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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존 발리, <엔터를 누르세요■>

by Jaime Chung 2024.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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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존 발리, <엔터를 누르세요■>

 

 

SF 전문 출판사 ‘아작’에서 낸 SF 소설가 존 발리의 소설. 종이책 기준으로 184쪽밖에 안 되는 얇은 책인데 앞에 저자의 에세이 같은 게 짧게 실려 있으므로 본편은 그보다 더 짧다. ‘조용히 살던 한 남자가 갑자기 전화가 울려서 옆집에 가 봤더니 그 집 주인은 죽어 있고 컴퓨터에 알쏭달쏭한 글귀가 남아 있다’라는 게 극초반의 줄거리이다. 다음 인용문을 보시라. 이거 엄청 흥미로워 보이지 않습니까!

“이것은 녹음된 소리입니다. 메시지가 완료될 때까지 전화를 끊지 마세요. 이 전화는 옆집 찰스 클루지의 집에서 걸었습니다. 10분마다 반복해서 전화가 갈 것입니다. 클루지 씨는 자신이 좋은 이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불편을 끼친 점에 대해 미리 사과합니다. 클루지 씨는 당신에게 즉시 집으로 와달라고 요청합니다. 열쇠는 매트 아래에 있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가서 해야 할 일을 하세요. 당신의 봉사에 대해 보상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딸가닥. 발신음이 들렸다.

“그 사람이 이 기계 앞에 앉아 있었어요.” 내가 키보드를 건드리자마자 키보드 뒤에 있던 모니터에 단어들이 가득 찼다. 나는 얼른 손을 뒤로 빼고 거기에 적인 메시지를 응시했다.

프로그램 이름: 현실 세계여 안녕히

날짜: 8월 20일

내용: 유언장, 기타

특성:

프로그래머: 찰스 클루지

작동시키려면

엔터를 누르세요 ■

끝에 있는 검은색 사각형이 깜빡거렸다. 나는 나중에 그걸 ‘커서’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략 이 정도를 알라딘에서 미리 읽기로 보고는 엄청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자책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 사서 읽었는데, 음… 읽다가 중반쯤 가서 흥미를 잃었다. 이유인즉, 리사 푸라는 베트남계 여자가 등장하는데 그 여자 캐릭터랑 주인공 중년 남자 빅터가 연인이 된다는 기함할 만한 전개 때문이다. 아니, 주인공 본인도 “왜 지랄병에 걸린 늙은 방귀쟁이를 짊어지고 살려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데! 게다가 “내 나이는 리사보다 정확히 두 배 많았다.”라며? 하… 이게 너무 충격적이고 입맛이 떨어질 정도여서 과연 이웃집 남자(위 인용문에 나온 ‘찰스 클루지’)가 죽은 이유가 뭔지, 그 배후를 밝히려고 하는 과정이 눈에 안 들어왔다. 굳이 리사와 빅터가 섹스를 하고 애인이 될 필요가 있었을까? 그냥 좋은 동료, 친구가 되면 소설 전개가 어려워지나? 하…

 

게다가 소설을 읽다 조금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부분이 있어서 원서를 찾아봤더니 번역이 틀린 곳이 몇 군데 있었다. 내가 원서와 번역본을 처음부터 끝까지 대조해 본 게 아니어서 이게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일단 첫 번째.

참치 캐서롤을 만들었다. 내가 만드는 방법은 그 이름만큼 맛있지 않았다.

여기는 원문이 “I made a tuna casserole—which is not as bland as it sounds, the way I make it"이다. ‘bland’가 맛이 자극적이지 않고 밍밍하다는 뜻이니까(케임브릿지 사전의 뜻풀이를 참고하시라), 이 부분은 완전히 뜻을 반대로 오역했다. 참치 캐서롤처럼 원래는 밍밍한 음식도 내가 만들면 맛있다고 해석하는 게 맞는다.

“사이공에서 길가에서 태어났어요. 혹은 파자마 입은 놈들이 이름을 바꾼 대로 호치민의 똥. 놈들의 자지가 썩어서 떨어지고, 엉덩이에는 삐죽삐죽한 부비트랩이 잔뜩 박히길 기원합니다. 엉터리 불어는 죄송.”

‘엉터리 불어는 죄송’은 도대체 뭔 소리인가 하고 찾아봤더니, “The sidewalks of Saigon, fer shure. Or Ho Chi Minh’s Shitty, as the pajama-heads renamed it, may their dinks rot off and their butts be filled with jagged punjee-sticks. Pardon my French.”였다(’fer shure’는 ‘확실히, 틀림없이’라는 뜻의 ‘for sure’를 소리나는 대로, 입말대로 쓴 것이다). ‘pardon my French’는 욕이나 상스러운 언어를 사용했을 때 상대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말이다(역시나 케임브릿지 사전의 뜻풀이를 보시라). 바로 앞에 똥이나 자지니 엉덩이니 하는 상스러운 말을 했기 때문에 리사가 덧붙인 거다. 프랑스어는 하지도 않았는데 무슨 엉터리 불어가 죄송하대? 아작 출판사에서 낸 책을 많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몇 권 읽었는데 번역이 틀린 부분이 있었어서 (몇 년 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체체파리의 비법>에 틀린 부분을 정리한 포스트까지 이전에 쓴 적 있다. 바로 여기) 이번에도 조심스레 읽었는데,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이 문단 바로 아래에는 이런 표현도 나온다.

나는 리사에게서 내 상처만큼이나 깊은 상처를 느껴졌다.

이건 원문을 찾아보고 자시고도 할 필요도 없이 그냥 비문이다.

“뭘 원하세요, 빅터?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과 결혼할게요. 아니면 당신과 함께 죄악 속에서 살게요. 나는 죄악 쪽이 더 좋지만, 당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죄악 속에서 산다니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둘이 무슨 보니와 클라이드처럼 무법자로 살겠다는 것인가. 원문은 “What do you want, Victor? I’ll marry you if you want me to. Or I’ll live with you in sin. I prefer sin, but if it’ll make you happy—”이다. ‘live in sin’은 남녀가 결혼하지 않고 (성적인 관계를 가지며) 동거하는 걸 말한다(케임브릿지 사전 뜻풀이). 이 관용구의 뜻을 모르더라도 번역해 놓은 문장만 봤을 때 어색하다는 게 안 느껴지나? 이게 안 느껴졌으면 이상하다는 생각도 못했을 거고, 그러면 원문이랑 대조해서 고치지도 못했을 거다. 그러니 이런 결과물이 나오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가 이 책 전체를 전부 원문과 대조해 본 게 아니라서 틀린 부분이 이게 전부라고 장담할 수가 없다.

 

리사와 빅터를 커플로 만드는 작가의 대담하고 악취미적인 전개에 흥미를 모두 잃었음에도 어찌어찌 책을 끝내긴 했는데, 그러고 나니 내게 남은 게 뭔지 모르겠다. 그래서 클루지라는 이웃이 죽어야만 했던 거대한 음모가 뭔데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작가도 잘못했고 출판사도 (교정교열을 제대로 안 봤으니) 잘못했네. 나는 9천 원만큼 가난해졌을 뿐이다. 혼자 있고 싶으니 다들 나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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