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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트루먼 커포티, <인 콜드 블러드>

by Jaime Chung 2019.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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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트루먼 커포티, <인 콜드 블러드>

 

 

1959년 11월 15일, 캔자스 주의 평화로운 시골 마을, 홀컴에서 평범한 일가족 네 명이 무참히 살해당한다.

범인은 딕 히치콕과 페리 스미스. 그들은 도대체 왜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걸까?

피해자들의 사망 전 일상 모습부터 범죄자들의 살해 장면, 법정 재판장 풍경과 교도소, 그리고 최후의 교수형대까지, 이 범죄의 처음과 끝이 모두 묘사된다.

 

두 범죄자 히치콕과 스미스를 주인공으로 삼은 리처드 브룩스(Richard Brooks) 감독의 <인 콜드 블러드(In Cold Blood, 1967)>부터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Philip Seymour Hoffman)이 '트루먼 카포티(Truman Capote)' 역을 맡은, 베넷 밀러(Bennett Miller) 감독의 영화 <카포티(Capote, 2005)>, 토비 존스(Toby Jones)가 주연을 맡은 더글라스 맥그라스(Douglas McGrath) 감독의 <인퍼머스(Infamous, 2006)>까지, 이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들이 많다.

나는 베넷 밀러 감독의 <카포티>를 보고 나서야 그 전부터 읽고 싶었던 <인 콜드 블러드>를 읽게 됐다.

 

책 뒷표지에 "'논픽션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기념비적 소설"이라고 쓰여 있는데, 나는 여기에서 작은 의문이 생겼다.

나는 맨 위의 간단한 줄거리 소개를 일부러 '소설'처럼 썼지만, 사실 위에서 언급한 세 영화 중 뒤의 두 편은 저자 트루먼 카포티를 영화에 등장시킨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논픽션 소설'도 결국엔 '소설'이고 이걸 쓴 저자의 모습은 소설 어디에서도 등장하지 않지만, 이 사건에 대해 생각할 때 트루먼 카포티 본인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거다.

어떻게 소설에다가 '논픽션'이라는 말을 붙였을까? 물론 실제 사건을 꼼꼼히 취재해 그걸 바탕으로 쓴 작품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이고 '상상'에 불과한 것 아닌가.

피해자들이, 인터뷰에 참여한 동네 사람들 및 형사들이, 그리고 범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느꼈으리라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무엇보다, 이 사건을 밀착해 조사한 저자가 어떻게 신처럼 공평하고 공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로 모든 이들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글을 썼다고 믿을 수 있는가?

내가 본 영화 <카포티>는 카포티 본인이 두 범죄자 중 한쪽, 페리 스미스에게 큰 흥미를 느끼고 그와 거의 인간적인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점을 잘 드러냈다.

 

 

로버트 브룩스 감독의 <인 콜드 블러드> 포스터. 여기에는 카포티가 등장하지 않는다.

 

내가 영화를 먼저 보고 났기 때문에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객관성'과 '전지적 작가 시점'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서라도 이 사건을 다룬 영화를 먼저 보고 난 후에 소설을 읽기를 권한다.

영화에서는 트루먼 카포티가 등장해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작가 하퍼 리(<앵무새 죽이기>와 <파수꾼>의 작가 그 하퍼 리다!)와 같이 이 사건을 조사하러 가는 모습, 나중에는 형무소를 뺀질나게 드나들며 스미스의 머릿속을 조금이라도 더 들여다보고 그의 내밀한 마음을 밝히려고 애쓰는 모습도 보여 주는데 소설에는 그런 얘기가 전혀 안 나오니까 말이다.

어떻게 자신의 자취를 그렇게 철저하게 감출 수가 있을까? 그래도 되는 것일까?

참고로 책 뒤에 딸린 옮긴이의 말을 보면, 이미 이 작품은 진위성 논란에 여러 번 휩싸인 적 있다. 커포티 본인은 "자신의 책이 95퍼센트의 정확도 내에서 쓰였다고 했다. 하지만 나중에 다른 이들은 그가 이 숫자조차도 때로 다르게 말했다고 농담하곤 했다. (...)

작품 내에 등장하는 캔자스 주 수사국 특수요원 해롤드 나이는 커포티가 페리 스미스와 애정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공정성을 잃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리처드 히콕의 가족들도 작품 내 딕이 그려지는 방식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또한 "소설 내에서는 의무감 강하고 유능한 형사로 그려진 앨빈 듀이가 커포티에게 자료를 제공하는 대가를 받았따는 것이다. 가령, 듀이는 경찰 외에는 접근하기 어려운 낸시 클러터[피해자 소녀]의 일기를 커포티에게 보여 주었다. 인터뷰에 협조하도록 동네 사람들을 밀어붙였고, 뉴욕 주민인 커포티가 쉽게 조사할 수 있또록 캔자스 운전면허증을 따게 수배도 해 주었다고 <월 스트리트 저널>은 보도했다."

 

물론 우리가 뉴스를 읽으면, 예를 들어 김 모 기자가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KTX를 타고 급히 지방으로 내려가 동네 사람들을 일일히 인터뷰를 했고, 정보가 새나갈 것을 우려한 경찰에게 취재를 저지당했다 따위의 이야기를 굳이 다 길게 쓰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그냥 어디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다는 것만 쓰여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정말 객관적인 사실, 참일 수 있을까?

기자가 사건을 취재함으로써 그 사건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기자가 아니라 다른 기자라면 같은 일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고 다른 기사를 쓰지 않을까? 그럼 도대체 '공정하고 치우치지 않는다'라는 건 뭔가?

나는 이런 의문을 계속 마음에 둔 채로 책을 읽었다. 딱히 뾰족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이 의문은 다시 가지를 뻗어서 다른 질문을 낳았다.

그렇다면 진실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왜 이것이 '논픽션 소설'이라는 것인가? 소설은 어디까지나 허구이며 '있는 그대로를 그대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그런 '소설'이라는 단어 앞에 '논픽션'이라는 말을 붙임으로써 저자(와 최소한 출판사는) 이 글이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갔다'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굳이 이 사건이 아니라도 어떤 일을 글로 쓴 이상, 그것이 현실과 똑같을 수 있는가?

 

내가 굉장히 감명 깊게 본 영화 중 하나인 토드 솔론즈(Todd Solondz) 감독의 <스토리텔링(Storytelling, 2001)>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 비평 세미나 수업을 듣는 한 백인 여대생이 이 수업을 이끄는 흑인 남교수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그녀는 이 경험을 낱낱이 글로 써서 수업에 들고 가서 이를 학생들과 나눈다. 그런데 다른 학생들은 그녀의 폭로에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으며 '흑인남이 백인녀를 강간했다는 설정은 저자가 흑인을 과다 성욕을 가진 존재로 묘사하는 인종 차별주의자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무미건조하게 혹평을 쏟아낼 뿐이다.

그녀는 이 글이 진실이라고, 진짜로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눈물로 호소하지만, 여전히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

수업이 끝난 후, 교수가 그녀에게 슬며시 이런 말을 흘리고 떠난다. "어떤 경험이라도 네가 글로 쓴 이상, 사람들은 그게 다 허구라고 생각해." 정확한 워딩은 이게 아닐지 몰라도,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그러니 어떤 일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게 가능할까? 그렇다면 그건 어떤 모습일까? 경찰서에서 쓰는 경위서 또는 진술서일까?

 

 

카포티가 극을 이끌어 나가는 주요 등장 인물로 나오는 두 영화.

왼쪽은 베넷 밀러 감독의 <카포티> 포스터, 오른쪽은 더글라스 맥그라스 감독의 <인퍼머스> 포스터이다.

 

다시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후에 읽는 게 낫다는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이러하다.

소설은 피해자들이 죽기 훨씬 전 그들이 동네 사람들과 맺은 관계와 그들의 일상을 묘사하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그와 동시에 역시 범인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어린 시절은 어땠고, 그 전에는 어떤 교도소에서 지냈고 하는 얘기도 같이 꺼낸다.

따라서 이게 무엇을 위해 이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읽기 시작하면 '도대체 핵심 사건은 언제 일어나는 거야? 이런 얘기는 또 왜 하는 거냐고!' 하면서 짜증이 날 수가 있다.

영화는 피해자네 집에 방문한 소녀(피해 가족 중 딸의 친구)가 이 집 안에 들어갔다가 처참한 모습을 보며 질겁하며 나오는 게 첫 장면인데, 이게 책에서는 거의 100쪽(약 97쪽부터)이 되어서야 묘사된다.

그러니까 대충 이게 어떻게 일어난 일인지를 영화를 보고 요약본으로 머릿속에 저장해 놓은 후에 소설을 읽으며 비교도 해 보고 세부 사항을 배워 나가는 게 훨씬 덜 지루할 것이다.

 

역시나 책 뒷표지에 "인간의 연약한 내면을 아름다울 만큼 극명하게 묘사"했다고 쓰여 있는데 나는 문체에서는 큰 감명을 못 받았다.

그래도 그건 내가 다른 문제에 천착하느라 문체까지는 살펴볼 여유가 없어서 그랬던 걸 수도 있다. 어쨌거나 확실히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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