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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조성우, <내 얘기를 들어줄 단 한 사람이 있다면>

by Jaime Chung 2018.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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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조성우, <내 얘기를 들어줄 단 한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은 '지난 18년간 법조인으로서의 삶을 묵묵히 걸어온' 변호사가 만난 사람들의 사연을 담은 책이다[각주:1].

문유석 판사의 <미스 함무라비>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법정이라는 곳은 생각보다 구구절절한 사연이 많은 곳이며 사람들은 우리 생각보다 이성적이지도 않고 부당하다는 느낌, 억울한 기분을 해소하기 위해 법에 의지하는 것 같다(물론, 사람들이 100% 이성적일 수도 없으며, 그런 것이 이상적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지만).

변호사든 판사든 온갖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만나 그들의 속사정을 들으면 참 가슴이 쓰리면서 혼란스러울 거 같다.

예컨대 A가 착하고(이 말 자체가 너무나 자의적이고 모호하긴 하지만) B가 일방적으로 나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좀 더 자세히, 깊이 알고 보니 B가 A를 고소할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든가 하는 것.

물론 피해자가 100% 완벽하게 순수하고 흠결 하나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처음 접했을 때의 인상과 실제 사정이 너무나 다르면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에는 읽다 보면 이처럼 '세상에...' 싶은 사연들이 여럿 담겨 있는데, 개중에는 저자의 활약으로 아주 개운하게 해결되는 사연도 있다.

 

내가 제일 통쾌하게 읽은 최애 에피소드는 이거다. 제목부터 기가 막히다. 제목은 <몇 대 맞으시면 됩니다>.

어떤 삼 형제가 아버지의 논 5,000평을 막내 김영학 씨 앞으로 이전했다.

막내가 부모님을 모시며 그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되, 그 논에서 나오는 쌀 중 20퍼센트 정도는 매년 서울에서 사는 두 형에게 보내주고 나머지는 막내가 소비하거나 팔아서 생계에 보태기로 합의를 한 것이다.

당시 논 자체는 별다른 값어치가 없었다. 그런데 20년이 지나자 막내의 논을 포함한 주위 일대가 개발 지역으로 고시되어 보상금으로 100억 원가량이 책정됐다.

이에 두 형들은 다짜고짜 막내 김영학 씨의 집으로 들이닥쳐 각서에 서명하라고 내밀었다. 내용인즉, 논에 책정된 보상금의 50퍼센트는 첫째 형이, 둘째 형이 35퍼센트, 막내가 15퍼센트를 나눠 가지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제세공과금을 막내가 모두 부담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두 형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서명 날인을 하긴 했지만, 세 형제 중 막내의 아들 김제형 씨는 이것이 너무 억울한 일이라며 저자(=변호사)를 찾아온다.

물론 할아버지가 주신 논이니 보상금을 자신의 아버지와 두 큰아버지가 나눠 갖는 것은 맞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배분하는 것은 너무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저자도 이를 딱하게 여기긴 했으나, 김영학 씨가 협박을 당해 공포심을 느껴 서명을 한 게 아니고 두 형이 단순히 윽박지른 정도로는 각서를 무효화할 수는 없었다.

일단 의뢰인을 돌려 보내고 며칠을 끙끙대며 관련 법 조문을 찬찬히 살펴보던 중, 저자는 묘안을 떠올린다.

며칠 후, 그는 의뢰인에게 조심스럽게 설명한다. 우리 민법에는 증여를 해제할 수 있는 경우가 두 가지 규정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증여를 받은 자가 증여를 한 자 또는 그 배우자나 아들에게 범죄행위를 한 때'이다.

의뢰인을 머리를 긁적이며 잘 이해가 안 된다고 대답한다.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김영학 씨나 제형 씨가 큰아버님들에게 몇 대 맞으시는 것도 포함이 되긴 합니다만..."

보상금을 증여하기로 한 김영학 씨나 그 아들인 제형 씨가 증여를 받기로 한 두 큰아버지에게 맞아서 상처를 입게 되면 형법상 상해죄가 성립된다. 다시 말해, 증여를 해제할 수 있는 범죄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 후 한 달쯤 지나 의뢰인은 변호사를 다시 찾아서 아버지와 자신의 상해진단서를 건네준다. 제형 씨가 말하기를, 추석날 저녁 온 가족이 모였을 때 의뢰인은 큰아버지들에게 각서 내용의 부당함을 토로했고, 이에 아버지도 억울한 마음에 같이 항변을 했단다.

항상 고분고분하던 막냇동생이 정색하고 대들자 형들은 버릇이 없다며 김영학 씨와 제형 씨를 밀치고 뺨을 때렸다. 김영학 씨는 넘어지며 장롱에 머리를 부딪혔다. 그다음 날 김영학 씨는 전치 2주, 아들 제형 씨는 전치 1주의 진단서를 발급받았다.

그래서 변호사는 이러이러한 범죄행위가 발생했으니 증여자는 증여계약을 해제할 수 있고, 이에 증여계약을 정식으로 해제한다는 내용증명을 두 형제에게 보낸다.

두 형은 김영학 씨를 찾아와 거듭 사과하며 용서를 빌었고, 세 형제는 변호사 앞에서 '보상금은 삼 형제가 각각 3분의 1씩 가지고, 제세공과금도 역시 3분의 1씩 부담한다'는 내용의 합의서를 새로 작성한다. 해피 엔딩!

 

정말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에 나오는 포샤(Portia)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이런 기가 막힌 '꼼수'는 도대체 어떻게 떠올리는 걸까? 영어에서는 '꼼수'를 'loophole'이라 하는데, 고리(loop)만 한 크기의 구멍(hole)이라는 뜻이다.

(이 표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 포스트를 참고하시라. 2018/10/23 - [영어 공부] - [영어 공부] loophole(규칙·법률의 빈틈, 빠져나갈 구멍))

진짜 이렇게 코딱지만 한 크기의 '빠져나갈 구멍'을 발견하려면 법 조항을 정말 꼼꼼하게 살펴볼 뿐 아니라 아주 창조적인 사고를 해야 할 텐데, 그런 걸 실제로 해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매번 놀랍다.

몇 대 맞아서 내 몫의 보상금을 공평하게 배분받을 수 있다면 못할 게 무어냐. 한두 푼도 아닌데.

사람들은 이래서 변호사들을 존경하는 동시에 무서워하는가 보다. 그나저나, 이런 '남자 포샤[각주:2]'를 가진 아내는 행복할 것 같다. 아니라고 해도 빠져나갈 구멍은 없을 것 같다만[각주:3].

 

책을 읽고 나면, 역시 사회 생활을 하면 상대방의 기분(또는 비위)을 사근사근 맞춰 주며 유들유들하게 구는 게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

내 체면이나 기분을 중요시해서 자신을 굽히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고 또 나도 때로는 그렇지만, 잠시만 생각해 보면 잠시 내 기분은 둘째로 미뤄 놓더라도 적당히 상대방의 기분을 고려해 잘 맞춰 주면 화난 사람의 기분도 풀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실질적으로 최고 이익을 얻는 것은 나다. 예를 들어 내가 변호사인데 고압적으로 이렇게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 하고 뻣뻣하게 나가기보다는 의뢰인 또는 상대방에게 나긋나긋하게 대해서 사건을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다면 나라는 변호사의 수익이며 몸값이 높아지는 거다.

상대방의 기분을 맞춰 준다는 말이 척추도 없는 것처럼 굴거나 아첨한다는 부정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나는 딱히 그런 의미로 쓰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를 배려해 주는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카페나 음식점에서도 화를 내며 클레임을 거는 손님에게 살짝 죄송한 듯 나긋나긋, 유연하게 대처하면 그 사람들 기분이 풀어져서 생각보다 쉽게 클레임을 취소하거나 가볍게 넘어간다.

그럴진대 내가 내 생각과 입장만을 고집할 이유가 무엇인가. 눈앞에 닥친 문제를 가장 쉽게,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내가 잠시 나의 에고를 꺾는 것이라면 말이다.

말만큼 쉽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유들유들하게 대처하는 게 최고라는 데는 의심이 없다. 이제는 부러워하지만 말고 그 사람들을 좀 닮으려고 애써야겠다.

 

나는 리디셀렉트에서 이 책을 다운 받아 봤는데, 판권 페이지에 초판 1쇄 인쇄가 2013년 4월 10일인데 초판 9쇄 인쇄가 2013년 8월 6일이라고 되어 있다.

5개월 만에 초판 9쇄를 달성하다니 ㄷㄷㄷ 나는 몰랐는데 꽤 잘 팔린 책인가 보다.

변호사라는 직업이 말을 잘해야 하는 일이라 글도 그렇게 쉽게쉽게 물 흐르듯 쭉 쓰신 것 같다.

몇몇 표현은 어법에 맞지 않는데(예를 들어 '염두하다'라는 말은 없다. '염두'는 '생각의 시초' 또는 '마음속'이라는 뜻으로, '염두에 두다'처럼 쓰는 게 맞는다) 이건 저자가 잘못 썼어도 편집부 측에서 간단히 손볼 수 있었을 부분이다. 그런데 왜 안 고치고 그냥 놔뒀는지 모르겠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확실히 틀린 게 맞는데.

어쨌거나 사연들도 흥미롭고(재연 프로그램이 인기 있는 이유가 이거 아닌가) 글도 술술 잘 읽힌다.

법 또는 변호사와 관련해 어렵지 않으며 현실적인 사연이 많이 담긴 책을 찾는다면 읽어봄직하다. 이것만 읽어서 실질적으로 법적 지식을 상당히 쌓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기초적인, 고등학교 '법과 사회' 레벨의 자잘한 지식을 얻는 데는 도움이 될 듯하다.

  1. 물론 변호사는 고객의 정보를 누설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직업적 의무를 지키기 위해 가명을 이용하고 등장인물의 직업 및 구체적인 사실은 모두 본래 모델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경했다. [본문으로]
  2. 남자들은 이렇게 기준을 여성으로 잡고 '마치 남자인 (대상이 되는 여성) 같다'라는 말을 들으면 자존심이 상할까? 이런 비유는 흔치 않긴 하다만. 여자들은 '여자 (대상이 되는 남자) 같다'라는 말을 들으면 왜 굳이 성별을 그렇게 강조해야 하는지 궁금해할 텐데 말이다. [본문으로]
  3. 이건 조우성 변호사님의 개인 사생활을 캐내거나 그분을 희롱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베니스의 상인>에서 포샤가 법학 박사인 척해서 자기 남편의 목숨을 살려 주고 나서, 결혼할 때 절대 손에서 빼지 말라고 부탁한 결혼 반지를 답례로 요구하는 식으로 남편을 옴짝달싹 못하게 제대로 '교육'시킨 일에 대한 레퍼런스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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