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감상/책 추천] 톰 필립스, <인간의 흑역사> :: 먹고, 자고, 읽고 [책 감상/책 추천] 톰 필립스, <인간의 흑역사> :: 먹고, 자고, 읽고

[책 감상/책 추천] 톰 필립스, <인간의 흑역사>

 

 

와, 짱잼!

이 책의 부제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인데, 역사상 인류가 저지른 가장 멍청한 일들을 들춰내 보는 책에 꼭 들어맞는 부제라 하겠다.

 

책은 이런 헌정사로 시작한다.

진짜 큰 바보짓을 저질러 본 모든 사람에게 이 책을 바친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그리고 프롤로그에서 소개되는, 인류 최초의 바보짓은, 첫 인류(누구나 들어 봤을, '루시'라는 이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은 것이다.

하지만 루시가 유명해질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냉정히 말해서, 어이없이 횡사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 후로 인류가 펼칠 온갖 바보짓의 예고편이 아니었을까.

이 책은 인간에 대한 책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일을 말아먹는 재주가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한 책이다. 인간은 지금까지 이루어낸 자랑거리도 많지만(예를 들어 과학,예술, 법), 어이없고 참담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되는 오점도 그만큼 많다(예를 들어 전쟁, 환경 오염, 공항의 펍).

독자 여러분도 최근에 한 번쯤은, 개인의 가치관이나 정치적 신조를 막론하고,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 이렇게 한탄한 적이 있을 것이다. "나 원 참, 세상이 어쩌다 이 꼴이 됐지!"

이 책은 그런 독자에게 좁쌀만큼이라도 위안이 되고자, 이렇게 말하려고 한다. 걱정 마시라, 인간 세상은 항상 그 꼴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살아 있지 않은가?

 

저자는 정말 기발하고 멍청하며 어이가 없는 (하지만 물론 흥미로운) 일화들을 여럿 이야기해 주는데, 여기에서는 맛보기로 몇 가지만 간략히 소개할까 한다.

인류가 아무리 눈부시게 발전하고 아무리 많은 난관을 극복했다 해도, 파국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역사 속에서 예를 찾아보자. 9세기 북유럽의 장수였던 '천하장사 시구르드'는 적장 '뻐드렁니 마엘 브릭테'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고 의기양양하게 귀환했다.

그러나 마엘 브릭테의 뻐드렁니가 말 타고 달리던 시구르드의 다리를 계속 긁었고, 그 상처의 감염으로 시구르드는 며칠 만에 죽고 만다.

천하장사 시구르드는 자기가 이미 죽은 적에 의해 죽임을 당한 불명예스러운 주인공으로 전쟁사에 길이 남았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두 가지다. 첫째, 자만은 금물이다. 둘째, 적의 치아 위생에 유의하자. 이 정도일 것이다. 이 책의 중심 주제는 자만과 그로 인한 파멸이니, 옛사람들의 구강 위생에 더 관심 있는 독자에게는 양해를 구한다.

 

그뿐이 아니다. 인간은 가축을 사육하면서 자신이 자연의 지배자이며, 동물이건 식물이건 자기 뜻대로 부릴 수 있다는 인식을 확실히 갖게 되었다. 지금부터 알아보겠지만, 동식물을 제 뜻대로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인간의 과신은 번번이 큰 화를 초래했다.

가령 1859년 오스트레일리아에 살면서 고향이 그리웠던 남자, 토머스 오스틴의 이애기를 해 보자. 오스틴은 영국인으로, 10대 때부터 식민지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민 와 살았다. 이제 40대인 오스틴은 부유한 지주이자 목양업자로, 면적 120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넓은 땅을 빅토리아 부근에 소유하고 있었다. 야외 스포츠 애호가였던 그는, 영국인들의 전통 스포츠를 자기 땅에 정성스레 재현해 놓았다. 경주마를 키워 훈련시키고, 땅의 상당 면적을 야생동물의 보금자리이자 사냥터로 만들었다. (...) 그렇게 지구 반대쪽 나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전통적 지방 유지의 삶을 살리라 결심했던 그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곳에 영국의 환경을 조금이나마 재현해 놓으려 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역대급 사고를 치게 된 계기였다.
오스틴은 영국의 고전적인 사냥감들을 좀 풀어놓으면 사냥이 훨씬 흥미로워지지라 생각했다(캥거루는 아마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조카에게 꿩, 자소개, 토끼, 지빠귀 등을 보내 달라고 했다. 거기에 영국산 토끼 24마리를 받은 것이 화근이었다. "토끼 몇 마리 들여온다고 별 해가 될 리는 없고, 사냥감으로 유용할 뿐 아니라 고향의 향취를 조금이나마 느끼게 해 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토끼가 사냥감으로 유용하리라는 판단을 옳았지만 "별 해가 될 리 없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오판이었다. (...)

오스틴이 토끼를 들여오고 10년 후, 빅토리아에서는 매년 토끼 200만 마리를 쏘아 죽였지만 토끼 수는 계속 늘기만 했다. 토끼 군단은 매년 130킬로미터를 이동하여 곧 빅토리아 전역에 퍼졌다. 1880년에는 뉴사우스웨일스(남동부)에 나타났고, 1886년에는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남부)와 퀸즐랜드(북동부), 1890년에는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서부), 1900년에는 노던테리토리(북부)에 출현했다.

1920년대에 오스트레일리아의 토끼 수는 100억 마리로 추산된다. 국토 1제곱킬로미터당 1천 마리가 넘는 토끼가 있었던 것. 오스트레일리아의 땅은 말 그대로 토끼로 뒤덮였다.

어떤 또라이가 호주에 토끼를 들여와 풀어놓았나 했더니, 이 자식이었구만?

(저자 말대로, 호주에 토끼를 처음 들여온 것은 오스틴이 최초는 아니었지만, 대재앙을 낳은 주된 원인은 그가 들여온 토끼였다.)

토끼 번식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는 걸 몰랐나? 게다가 호주는 거대한 섬이라 외부에서 들어온 천적에 취약한데!

도대체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멍청한 짓을 저지를 수가 있을까? 뭐, 그러니까 이 책에 언급된 거겠지만.

정말이지 인간의 멍청함은 거의 백과사전 급이라니까. 모든 분야에 걸쳐서 무식하니까 이런 짓도 저지를 수가 있었던 거겠지.

 

그럼 이번엔 같은 중국에서 17세기 정도 뒤인 1505년, 명나라 정덕제의 이야기를 해 보자. 정신 연령이 떼쓰는 아이 수준인 사람에게 나라를 맡기면 안 되는 이유를 알아보는 첫 사례로 좋을 듯하다.

황제가 국정에는 전혀 취미가 없고 호랑이 사냥이나 어마어마하게 많은 후궁들과 잠자리를 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던 사실은 일단 제쳐두기로 하자. 이상적인 황제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황제도 있는 걸 어쩌겠는가.

그보다 더 기이한 행동은 자신의 '분신'을 창조해 일인이역 놀이에 빠진 것. 그 분신은 주수라는 용맹한 장수였다. 정덕제는 이 주수에게 북방에 출격해 전투를 수행할 것을 명했고, 그러고는 자기가 주수가 되고 황제의 명을 충실히 따랐다. 주수가 싸우러 나가면 우연의 일치인지 황제는 여러 달 동안 자리를 비우곤 했다.

정말 기이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기이하기로 치면 그건 약과였다. 그는 궁궐 마당에 시장을 실제와 똑같이 차려 놓게 하고는, 재상과 장군들에게 모두 상인 복장을 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평민 복장을 하고 시장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사는 놀이를 했다. 신하들로서는 이 무슨 헛짓거리이고 굴욕인가 싶었지만, 조금이라도 뚱한 표정을 짓다가 황제에게 걸리면 파직되는 것은 물론 더 험한 꼴도 당했다.

그런가 하면 등불 축제를 앞두고 엄청난 양의 화약을 궁궐 안에 쌓아 놓으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화약이 폭발해서...... 그다음은 생략한다(그는 화재에거 목숨을 건졌지만, 뱃놀이하다 물에 빠져 얻은 병으로 29세에 사망했다).

 

이 외에도 희한하고 골 때리는 바보짓, 때로는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르게 만든 바보짓이 많이 소개된다.

예컨대 엔진의 노킹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에탄올이라는 멀쩡하고 무해한 해결책을 두고 돈 몇 푼 더 벌겠다고 납을 선택한 자나(이미 그 당시에도 납의 위험성은 잘 알려져 있었다) 오존에 구멍을 내는 프레온 가스를 만든 자(적어도 이때는 그게 그런 결과를 낼 줄 아무도 몰랐다)처럼. 참고로 이 둘이 같은 인물이다.

이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다 소개해 드릴 수가 없어서 안타깝다. 책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라!

 

한 가지 더 이 책이 내 마음에 드는 점: 내가 인용한 부분들만 봐도 어느 정도 느낌이 오겠지만, 번역이 정말 유머러스하고 깔끔하게 잘됐다.

원문 자체도 그런 말투인데 마치 원래 한국어를 유머러스하게 잘 구사하는 한국어 화자가 글을 쓴 것처럼 초월 번역이 잘돼 있다. 이 번역자분도 한번 눈여겨봐야겠다.

그러한 재앙의 한 예는 1969년의 어느 따뜻한 여름날, 쿠야호가강에 불이 난 사건이다.

맞다. 강이란 원래 불이 나는 곳이 아니다. 혹시 강이 무엇인지 잠시 헷갈리는 독자를 위해 설명하자면, 강이란 자연적으로 흐르는 큰 물줄기를 말하며, 물이란 일반적으로 불에 잘 타는 물질이 아니다. 강은 여러 가지 작용을 해서, 상류에서 하류로 물을 운반하고, 세월의 흐름을 빗대어 표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며, 삼각주를 형성해 중학생들에게 지구과학 시간에 외울 거리를 안겨 주기도 하지만, 불에 활활 타는 재주가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 보았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영어로든 한국어든 이렇게 웃긴 글을 쓸 수가 있지?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저자와 번역가 두 분 모두.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래, 내가 그때 멍청한 실수를 하긴 했지만 이에 비하면 양반이지'라고 생각하며 안심할 수 있게 된다.

적어도 나는 인류에게 그만큼 큰 해를 끼치진 않았으니까! 밤마다 나의 흑역사가 떠올라 잠 못 이룬다면, 또는 이런 바보짓을 한(또는 하는) 게 나뿐은 아닐 거라 믿고 싶다면, 또는 남이 멍청한 짓을 하는 거 보며 하하 비웃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어느 쪽이든 인류의 멍청함에 놀라 혀를 내두르게 될 테니. 저자의 유머러스한 감각을 즐길 수 있는 기회는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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