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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박화성, 박서련,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

by Jaime Chung 2025.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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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박화성, 박서련,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

 

 

근대와 현대의 만남이라고 불러도 좋을, 근대 여성 작가 박화성과 현대 여성 작가 박서련의 앤솔로지라고 해야 할까. 이 책은 근대 여성 작가 박화성의 단편 소설 작품 세 편을 소개한 후, 이 작품들 중 <하수도 공사>에 영감을 받은 박서련 작가의 단편 소설 한 편과 에세이 한 편을 보여 주고, 이 두 작가들의 작품을 해설하는 글로 마무리된다.

표제작인 <정세에 합당한 연애>는 박서련 작가가 박화성의 <하수도 공사>를 변주한 작품이다. 표면적으로는 <하수도 공사>를 읽은 독서 동아리 대학생 림의 이야기이지만, ‘대의명분’ 앞에서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 여성의 인권과 권리를 재조명한다는 점에서는 둘 다 통하는 점이 있다.

 

일단 박화성의 <하수도 공사>를 먼저 간략히 소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시대적으로는 일제의 억압에서 해방되기 전, 실업 노동자들 구제를 위해 하수도 공사가 목포에서 진행된다. 근데 이자들이 하는 짓이 현대와 어찌나 똑같은지 정말 어이가 없을 정도다. “목포부에서도 실업 구제의 하수도 공사를 시작하게 되어 중정이라는 자와 칠만 팔천 원의 경비로 육 개월간에 공사를 준공시키기로 청부 계약이 성립되었다. 중정이는 칠만 팔천 원의 사 할은 자기 주머니 속에 따로 떼어놓고 나머지 사만 칠천팔백 원으로 공사를 끝마칠 예산을 세웠다.” 그러니까 일단 40퍼센트는 인마이포켓을 해 두고, 나머지만 가지고 싸게 하청으로 일을 처리하겠다는 거다.

(…) 처음 부청과의 계약에 노동자의 임금은 기술 노동자와 십장은 매일 일 원 이상이요, 보통 노동자는 최하 칠십 전으로 정한 것이나 중정의 비밀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 삼만 일천이백 원의 큰 구멍을 감쪽같이 때우는 오직 한 가지의 길은 가련한 노동자의 피땀의 삯전에서 착취하는 수단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오십 전 이하 삼십 전까지의 적은 삯에 목을 매고 유달산에서 사정없이 내려 닥치는 찬 바람과 뒷개 벌판에서 몰려오는 눈보라를 맞으며 꽁꽁 얼어붙은 땅을 파기 위하여 종일 곡괭이질과 남포질로 흙을 파며 돌을 뜨기 시작한 지 석 달 동안에 삯이라고는 돈으로 한 번 받고 십이 전짜리 (보통 쌀 십칠 전 할 때) 싸라기로 한 번 받은 일밖에 없었다. 중정이는 목포 공사 외에 보성 벌교에 다시 하수도 공사 청부를 맡아 그곳에 현금을 쓰느라고 노동자들의 임금 지불의 기한을 내일이니 모레이니 미루어 속여오는 한편 중정의 전주인 산본의 서기 등촌藤村이가 중정이를 몰아내기 위하여 산본에게 권고하기를
“중정에게 자본을 대어주다가는 나중에 한 푼도 받지를 못할 것이니 차라리 당신의 이름으로 청부명의를 하는 것이 옳다.” 하므로 산본이가 출자하기를 그치어 중정의 돈길이 끊어졌었다. 죄 없는 노동자들은 삯은 받지 못하고 전표만 매일 받아가며 고픈 배를 움켜쥐고 뼈가 닳아지도록 외상 일을 하되 걸핏하면 십장과 감독에게 두드려 맞으며 압제만 당할 뿐이니 그들도 종시 피가 있는 젊은 사람들인지라 어찌 영구한 허수아비가 될 뿐이랴. 석 달째 되면서부터는 태업하기를 시작하여 기분이 불온하다가 넉 달 되는 삼월 하순에는 삼조의 동맹파업 기분이 농후하여졌다.

그런데 그 적은 돈을 가지고도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아서 동맹 파업이 시작되고, (소설 첫 문장대로) “격분된 삼백 명의 노동자들은 중정대리를 끌고 경찰서에 쇄도”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경찰) 서장이 “닷새 이내로 중정이로 하여금 임금을 전부 지불하게 하되 만일 중정이가 할 수 없을 경우는 부청에서라도 책임지고 지불하겠다”라는 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된 날짜에 임금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았다는 거다. 처음으로 약속한 날에는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와서 임금을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오후 3시에 온다, 이제 곧 온다, 이렇게 미루더니, 전부 지불하지 않고 육백 원만, 그나마 밀린 임금이 적은 사람들 먼저 지불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또 정한 날에는 사흘 이내로 나머지 임금도 주겠다더니 보름이나 지나서야 원래 임금을 다 받을 수가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마땅히 줘야 할 임금 지불을 차일피일 미루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 하 진짜 개답답…

 

<하수도 공사>는 이렇게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동권의 연애도 보여 준다. 동권이 어릴 적부터 친한 친구로 지낸, 지금의 ‘여자 친구’인 용희는 부잣집 딸이다. 얼굴도 예쁘지만 똑똑하기도 해서 경성으로 유학을 가고 싶었으나 부모가 허락하지 않아 동권이와 같은 (국내)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동권이는 용희를 사랑하지만, 지금 자신의 처지가 노동자에 불과하고 또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힘써 개선해야 할 일이 많으므로 아직 자신에게 사랑은 사치라고 생각한다.

동권이는 빙긋이 웃고 한 손으로 마저 용희의 남은 손을 잡으며
“최용희 씨를 생각지 말자 하면 그럴수록 더 그립고 보고 싶어 견디기 어려우니 나 같은 노동자가 부잣집 영양에게 짝사랑하는 것이 온당치 못한 일이 아니냐고 여쭈었습니다.”

“용희! 나는 용희를 정말로 사랑하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사랑이 현재 우리 정세에 합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스스로 억제하는 때가 많소. 그러나 용희는 어쩐지 누가 아오?”

“용희! 전에도 한 말이지마는 우리의 사랑은 현재의 우리 정세에 합할 수 없지 않소.”
“왜요? 참, 그것은 숙제로 두었지. 왜 불합당해요?”
그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보며 핍박하는 듯이 물었다. 동권이는 용희의 그 태도를 귀여운 듯이 내려다보며 천천히 그리고 힘 있게 말하였다.
“글쎄 생각해보면 알지 않소? 결혼할 수가 없는 사랑이 어찌 합당한 사랑이겠소. 내가 내 몸 하나도 변변히 처리 못하는 못난인데 어떻게 용희까지…… 무어 나는 아무리 생각했자 열에 하나도 좋은 조건이 없으니 영원한 사랑을 계속할 수는 없다는 말이오.”
“결혼만 하면 좋은가? 사랑만 하면 그만이지.”
“그런 막연한 말이 어디 있소? 항상 하는 말이지마는 인제 그런 생각 방법은 하지 말아요. 결혼은 아니 해도 사랑만 하면 그만이라니 그런……”
“아니, 나도 알아요. 그것은 공연한 말이고……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어머니는 이번 동기 방학에 그자가 나오면 혼인해버리겠다고 지금 야단들인데……”
“무어 문제가 그렇게 급하게 되었는가? 단단히 욕심이 나시는 모양이로군. 그러니까 어머니 말대로 하구려.”
“또 그런 말을 해. 참 기막혀 죽겠네. 나는 죽으면 죽었지 존경할 수 없는 자와 결혼할 수는 없어.”
“그러나 용희! 나는 여기 있을 사람이 못 되오.”
“응? 그러면 어디로 가요?”
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동권이를 쳐다본다.
“글쎄 어디로 가든지.” “그러면 나도 가지.” 하는 용희의 눈은 반짝인다.
“될 말인가. 나는 내 일이 따로 있어 가는 게야.”
“나도 같이 일하러 따라가지. 희순이가 시집으로 갈 때 우리는 결혼한 후에도 언제든지 오빠와 같이 일하자고 내 손을 잡고 그러던데……”
“그렇게 문제는 쉽게 되지 못하는 것이오. 내게는 지금 한가한 결혼 문제보다도 더 급한 문제가 있으니까……”
자기를 따라가겠다는 여인을 앞에 앉혀놓고 이러한 말을 하는 동권이는 십구 세의 청년으로는 지나칠 만큼 그의 머리와 의식이 단련되었고 동권이의 이러한 이지적 태도와 성격에 용희는 더욱 열복하는 것이다.
“나는 용희를 애인보다도 한 동지로 생각하기 때문에 용희 같은 유망한 여자와 떨어지고 싶은 생각은 더구나 없소. 그러나 정세가 허락지 않는 데야 어찌하겠소. 만일 용희가 나를 끝까지 사랑한다면 용희 스스로 용희 자체를 개척할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오. 그렇지 않소, 응? 용희!”

그러니까 동권이는 지금 용희와 결혼할 처지가 못 되니 우리의 사랑이 ‘정세에 합당하지 못하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용희는 결혼은 못 하더라도 동권이를 따라가겠다고 주장한다. 동권이 정말로 용희를 “애인보다도 한 동지로 생각”한다면 어떻게든 용희와 같이 노동 운동을 하든 뭘 하든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용희 스스로 용희 자체를 개척”한다는 건 또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뭘 어쩌라는 걸까? 게다가 위 인용문 이전에 용희가 그나마 좀 배웠다는 동권이가 이제는 하수도 공사 같은 힘든 노동을 하면서 얼굴이 상한 걸 보며 속상해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걸 보고 ‘와 그래, 여자들이 뭣도 모르고 남미새이던 때가 있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10년 전만 해도 ‘훈녀 생정’ 같은 거 공유하면서 남자들 마음에 들려고 애를 쓰던 시대가 있었는데 지금 여자들은 다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다.

 

박서련 작가의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는 아예 이 표현을 따와서, 레즈비언 대학생 림의 입장에서 ‘언제나 연애는 사적인 것, 공적인 것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개념에 대입한다. 림은 진이라는 인문학 독서 동아리의 회장과 사귀고 있는데, 자신들의 연애를 공개하고 싶어 한다. 반면에 진은 총학생회 선거에 나가기 위해 이를 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림은 그것으로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사귀는 거 유독 회원들한테는 말해야 하지 않을까?
림이 물었다. 건전한 인문학 독서 동아리의 회장과 회원으로서 한 학기를 보낸 후였다. 과외 아르바이트를 핑계로 방학을 서울에서 보내기로 한 진의 방에서였다. 최저 온도가 27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켜져 있는 게 맞기는 한지 의심되는 중앙 냉방 에어컨과 작은 선풍기 하나만 믿고 두 사람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글쎄, 다들 이해해줄까.
이해가 무슨 상관이지. 그냥 통보하는 거지.
세림아. 우리 학교 총학생회 선거 출마자들 공통점이 뭔지 알아?
뭔데, 갑자기?
역대 선거에 여자 정후보가 한 명도 없었어.
낙선 캠프에도?
응. 한 번도.
그래서?
그래서라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고.
진은 음 하고 목소리를 길게 끌었다.
여자 총학생회장을 본 적 없는 학교가 레즈비언 총학생회장은 괜찮게 생각할지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하고 반박하려다 림은 입을 다물었다. 전교생한테 커밍아웃을 하자는 게 아니라 동아리 회원들한테 말하자는 건데. 전교 여학우를 위하여 총여학생회를 재건하자는 사람이 여자 총학생회장과 레즈비언 총학생회장이 크게 다른 것처럼 말하는 건 아무래도 모순적인데. 림은 진을 이해했다. 모순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진이 더는 완전무결하게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진에게는 총여학생회 재건이 그렇게도 중요한 위업이라는 것. 너무도 중요해서 표면에 조금의 흠집조차 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야만 한다는 것. 이해할 수 있었기에 섭섭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좋아해.
그래서 림은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무슨 말인가를 찾고 있었지만 어떤 말도 적당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야 림은 그때 했어야 하는 말을 찾았다. 쓰인 지 백 년이 다 되어가는 소설에서였다.
언니는 우리 연애가 정세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구나.

애초에 정세에 합당한 연애라는 게 뭔가. 연애라는 건 결혼과 달리 개인적이고 두 사람들만의 일 아닌가. 그러니 사회나 주변 사람들의 기준이 끼어들 곳이 어디 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것들을 연애에 끼어들게 허용한다. 왜 그럴까… 🥲

 

개인적으로 박서련 작가의 <총화>가 제일 드라마틱하고 재미있었다. 드라마틱하다는 건, 읽어 보시면 알겠지만, 저자의 경험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건 실례려나. 어쨌거나 <하수도 공사>에서 용희가 느꼈던 감정을 박서련 작가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느꼈으리라는 데는 의심할 바가 없다. 근대와 현대를 연결하는 ‘소설, 잇다’ 시리즈는 이 작품을 시작으로 해서 총 여섯 권이 출간돼 있다. 다른 작품들도 한번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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