은 이곳에서 오로지 자기 몸에 집중할 뿐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비현실적이다. 그 돈이라면 다들 대출금을 갚거나, 삶의 질을 높이거나, 신용카드 대금을 지불하거나, 아니면 저축을 할 것이다. 자유롭게 쓴다는 전제가 있다 해도 휴가를 가거나 자동차를 사고, 어떤 지역에서는 집을 사는 데 보탤 것이다.

 

게다가, 많은 여성들이 특히 이 부분에 공감할 텐데, 정치적 신념이 다이어트(와 그것을 부추기는 사회 문화) 사이에 끼어들면 모든 게 더 복잡해진다. 이 부분은 저자가 정말 기가 막히게 잘 표현해서, 내가 더 말을 덧댈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정치적 신념 때문에 복잡해진 것은 분명하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나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여겨왔다. 다이어트를 적극적으로 하게 되면, 그전까지는 먹는 것 때문에 느끼던 죄책감이 내가 잘못된 페미니스트거나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죄책감, 체중 감량이라는 관습적이고 우울감을 유발하는 무언가를 추구하고 있다는 찔림으로 바뀐다. 모든 신체가 찬사받는 세상을 위해 싸우는 대신, 세상과 영합하고 세상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내 몸을 고치려 한다는 두려움이 고개를 든다. 전통적인 페미니즘의 시각에 따르면 외모 때문에 칭송받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억압에 동참하는 것이며, 우리의 두뇌와 힘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음식, 사회, 페미니즘과 관련하여 내가 가장 풍성한 논의를 발견한 곳은 주디스 워너의 책 《엄마는 미친 짓이다》였다. “마치 좋은 종류와 나쁜 종류의 통제 행위가 있다는 식이었다. 나쁜 종류는 ‘가부장제’의 손바닥 안에서 노는 것이었다. 예컨대 마른 몸이나 그 외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남성들의 일반화된 관념에 순응하는 모든 것이 여기 속한다. 좋은 종류는 가부장제와 대결했다. 의료계, 식품 산업 또는 관습의 낌새가 느껴지는 모든 것에 도전하는 형태를 취했다.” 워너는 이 모든 행위가 우리가 좋은 기분을 느끼도록 만들며, 그 안에 자기강화적 측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음식–신체 통제는 아편이다. 존재의 불안을 덮어버리는 대단히 효과적이고 대단히 적응적인 방식이다.” (…) 한마디로, 훌륭한 페미니스트는 다이어트를 하지 않는다. 한다 해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우리는 다이어트 사실을 숨기도록 교육받았다. 아니면 그 정도에 연연하는 수준은 뛰어넘어야 하므로 다이어트를 해도 티가 덜 나게 하라고 배웠다. 내가 아는 어느 작가는 남자친구가 자기 집 냉장고를 열어보고 자신이 다이어트 식단 배송업체에서 저칼로리 포장음식을 시켜 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까 조마조마해했다. 누군가는 캐슈너트 개수를 셀 때마다 동료들의 눈을 피하려 애쓴다. 또 누군가는 인스타그램에서 피트니스 계정들을 따로 팔로우하기 위해 비밀 계정을 하나 더 만들었다. (…) 우리의 몸은 신체 긍정주의보다 더 복잡하다. 근본적인 신체 사랑 운동은 ‘탄탄하고 날씬한 몸’이라는 지배적이고 끈질긴 미학에 맞서는 데 꼭 필요한 대척점이지만, 그럼에도 비현실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은 미적 규범을 진심으로 경멸하는 흔치 않은 개척자를 요구한다. 그리고 나는 반골 기질이 없다. 뚱뚱하지 않기를 바라면 문제가 있다는 식의 관점이 신체 긍정이라면 나에게는 답이 될 것 같지 않다. 내 욕구는 변한 적이 없다. 나의 가장 큰 문제는 오히려 사랑, 긍정, 중립, 수용이라는 단어들 자체와 관련되어 있다. 이런 말들은 마치 내가 내 몸을 관리하려고 애쓰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힘들지 않다는 양 내가 내 기분까지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을 것이라 전제한다. ‘내 몸 사랑하기’는 여전히 몸에 초점을 맞춘다. 차라리 나는 내 몸에 대해 아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자유를 바란다.

“차라리 나는 내 몸에 대해 아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자유를 바란다.” 이 문장에 정말 크게 공감한다. 나와 내 몸이라는 가장 내밀하고 친밀하고 사적이어야 할 관계가 사회와 타인의 시선 때문에 망가지는 게 안타깝다. 게다가 이런 일은 왜 거의 늘 여성에게만 일어나는지… 이 책에서도 잠시 언급되지만, 웨이트워처스에서 남성 회원은 10% 정도이고, 심지어 마케팅의 방향도 여성 회원을 타깃으로 하는 것과는 다르다.

남성은 항상 웨이트워처스 프로그램의 10퍼센트가량을 차지해왔고, 공개적인 체중 검사나 모임 참석을 강요하지 않는 온라인 다이어트 프로그램의 도래는 이들 인구집단과 잘 맞아떨어졌다. 웨이트워처스는 남성 전용 온라인 프로그램(“남자답게 감량하라”나 “진짜 남자는 다이어트를 하지 않는다” 같은 ‘남성적인’ 어휘가 쓰인 것을 보면 이성애자 남성을 겨냥한 것 같다)을 시작했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인 찰스 바클리가 유명인사 대변인으로 기용되어 ‘프로그램을 그대로 지키면서 감량을 해나가라’는 메시지를 홍보했다. 여성 회원들에게 자주 쓰였던 구원을 약속하는 치료적인 어조나 자기 잘못이 얼마만큼인가를 따지는 자기 부인의 뉘앙스도 빠졌다.

 

국내에 웨이트워처스는 없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다이어트를 해 보지 않은 이는 없을 테니 문제없다. 다이어트를 한 번이라도 해 본 이라면 공감하며 읽을 수 있다. 내가 책 소개를 위해 인용할 때는 굳이 가져오지 않았지만 진 니데치의 삶도 (이 책을 통해) 되돌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 참고로 리디 셀렉트에서 이용 가능하니, (나처럼) 리디 셀렉트에서 읽을 게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이 책이라도 건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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