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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나탈리 헤인스, <천 척의 배>

by Jaime Chung 2024.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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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의 목마’로 유명한 트로이-그리스 전쟁 이야기는 이미 다들 알 것이다. 하지만 그 전쟁에 연루된 여성들이 어떤 일을 했고, 어떻게 살았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남자’ 영웅들만큼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소설에서 나탈리 헤인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이 여인들에게 목소리를 준다.

<일리아드>나 <오뒷세이아> 같은 서사시들은 관습적으로 시인이 무사(희랍 신화에 나오는 학문과 예술의 여신들. 영어식으로 하면 ‘뮤즈’) 여신들에게 ‘제가 이 시를 잘 노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라’ 하는 기원으로 시작하는데, 저자는 이 관습을 살짝 비틀어 칼리오페가 이 소설의 첫 장을 시작하게 한다. 칼리오페가 무사이(’무사’의 복수형) 중 유창함과 서사시를 담당하는 여신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시인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못했던 여성의 입장을 이해하고 노래하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밝힌다.

나는 불타는 도시에서 탈출한 여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라고 바로 시인을 바닷가로 데려갔는데, 시인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불쌍한 크레우사보다 더 나을 것도 없다는 걸 알아차리지도 못했어. 이렇게 대놓고 주워 먹으라고 갖다주는 데도 알아먹지를 못하니 원. 나는 그에게 트로이아 전쟁 중 한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쟁에 휘말린 모든 여자들의 이야기를 주려는 건데. 뭐, 모두는 아니더라도.(헬레네를 넣을지 말지는 아직 결정을 안 했거든. 헬레네는 좀 짜증을 유발해서.)

나는 시인한테 전쟁을 양쪽 끝에서 볼 기회를 주려고 해. 전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 결과가 어떻게 펼쳐졌는지. 규모 면에서나 주제 면에서나 장대하지. 그런데 시인은 테아노를 어떻게 묘사할지 이제 겨우 감이 왔는데 테아노 역할이 끝나 버렸다고 징징대고 있네. 멍청한 인간. 이건 테아노의 이야기도 크레우사의 이야기도 아니라고. 그들의 이야기지. 시인이 투덜거리기를 멈추고 계속 시를 짓는다면 그렇게 될 거야.

 

그리스﹒로마 신화 만화깨나 읽었다는 독자는 별 어려움 없이 이 소설 속 사건들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조금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책 뒤에 있는 ‘작가의 말’을 참고 문헌으로 삼아도 좋다. 당연히 <일리아드>나 <오뒷세이아> 정도만 알아도 문제없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 <트로이아의 여인들>이나 <오레스테이아>, <이피게네이아>까지 읽으면 더 좋다. 조금 더 현대적인 해석을 읽고 싶다면 (역자가 ‘옮긴이의 말’에서 언급하듯) 매들린 밀러의 <키르케>(키르케)나 마거릿 애트우드의 <페넬로피아드>(페넬로페), 팻 바커의 <침묵은 여자가 되나니>(브리세이스), 그리고 크리스타 볼프의 <카산드라>(카산드라)도 읽으면 된다. 개인적으로 앞의 두 권을 읽어 봤는데 마거릿 애트우드의 <페넬로피아드>를 강력히 추천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썼는데, 이 부분이 너무나 통쾌해서 여기에서 보여 드리고 싶다. 아킬레우스 진짜 완전 애새끼인데 무슨 위대한 영웅 ㅋㅋㅋㅋㅋ 차라리 자기가 질 것을, 또한 죽을 것을 알면서도 싸웠고, 다정한 남편이자 좋은 남자였던 헥토르를 영웅이라고 하면 이해나 하지.

그런데 그 친구가 이 책의 기본 전제에 의문을 제기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혹은 살아남지 못한) 여자도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영웅적이라는 전제에. 남자들은 나가서 싸우는데, 여자들은 그러지 않지 않냐는 게 그 친구 주장의 근거였다. 그런데 여자(대표적으로 펜테실레이아와 아마조네스들)도 싸운다. 이들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는 시들이 사라지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남자들이라고 언제나 싸우는 것은 아니다. 아킬레우스는 24권으로 이루어진 『일리아스』에서 18권이 될 때까지 싸우지 않는다. 앞쪽 17권에서는 내내 말다툼하며 삐져 있고, 엄마한테 도와 달라고 하고, 또 좀 삐져 있다가 친구한테 대신 싸움을 시키고, 조언은 하지만 사과는 하지 않는다. 계속 안 싸운다고 버티면서. 다시 말해서 전체 시의 거의 4분의 3 분량을 전장을 떠나 집과 비슷한 곳에서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킬레우스가 영웅이라는 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싸우지 않아도 전사로서 지위는 확고하다. 나는 서사시처럼 쓰려고 의도한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영웅심이란 우리 모두에게 깃들어 있는 것이라고 느끼기를 바란다. 특히 상황이 영웅심을 요구할 때는 누구나 영웅심을 발휘하게 된다. 영웅심은 남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전쟁의 비극적 결과가 여자들에게만 미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존자, 희생자, 가해자의 역할이 언제나 자로 잰 듯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상처를 입으며 동시에 상처를 줄 수 있고, 혹은 같은 생 안에서 다른 시기에 그럴 수도 있다. 아마도 헤카베가 가장 통렬한 예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이 소설에서 목소리를 내는 여자들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칼리오페와 페넬로페인데, 둘 다 말투가 너무 내 취향이어서다. 은근히 말 안에 뼈가 있는, 돌려서 멕이는 그런 말투. 이게 너무 웃기고 통쾌했다. 우리 페넬로페, 하고 싶은 말 다 해!

그러고 또 7년—7년이라고! 오딧세우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긴 해? 스물여덟 번 계절이 바뀌고, 일곱 번 추수하고, 아이는 어른이 되고,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병 드시고—그동안 당신한테서는 한 마디 소식도 없어. 하지만 안심해.(당신은 안 그래도 지금 무척이나 마음 편히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음유시인이 당신 이야기를 들려주니까.

칼립소의 동굴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시인이 처음 이 대목을 불렀을 때 나는 완곡어법인 줄 알고 시인을 회초리로 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니까. 시인은 저속한 이야기를 돌려 말하는 게 아니라고, 부엉이며 매며 새들이 사는 포플러와 사이프러스 나무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주장했어. 시인이 나를 비웃는 건 아닌지 판단이 안 서더라. 감옥치고는 무척 목가적으로 들리던데. 잘 익은 포도가 주렁주렁 달린 넝쿨이 동굴 입구에서 자라고 근처 샘에서 맑은 물이 퐁퐁 솟고. 파슬리로 덮인 풀밭 군데군데 제비꽃이 돋았다는데 아마 그 여자가 그 색을 좋아하나 봐. 아니면 제비꽃을 먹는지도 모르고. 당신 편력이 하도 화려해 이제는 넘겨짚기도 힘들다. 칼립소는 손님 대접이 완벽했던 모양이야. 당신이 그 여자의 남편이 아니라 내 남편이라는 사실(내가 이 사실을 아직 기억하는 것도 참 희한한 일인 것 같긴 한데.)만 눈 감을 수 있으면 말이지. 시인이 또 노래하길 칼립소가 황금 베틀에서 뛰어난 베 짜기 솜씨를 보여 준다고 하던데, 아마 당신도 그 솜씨에 감탄했겠지. 난파해서 표류했다니 당신한테 새 망토가 필요하긴 했을 거야.

시인 말이 당신이 바다를 바라보며 집을 그리워한다고 해. 칼립소에게 놓아 달라고 애원했다고. 칼립소에게 아내가 비록 님프보다 아름답진 않지만, 게다가 이토록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더욱 그럴 테지만, 그래도 아내이기에 사랑한다고 말했다며. 솔직히 말해서, 오딧세우스, 당신이 그런 소리를 안 했다면 좋았을 거야. 자기가 아름답지 않고 나이도 많다는 이야기를 노래로 듣고 싶은 사람이 있겠냐고.

그랬던 페넬로페가, 남편 오뒷세우스가 돌아온 후 헤라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릴 때는 조금 더 예의를 차린 언어를 쓰긴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남편이 이렇게 무정하고 잔인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의 피를 흘리게 한 남자라니’ 하며 안타까움을 느끼는 게 참 슬펐다. 나는 페넬로페의 내러티브를 어느 미디어, 어느 작가의 입을 통해 듣든 늘 남편에 비해 너무 훌륭하고 지혜로워서 아까운 여자라고 생각했기에 더더욱.

 

나탈리 헤인스가 목소리를 준 덕분에 나는 헤카베와 폴릭세네, 카산드라, 안드로마케 등 트로이아의 여인들에게 이입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여성주의적인 소설을 읽고 싶다면, 또는 고전을 현대적이고 여성적인 시각으로 ‘리메이크’한 작품을 찾는다면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마지막으로 ‘알쓸신잡’한 지식으로 이 글을 끝맺을까 한다. 책 제목인 ‘천 척의 배(a thousand ships)’는 트로이 전쟁을 일으킨 트로이의 헬레네의 미모를 수식하는 말인데(천 척의 배를 띄울 정도로, 즉 큰 전쟁이 날 정도로 헬레네가 아름다웠다는 뜻),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 나온 게 아니라 17세기에 영국의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가 <포스터스 박사의 비극(The Tragical History of Dr. Faustus)>에서 쓴 표현이다. 포스터스 박사는 우리가 ‘파우스트’ 박사로 아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한 그 박사의 이름의 변형이다.

이것이 천 척의 배를 진수시키고
일리움(트로이의 다른 이름)의 높은 탑들을 불태운 얼굴인가?
아름다운 헬레네, 키스로 나를 불멸케 해주오.

Was this the face that launched a thousand ships
And burnt the topless towers of Illium
Sweet Helen, make me immortal with a ki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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