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영화 추천] Old Boys(올드 보이즈, 2018) -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현대 소년 버전
감독: 토비 맥도널드(Toby MacDoland)
우리의 주인공 앰버슨(Amberson, 알렉스 로더 분)은 칼더마운트(Caldermount)라는, 소년들을 위한 명문 사립 학교에서 아침마다 물벼락 세례를 맞으면서도 꿋꿋하게 학교 생활을 하는 소심한 소년이다.
어느 날, 그는 평소처럼 아침에 일어나 물벼락 세례에 쓰일 물을 떠서 (다른 학생들이 시켰다) 돌아가는 길에 넘어지고, 한 소녀를 만난다.
만나자마자 처음 하는 말이 프랑스어를 내뱉는데, 일단 예쁘다. 이름은 아녜스(Agnes, 폴린 에티엔 분). 보자마자 사랑에 빠질 것 같은 느낌!
앰버슨은 소녀가 근처로 이사 왔구나 싶어 종이 상자를 옮겨 주려다가 다시 넘어지고 만다. 그 안에 든 건 책 한 무더기.
그런데 갑자기 무척 성난 것 같은 프랑스 남자가 나타나더니 그 소녀에게 무어라고 계속 이야기한다. 대략 소녀의 아버지인 모양.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당당한 풍채의 남자는 새로 온 프랑스어 선생님이었다. 이름하여 바비노(Babinot, 드니 메노셰 분) 선생님.
첫 수업 때 바비노 선생님이 학생들을 랜덤으로 한 명씩 지목해 지난번 선생님께 배운 내용을 읊어 보라고 시키고 있는데, 선생님의 딸 아녜스가 뭘 가져다주러 왔다.
마침 이때 암기 순서는 학교에서 거의 왕처럼 군림하는, 같은 남자들도 인정하는 초인싸 훈남, 윈체스터(Winchester, 조나 하우어-킹 분)다.
윈체스터가 암기해야 할 내용을 떠올리지 못해 버벅거리는 걸 앰버슨이 뒤에서 살짝 알려 줘 다행히 자연스럽게 (그리고 능청스럽게) 암송 시작.
아녜스는 윈체스터가 너무나 멋지게 프랑스어로 시를 암송하는 순간을 감상하고,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얼마 후, 아녜스가 전화로 앰버슨을 따로 불러내더니 윈체스터에게 이걸 전해 달라며 작은 소포를 건넨다.
'왜 내가 이걸 윈체스터에게...?'라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윈체스터에게 소포를 가져다준다. 윈체스터가 뜯어 보니 그건 비디오 테이프였고, "나 원래 이런 여자 아닌데, 너는 좀 달라 보여"라는 메시지를 담은, 다소 도발적인 아녜스의 메시지가 다소 예술적인 영상이 녹화돼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에 뒤지지 않을, '예술적인' 영상을 찍어서 아녜스에게 답장을 한단 말인가? 윈체스터는 솔직히 잘생기긴 했지만 예술적인 타입과는 거리가 멀고, 아주 똑똑한 편도 아니다.
윈체스터가 말주변이 없다는 걸 알게 된 후, 보다못한 앰버슨은 윈체스터를 도와주기로 하는데... 앰버슨은 과연 다른 남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와 잘되도록 도와주는 큐피드 역할에 만족할 것인가?
프랑스 작가 에드몽 로스탕(Edmond Rostand)의 유명한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Cyrano de Bergerac, 이하 시라노)>를 기초로 하여, 현대를 배경으로 다시 쓴 영화.
원작 <시라노>의 큰 틀대로, 체구도 작고 소심하지만 예술적 감성을 가진 앰버슨이 학교에서 제일 잘나가는 미남이지만 똑똑하지는 못한 윈체스터가 예쁜 아녜스와 잘되도록 도와준다는 게 큰 플롯이다.
<시라노>는 워낙에 인기가 많은 작품이라 영화로도 여러 번 만들어졌고, 현대식으로 각색한 버전도 여럿 있다. 나도 스티브 마틴(Steve Martin)이 시라노 역할(극중 이름은 찰리)을 맡은 <Roxanne(록산느, 1987)>를 봤는데, 이것과 그걸 비교하자면, 음, 옛날 영화이긴 해도 <록산느>가 더 나은 것 같다.
<올드 보이즈>는 연기는 둘째치고, 대사가 별로다. '이런 멘트에 여자가 넘어간다고?' 싶은 멘트를 조언이랍시고 앰버슨이 윈체스터에게 해 주는데, 나라면 '뭐라는 거야, 이 자식이?' 했을 듯.
아녜스가 그 말에 넘어갔다면, 그건 전적으로 윈체스터 역의 배우 조나 하우어-킹이 잘생겨서 그런 게 아닐까.
이걸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자들만 자신의 외모를 의식하고 비관하는 줄 알았는데, 남자들도 그러는구나.'
보통 남자들은 여자들을 예쁜 여자 아니면 못생긴 여자로 구분하고 (실생활에서는 꼭 그렇지 않더라도) 미디어에서는 '못생겼는데 착하거나 똑똑하거나 해서 사랑받는' 여자의 모습은 거의 보여 주지 않는다. 예쁜데 착하거나 똑똑하기까지 한 여자는 있지만.
다시 말해 여자는 '예쁜' 게 기본 디폴트이고, 그렇지 않으면 여자 취급도 받지 못한다는 소리다.
반면에 남자는 아무리 (좋게 표현해서) 호감형 외모가 아니어도 능력이 있다든가, 성격이 좋다든가, 하여간 뭔가 하나 있으면 여자 하나는 꿰찰 수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심지어는 호감형 외모가 아니고 정말 쥐뿔도 가진 게 없는데 제작자(작가나 감독 등)의 욕망이 반영되어 예쁜 여자를 얻기도 한다(심지어 그 남자가 병X 짓을 해도 귀엽고 웃기다고 봐 주는 것으로 설정된 여자는... 이건 진짜 제작자들이 '현실'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표현했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즉, 다시 말해, 남자들은 대개 외모가 어떻든 그것이 여자를 얻는 데 크게 걸림돌이 된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개인 한 명 한 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지만) 대체적으로 사회는 그렇게 주장한다. 여자는 예뻐야 하지만 남자는 '반드시 잘생겨야 한다'는 압박을 받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시라노>의 틀이 되는 구도가 내게는 신선했다. 똑똑하고, 재치 있고, 알고 보면 나름대로 매력도 있지만 얼굴이 잘생기지 못해서(시라노의 경우 보기 흉할 정도로 큰 코라는 설정) 여자를 얻지 못하는 남자, 그리고 그 반면에 엄청 잘생겼지만 머리나 가슴 안에 든 게 없는, 속 빈 강정 같은 남자.
그걸 보고 '음, 남자들도 자신의 외모를 의식하고 잘생긴 남자에게 부러움 또는 박탈감 등을 느끼는구나' 싶었다.
보통 남자들은 워낙에 사회적으로 우쭈쭈를 받고 자라서 외모와 상관없이 자신감을 느끼고 여자 하나쯤 차지할 자격이 있다는 믿음을 마음속 깊이 품고 사는 줄 알았는데.
그런 점에서 <시라노>는 내게 신선했다. '외모야 어떻든 내면이 중요한 거야!'라는, 다소 교과서적이고 뻔한 교훈은 별로였지만.
그런데 <올드 보이즈>는 원작만큼의 깊은 고뇌라든지, 시라노의 번득이는 재치라든지 하는 게 보이지 않는다.
후반에 앰버슨과 윈체스터가 서로를 '친구'로 생각하는 건 감동적이었지만, 그뿐이다. 스포일러가 될까 봐 더 말하지는 않겠지만 결말이 나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원래 영국 내셔널 시어터(National Theatre)에서 하는, 제임스 맥어보이가 시라노 역을 맡은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를 보려고 했는데 이 코비드-19 사태로 영화관을 갈 수가 없어서 취소돼 버려 이 아쉬운 마음을 이 영화(어쨌든 큰 틀은 <시라노>니까)로 달래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나도 제임스 맥어보이가 나오는 <시라노>를 보고 싶다... 😭물론 그 잘생긴 얼굴로 '못생긴 시라노' 연기하는 것도 설득력은 없겠지만.
어쨌든 <올드 보이즈>는, 앰버슨 말대로, '바지 입은 래브라도 강아지' 같은 윈체스터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시기를.
아니면 원작 <시라노>의 큰 팬이어서 그와 관련된 작품이라면 뭐든 섭렵하고 싶은 분들, 또는 넷플릭스 시리즈 <The End of the F***ing World(빌어먹을 세상 따위)>에서 알렉스 로터는 귀엽게 보신 분들. 영화 속에선 안경 때문에 더 찌질하게 보이는데 사실 안경을 벗으면 이 친구도 귀엽고 준수하게 생기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