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레베카 하디먼, <83년째 농담 중인 고가티 할머니>
잃을 게 없어서 겁도 없는 할머니가 주인공인 소설. 넓은 폭의 독자를 사로잡을 만하다. 책 표지 띠지에 ‘맨정신으로 보다가도 어느새 킬킬거리게 되는 재치와 입담 속으로’라고 되어 있는데, 그 말이 정말 꼭 맞는다. 어떤 종류의 재미냐고 묻는다면, 표현이 재미있달까. 그 예는 잠시 후, 일단 줄거리와 등장인물 소개부터 하고 보여드리겠다.
제목에 등장하는 ‘83년째 농담 중인 고가티 할머니’는 밀리 고가티이다. 밀리는 어느 날 가게에서 물건을 슬쩍하다가 들키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들 케빈은 밀리에게 가정부를 들여 도움(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감시)을 받지 않는다면 요양원에 보내겠다고 협박한다. 어쩔 수 없이 미국인 가정부 실비아를 들이게 된 밀리. 미국인 특유의 천진난만한 명랑함과 긍정적인 성격의 실비아에게 푹 빠지고 마는데, 이 바람 잘 날 없는 집안이 이렇게 해피 엔딩을 맞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소설을 웃기게 만드는 인물은 크게 세 명, 밀리와 케빈, 그리고 케빈의 딸 중 하나인 에이딘이다. 한 명씩 조금씩 살펴보자면, 밀리는 대담한 할머니이다. 나이가 들어서 자기 자신을 잘 돌볼 수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존심만큼은 그대로이다. 정정한 정신과 이를 따라주지 못하는 노쇠한 신체 사이의 간극이 웃음을 자아낸다.
순간 BMW 한 대가 밀리의 시야 가장자리로 거칠게 들어오더니 날카롭게 이리저리 방향을 튼다. 내가 좀 헤맸나? 운전자는 밀리를 향해 날카롭게 경적을 울린다. 밀리는 답례로 기분 좋게 손을 흔든다. 교통 신호에 멈춘 두 차는 이제 나란히 서고, 밀리는 창을 내려 동료 운전자에게 똑같이 하라고 수신호를 보낸다. 남자의 매끈한 유리창은 위엄 있게 스르륵 내려간다.
“미안허우!” 밀리가 외친다. “사고 난 뒤로 어깨가 뻣뻣해져서!” 비록 다친 것과 아슬아슬한 운전은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뭐라고 해명을 하는 게 의무일 것 같아서다. 밀리는 오른쪽 팔꿈치를 닭 날개마냥 파닥거리며 쌀쌀한 공기를 가른다. “아직도 꽤 쑤시거든.” 밀리는 얼굴이 혼란스러운 안개로 뒤덮인 남자를 향해 경적을 낮고 친근하게 세 차례 울린 후 액셀을 밟는다.
크리스마스 새벽, 밀리는 부엌 서랍들을 뒤지면서 케빈의 집에 가져갈 재활용 선물을 장만하려 애쓰고 있다. 케빈과 그레이스의 선물로는 각각 시드니 관광명소가 그려진 잔받침 세트를 찾아냈다. 에이딘은 어쩌면 김 한 봉(밀리가 듣기로는 스시를 만드는 데 쓴다는)이면 좋아할 것도 같고. 막내인 키아란에게는 세트로 된 장갑과 모자를 주면 되겠지. 장갑 엄지에 소스가 좀 묻어 있긴 하지만, 비누칠을 살짝 하면 뭐든 지울 수 있으니까. 누알라에게는 매니큐어를 줄 거고(미용사가 늘 억지로 떠넘기는 것들), 방학을 맞아 집에 온 제라드에게는 중국 요리책을 주면 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 애의 단칸셋방에 주방이 있었던가?
에이딘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십대 청소년인데, 아빠 케빈이 자신을 기숙학교에 보내자 분노를 표출한다. 분노에 몸을 떠는 에이딘은 어디로 튈지 모르기에 그것도 웃음 포인트.
누알라가 옳다. 에이딘은 충분히 매력적이지 못하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일은 없을 거고, 그건 진정 비극적이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건 제쳐놓고라도, 에이딘은 열망의 대상이 되는 걸 남몰래 열망하기 때문이다. 클린컷은 HMV 음반점 사인회와 백스테이지 VIP 팬 사인회에서 에이딘에게 너무나 잘해주었고 심지어 트위터에서 직접 멘션을 보내기도 했다. 딱 두 번뿐이었지만. 하지만 그건 에이딘이 그 가수와 키 작은 백업팀을 숭배하는 충실한 팬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라스판햄 출신의 듣보잡에 불과하니까. 그 어떤 남자애, 진짜 남자애가 에이딘 고가티를 선택하겠는가. 가뜩이나 광채를 발하는 쌍둥이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데? 심지어 에이딘의 끔찍한 가족조차 에이딘을 원하지 않는데. 어떤 추한 분노, 아니 어쩌면 불의, 아니 어쩌면 그냥 흔한 형제 간 질투의 앙금이 에이딘의 안에서 깨어난다. 잠들어 있던, 몇 달째 곪고 있던 자기혐오의 불씨가 다시 화르륵 타오른다.
에이딘은 뒤로 물러서서 자신의 파괴행위를 가늠해본다. 엄밀히 말해 급진적이지는 않다. 엄밀히 말해 총을 난사해 더블린 중앙우체국에서 영국 병사들을 저지한 마이클 콜린스 급은 아니다. 좀 더 피해를 입힐 필요가 있다. 에이딘은 부엌 서랍에서 가장 크고 가장 날카로운 칼을 가져와 달걀이 문대진 그림 한복판을 푹 찌른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마치 환자의 몸뚱이를 찢어발기는 외과의사처럼. 상처가 어찌나 긴지, 치유는 절대 불가능하다. 이제 됐어. 에이딘은 생각한다. 완전히 좆됐어. 나처럼.
케빈은 이제 중년에다 딸린 식구가 있는 아버지라 위로는 어머니(=밀리)를 돌봐야지, 아래로는 아이들(큰아들 제라드, 쌍둥이 자매인 누알라와 에이딘, 막내아들 키아란) 봐줘야지, 가운데에 끼어서 고생이 많다. 케빈은 실직 상태인데, 돈은 아내인 그레이스가 잘 버는 듯하다. 대신 그만큼 그레이스가 바빠서 집안일과 애들 보는 일은 전부 케빈의 몫이다. 그렇다고 케빈을 너무 불쌍하게만 볼 필요는 없다. 끝까지 가지는 않지만 케빈도 잠시 바람을 피우기 때문이다. 자세히 스포일러를 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요.
“술 드시느라 좀 바쁘셨겠어요…” 케빈은 농담이라는 걸 보여주려고 싱긋 웃고는 얼굴을 찌푸린다. 예전에는, 아아 그렇다, 거의 20년 전, 두 사람이 아직 번식을 시작하기 전의 말도 안 되게 태평하던 그 시절에는 농담이라는 신호를 따로 줄 필요가 없지 않았나? 케빈은 그냥 곧장 농담을 하곤 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거나, 어깨를 으쓱하거나, 하여튼 뭔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설명하거나 말을 덧붙이거나 뾰족한 모서리를 둥글리거나 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내가 처리 중이야.” 케빈이 말한다. “여왕 폐하께서 온갖 종류의 화장품을 요구하고 계셔. 헤어젤이랑 윤활유랑.”
“말도 안 돼.” 그레이스가 그렇게 대꾸하고는 차 찌꺼기와 함께 알약을 꿀꺽 넘긴 후 포크를 모로 눕혀 달걀을 자른다. “이거 너무 맛있겠다.”
케빈은 자신의 거짓말이 통했다는 게 거의 믿기지 않을 정도다. 외모를 꾸미는 데 공격적일 정도로 무관심한 에이딘은 한 번도 화장품을 사 달란 적이 없고, 앞으로도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진실은 에이딘이 참 빨리도 말썽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블리클랜드는 학부모가 나쁜 소식을 접수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하는 데서 희열과 고소함을 느끼는 부류의 가학적인 교사인지라, 케빈이 아무리 졸라도 전화로는 그 어떤 정보도 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아침 제일 이른 시간에 만나자고 단호하게 잘랐다. 케빈은 이 작은 잉걸불을 아내 모르게 직접 끄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 그림이 망가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아수라장 시작이 벌써부터 닥쳐온다면 스트레스 수치는 더한층 치솟을 것이다. 적어도 케빈은 그런 이론으로 자신의 부정직함을 내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물론 거기엔 다른 동기들도 작용하고 있지만.
책 소개를 하면서 줄거리를 어느 정도까지 밝히고 어느 정도는 입을 다물어야 하는지가 늘 고민인데, 이 책도 마찬가지다. 재미있는 사건들이 중후반에 일어나는데 이걸 언급하지 않으면서 소개를 하려니 어렵다. 적어도 내 책 소개가 ‘이 책 괜찮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하게 도왔으면 좋겠다. 아일랜드 가족 삼대의 코미디는 만나기 쉽지 않잖아요!
참고로, 밀리가 좋아하는 <더 골든 걸스>(본문 표현대로 “마이애미의 자유분방한 숙녀들”)는,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1980년대에 방영한 엄청 재미있는 미국 드라마이다. 이에 대해 추천 글을 쓴 적도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한번 살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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