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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곽재식, <지상 최대의 내기>

by Jaime Chung 2020.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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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곽재식, <지상 최대의 내기>

 

 

'환상 문학 웹진 거울 서버를 다운시킬 정도로 인기가 폭발했다는 <초공간 도약 항법의 개발>을 담은, 곽재식 SF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참고로 곽재식 작가는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라는 작법서를 쓰신 그분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SF 소설의 큰 팬은 아닌데, 우주선이랄지 외계 생물체의 모습을 상상하는 게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상상력이라는 건 어느 정도 지식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나는 (자주 SF 소설의 배경이 되는) 우주라든지 우주선 따위에 대한 (관심이 없으니) 지식이 많지 않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런 '전형적인' SF 소설을 접하게 되면 상상하기가 어렵고 과학적 내용이 이해가 안 되고, 따라서 줄거리를 따라가기가 힘들어지며 너무나 당연하게도 재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곽재식 작가의 이 SF 단편소설들은 생활 밀착형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의 일반적이고 평범한 생활에 기반하고 있다.

그래서 낯선 우주선이나 외계인 따위를 상상해야 할 필요 없이도 편하고 술술 읽을 수 있다.

 

이 단편집에 실린 11편의 단편소설을 간단히 평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다만 줄거리를 일일이 소개하지는 않겠다.

나처럼 줄거리를 모르는 채로 읽는 걸 선호하시는 분이 계실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하나하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게 약간 지루하기도 하고.

다만 특히 재밌는 부분, '나는 여기에서 빵 터졌다' 하는 부분이 있으면,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조금 인용해 보여 드리겠다.

<01_초공간 도약 항법의 개발>

회사 생활 하면서 관료주의적인 관행 또는 '까라면 까'라는 관행을 접해 본 적이 있는 이라면 이 단편에서 너무나 현실적으로 묘사된 이 관행에 PTSD가 올지도 모르겠다.

김 박사의 영혼은 이미 분실된 상태였다. 김 박사는 시키는 대로 고쳤다.

'지난겨울 우주선에 쓰이는 HLO를 연구했는데 실제 우주선을 제작해 연구한 것은 아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02_지상 최대의 내기>

낭만적인 SF 연애 소설. 한승희라는 상대를 향한 마음이 아주 담담하달까, 담백하게 그려져 있는데 "나 연애 소설이야!!"라고 소리치지 않아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그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아주 훈훈하고 재밌게 읽었다.

나는 한승희의 그러한 성격이 그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보고 있다. 알파 산업의 회장은 한승희의 어머니였는데, 회장님, 그러니까 한승희의 어머니께서는 옛날 환락과 정열의 20대를 뻐근하게 보낸 결과, 결혼할 남자에 대해서는 단 두 가지 특징만 따지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셨다고 한다.

그 두 가지 중 첫 번째는 선량한 마음이었고, 두 번째는 뒤에서 보았을 때 어깨 근육의 아름다움이었다고 한다. 어머님께서는 알파 산업을 여든 배로 성장시킨 수완가답게 그 둘을 완벽하게 가진 남자를 찾아내고 자신의 배필로 삼는 데 썽공했다. 그러니까 한승희의 선량함은 그 아버지의 선량함을 물려받은 것이고, 한편으로는 그런 선량한 사람을 찾아다닌 어머니의 마음을 같이 물려받은 더 새로운 선량함이었다. 게다가 한승희가 완벽한 어깨선을 가진 것 역시,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전자의 간접 영향은 아니었을까 나는 짐작한다.

<03_로봇 살 돈 모으기>

제목 그대로 10살짜리 고아가 아동을 돌봐주는 로봇을 사기 위해 돈을 모으는 이야기인데, 퍽 귀엽다.

<04_체육대회 묵시록>

체육대회 망해라! 김 박사 불쌍해... 일 좀 할라치면 사람들이 말 걸어서 집중력 다 깨지고...

<05_다람쥐전자 SF팀의 대리와 팀장>

SF 소설만 읽으면서 돈을 받을 수 있는 일자리가 있다면 나라면 평생 뼈를 묻겠다!! 그런데 주인공은 '회사가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왜 SF 소설을 읽기만 하면 돈을 준다는 거지?' 하고 의문을 가지게 되고, 이 신의 직장의 비밀을 캐려 하는데...

팀장님은 그렇게 말하고 '흐흐흐' 웃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괜히 따라 웃었다. 회사원의 본능이었다. 물고기는 수영할 줄 알고, 새는 날 줄 알며, 박쥐는 초음파로 볼 줄 알듯이 회사원이라면 상사가 웃으면 같이 웃을 줄 아는 것 아니겠는가.
많은 사람이 만족을 모르며 지나친 탐욕을 품다가 신세를 망치곤 한다. 사람이 천국에서 오래 살다 보면 가끔은 "혹시 유황불에 몸을 구우면 좀 짜릿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궁금하다." 하는 생각도 하게 되나 보다. 나도 그때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06_치카우>

작가님이 애가 있으신가 보다... 육아의 힘듦을 이 단편소설로 승화시키신 게 아닐까...

저 머나먼 외계에서 온 우주인들 말투가 사극 말투를 닮은 것도 웃음 포인트. 예를 들어 이런 거.

"(...) 다만 2억 년 동안 이어온 선대의 조종세업이 내 대에서 끝나게 되어, 그 종묘사직을 지키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닥쳐라, 이 비열한 놈. 블랙홀이 물질을 내뿜고 우주가 수축한다 할지라도 나의 충심이 조금이라도 흔들림이 있겠느냐?"

<07_2백세 시대 대응을 위한 8차 산업혁명 기술 기반 컷 앤 세이브 시스템 개발 제안서>

뭐가 컷 앤 세이브얔ㅋㅋㅋㅋㅋㅋㅋ 그냥 SF 버전 고려장일 뿐이잖아!

제안서의 형태로 된 단편소설인데, 마지막에 보면 "이상, 제안서 작성자: 주식회사 모디스트 프로포절 테크놀러지(대표: 조너선)"이라고 돼 있다.

이 글이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 <걸리버 여행기> 쓴 그 사람 맞다)가 쓴, 아이들을 잡아먹어서 식량 문제를 해결하자는 풍자 에세이 <어 모디스트 프로포절(A Modest Proposal)>에 대한 오마주임이 틀림이 없음을 밝히는 부분이다.

이걸 읽다 보면 죽어가는 사람의 뇌를 포함한 머리 부분을 자르고 그 뇌 안에 있는 데이터를 온라인 버추얼 세상에 업로드하여 '죽음 후의 세상'을 영원히 살게 한다는 설정을 가진, 아마존 프라임(Amazon Prime) 시리즈 <업로드(Upload)>가 떠오른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이 미드도 한번 살펴보시라. 꽤 재밌다.

<08_종속선언서>

인간 대표 33인이 로봇 황제에게 '우리를 다스려 주시오!'라고 다소 강압적으로 부탁하며 '거절을 거절하는'데, 꽤 웃기다. 이래서 인간은 안 된다니까!

33인 그런 것이다. 특히 우리에게는 시급한 문제도 있어.

로봇 황제 어떤 겁니까?

33인 일단 많은 문제 중에 어떤 게 제일 시급한 문제인지 결정하는 것부터가 시급한 문제다. 인도 사람들은 지난번 태풍에 대한 복구 계획을 세우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고, 러시아 사람들은 어제 핵무기를 훔쳐 간 이반 4세 유치원 아이들을 다시 잡아들이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고, 한국 사람들은 어제 TV에서 어쩐지 버르장머리 없어 보인 가수를 어떻게 처벌하는지 결정하는 문제가 가장 시급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들 결사적으로 자기 문제가 가장 시급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우선 그것부터 정리해야 한다.

<09_납량특집 프로그램의 공포>

이건 납량 소설인가... 아니, 으스스한 느낌이랑 반전도 괜찮은데 어디가 SF스러운지는 모르겠다. 이게 왜 SF 단편소설 모음집에 들어 있는 거죠...?

<10_멧돼지의 어깨 두드리기>

제목이 다 했다. 제목만 딱 들어도 '어, 그게 무슨 소리지?' 하고 흥미를 끌기에 딱 적합하잖아. 이야기만 따지자면, 대충 세계관과 설정을 이해하면 그다지 엄청 충격적인 반전이 있다든가 하지는 않다.

<11_종말 안내문>

이것도 충격적인 반전이라든가 엄청 신선한 소재는 아니지만 표현을 재밌게 잘했다.

 

결론적으로 너무 어렵지 않고 읽을 만한 SF 소설을 찾는다면, 아니면 딱히 SF 소설을 찾는 건 아니지만 재미만 있다면 SF 느낌이 조금 버무려진 정도는 괜찮다 하는 경우라면 이걸 한번 거들떠보시라고 하고 싶다.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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