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서귤, <어피치, 마음에도 엉덩이가 필요해>
안다, 여러분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지.
캐릭터의 인기에 힘입어, 감상적인 문구만 대충 나열하고 사진이나 그림으로 내용을 채워 종이를 낭비하는 이런 인스타그램용 책을 읽었다고?
사실 나도 '이런' 책을 읽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내 블로그 책 리뷰를 꾸준히 거들떠 보신 분이라면 알겠지만, 내가 서귤 작가님께 푹 빠져서(아래 책 리뷰 참고) 이분의 다른 책을 조지려던 참이었다.
2020/08/24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서귤, <회사 밥맛>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북으로 발행된 책이 이거(어피치 책) 아니면 어떤 독립 서점에 관한 책(서귤 작가님이 만화를 그리는 데에만 참여한) 두 권뿐이더라.
또 마침 이 어피치 책이 리디셀렉트에 올라와 있어서 내가 가욋돈 쓸 필요가 없길래 '그래, 나는 이 작가님 좋아하니까. 어차피 내 돈 나가는 것도 아닌데 한번 들여다보기나 하자' 하는 마음으로 다운 받아 읽은 것이다.
물론 이 책을 읽기 전, 그 전에 읽은 이주윤 작가의 책에서 본 그 말이 떠오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 작가는 어쩜 이리 다작을 하는가. 한 인간의 머릿속에서 이다지도 많은 말이 쏟아져나오는 게 정녕 가능한 일인가. 혹시 허언증은 아닌가. 글 두 줄로 한 페이지를 채우는 이 구성은 뭔가. 이 책을 사는 사람은 글을 사는 것인가 공백을 사는 것인가. 그러니까 이건 읽기 위한 책인가 인스타그램 업로드를 위한 책인가. 이 캐릭터 에세이는 또 뭔가. 사람이 아닌 캐릭터가 화자인 이 상황을 아무래도 납득하기가 어려운데, 어 그러니까 이건 뭐랄까. 개를 산책시키다가 마주 오는 누군가가 "아이고 예뻐라, 너 몇 살이니?" 하고 개에게 물으면 "세 짤이에영!" 하면서 개의 말을 대신하는 주인처럼 말 못하는 캐릭터의 속마음을 저자가 대변하는 것인가. 허이구야, 하다하다 고길동에 마이콜까지. 그렇다면 꼴뚜기 왕자를 주인공으로 한 책은 왜 나오지 않는가. <꼴뚜기 왕자, 변기에 빠져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라는 책도 나와야 마땅한 것 아닌가. 지금 꼴뚜기 왕자를 무시하는가. 오자와 탈자 범벅인 이 문장은 뭔가. 이다지도 무책임한 문장을 쓰는 인간을 작가라 칭해도 되는가. 아니, 작가는 그렇다 치고 이 책의 편집자는 뭐 하는 사람인가. 말도 안 되는 문장을 손보지도 않고 그대로 낸 이 편집자는 일을 하는 것인가 마는 것인가. 어머어머, 근데 이 잘생긴 작가는 뭔가. 혹시 글을 잘 쓰는가. 에라이, 얼굴만 믿고 책을 넀는가. 냉정하게 작가치고 잘생긴 거지 그리 대단한 얼굴은 아니지 않은가. 뭐 어찌 됐든, 왜 반듯한 얼굴에 스스로 먹을 칠하는가.
(이 문단은 이주윤 작가의 <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계속 쓰는 삶을 위해> 리뷰에서도 인용했다.)
2020/08/10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이주윤, <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계속 쓰는 삶을 위해>
읽고 난 감상을 한 줄로 정리하자면, '음, 역시 서귤 작가님은 프로페셔널하셔.'
온통 핑크 천지에다가 어피치 캐릭터가 한 페이지마다 삽화로 들어가 있는 책에서 약간 나 중학생 시절 러브장을 연상시키는 그런 감성의 글을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잘 쓰실 수 있다니, 역시 프로다...!
한두 페이지를 넘어가는 글이 없는데 이 역시 출판사/편집자 쪽에서 일부러 그렇게 써 주십사 바란 게 아닌가 싶다. 원래 이것보다 긴 글도 재밌게 잘 쓰시는 분이니까.
솔직히 러브장 감성은 아직도 내가 받아들이기 좀 버겁지만, 그래도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진짜 중요한 건, 이 책을 접함으로써 인해 책에 대한 인식이 조금 바뀌었다는 거다.
도서 정가제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대개 이북이나 장르 소설을 우습게 보고 낮춰 보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도정제에는 결사 반대하지만 솔직히 '책의 등급'을 아예 나누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실용서는 약간 아래에, 인문 서적은 그 위에, 고전 소설은 가장 위에, 하는 식으로 '무엇이 무엇보다 낫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이런 캐릭터 책은 진짜 폐급, 책 안 읽는 사람들이 인테리어용으로 사들이는 책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순문학, 순수 예술을 추구한답시고 상업성, 대중성, '엘리트'(라 자처하는 사람들)에 끼지 못하는 일반 대다수의 사람들을 무시하는 행태를 보면 얼마나 우습고 유치한지 알면서 내가 그 비슷할 걸 하고 있었던 거다.
캐릭터 책이 어때서? 그리고 그런 책을 쓰는 사람이 뭐 어때서? 내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다 깎아내릴 필요는 없었는데.
그런 마음에서 위에 인용한 이주윤 작가의 글 뒷부분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왜, 낯선 편집자로서 '이주윤 작가님 출간 제의드립니다'라는 제목의 메일이 오면 열어 보기를 두려워하는가. 혹시 그 내용이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제가 이렇게 메일을 드린 이유는 캐릭터 에세이 출간 제의를 드리고 싶어서인데요. 감성적인 캐릭터 에세이 시장에 꼴뚜기 왕자와 같은 파격적인 캐릭터가 등장한다면 독자에게 색다르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해당 건을 기획 중에 있습니다. 여러 명의 저자를 후보에 올려 두었으나 꼴뚜기의 이미지와 가장 어울리는 건 역시 작가님이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시궁창 같은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작가님의 삶의 태도를, 변기에 빠진 꼴뚜기 왕자에 녹여 글을 써 주실 수 있으실는지요. 이른 예측이기는 합니다만 에세이 베스트 진입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만나 뵙고 자세한 이야기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럼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하며 나를 유혹할 것 같아서는 아닌가. 그 제안을 뿌리쳐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차마 그리하지 못할 것 같아서가 아닌가......
(내 안의) 엘리트주의자는 꺼져라! 아, 쓰고 나니 마라톤에서 꼴등으로 들어왔지만 운동 엘리트주의자들에게 기죽지 않고 당당히 마라톤 그 자체를 즐겼던 작가가 떠오른다. 이걸 다시 한 번 읽고 싶어지는군.
이 위에 언급된 책들과는 전혀 관련은 없지만 이것도 재밌는 운동 에세이이니 추천한다.
2018/10/31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조엘 H. 코언, <마라톤에서 지는 법>
그럼 오늘은 이만 여기까지! 주말에 시간을 좀 내서 더 재밌는 책을 읽고 돌아올 수 있기를... (너무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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