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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베키 앨버탤리, <첫사랑은 블루>

 

 

우리의 주인공 사이먼 스파이어는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절친 닉과 레아도 있고, 남매(앨리스 누나와 여동생 노라)끼리 사이도 좋다.

그에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게이라는 것 정도? 아직 아무에게도 커밍아웃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학교 텀블러 사이트에서 자신이 게이라고 밝힌 한 익명의 남학생이 쓴 글을 읽고 그에게 동질감을 느껴 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한다.

상대는 '블루'라는 닉네임을 쓰는데, 사이먼과 그는 잘 통한다.

사이먼은 '블루'에게 학교 얘기, 친구 얘기, 공연(사이먼은 연극부원이다) 얘기 등등을 하면서 점점 더 그와 친해지고, 그는 얼굴도, 본명도 모르는 이 소년에게 점점 빠져 버리고 마는데...

 

라는 것이 간단한 줄거리이다. 학교의 누가 '블루'인지 찾아내는 게 큰 줄거리랄까.

주인공이 게이 소년이다 보니까 당연히 그의 성 정체성을 이용해 협박을 하는 악역도 있다.

마틴 애디슨이라는 동급생이 사이먼의 비밀 이메일(블루에게 보낸 이메일)을 우연히 보게 되고, 그래서 이 비밀이 널리 퍼지는 게 싫으면 애비(최근에 사이먼과 친해진 예쁜 흑인 여자애)와 자기가 잘되게 도와 달라고 협박한다.

(스포일러 아니냐고? 아니다. 소설 시작하자마자 사이먼이 마틴에게 이메일을 들키기 때문이다. 글자 그대로 책 펴자마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책은 아시는 분들은 아실 영화, <러브, 사이먼(Love, Simon, 2018)>의 원작 소설이다. 난 영화는 아직 안 봤는데,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고 싶어서 그랬다.

이 소설의 원제는 <사이먼 대 호모 사피엔스 어젠다(Simon vs. the Homo Sapiens Agenda)>인데, 미국에서 첫 출간됐을 때 많은 공감과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저자 베키 앨버탤리가 임상 심리학자로서 많은 청소년들을 상담해 보았기에 생생한 게이 소년의 목소리를 잘 담아서 글을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아, 원제가 무슨 뜻이냐면, 중반에 사이먼과 블루가 '왜 게이들만 커밍아웃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이성애자들도 자신이 이성애자라는 걸 밝히는 어색하고 괴로운 시간을 겪어 봐야 해'라는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에서 언급되는 표현이다.

게이들뿐 아니라 이성애자들도 커밍아웃을 겪어 봐야 한다는 주장을 블루는 '호모섹슈얼 어젠다'라고 부르는데, 사이먼이 '인간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라는 의미에서 '호모 사피엔스 어젠다'라고 정정해 준다.

(영화 버전에서도 '이성애자들도 커밍아웃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력이 유머스럽게 잘 표현된 것을 트레일러에서 보았다. 보신 분들은 무슨 말인지 아실 듯. "저 남자가 좋아요"라고 흑인 소녀가 커밍아웃을 하니 그 어머니가 "아이고 세상에, 예수님, 절 도와주세요!"라며 신음하는 장면ㅋㅋㅋ)

 

사이먼의 1인칭 시점 서술과 사이먼과 블루가 주고받은 이메일을 몇 통 보여 주는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막 엄청 빵빵 터지는 말투나 장면은 없지만 과연 블루가 누굴까 추측하는 재미가 있어서 재밌게 잘 읽었다.

십 대 게이 소년은 되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십 대 첫사랑의 풋풋한 귀여움이 느껴져서 좋았다. 청소년 학급 문고 같은 데에 추천해도 괜찮을 것 같다.

[영화 감상/영화 추천] 저스트 비포 아이 고(Just Before I Go, 2014) - 내가 죽기 전에 해야 할 일

 


감독: 커트니 콕스(Courtney Cox)

테드 모건(Ted Morgan, 숀 윌리엄 스코트 분)은 자살할 것이다. 삶을 밝게 비춰 주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떠났고, 직업도 변변찮은 데다가 자식도, 애완동물도 없는 불쌍한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첫 번째, 고향으로 돌아가서, 7학년 시절 자신에게 못되게 굴었던 로렌스 선생님(Mrs. Lawrence, 베스 그랜트 분)에게 왜 내 인생을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뜨렸느냐고 따지기.

두 번째, 그 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롤리 스탠스필드(Rowley Stansfield, 롭 리글 분)에게 복수하기.

세 번째, 그 힘든 시절 자신에게 친절했던 소녀 비키(Vickie, 맥켄지 마쉬 분)를 다시 만나 보기.

그러고 나서 테드는 미련 없이 자살할 것이다.

이 이상한 '버킷 리스트'를 가지고 고향을 찾은 테드. 일단은 고향에 눌러 살고 있는 형 럭키(Lucky Morgan, 가렛 딜라헌트 분)네 집에서 머물기로 한다.

형은 본성이 나쁜 건 아닌데 인권 감수성은 전혀 없이 말을 생각 없이 내뱉는 스타일이다. 뚱뚱한 사람 앞에서 뚱뚱한 사람을 놀리는 농담을 하고, 게이 앞에서 게이에 대한 농담을 하는 식. 그런 그의 직업은 놀랍게도 경찰.

게다가 테드의 형수님 되는, 럭키의 아내 캐슬린(Kathleen, 케이트 월쉬 분)도 좀 이상하다. 대뜸 한밤중에 테드의 방에 찾아와 대놓고 그 앞에서 자위를 하는데, 럭키 말로는 몽유병이라고 한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문을 단단히 잠그고 자는 수밖에. 어쨌든 테드는 오랜 숙적, 로렌스 선생님을 찾으러 양로원에 간다.

그리고 치매가 왔는지 그저 TV를 보며 벙글벙글 웃고만 있는 로렌스 선생님에게 그동안 쌓인 원한과 분노를 담아 욕설을 퍼붓는다.

그런데 그의 뒤통수를 때린 여자가 있었으니, 바로 로렌스 선생님의 손녀딸인 그레타(Greta, 올리비아 썰비 분).

테드가 오해를 풀기 위해 자신은 자살하기 전에 버킷 리스트를 실행하러 왔다고 설명하자, 그레타는 걱정한다.

테드는 그냥 모른 척해 달라고 부탁하지만, 그레타는 다음 날 테드네 집 앞에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다.

그리고 테드의 이야기를 영상 기록으로 남기도록 허락해 주지 않으면 형 럭키에게 모든 사실을 불겠다고 협박한다.

어쩔 수 없이 '자살 다큐멘터리'를 찍게 될 영상 기사를 달고 다니게 된 테드. 그는 버킷 리스트를 모두 성취하고 마침내 원하던 대로 미련 없이 이 세상을 하직할 수 있을까?

 

형 럭키(왼쪽)와 테드(오른쪽)
테드(왼쪽)와 그레타(오른쪽)
롤리(왼쪽)와 테드(오른쪽)

 

사실 정말 큰 기대 없이 본 영화였고, 처음 30분 정도는 "이거 리뷰 쓸 만한 영화일까? 지금이라도 멈추고 다른 영화를 트는 게 현명한 거 아니야?" 하고 고민했다.

그래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감탄을 하든 욕을 하든 일단 끝까지 보고 나서 하자는 마음으로 계속 봤다.

끝까지 보고 난 감상은? "예상 못 했는데 꽤 감동적인 영화!"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뭐가 감동적인지 이야기하려면 불가피하게 영화 시작 30분 이후의 이야기도 해야 하므로, 스포일러를 피하고 싶은 분들은 다음 짤부터 스크롤을 쭉 내려, <저스트 비포 아이 고> DVD 짤 이후의 마지막 한 문단만 보시라.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테드가 고향에 돌아와 만난 사람들은 다 테드의 생각 이상이었다.

롤리 스탠스필드는 지금 만나 보니 완전히 사람이 변해 있었다. 그 시절 테드를 괴롭힌 것이 미안하다며 사과할 정도로.

운명의 장난인지 그는 아내는 먼저 떠나보냈으며, 다운 증후군인 아들을 끔찍이 사랑하며 아끼지만, 어릴 적부터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아버지 아래에서 정말 힘들게 일하고 있었다. 

테드는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친구까지 된다. 롤리가 아버지를 죽이고 싶으니 도와 달라고 하자, 술에 취해서인지 테드는 별로 깊이 생각도 하지 않고(어쩌면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겠다고 한다.

그리고 어릴 적에 자신에게 친절하던 비키를 다시 만나 보니, 살이 상당히 붙었고, 애도 다섯이나 낳은 상태였다. 다행히 다정하고 착한 마음씨는 잃지 않았지만.

비키는 부모님의 세탁소에서 일하는데, 어릴 적부터 계속된 단조로운 삶에 지겨움을 느껴 왔던 터라, 테드의 다정함에 판단력을 잃고 만다.

그리고 테드에게 모텔 방에서 만나자고 하고, 테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 제안에 응한다.

그레타는 테드를 따라다니며 테드의 따뜻한 성정을 알아보고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테드는 여전히 자살할 계획을 취소하지 않았다.

테드는 자신의 버킷 리스트를 이루기 위해 만난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되지만, 그들이 정말로 테드를 걱정하고 신경 쓰고 아낀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미 많은 이들의 삶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살 계획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보다 먼저 자살하겠다고 나선 것은 테드의 조카(=형 럭키의 큰아들) 지크(Zeke, 카일 갈너 분)였다.

지크는 같은 학교의 로미오(Romeo, 에반 로스 분)라는 흑인 혼혈 게이 소년과 몰래 사귀고 있는데, 하필이면 지크가 같이 다니는 친구들이 호모포비아였다.

그 패거리는 화장실이건 학교 복도건 로미오만 봤다 하면 시비를 걸고 폭력을 행사한다. 지크도 게이이지만, 그 사실을 들켰다가는 친구들이 로미오에게 가하는 혐오와 분노, 폭력을 자신도 당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섣불러 로미오를 도울 수도, 친구들을 말릴 수도 없다.

지크가 테드에게 속내를 털어놓으며 하는 이야기가 정말 가슴이 아픈데, 대략 요약하자면 이런 거다.

어느 날, 지크가 복도를 가다가 게이인 다른 학생과 마주쳤다. 그때 그 학생이 지크를 보고 씨익 웃었는데, 지크는 그게 '나는 다 알고 있다(=네가 게이라는 걸 난 알지롱)' 하는 의미라고 느껴졌단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이 게이라는 게 들통 날까 봐 너무나 두려워져서, 다음 번에 그 남학생을 만났을 때 일부러 어깨빵을 세게 쳤는데, 상대는 철퍼덕 넘어졌다.

지크는 그때 그 학생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빛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자신도 그 순간 다른 누구보다 그 학생을 격하게 증오했다고, 자신이 그런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 될까 봐 너무너무 두렵다고 말하며 울었다.

지크가 이야기가 전개되면서부터 나는 '영화를 멈춰야 하나' 하는 생각을 그만뒀다. 이렇게나 흥미로우면서 가슴 아픈 서사라니.

영화가 갑자기 두 배는 진지해져서, 숨겨 놨던 의미의 층위를 드러내는 느낌이었다.

 

로미오를 사랑하지만, 게이임이 알려졌다가는 극심한 혐오와 분노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은 "게이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울던 지크.

로미오가 자신의 친구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는데 친구들을 말리지 못하고 오히려 "저 호모 녀석을 보면 역겹다"며 호모포비아인 척하고 로미오를 주먹질하는 지크.

그러고 나서 친구의 차를 훔쳐 로미오와 자주 가던 한적한 호숫가로 도망쳐 그곳에 떨어져 죽으려던 지크.

정말 예상도 못하고 있다가 섹슈얼리티와 혐오에 대한 서사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테드가 마음이 따뜻해서 지크가 미리 자신의 성적 취향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지크가 도망가서 죽으려던 것을 테드와 다른 가족들, 그리고 로미오가 따라와서 어떻게 말릴 수 있었을까.

 

지크 덕분에 테드는 자신이 그간 주위의 사람들에게 신경 쓰지 않았으며, 자신이 죽어도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이 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지크가 실수로 호수에 빠져 버렸을 때 자신도 모르게 그를 따라 호수로 몸을 던진다.

깊은 물속에서 정신을 잃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나 나누는 대화가 정말 이 영화의 꽃이자 눈물을 제일 많이 뽑아 내는 부분인데, 이건 꼭 봐야 한다.

아버지는 "두려움은 텅 빈 마음에 쉽게 자리잡는다"며, 인생을 알차게, 풍성하게 살아서 두려움이 들어설 곳이 없게 만들라고 말한다.

와 정말 옳은 말씀이자 명대사...

아버지와 이야기하던 테드가 어릴 적 모습으로 돌아가 아버지와 포옹하고 헤어지는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감동적이다.

커트니 콕스(우리가 아는 그 배우 커트니 콕스 맞는다. 이 영화는 커트니 콕스의 감독 데뷔작이다)가 이런 연출을 할 수 있구나, 대단하고 느끼게 한 장면이었다.

혹시나 걱정하실까 봐 덧붙이자면, 아버지와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나서 테드는 물속에서 눈을 뜨고, 호수 속 괴물(네스 호의 괴물 같은 그런 괴물)을 보고 짧은 교감을 나눈 후, 구조되어 살아난다. 해피 엔딩이니까 걱정 마시라.

 

<저스트 비포 아이 고> DVD 커버

 

중간에 스포일러까지 하면서 길게 썼는데, 다시 한 번 요약하자면, 가벼운 마음으로 웃으며 시작해 마지막에는 눈물 콧물 다 뺄 수 있는 영화다. 의미도 있고 감동도 있다.

만에 하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끝내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신 분이 있다면, 이 영화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자세히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이 이야기는 위에서 많이 했으니까) 섹슈얼리티와 혐오에 관한 서사도 있으니 혹시 게이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면 이 영화를 보셔도 좋겠다.

정말로 추천하고 싶은 영화다. 따봉! 👍

[영화 감상/추천] Ideal Home(아이디얼 홈, 2018) - 환장의 게이 커플, 얼떨결에 손자를 떠맡다!?

이 커플의 환상 케미를 보라!

감독: 앤드류 플레밍(Andrew Fleming)


'이상적인 가정(Ideal Home)'이라는 요리 프로그램의 진행자인 에라스무스(Erasmus, 스티브 쿠건 분)와 그의 남자 친구이자 제작자인 폴(Paul, 폴 러드 분)은 정말 서로를 죽이지 않고는 못 사는 애증의 게이 커플이다.

에라스무스가 잘난 척을 하면 폴이 구시렁구시렁, 혹여나 둘이 한자리에 있을 때는 말싸움이 끊이질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폴의 생일날 저녁, 파티 와중에 어떤 남자아이가 찾아와 에라스무스에게 성경을 건넨다.

성경을 펼쳐보니 '이 아이는 에라스무스의 손자이니 돌봐주길 바란다'는 내용이 휘갈겨 쓰여 있었다.

사실인즉, 에라스무스가 젊을 적에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실험'을 하던 때에 한 여자랑 잔 적이 있는데 그 여자가 임신을 해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은 또 젊은 나이에 아들, 즉 에라스무스의 손자를 본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애 아빠는 경찰에 잡혀 간 상태이고, 애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 이름조차 말해 주지 않는다!

뺀질뺀질 입만 산 잘난 척 대마왕 에라스무스와 그런 그와 싸우지 않고는 살아갈 수도, 차마 그를 떠날 수도 없는 폴, 이 둘은 이 손자를 잘 키울 수 있을까?

 

본격 게이 커플의 손자 키우기 프로젝트라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는 이 영화는 (위의) 포스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쓰인 문구가 기가 막힌다.

"THESE DADS SUCK." ㅋㅋㅋㅋㅋ Suck에는 '(물고) 빨다'라는 뜻과 동시에 속어로 '(~을) 못하다, 형편없다'는 의미가 있다.

이 '아빠들'이 게이라는 점과 애 키우는 데 영 소질이 없다는 걸 잘 보여 주는, 센스 있는 문구이다.

 

나는 스티브 쿠건을 <The Trip(트립 투 잉글랜드, 2010)>, <The Trip to Italy(트립 투 이탈리아, 2014)>, <Philomena(필로미나의 기적, 2013) 등에서 봐서 이 배우 특유의 '잘난 척해서 밉지만, 그러면서도 결국엔 슬며시 웃게 만드는 매력'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영화에서도 그런 캐릭터를 잘 연기했다.

아주 '고오급' 요리만을 취급해 '타코 벨(Taco Bell, 부리토, 타코 같은 멕시코 요리를 파는 미국의 패스트 푸드 체인점)'은 음식으로 치지도 않는 요리 쇼 진행자라는 설정은 일부러 그를 염두에 두고 설정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딱 들어맞는다.

다만 나는 그가 이 영화의 주연이라는 점에 다소 놀랐다. 일단 게이 커플이 나오니까 이 영화도 '로맨틱'이라는 범주에 들어가는 거 같은데, 이 아저씨 얼굴이 로맨틱 코미디 얼굴의 남주인공이라고 하면 딱 떠오르는 그런 얼굴은 아니니까... (죄송)

 

여태까지 내게 폴 러드는 키가 작고 마른 남자 배우라는 이미지였는데, 여기에서는 몸도 아주 우락부락하고 수염도 덥수룩하게 기른, 잘생긴 게이로 나온다(지금 찾아보니 이 배우 키가 178cm란다. 그럼 아주 작은 키는 아닌데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앤트맨' 때문인가?)

폴이 맡은 캐릭터 폴이 에라스무스한테 퍼붓는 말이 정말 웃긴데,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장면이니 스포일러 걱정 없이 얘기해 보겠다. 에라스무스는 요리 프로그램 촬영을 위해 카메라 앞에서 말을 탄 채로 유려하게 말을 늘어 놓는다.

폴은 그걸 천막 안에서 모니터링을 하며 궁시렁궁시렁한다. 그 옆에 있던 다른 스태프가 "두 분 집에서도 이러세요?" 하고 묻자 "아니, 집에서는 이렇게 잘 지내지 못해." ㅋㅋㅋㅋ

다시 그 스태프가 그럴 거면 그냥 헤어지는 게 어떻겠느냐 하자 "그래, 그렇지만 내 맘속 한 켠에서는 쟤가 죽는 꼬라지를 보고 싶어서 말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

예시 2. 생전 처음 보는 꼬맹이가 에라스무스의 손자랍시고 파티 도중에 나타나자 에라스무스와 폴이 잠시 이야기를 하기로 하는 장면.

폴이 우리가 쟤를 어떻게 키우냐, 우리는 개 한 마리도 제대로 못 키웠지 않느냐 하며 에라스무스에게 따진다. 그리고 바로 덧붙이기를, "다행히 코요테 때문에 그 문제는 해결됐지만, 쟨 어떡하느냐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개 RIP...

 

말은 이렇게 해도 폴은 나름대로 소심하고 또 여린 면이 있어서 애를 돌보는 건 폴뿐이다. 에라스무스는 술 마시기 바쁘고(폴도 술은 엄청 마시지만 애를 돌보는 중간중간에 마신다).

애 이름을 어찌어찌 알아내고 애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 일상을 보내게 됐는데 당연히 거의 모든 일을 폴이 한다.

학교 앞에서 에라스무스랑 싸우고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지만 자기가 거길 떠나면 에라스무스가 학교 끝날 때까지 기다려서 집에 데려올 리가 없으니 자기가 기다리겠다고 할 정도로 책임감이 강한 모습이 짠하면서도 안쓰러웠다.

(사실 둘이 학교에 간 사연도 웃기다. 애가 발표 시간에 "게이들을 절대 faggot이라고 부르면 안 됩니다. Cocksucker라고 불러서도 안 되고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체 검열)이라고 부르면 안 됩니다." 하고 발표하다가 보호자인 에라스무스와 폴이 선생님에게 호출당한 것)

안 그래도 애를 떠맡았다는 부담감에 공황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불안감을 느꼈던 폴인데 말이다. 여기서 정말 감동ㅜㅜㅜㅜ

 

아, 이 영화의 세 주연 중 한 명인 아역(손자 역) 얘기를 안 했구나. 애는 귀엽다. 딱히 에라스무스/스티브 쿠건을 닮은 것 같진 않지만(에라스무스 왈, "그래, 정말 충격이지? 나는 얼굴에 손 하나도 안 댔는데 말이야.").

꽁하니 말 안 하고 있을 땐 답답했는데 에라스무스와 폴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친해지니 귀엽다. 그렇다고 애가 사고를 안 치는 건 아니지만 ㅜㅜ

위에서 말한, 이 커플이 학교에 호출당한 것도 사실 따져 보면 아이가 '두 아빠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학우들에게 그 정보를 전해 주려던 거니까.

우리가 아이들에게 차별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애들이 그런 차별적 지식을 알게 되지는 않을 거라고들 하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또한 타고난 천성보다는 환경이 양육에 더 중요함을 마지막 장면에서 이 아이를 보고 느낄 수 있다 ㅎㅎㅎ 귀여운 것...

 

영화가 다 끝나고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스크린에는 아이를 키우는 동성 커플들의 사진이 한 장씩 나타난다.

나는 이 영화관을 본 경험 중에서 이 점이 제일 좋았다. 제목과 내용과 이 연출이 시너지를 일으켜서 '진정한 의미에서 '이상적인 가정(ideal home)'이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껴 주는 가정이다'라는 걸, 굳이 촌스럽고 멜로드라마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그냥 알 수 있도록 보여 주었다.

감상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웃기면서 주제도 있고 감동적인 코미디를 원한다면 이 영화를 추천한다.

(근데 이거 우리나라 극장에 걸릴 수 있나? IPTV로라도 올라가면 한번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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