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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 감상/영화 추천] The Kingmaker(킹메이커, 2019) - 모든 국가는 그에 걸맞은 정부를 가진다

by Jaime Chung 2020.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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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영화 추천] The Kingmaker(킹메이커, 2019) - 모든 국가는 그에 걸맞은 정부를 가진다

 

 

감독: 로린 그린필드(Lauren Greenfield)

 

스탠(Stan., 호주의 영화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약 한 달 전 처음 소개되었을 때부터 흥미롭다 생각했는데 최근에 시간이 나서 드디어 보게 되었다.

필리핀의 악명 높은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1917~1989) 시절 영부인이자 현재 과부인 이멜다 마르코스를 인터뷰한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나는 솔직히 필리핀에 대해 잘 몰랐다. 이멜다 마르코스라고 하면 '구두를 미친듯이 사들인, 필리핀 독재자의 아내' 정도로만 알았다.

그런데 로렌(네이버 영화 정보에는 '로린'으로 되어 있는데 스펠링을 보면 발음은 로렌이 맞는 것 같다) 그린필드의 이 다큐를 보자 "모든 국가는 그에 걸맞은 정부를 가진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멜다 마르코스의 집안 꼬라지...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마르코스 독재 시절은 우리나라 박정희 시절 즈음이다(둘은 서로를 극히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확히 말하자면 마르코스 통치 초기만 해도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꽤 잘사는 국가에 들었다. GDP도 우리나라의 몇 배는 됐고.

그런데 마르코스가 나라를 아주 조져 놔서, 필리핀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현재의 처지가 되어 버렸다.

마르코스가 필리핀을 어떻게 말아먹었느냐면, 국가의 부를 전부 뽑아서 자기네들 사치하는 데에 갖다 처박았다.

2019년 블룸버그 통신의 한 기사에 따르면, 필리핀 법원은 마르코스 가문이 부정부패로 모은 2천억 페소, 또는 39억 5천만 달러를 회수하려는 소송을 기각했다고 한다(여기에서 이미 느끼신 분이 있을 것이다. '아, 현재 필리핀 정부도 이미 마르코스와 짝짜꿍이하는 편이라 이 돈을 빼앗아오지 못하는구나'라고. 맞다. 그 얘기는 아래에서 다시 하겠다).

이 정도면 필리핀이라는 나라를 아예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고 무방할 정도다. 그래서 한때 잘나가던 필리핀은 빈국으로 추락...

 

이멜다의 사치는 내가 앞서 말한 구두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참고로 마르코스 가가 하와이로 도피할 때 미처 챙기지 못한 이멜다의 구두만 3천 켤레였다고 한다).

이 다큐 인터뷰에 참여한, 마르코스 가문의 부정한 재산을 회수하려고 노력하는 위원회(정확한 명칭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 분의 말씀에 따르면 이멜다의 집에 피카소 그림이 있고, 최근에는 미국에서 모네 그림을 낙찰받았다고.

아니, 도대체 그때 얼마나 해 처먹었길래 마르코스가 죽은 지 30년이나 지난 지금도 그만큼의 재산이 있는 거지? 모든 필리핀인들에게 애도의 마음을 전한다. 왜냐하면 그게 다 필리핀인들이 마땅히 누려야 부를 쪽 빨아간 거니까.

 

이 다큐의 모든 내용, 또는 필리핀의 현대 정치사를 모두 여기에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이 리뷰에 저런 부제("모든 국가는 그에 걸맞은 정부를 가진다")를 붙인 이유 정도는 설명해야겠다.

마르코스와 이멜다 사이의 아들, 봉봉 마르코스가 대통령이 되려고 몇 번이나 도전했다가 그게 잘 안 되니까 부통령에 도전했다(다큐에서는 그가 캠페인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제일 유력한 다른 후보 레니 래브라도를 인터뷰하기도 한다).

결과는? 레니 래브라도 후보가 승리했는데 봉봉은 선거가 부정했다며 법원에 소송을 건다. 어라, 치졸한 정치인들 하는 건 국적을 막론하고 똑같네. 어디서 배워 오나 보다. 정작 본인 아버지, 마르코스가 부정 선거 했던 건 생각 못 하나 보지?

어쨌거나 법원은 레니 래브라도가 정당하게 부통령에 당선되었음을 알린다. 하지만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두테르테라는 자가 2016년 필리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이자의 아버지가 마르코스 시절 장관을 해 먹던 자였다. 즉, 다시 말해 두테르테가 대통령이 된 건 마르코스 가문에 절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마르코스 가문에 힘을 실어 준다고 봐야 한다.

어느 정도냐면, "봉봉 마르코스가 부통령으로 당선된다면, 나는 대통령직에서 물러서겠다"라고 공언했을 정도. 레니 래브라도 부통령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시하며 그녀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말을 공석에서 하는 두테르테 클라쓰~!  

 

이 다큐는 이런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멜다가 차를 타고 가는데 빨간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춘다. 이멜다는 창문을 열고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미는 아이들에게 지폐를 한 장씩 건네준다. 빨간 불 대기 시간이 다 갈 때까지, 계속 아이들이 몰려들어 돈을 구걸한다. 

마침내 차가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게 되자 이멜다의 수행원이 차가 움직여야 하니 비켜 달라고 하고 창문을 닫는다. 

그리고 마침내 이멜다가 도착한 곳은 한 병원. 그곳에서 소아 암 환자들을 만난 이멜다는 자기 수행원을 불러 아이들에게 줄 돈을 가져오라고 한다.

아이들에게만(성인들은 ㄴㄴ) 한 장씩 주어지는 지폐. 이멜다는 그러고 나서 그 병동을 나와, 원래 아이들 놀이터였던 곳을 바라보며 눈물 짓는다.

 

처음에 이 장면을 볼 때는 '뭐야, 왜 돈을 나누어줘? 포퓰리즘의 좋은 예~' 이러고 말았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 이상하다.

보통 정치인이 유권자들을 방문하면 그들 마음을 살 정책 한두 가지는 제시하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학교라면 교육 예산에 얼마는 더 편성하도록 노력하겠다, 병원이라면 환자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 줄 방법을 찾아보겠다 같은 것. 

그것을 실제로 실천하느냐는 그다음 문제고, 일단은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정책이라도 일단 주워섬기지 않나.

이멜다 마르코스도, 믿기지 않지만, 필리핀의 하원 의원이다(적어도 이 다큐 촬영 당시엔 그랬다). 

그런데 이멜다는 정책에 대해서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는다. 그저 돈을 건네줄 뿐이다. 이멜다가 그런 정책을 제시했는데 다큐 감독이 시간상 또는 이야기상 편집을 했을까? 글쎄, 별로 그럴 것 같진 않다.

마르코스가 그렇게 나라를 말아먹었는데도 마르코스의 아들이라고 봉봉을 찍어 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뭐하러 정책 어쩌고 그런 얘기를 하겠어? 애초에 할 필요가 없지.

다큐 중간중간에 나오는 한 반정부 운동가(마르코스 시절 그에 반대해 데모를 하셨다가 고문까지 당하신 분) 말씀대로, "필리핀인들은 참 용서를 잘해 주는(forgiving)" 민족인가 보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자기 나라 국민을 수천 명 고문하고 죽인 독재자를, 그때는 지금보다 형편이 조금 나았다는 이유로(그나마 그때도 빈부 격차가 심했다) 한 표 던져 준다는 게 말이 되나? (잠깐만, 혹시 마르코스가 이런 살해범인 거 모르셨던 분? 독재자가 그냥 돈과 권력만 즐기고 자기 국민들에게 잘해 줬을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가지는 법이다. 정말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마르코스 가문의 말도 안 되는 돈지랄 중 제일 우스꽝스러운 건 이게 아닐까 한다.

마르코스는 케냐에서 기린이나 얼룩말 같은 '이국적인' 동물들을 여럿 들여와 칼라우이트 섬에 풀어놨다.

그리고 이 동물들이 살아야 한다며, 동물들을 '보호'하는 의미에서 그곳에 살던 주민들을 내쫓았다.

동물들에 밀려서 원래 살던 곳에서 쫓겨난 주민들은 나중에 마르코스 가족이 하와이로 도피한 후 다시 섬에 돌아와 살게 됐지만, 주민과 동물의 공존은 어려워 보인다.

주민들이 농사를 지으면 동물들이 먹거나 망쳐 놓기가 일쑤인 데다가, 이 '사파리'는 적절한 관리인도 없다.

그래서 예컨대 아빠 기린이 자기 딸인 기린과 짝짓기를 하고, 엄마 기린이 아들 기린과 짝짓기를 하는 식으로 근친이 일어났다고 한다.

일부 기린은 벌써 목이 짧아졌다고. 또한 벌레 또는 구더기에 물려서 앓고 있는 동물들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 가고 있다.

동물도 불행하고 주민들도 불행한 이 끔찍한 상황을 만든 건, 이기적인 마르코스 가문의 변덕과 욕심이었다.

 

다큐 내 인터뷰에서 이멜다는 여러 번 반복해서 자신을 '어머니'라고 표현한다. 어릴 적에 어머니를 잃고 고아가 되었는데 마르코스를 만나 다시 온전해진 느낌이 들었고, 퍼스트 레이디가 되어 필리핀의 어머니가 되었으며, 해외 순방을 나가 전 세계의 어머니 노릇을 했으며 계속 하고 싶다 운운.

이 여편네의 현실 인식 능력이 얼마나 떨어지느냐면, 자신이 카다피도 만나 봤고, 사담 후세인도 만나 봤고, 마오 쩌둥도 만나서 손에 키스도 받아 봤다, 이러고 있을 정도다.

저기, 말씀하신 세 명 전부 다 지금 죽었거든요? 하기야,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 모르니까 그렇게 시대착오적인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겠지만.

(참고로 이멜다 마르코스는 2020년 현재 기준 90세다. 어쩜 90세에도 그렇게 탐욕스러울 수가 있지?)

 

마르코스 가에 대해 욕을 하다 보면 끝이 없을 테니 이쯤 해서 총평을 내리고 마무리를 짓도록 하겠다.

필리핀에 대해 잘 몰랐고 관심이 없었던 분들이라도 꼭 한 번쯤 봤으면 좋겠는 다큐멘터리다.

과거를 반복하지 않도록 과거에서 교훈을 얻는 의미에서 필리핀의 예를 가벼이 넘겨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도 박정희의 딸이라는 이유로 박근혜라는 대한민국의 오점을 당선시킨 전적이 있으니까.

정말 충격적이면서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는 좋은 다큐멘터리다. 강력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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