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필 바커, <남자다움의 사회학>
'남자라면 마땅히 이래야 한다'라는 생각을 '맨박스(manbox)'라고 하는데, 대개는 신체적으로 강인해야 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이성애자여야 하고... 등등, 여러분도 익히 잘 알고 있을 그런 생각이다.
저자는 이런 '남자다움'을 강요하는 것이 남자들에게 어떤 피해를 주고 여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치는지는 여러 각도에서 살펴본다.
맨박스 안에 남으려는 투쟁은 벽을 통과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에게도 심각한 피해를 초래한다. 소통, 공감, 우정, 열린 마음,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능력 같은 것은 모두 상자 밖에 있다. 상자 안에서 허용되는 표현은 분노와 약간의 성적 공격성이 전부다.
맨박스는 부서지기 쉽다. 우리가 조금씩 깎아낸다면 결국 무너지고 말 것이다. 남자라면 누구든지 (자신에게 정직하다면) 살아가면서 적어도 한 번은 '남자다움을 연기'하려는 단순한 이유로, 상처를 주고 폭력적이거나 그보다 더 나쁠 수도 있음을 자신도 알고 있는 방식으로 타인을 대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한 번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앞의 불쾌하고 짤막한 문장에서 '연기'라는 단어가 얼마나 의미심장한가? 남자다움의 모든 법칙을 따르는 일은 가장 확실한 연기이기 때문이다.
연기는 현실이 아니다. 그런 연기를 잘해낼 수는 절대로 없다. 항상 누군가가 우리에게 더 남자다워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보다 더 남자다운 삿람들, 우리처럼 남자답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항상 있을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우리 중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이는 위험한 일이다. 우리를 분노에 빠뜨린다. 너무나 맹렬한 분노. 누군가는 다치게 될 것이다.
맨박스가 남자에게 끼치는 해악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남성들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말라고 배우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 서투르다.
이것은 남자들의 인간관계(특히 여성 파트너와의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정신적이거나 신체적 문제가 있어도(예컨대 우울증이나 체력 저하 등) 전문가의 도움을 구하기 어렵게 만든다(자신이 알아서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고 도움을 구하는 남자는 '남자답지 못하다'고 여겨지니까).
또한 남자들이 어릴 적부터 노출되는 포르노에는 진정한 사랑이 없고 오직 성적 이미지만 있다. 포르노는, 저자 표현대로, "젊은 남자들이 여성과 풍요롭게 성공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방해하는 으뜸가는 요인이다."
남성권리운동가, 또는 인셀(involuntarily celibate, '비자발적 독신(주의자)'이라는 뜻)에 대한 장을 읽으면서는 '와, 일베충 같은 놈들은 전 세계 어디에나 있구나' 싶어서 놀랐다.
도대체 자기가 남성으로 태어났다 해서 섹스가 왜 자연스럽게 그냥 자신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하긴, 정상인이 또라이의 정신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겠느냐만은. 그래도 이들에 관한 장이 흥미롭긴 했다.
그들은 여성이 자신을 원하지 않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어느 인셀은 '여자들은 나를 무시하면서도 남자들 찾을 수 없다는 멍청한 말을 한다. 밖에 나가면 핫도그가 널렸는데 배고프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이 불쌍한 사람의 문제는 버려진 음식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 책은 남자다움을 다시 생각하는 의미에서 남자들에게 요리할 것을 추천한다. 심지어 간단한 닭고기 요리 레시피까지 들어 있다! 올ㅋ
그리고 (남자라고 해서 모두 아버지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지만) 아버지가 되는 일에 대해 생각하는 장도 따로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자녀를 가질 계획이 전혀 없어서 딱히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해당 사항이 있으신 분들은 읽어 봐도 좋겠다.
책 자체는 괜찮은데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다. 영어적인 표현을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바꾸지 못했달까.
번역가가 자꾸 '-'(마이너스 부호)를 이용해서 문장 사이사이에 삽입된 절을 이어붙이는 나쁜 버릇이 있다. 심지어 엠 대시(em dash)도 아니야!
아니, 저자는 그럴 수 있다. 영어에서는 그렇게들 쓰니까. 하지만 한국어로 번역할 때 그렇게 게으르게 하면 안 되지.
예를 들어,
여자들에 대하여 쓰레기 같은 말을 하는 것은, 그와 반대되는 말 - 부드럽게 다정하고 공감하는 - 을 하면 '푸시'라 불리기 쉬운 표적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장 안에 '-' 부호를 써서 삽입구를 넣을 거면 적어도 그 앞에 오는 말과 같은 형태로 맞춰 주는 게 읽기 편하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앞에 나오는 말이 명사면 삽입구로 명사로 만들라는 거다. 이렇게.
여자들에 대하여 쓰레기 같은 말을 하는 것은, 그와 반대되는 말, 즉 부드럽게 다정하고 공감하는 말을 하면 '푸시'라 불리기 쉬운 표적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만 해도 번역을 건드리지 않고도 훨씬 읽기가 편해지지 않나. 예시 하나 더.
본보기와 애정 어린 조언을 통해 그들에게 사랑하고 존중하는 여성과의 관계가 소중하고, 기쁨을 주고, 경이로운 관계임을 보여 주는 일은 우리 - 쉰세 살인 나도 '나이 든 남자'에 속한다-의 몫이다.
이건 그냥 "(생략) 보여 주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쉰세 살인 나도 '나이 든 남자'에 속한다)." 이렇게 괄호에 넣어서 뒤로 보내는 게 나았겠다.
그리고 어떤 문장은 번역 자체가 너무 별로다. 예를 들어, 다음 문장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가 되시는지?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소녀의 귀여운 막대 그림 주위에 다음과 같은 기괴하고 섬뜩한 문구들이 보인다.
'귀여운 막대 그림'이 도대체 뭔가 싶을 것이다. 내 추측으로는 '(cute) stick figure'를 말하는 것 같다. 아이들이나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들이 간단히 동그라미와 직선으로 사람을 그리는 그런 거 말이다. 졸라맨처럼.
이런 게 'stick figure'다.
그러니까 위의 예시 문장은, "단순하게 동그라미와 선으로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소녀를 그린 귀여운 그림 주위에~ (이하 생략)" 정도로 표현하는 게 낫겠다.
편집자가 저 위의 삽입어구들이나 이런 어색한 문장들을 도대체 왜 그냥 놔뒀는지 모르겠다.
내가 왜 책을 읽으면서 교정을 봐야 하지? 이럴 거면 나에게 돈을 주든가, 아니면 책값을 할인해 주든가 해라ㅡㅡ
어쨌거나, 편집만 좀 더 잘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책 내용 자체는 괜찮다. 리디셀렉트에도 있으니 한번 살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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