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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서귤, <회사 밥맛>

by Jaime Chung 2020.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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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서귤, <회사 밥맛>

 

 

 

 

와 씨, 너무 재밌고 귀엽다. 7년차 직장인 서 대리의 회사 에세이인데, 특이하게도 그냥 회사 얘기뿐 아니라 먹는 얘기도 담겼다.

<디 오피스>와 <고독한 미식가>가 만난 듯한 느낌? 예컨대, 서 대리의 출입증을 빌려서 그날 점심을 두 번이나 먹은 모 과장이 팀장에게 대차게 까이는 모습을 본 날의 메뉴는, 그날 과장이 먹은 짜파게티라는 식이다.

어떻게 글로 쓸 만한 가치가 있는 사건이 일어나는 날과 그날 먹은 메뉴를 연결지을 생각을 다 했을까? 정말 너무 천재적이라 감탄스럽다.

게다가 맛 묘사는 어쩜 이렇게 기가 막히게 하는지. 먹는 얘기가 나오니까 당연히 그 맛도 묘사를 잘해야 하는 게 맞는 거긴 한데, 나처럼 입맛도 무던하고 별로 까다롭지 않은 사람은 미묘한 맛을 구분 못해서 그런가, 묘사도 잘 못하겠더라.

그래서 난 음식 묘사를 잘하는 사람이 참 신기하다.

우선 참치김밥.

참치 기름이 주변 재료를 적시는 바람에 참치김밥은 늘 조금 헐렁하다. 젓가락으로 들어 올릴 때 내용물이 흩어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약간의 주의를 기울여 그 흐물거리는 김밥을 입에 넣었을 때의 기쁨은 모든 노력을 보상한다. 짭조름하고 기름진 참치가 흰밥과 촉촉하게 섞이며 자아내는 바다 내음, 그리고 뒤이어 밀려오는 단무지와 야채들의 앙상블. 참치에는 마요네즈가 들어가도 좋고 들어가지 않아도 좋다. 들어가면 고소하고 크리미한 느낌이 더해지고, 들어가지 않는다면 참치의 맛을 온전히 더 느낄 수 있다. 참치김밥에서 참치의 거대한 존재감은 어떤 상황에서도 줄어들지 않는다.

아니면 이런 거.

큼직한 뼈다귀 두 점이 올라간 갈비탕이었다. 숟가락으로 기름이 둥둥 뜬 누르스름한 국물을 먼저 떠 올렸다. 입술 주변이 번들번들해질 수 있으니 주둥이를 쭈욱 내밀어 꼴딱 삼켰다. 혀와 식도가 환호성을 지르는 듯했다. 기름! 너무! 좋아! 이제 흑미가 섞여 얼룩덜룩한 밥을 담뿍 떠서 혀에 올리고, 시간차공격으로 뼈에 붙은 살코기를 뚝 끊어 입에 넣을 차례. 촉촉하고 야들야들한 살점이 물 흐르듯이 매끄럽게 목구멍을 넘어갔다. 보드랍게, 한없이 보드랍게, 솜사탕처럼 갈빗살이 위장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느껴질 듯 말 듯 코끝을 스치는 풋풋한 대파 향과 알싸한 후추 향. 좋아, 오늘의 갈비탕은 브이아이피다. 베리, 임폴턴트, 피‧‧‧‧‧‧ 피스. 마음의 평화. 

 

음식 얘기도 좋은데 저자가 풀어놓은 회사 얘기도 너무 공감이 된다. 실연당했을 때처럼 너무 마음이 힘들 때에도 회사에서는 티를 낼 수 없으니 불편하다는 얘기라든지,

인생 최초의 실연은 방학 때여서 일주일을 방 안에만 누워 있었다. 생각해 보면 마음껏 슬퍼할 수 있어서 충만했던 시간이었다. 이제 나는 밤새 잠을 설치고 새벽 내내 울더라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출근을 해야 한다. 사랑을 잃었다고 직장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퀭한 눈으로 출근을 했더니 사람들이 어디 아프냐고 물어왔다. 회사 사람들의 공연한 관심이 싫어서 남자 친구가 있다는 것도 말한 적 없는데, 헤어졌다는 얘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대충 몸살 기운이 있다고 둘러댔다. 점심시간에는 아예 싟사를 거르고 지하 수면실로 내려왔다. 어둡고 건조한 그곳에서 몸을 쌔우처럼 구부리고 누웠다.

일전에 남긴 음식을 아까워하는 얘기라든지,

어제 점심, 파리 출장의 마지막 식사라며 거하게 코스 요리를 먹었다. 감자를 돌돌 말아 바삭하게 튀긴 새우가 애피타이저였고, 기름이 좔좔 흐르는 거대한 립스테이크가 메인, 달콤하고 부드러운 크림브륄레가 디저트 나왔다. 식전 빵과 애피타이저로 이미 배가 차서 스테이크를 남겼다. 미디엄 레어로 익혀서 속살이 발갛던, 살포시 누르면 반동으로 탱탱하게 흔들리며 고소한 육즙이 흘러나오던, 따뜻하고 말랑말랑했던‧‧‧‧‧‧ 스테이크를.

그걸 남겼단 말이지. 그걸, 내가.

상사를 미워하면서도 때로는 조금 동정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온갖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느낌 등등.

그가 팀장이었을 때 나는 인사고과에서 2년 연속 최하점인 C를 받았다. 꽤 충격이었는데, 한 번만 더 C를 받으면 성과 관리 대상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가 사내벤처로 떠난 후 새로 온 팀장은 내게 A를 줬다. 다행스러운 일이었고 좀 웃기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1년 사이에 업무 능력이 C에서 A로 바뀔 만큼 드라마틱한 변화가 나에게는 없었다.

한때 G 부장을 싫어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좀 불편할 뿐 크게 부정적인 감정은 없다. 그는 이미 나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영향력 없는 사람'이란 '일 못하는 사람'보다 못해서, 이들에게는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평가받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G 부장은 복직 이후 아무 일도 맡지 않고 외딴 자리에 하루 종일 앉아만 있었다. 그가 매일 누구와 어디서 점심을 먹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회사를 유령처럼 오가는 G 부장을 볼 때마다 임원이 되지 못한 옷십 대 직장인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건 나의 앞날일까. 나는 과연 몇 살까지 이 회사를 다니게 될까.

 

글도 물론 재미있지만 내가 이 책에서 제일 좋아한 건 만화였다.

한 페이지에 8컷짜리 만화가 군데군데 삽입돼 있는데, 저자가 직접 그린 것 같다(다른 삽화가가 그린 거면 판권 페이지에 그린 사람 이름이 나올 텐데 없더라).

근데 이게 너무 귀엽고 재밌어서 난 이것까지 꼼꼼히 읽고 제일 웃긴 거에는 책갈피까지 해 놨다ㅎㅎ

아래는 출판사에서 홍보용으로 공개한, 본문 속 만화 두 개.

 

개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만화는 구피 이야기다. 이건 지문과 대사를 간단히 옮겨 보겠다.

F 대리는 사뭇실 자리에서 구피를 키운다.

(구피: 열대어, 몸기링 3~4cm)

서 대리: F 대리님, 저 토요일 특근인데 구피 먹이 제가 줄까요?

F 대리: 와, 너무 좋죠.

서 대리: 근데 평소 주말엔 밥 어떻게 줘요?

F 대리: 일단 금요일 퇴근 때 많이 주고요, 여차하면 서로 잡아먹더라고요.

서 대리: *충격*

인간으로 비유하자면, 지구라는 수조에 인간들을 넣고 먹을 걸 주지 않는다.

(NO 햇빛, NO 식물, NO 동물)

(서 대리가 어떤 사람 손을 꽉 깨물어 냠냠 먹고 상대는 '으악' 소리지르는 컷)

서 대리: 안 돼엣!!

F 대리: 하하, 감정 이입은 적당히.

마지막 컷의 서 대리가 눈이 약간 미묘하게 돌아간 게, 그 상상으로 충격받은 것 같아 보여서 정말 너무 웃기고 귀엽다. 

 

아, 이 재치 넘치고 식욕 당기는 이 책을 모두가 한 번쯤 봐 줬으면.

나는 이 책 덕분에 내 마음에 드는 작가를 만난 셈이라 두 배로 더 기쁘다. 이제 이 작가분 비블리오그래피도 조져 버려야지^^

작가님, 회사 다니기 힘드셔도 작품 활동은 꾸준히 해 주세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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