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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 감상/영화 추천] Ammonite(암모나이트, 2020) - 애매하고 부정확한 전기 영화

by Jaime Chung 2021.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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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영화 추천] Ammonite(암모나이트, 2020) - 애매하고 부정확한 전기 영화

 

 

감독: 프랜시스 리(Francis Lee)

메리 애닝(Mary Anning, 케이트 윈슬렛 분)은 이크티오사우루스(Ichthyosaurus)의 화석을 발견하고 후에 다윈(Darwin)의 학설에도 영향을 준, 뛰어난 고생물학자이다.

하지만 그녀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현재 자신의 고향인, 영국의 라임 레지스(Lyme Regis) 지방에서 화석을 채취해 팔거나 관광객들을 위한 잡동사니를 파는 것으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 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생물학에 관심이 있다는, 멀끔한 차림의 한 남성, 로더릭 머치슨(Roderick Murchison, 제임스 맥아들 분)이 그녀의 가게를 방문해 그녀가 화석을 채취하는 모습도 보고, 이런저런 조언도 듣고 싶다고 한다.

메리는 이 제안이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돈을 주겠다고 하니까, 노모의 불편한 심기를 달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그에게 한 번 바화석 채취하는 걸 보여 줬더니, 자신을 따라온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아내, 샬럿 머치슨(Charlotte Murchison, 시얼샤 로넌 분)이 여기에서 요양을 하는 동안 좀 잘 돌봐 달라고 부탁까지 한다.

아니, 고생물학자를 무슨 요양원 간호사로 아나? 정말 불쾌하고 어이가 없지만 역시나 생계를 걱정하는 노모를 위해 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그래서 해변가에 데리고 갔더니, 우울증에 걸린 듯 말도 없고 미소 한 번 짓지 않는 샬럿이 자기 일하는 거 보면서 저 화석을 채취해야 하지 않냐 묻는 것이다.

얼척이 없어진 메리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은 요양하고 싶으면 바닷물에 들어가 수영이라도 해 보라고 대꾸한다.

그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정말로 수영을 하러 나갔다가 오히려 열이 나고 앓아 눕게 된 샬럿. 의사 선생님을 불렀더니 같은 여성으로서 환자를 잘 돌보라고 충고하기만 한다.

어쨌든 사람이 아픈데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샬럿을 간호하기 시작한 메리. 그런데 가녀리고 부서질 것 같은 샬럿의 모습에 동정 이상의 감정을 품게 되는데...

 

이 스틸샷이 두 인물의 분위기를 제일 잘 말해 주는 것 같다. 왼쪽, 파란 재킷을 입은 게 메리 애닝, 뒤에 따라오는 상복 입은 여인이 샬럿 머치슨이다
사랑에 빠지는 두 사람

 

실제로 위대한 고생물학자인 메리 애닝의 삶을 다룬 영화이다. 나도 메리 애닝에 대해서는 아주 최근, 그러니까 작년 말에야 알게 되었다.

(매기 앤드루스와 재니스 로마스가 쓴 <100가지 물건으로 다시 쓰는 여성 세계사>를 통해 그녀의 이름을 처음으로 들었다. 아래 책 리뷰에도 그 부분을 쓴 기억이 난다.)

2020/11/20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매기 앤드루스, 재니스 로마스, <100가지 물건으로 다시 쓰는 여성 세계사>

 

[책 감상/책 추천] 매기 앤드루스, 재니스 로마스, <100가지 물건으로 다시 쓰는 여성 세계사>

[책 감상/책 추천] 매기 앤드루스, 재니스 로마스, 책 제목이 내용을 너무 잘 요약해 줘서 따로 설명이 필요 없다. 그러니 개중에 내가 제일 인상 깊었던 물건만 몇 가지 소개하겠다. 07 | 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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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다윈에게 영향을 끼칠 정도로 대단한 학자가 있는데 나는 여태까지 살면서 그런 것도 몰랐네? 교과서에 다윈 얘기는 있어도 메리 애닝 얘기는 없었는데! 이건 사기야!'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토록 위대한 여성 학자의 존재가 내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기에, 그녀의 삶을 다룬 영화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영화관에 달려갔다.

음, 그런데 웬걸. 영화는 두 가지 의미에서 충격적이었다. 첫째, 나는 이 영화에 여성들간의 러브 씬이 이렇게 많이 나올 줄 몰랐다.

물론 영화관에 가기 전에 IMDB와 영화관 사이트에서 이 영화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메리 애닝의 동성 연애를 다룬다는 점)를 읽고 갔기에 메리와 샬럿이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고 연애를 한다는 점에 놀란 게 아니다. 

키스 신이 나올 때까지만 해도 '그래, 화끈하게 키스 갈겨!'라며 마음속으로 응원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오는 베드 신... 아... 

내가 나중에 친구에게 'girl-on-girl action(여성간의 성적 행위)'이 그렇게 많을 줄 몰랐다고 했더니, <아가씨> 같은 거 아니냐길래 그렇다고 했다.

대략 그 정도를 상상하시면 된다. 물론 베드 신이 엄청 많은 건 아닌데 난 그렇게까지 적나라하게 나올 줄 몰랐다고 할까... 이 점은 알아 두시는 게 영화관에서 당황하지 않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그리고 둘째, 사실 영화에서 그리는 메리 애닝과 샬럿 머치슨의 동성 연애는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나도 영화를 보고 나서 리뷰를 쓰려고 정보를 찾아보면서야 알게 됐다.

이 소스에 따르면 메리와 샬럿은 1825년에 처음 만났는데, 샬럿의 남편인 로더릭이 그녀를 방문해 샬럿과 메리가 만나게 된 것은 맞지만, 둘이 친구 이상이었음을 암시하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애닝의 후손인 바바라 애닝(Barbara Anning)은 자신의 선조를 게이 여성으로 묘사하는 걸 뒷받침할 근거가 없다고 <더 텔레그래프(The Telegraph)>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사실 애닝에 대한 자료가 애초에 그다지 많지 않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증거가 없는 이야기를 지어낼 필요가 있을까?

다른 소스에 따르면 극 중 '샬럿 머치슨'의 바탕이 되는 실제 인물은 프랜시스 벨(Frances Bell)인데, 그 둘이 연인이었다는 증거도 역시 없다.

팩트는 이것이다. 프랜시스 벨이 1824년에 라임 레지스를 방문했을 때 그녀는 고작 14살이었고, 자신보다 10살 위인 메리 애닝과 친구가 되었으며, 메리에게 화석에 대해 배우기는 했다. 또한 메리가 황철광(iron pyrite)이 포함해 금빛으로 반짝이는 암모나이트를 발견하는 도왔다.

그러나 벨은 그다음 해(1825년)에 숨을 거뒀고, 둘이 주고받은 편지도 종교적인 얘기나 화석 얘기 등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연애는 무슨! 위대한 학자를 10살이나 어린 미성년자랑 연애하는 아동 성애자로 만들 셈이냐!

 

애초에 메리 애닝이 동성애자였다는 증거도 없는데 굳이 왜 없는 인물까지 창조해 내면서까지 이걸 영화로 만들었는지를 모르겠다.

동성애자였던 게 확실한 다른 인물을 발굴하든가, 아니면 애초에 그냥 허구의 인물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면 됐는데.

메리 애닝은 뛰어난 업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후세에도 (다윈처럼 그녀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에 비해) 언급이 적은데 이거에 초점을 맞춰서 여성주의 영화로 만들었다면 적어도 초점은 확실했을 것이다.

그런데 메리가 가진 학자로서의 면모, 그녀의 성과를 보여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진실된 사랑을 보여 주는 것도 아니고(그녀가 머치슨과 연인 관계였다는 증거가 없으니까), 도대체 뭘 하려고 한 건지 모르겠다. 

스포일러가 될까 봐 말은 않겠지만 마지막 장면은 더욱 어이가 없다. 사랑과 자유라는 가치 사이에서 충돌하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던 건가?

둘 중 어느 쪽이든 선택을 해서 '이러이러한 결과가 있었습니다', 또는 '이 가치를 선택하고 다른 가치를 버림으로써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 애매하기 짝이 없다. 설득력 없는 열린 결말은 그냥 작가가 게으르다고 광고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결론적으로 요약하자면, 메리 애닝이라는 여성 학자의 존재를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은 이 영화의 잘한 점이라 하겠으나, 있지도 않은 사실을 지어내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었다는 점은 큰 잘못이라 하겠다.

케이트 윈슬렛이나 시얼샤 로넌을 좋아한다면, 또는 이 영화를 정말 '이야기', 즉 허구로만 받아들일 자신이 있다면 보는 것도 괜찮다.

다만 '남성들의 뒤에 가려진, 위대한 여성 학자의 슬픔, 분노, 고뇌' 같은 건 기대하지 마시고,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영화를 제대로 안 본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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