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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엄민용, <당신은 우리말을 모른다: 어휘편>

by Jaime Chung 2024.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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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엄민용, <당신은 우리말을 모른다: 어휘편>

 

 

자칭﹒타칭 ‘우리말 달인’이 알려주는 올바른 우리말. 어휘편과 문법편이 나뉘어져 있는데 나는 일단 어휘편부터 읽었다.

 

이 책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두 가지를 꼽을 수 있겠다. 첫째, 저자가 자신이 넘친다. 우리말 맞춤법이나 사전도 나날이 변하고 업데이트되는데 시중에 나와 있는 일부 책들은 옛날 지식을 전달해서 현재와 맞지 않으니, 자기 블로그에 들러서 최신 정보를 확인하라고 저자가 정말 여러 번 말한다. 최신 정보를 전달하고 싶어서 자신이 예전에 쓴 책은 일부러 절판시켰다고 하는데, 그 정도의 자신감이면 믿어 봐도 되지 않을까. 게다가 어떤 책들은 어떤 표현들은 번역투니 좋지 않다, 수동태는 웬만하지 쓰지 말라고 하는데, 저자는 그것들이 문법적으로도 문제가 없고 국립국어원도 인정하지 않는다며 써도 괜찮다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우리말 전문가는 처음이라서 나도 놀랐다. 저자가 제시하는 근거를 보면 또 그럴듯해서 나도 그냥 납득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

Q. ⋯ ‘-중에 있습니다’는 문법에 맞지 않거나 번역투의 말인가?

A. 국립국어원 ‘-중에 있습니다’는 ‘-중이다’에서 변형된 표현으로서 번역투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은 옳고 그름으로 답변하기 어렵다. 다만 표현적 측면을 고려해 문맥에 맞게 ‘-고 있다’로 표현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위의 사례들에서 보듯이 흔히들 번역투라고 하는 것을 국립국어원은 거의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위의 사례 외에 ‘-을 필요로 하다’는 번역투이므로 ‘-가 필요하다’ 또는 ‘-가 있어야 한다’로 쓰는 게 옳다거나 ‘-이 요구되다’ 같은 피동태도 번역투이므로 ‘-이 필요하다’ 꼴로 써야 한다는 등 번역투와 관련한 지적이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번역투라고 들은 표현 대부분을 국립국어원은 ‘멀쩡한 우리말 표현’으로 얘기할 겁니다. 아울러 ‘요구되다’ ‘오염되다’ ‘흥분되다’ 등처럼 여러분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되다’ 꼴의 동사는 대부분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돼 있습니다. 제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당장 〈표준국어대사전〉을 뒤져 보거나 국립국어원 누리집에 들어가서 ‘온라인 가나다’에 물어보세요. 누구 말이 맞는지 금방 알게 될 겁니다.

 

둘째, 나름대로 유머러스하게, 재미있게 글을 쓰려고 신경 쓴 티가 난다. 예를 들자면 아래 <황금어장>의 ‘무릎팍도사’ 코너를 소재로 삼아 올바른 표현을 알려 주는 꼭지가 그렇다.

만약 누가 저에게 “그동안 가장 싫어한 TV 프로그램이 뭐냐”라고 물으면 저는 〈황금어장〉의 ‘무릎팍도사’ 코너라고 말할 겁니다.

제가 이 프로를 싫어하는 것은 출연자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내용이 마뜩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닙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보고 적잖이 웃음을 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프로로 인해 ‘무릎팍’이라는 말이 표준어인 양 세력을 넓혀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무릎팍도사’가 ‘무르팍’이라는 바른말을 몰아내고, 말도 안 되는 ‘무릎팍’을 퍼뜨린 것입니다. 제 딸이 어린 시절 책에 적힌 ‘무르팍’이라는 글자를 보고 ‘무릎팍’을 잘못 쓴 것이라고 얘기해 쓴웃음을 지은 적도 있습니다.

“가슴의 판판한 부분을 속되게 이르는 말”인 ‘가슴팍’이 있다 보니, 무릎을 달리 부르는 말도 ‘무릎팍’일 것으로 생각하는 듯한데, “무릎을 속되게 이르는 말”은 ‘무르팍’입니다. ‘무르팍’은 ‘무릎’에 ‘악’이 더해진 뒤 ‘릎’의 ㅍ 받침이 연철된 거랍니다.

그 프로가 변명거리로, ‘무릎’에다가 의성어 ‘팍’을 재미로 붙인 것이었다고 한다면, ‘무릎 팍’으로 띄어 썼어야 합니다.

청소년은 물론 국민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송이라면 재미를 핑계로 소중한 우리말을 훼손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이 때문에 제가 지금 제일 싫어하는 프로그램이 SBS의 〈런닝맨〉입니다. 저는 절대 이 프로그램을 보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영어 ‘running’의 바른 외래어 표기는 ‘런닝’이 아니라 ‘러닝’이거든요. 그 이유는 〈문법 편〉에서 좀 더 자세히 얘기해 드릴게요.

나도 비슷한 이유로 <아빠! 어디가?>를 싫어하는데, 도대체가 ‘문화방송’의 프로그램이라면서 이 제목은 당최 어찌된 것인지 문법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아빠에게 우리 어디 가냐고 묻는 거면 ‘어디 가?’라고 띄어 쓰는 게 맞는다(만약 이 프로그램의 표기가 맞으려면 아빠가 이미 이전에 어떤 장소에 대해 뭐라고 발언을 했고, 아이가 ‘어디가 (그래?)’라고 물어보는 상황이어야 한다). 게다가, 이건 나만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아이가 아빠를 부르고 잠시 반 박자 정도 쉰 후 어디 가냐고 물어보는 거니까 ‘아빠, 어디 가?’라고 쉼표를 이용해 이으면 될 거 같은데 느낌표를 써서 ‘아빠!’ 하고 문장을 끝내 버린 후 질문을 던진다는 게 어색하게 느껴진다. 발화할 때를 생각해 보면 ‘아빠 (사이) 어디 가?’ 이렇게 말하지 않나? 이 프로그램 제목뿐 아니라 요즘 사람들은 다 이 잠깐의 사이를 ,(쉼표)로 잇지 않고 문장을 거기서 끝내 버리는 것 같다. 예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만약에 한국어 꼰대라는 게 있다면 내가 아마 바로 그거인 듯.

 

솔직히 우리말을 배우는 책이라는 게, 책 중에서도 제일 인기 없는 편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최소한 읽는 사람들만 읽는 그런 분류에 속할 듯.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이미 매일 말하고 쓰니까 자기가 한국어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모국어라서 더 대충, 깊이 공부하지 않고 쓰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소한 글을 자주 쓰는 사람들은 한 번이라도 읽고 배우고, 곁에 두고 계속 찾아보면 도움이 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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