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강이라, <탱탱볼>
얼마 전에 김지숙의 <소녀 A, 중도 하차합니다> 리뷰에서 청소년 소설이라고 애쓰지 않고 적당히 쉽게쉽게 쓰는 게 싫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건 바로 정반대다. 이건 청소년 소설이지만 그들을 내려다보지도 않고, 일부러 쉽고 허술하게 쓰지도 않았다. 탐정 소설, 추리 소설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뿍 담긴 이 소설은 청소년을 진지하게, 진심으로 대한다.
전직 형사인 영욱은 ‘향수문방구’를 연다. 하필이면 이 문방구는 초등학교의 폐쇄된 정문에 위치해서 손님들이 많지 않다. 초등학생 리라는 중학생 하나가 문방구에서 물건을 슬쩍하는 걸 매의 눈으로 발견해 영욱에게 알리고, 영욱은 관대하게 하나를 용서해 준다. 고등학생 동우는 영욱이 형사이던 때 여성청소년계에서 만난 학생인데, 형사 일을 그만둔 후에도 영욱을 찾아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리라, 하나, 동우는 각자 영욱을 ‘도도마(탄자니아의 수도)’, ‘외할(’외할머니’의 줄임말)’, ‘미스 마플’이라고 부르며 따른다. 아이들은 영욱의 후배 이 형사가 데려온 강아지에게 ‘무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돌봐주기도 한다.
책 표지 그림부터 썩 귀여운데 책 전체의 분위기도 이 그림과 비슷하다. 엄청나게 스릴 넘치는 사건이나 머리를 굴려야 하는 트릭 같은 건 나오지 않지만, 청소년들과 어른이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가까워지고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가 퍽이나 사랑스럽다. 저자가 추리 소설 팬인 듯, 이런저런 추리 소설들이 자주 언급된다. 앞에서 언급했듯 동우가 영욱을 ‘미스 마플’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사회 시간이었다. 학생의 반은 졸고 나머지 반은 서로 속닥거리거나 딴짓을 하고 있었다. 하나는 딴짓하는 부류였다. 사회교과서 밑에 다른 책을 펼쳐 놓고 몰래 읽었다. 추리소설 ‘에놀라 홈즈’ 시리즈였다.
“필립 말로*를 상상했는데, 미스 마플이네요.”
*미국의 추리소설가 레이먼드 챈들러가 탄생시킨 탐정 캐릭터. 큰 키에 단단한 체구, 거칠지만 의리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영욱은 동우가 처음 건넸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잘 지냈니?”
“좋은 머리 낭비하지 말래서 공부하는 데만 쓰고 있어요. 형사님 말씀대로.”
“기특하구나.”
동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추리소설에서는 말이다. 세월이 흘러 용의자가 형사를 찾아올 때는 보통 보복을 목적으로 하지 않니?”
“걱정 마세요. 그런 건 아니니까요.”
“다행이구나.”
“형사는 왜 그만두셨어요?”
“그건 어떻게 알았니?”
“식은 죽 먹기죠.”
영욱이 의자에 앉으며 다시 책을 집어 드는데 아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영욱은 책 표지를 아이에게 보여 주었다.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 추리소설이야. 코델리아라는 용감한 탐정이 맨손으로 막 우물을 빠져나온 참이야.”
“하나는 추리소설 좋아하지? 『솔로몬의 위증』이란 일본 추리소설이 있어. 한 아이의 추락사에 얽힌 거짓과 진실을 가리기 위해 중학생들이 직접 교내 재판을 벌이는 이야기야.”
추리소설이란 말에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이 소설에는 세 가지 폭력이 나와. 아이를 옥상에서 떠미는 신체적 폭력, 못된 말로 남을 괴롭히는 언어적 폭력. 마지막이 뭔지 아니?”
영욱이 이어 말했다.
“생각의 폭력. 미워하고 저주하는 거.”
영욱이 하나의 이마를 가리켰다.
“머리로.”
이번에는 하나의 왼쪽 가슴을 가리켰다.
“그리고 마음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가장 나쁜 거야. 결국 자기 자신을 해치거든.”
책 맨 뒤에는 ‘추리 소설 더 읽기’라는 코너도 있어서, 본문에서 언급된 추리 소설들이 전부 정리돼 있다. 이 장르를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이미 많은 책을 읽어 보았겠지만, 이 책을 통해 새로 관심을 갖게 된 독자라면 추리 소설을 한번 시도해 보는 데 좋은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스포일러를 하고 싶지는 않으므로 각각의 아이들이 어떤 고민을 안고 있는지는 밝히지 않겠다. 재미있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설이니까 그냥 한번 읽어 보세요. 엄청 촘촘하게 사건이 얽혀 있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트릭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냥 읽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다시 청소년 시절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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