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영화 추천] Promising Young Woman(프라미싱 영 우먼, 2020) - 복수는 전도유망한 여성의 낭비
감독: 에머랄드 펜넬(Emeral Fennell)
영화는 클럽에서 온 몸을 흔들며 춤을 추는 남자들의 하반신을 보여 주며 시작한다.
일이 끝나고 스트레스를 풀러 온 것 같은 남자들이 득시글한 한 클럽에 단정한 정장을 입고 그렇지 못한 태도로 흐트러져 있는 한 여성이 있다.
술에 엄청 취한 듯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녀를 두고 남자들은 "저러다 몹쓸 놈에게 이용당해도 할 말 없겠네" 같은 말을 주고받는다.
그러다가 그중 한 명이 이 취한 여성에게 다가가 괜찮냐고 묻고, 신경 써 주는 척하다가 너무나 뻔하게도 자기 집으로 데려온다(택시를 태워 줬는데 '우리 집이 여기랑 가까운데, 가서 해장술이나 한잔 할래?' 하는 수법으로).
그리고 그곳에서도 너무나 뻔한 수법으로 이 여자에게 수작을 걸고, 키스를 시도한다. 여자는 키스에 반응하지 않지만 남자는 그에도 굴하지 않는다. 여자가 그냥 누워서 쉬고 싶다고 하자 자기 방으로 그녀를 데려가서는 그녀의 속옷을 벗기기 시작하는 남자.
여자는 미약한 목소리로 "뭐 하는 거야?"라고 묻지만 그는 여전히 이를 씹고 여자 몸을 탐하는 데만 집중한다.
그런데 돌연, 완전히 취해서 인사불성인 줄 알았던 그녀가 너무나 명료하고 또렷한 목소리와 말투로 되묻는다. "뭐 하는 거냐니까?" 남자는 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란다. 무슨 일일까? 이 여자는 취한 게 아니었나?
영화 제목인 'Promising Young Woman', 즉 '전도유망한 젊은 여성'이라는 말은 2016년에 성폭행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브록 터너(Brock Turner)라는 스탠포드 대학생에 관한 언급을 살짝 비튼 것이다.
왜 다들 알지 않은가. 젊은 남성이 여성을 성추행하면 그냥 '실수'일 뿐이고 이런 걸로 '전도유망한 젊은 남성'의 앞길을 막을 수 없다 운운하는 소리. 거기에서 '남성'만 '여성'으로 바꾼 거다.
다른 영화 사이트 영화 소개에도 이 정도는 나올 테니까 조금 더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캐시(Cassie, 캐리 멀리건 분)는 7년 전에 성추행을 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친구 니나(Nina)의 복수를 위해 밤에 클럽을 다니며 술 취한 여자인 척한다.
그러다가 그런 여자를 이용해 먹으려는 남자들에게 일부러 순순히 끌려가서 성폭행이 일어나기 직전 자신이 사실은 멀쩡한 정신이었음을 밝히고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일종의 자경단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그런 위험한 활동으로는 도저히 메울 수가 없는 큰 슬픔, 후회가 있다. 어릴 적부터 친했던, 그래서 마치 친자매 같았던 니나가 술에 취해 그렇게 될 때 자기가 막지 못했다, 돕지 못했다는 자책감인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우수한 성적으로 다니던 의대도 그만두고 지금은 별 볼 일 없는 커피숍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감독은 이 '전도유망한 여성'이 어떻게 자신의 재능을 복수에 낭비하게 되는지를 보여 준다.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시라!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시면 가장 마지막 문단으로 가셔서 결론만 보시면 된다.)
캐시가 실질적으로 복수하는 사람은 크게 네 사람이다.
첫 번째, 니나, 캐시와 같이 친구였지만 성폭행이 일어나고 나서 사실을 말했을 때 이를 믿지 않고 도와주지 않은 매디슨(Madison, 앨리슨 브리 분). 쌍둥이를 출산했다는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그녀를 불러내 술을 마시게 한 뒤(사실 캐시가 술을 마시라고 부추길 필요도 없이, 그동안 애 키우느라 힘들었다며 자기가 알아서 쭉쭉 들이킨다) 인사불성이 되자 한 남자를 시켜 호텔 방으로 데리고 가게 한다.
후에 밝혀지지만 실제로 매디슨을 성폭행하라고 사주한 것은 아니고, 자기가 니나의 입장에 처하게 되면 얼마나 두렵고 공포스러울지 깨닫도록 그냥 겁만 준 거다(그 남자는 그냥 매디슨을 호텔 방으로 데리고 가서 별일 없도록 살펴봐 주기만 했다).
두 번째, 의대의 학장 워커(Dean Walker, 코니 브리튼 분). 알 먼로(Al Monroe, 크리스 로웰 분)라는 남학생의 주도로 니나가 여럿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건이 일어나 이것이 신고가 됐는데, 학장은 이 일을 전형적인 '각자의 주장이 상충되고 진실을 밝히기 어려운(he said, she said)' 사건으로 치부하고 그냥 넘겨 버렸다.
주동자를 처벌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서 니나는 계속 괴롭힘에 시달렸고, 결국 자살했다. 그래서 캐시는 학장에게 복수한다.
학장의 딸을 꼬여내고는 (딸이 좋아하는 보이밴드의 뮤직 비디오 촬영장에서 일하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척하고 그녀에게 촬영장에 데려가 주겠다 했다) 학장에게 가서 "니나를 성폭행했던 남자들이 있는 곳에 당신 딸을 데려다 줬지"라고 하니 학장은 거의 심장 정지 오기 직전.
그런 끔찍한 일이 자기 딸에게 일어났으면 이렇게 노발대발하며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를 썼을 텐데, 자기가 아는 사람 아니라고 니나의 일은 그냥 별일 아니라는 듯 넘겨 버렸던 게 캐시는 괘씸했던 거다.
물론 매디슨 때와 마찬가지로 실제로 학장의 딸이 성폭행을 당하게 사주한 건 아니고, 그냥 식당에서 하릴없이 기다리게 만들기만 했다(좋아하는 보이밴드는 못 봤을지언정 적어도 큰 사고를 당한 건 아니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렇게 캐시는 여성들에게 실제로 어떤 피해를 유발시키지는 않고, 다만 '네 일, 또는 네 주위의 소중한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조금 더 신경 쓰지 않았겠느냐' 하고 훈계하는 선에서 끝난다(물론 그 방법이 좀 과격하긴 하지만).
진짜 복수는 이 성폭행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남자들에게 한다. 세 번째, 캐시에게 관심이 있고 끈질기게 데이트 신청을 해서 캐시도 마침내 마음을 열고 사귀게 된 남자 라이언(Ryan, 보 번햄 분)이 있는데, 알고 보니 이놈도 그 사건에 직접 참여한 건 아니었어도 이를 막기 위해 아무것도 안 한 방관자였다. 매디슨이 준 당시 영상에 그놈이 있었던 것.
그래서 캐시는 알 먼로의 총각 파티가 어디에서 열리는지 주소를 불지 않으면 그 영상을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전송하겠다고 라이언을 협박한다.
네 번째, 알 먼로. 할리 퀸스러운 가발에 간호사 복장을 하고 스트리퍼인 척, 그의 총각 파티에 잠입한 캐시는 그와 단둘이 이층 방으로 올라가 그의 양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여기까지만 해도 스트리퍼가 '2차'를 뛰기 전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하는 페티시라고만 생각했겠지) 그에게 니나에 대한 이야기, 자신이 복수를 결심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니나의 이름을, 자기 말고 생각해 주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러니까 내가 그녀의 이름을 네게 새겨 주겠다며 메스를 그에게 들이댄 그녀는 엎치락뒤치락 몸싸움 후 결국 베개에 숨이 막혀 죽는다.
이게 어떻게 복수냐고? 걱정 마시라. 그녀는 멍청하지 않았다. 우리 캐시는 무려 '전도유망한 젊은 여성' 아닌가.
라이언이나 알 먼로에게 복수를 시도하기 전, 니나의 사건에서 그녀에 맞서 알 먼로를 옹호한 변호사 조단 그린(Jordan Green, 알프레드 몰리나 분)가 있다.
그녀는 그에게도 복수하려고 찾아갔으나, 그는 이미 과거 그 일로 인한 후회와 죄책감으로 잠을 못 이루고 있는 상태였다.
그가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다고 판단한 그녀는 그를 용서한다 말하고 그의 집에서 나온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자기가 잘못한 줄도 모르고 뻔뻔하게 굴거나 그녀의 돌변한 태도에 겁을 먹은 남자들 앞에서 그녀는 무척 당당하고 용기가 있는 모습이지만, 실제로 후회하고 자신이 저지른 짓에 괴로워하며 용서를 구하는 이 남자 앞에서는 오히려 놀라고 당황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려는 남자를 볼 일이 드물어서 그런 걸까.
어쨌든, 캐시는 알 먼로에게 복수하러 가기 전에 이미 이 변호사에게, 자신이 매디슨에게 받은 증거 영상을 보내 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캐시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호사가 경찰에게 보낸 영상을 통해 경찰이 사태를 파악하여(캐시가 복수하러 그곳에 갔다가 변을 당했다는 걸 알았겠지) 캐시를 살해한 혐의로 알 먼로를 체포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그의 결혼식 당일에!
영화 마지막에 캐시가 미리 예약해 둔 메시지("이게 끝인 줄 알았지? 아니야.")가 라이언의 핸드폰에 뜨는데 이때 느껴지는 쾌감이란!
역시나 전도유망한 젊은 여성은 복수 계획도 잘 세웠네! 하긴, 그 머리가 어디 가겠어. 알 먼로뿐 아니라 라이언도 이렇게 복수당한다.
(여기가 마지막 문단입니다. 스포일러를 피하고자 하시는 분들은 여기서부터 다시 읽으시면 됩니다!)
애초에 성범죄자들이 니나를 성폭행하지 않았다면, 니나도 살아 있었을 것이고, 니나와 캐시 모두 공부를 잘했으니 뛰어난 의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본인뿐 아니라 그 병원을 이용하는 많은 환자들이 도움을 받았겠지. 그들뿐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게 이익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성범죄자들이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막았다. 그래서 니나도 죽었고, 캐시도 니나를 위해 복수하는 데 자신이 가진 재능과 시간, 에너지를 모두 쏟아부었다.
비록 그 복수가 성공한다 할지라도, 이거야말로 재능 낭비, 인재의 낭비 아닌가! 애초에 성폭행이 안 일어났으면 이렇게 머리를 짜서 복수해야 할 일도 없었잖아.
여자들에게 성폭행당할 만한 짓을 하지 말라고 말할 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성폭행당했는지 통계를 내는 대신에, 남성들, 가해자들에게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말해야 한다.
아, 영화의 이야기 외적인 것에 대해 말하자면, 캐시의 의상뿐 아니라 배경, 특히 캐시가 일하는 커피샵의 배경이 굉장히 영상이 예쁘게 나온다. 배경 음악도 신경 써서 고른 것 같고. 캐시와 라이언이 노래를 따라 부르는 약국 장면은 마치 뮤직 비디오 같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좋은 주제를 놀라운 이야기와 영상미로 풀어낸 영화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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